[광복 80년] 120년 전 '국채보상운동' 이끈 이 남자

'외환위기 극복'의 선각자, 동양자 김광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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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광문사' 설립, '달명의숙' 부교장과 강사도 겸해
◉ "무관 출신의 뛰어난 경제이론가 면모, 언변과 작문실력도 우수"
◉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2547점,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行
◉ 손자인 故 김병렬 씨는 보령산업 대표이사 전무 역임
◉ 1982년 대통령표창 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김광제의 호는 동양자(東洋子), 시호는 석람(石藍), 초명은 김홍제(金弘濟) 이다.
1907년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시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나라 빚을 우리 손으로 갚겠다”는 민중의 의지가 전국으로 번져간 사건이었다. 
 
남녀노소(男女老少) 신분과 지역을 넘어선 이 거대한 자발적 연대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한 마음'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2025년 오늘 우리는 광복 80년을 맞이했다. 일제의 굴레를 벗기까지 수많은 희생과 단결이 있었듯, 오늘의 대한민국이 마주한 위기 또한 우리 모두의 연대 없이는 극복할 수 없다. 이제 국채보상운동이 남긴 교훈을 되새기며 새로운 세대의 국민적 대단결로 다음 100년을 준비해야 할 때다.

오늘 기자는 80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김광제 선생을 소개한다.

알고 보면 무관출신

동양자(東洋子) 김광제(金光濟·1866~1920) 선생은 2남 중 차남으로 1866년(고종 3) 7월 1일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평리에서 태어났다. 형은 김용제(金庸濟)로 1860년 출생하여 궁내부(宮內府) 주사(主事)를 역임했다.

1888년 4월 29일 김광제는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효력부의위용양위 부사용(兵曹效力副尉龍驤衛 副司勇·왕실 소속 의장·경호 부대의 초급 무관)을 제수(除授·임명) 받고 같은 해 6월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宣略將軍 行 龍驤衛 副司果·궁궐 경호 및 의장 부대에서 비교적 높은 대우를 받으며 중간급 지휘를 맡은 무관)로 승진한다. 1894년에는 낙향해 전국 명승지와 벗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이상사회 건설을 모색한다.

1894년에는 남포에서 유회군(儒會軍)을 조직해 동학농민군에 대항하는데 나섰다. 유회군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유생과 재지사족(在地士族· 조선의 지방에서 활동하던 지배 계층 집단)을 중심으로 조직된 ‘준군사조직’이었다. 남포지역을 포함한 내포지역 일대는 농민을 비롯해 보부상이 유회군의 주력군으로 대거 참여했다.

'을사5적' '간신배 척결' 주장

1896년에는 이세영(李世永), 황재현(黃在顯), 이관(李寬) 등과 남포에서 의병을 일으켜 친일관료 처단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자 서울로 피신한다. 같은 해 윤이병(尹履炳)의 천거(薦擧·추천)으로 궁내부(宮內府) 주사(主事)에 임명되나 녹지고변사건(綠地告變事件·을미사변 가담자 척살 모의)을 도모한 혐의로 장(杖) 100도에 2년간 유배형을 선고받아 같은 해 9월 전남 지도군 고군산도로 유배된다. 

하지만 이후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고종은 조령(詔令·임금이 내리는 공식적 명령)을 내려 2년 유배형으로 단축시킨 후 이후 3개월 만에 사면시킨다. 고종은 1900년 8월 14일 김광제를 동래경무관(東萊港警務官·오늘날의 경남경찰청장)에 임명하지만 같은 해 11월 21일에 그를 면직시킨다. 
 
그가 3개월 만에 그가 면직당한 이유는 당시 외세의 침략에 의한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등 권력 장악을 위한 암투가 만연하여 지배체제의 문란으로 관직을 계속하기에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종은 1901년 6월부터 김광제를 삼남찰리사(三南察理使·경상도, 전라도, 총청도 감찰관)로 임명핸다. 이후 그는 현지로 나아가 대대적인 지방관리의 불법행위 조사에 착수하나 지방 관료들의 방해 때문에 더 이상 감찰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같은 해 12월 다시 면직된다.

김광제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즈음하여 내정개혁을 위한 상소문을 올려 ‘을사5적’ 뿐만 아니라 간신배의 즉각적인 척결을 주장한다. 하지만 자신의 뜻이 제대로 관철되지 않자 김광제는 대구로 내려가 1906년 1월 대구 광문사(廣文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교육 진흥 운동과 산업 진흥 운동을 목적으로 교육, 연구, 출판 등의 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또 같은 해 2월에는 달성(대구) 광문회가 설립한 사립보통학교의 교장을 맡아 달명의숙(達明義塾) 부교장 및 강사를 겸임했다. 대구 광문사와 달명의숙은 대구와 경북 도내 유지들의 문회원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는 굳건한 토대를 마련한다. 

서상돈과 함께

1906년 5월에는 계몽운동 단체인 인민대의소(人民代議所·대구민의소 라고도 함) 설립을 주도하고 총의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인민대의소의 설립 취지는 민지개발(民智開發)과 민권부식(民權扶植)을 중심으로 자치 및 자강을 통한 국권 확립이 목표로 도내 지방 관청과의 유대를 강조했다. 이후 1907년 1월 29일에는 대구광문사 내 경상북도 각 군의 유지들로 구성되어 있던 문회(文會·문학·학문을 주제로 하는 모임)를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변경하기 위한 특별총회에 참여하여 대동광문회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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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제 선생은 1982년 대통령 표창(위 사진)을 수여받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아래 사진)이 추서됐다.
 
당시 대동광문회 결성 자리에서 서상돈(徐相敦·1850~1913)이 국채보상운동을 제기하자 김광제는 국채보상운동의 연설을 마친 후 즉각 실행을 제의했다. 아울러 자신의 담뱃대와 담뱃갑을 버리고 의연금 70전을 내놓았는데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됐다. 또 1907년 3월에는 대한자강회 임시평의회에 국채 보상에 관한 의안을 제출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배경이 됐다.

나랏빚 1300만 원은 디서 왔나

결론적으로 우리나라가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부터다. 

각종 개화정책 추진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임오군란'에 따른 배상금 등을 조달하기 위해 채무를 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조선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국채를 조절하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1907년이 된 시점에서는 크나큰 문제가 됐다.

당시 빚을 지게 된 내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5년 1월 이른바 '화폐정리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으로부터 300만 원을 들여왔다. 같은 해 6월에는 ‘대한제국의 각종 부채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또다시 200만 원을 들여왔다. 같은 해 12월에는 화폐정리사업 때문에 일어난 '금융경색을 완화하기 위해' 150만 원을 추가로 들여왔다. 이렇게 하여 1905년 단 1년 동안 도입된 나랏빚이 650만 원에 달했다. 

1906년 2월에는 '교육제도 개선' '금융기관 확장'과 더불어 도로와 항구와 항구 등 '주요 기반시설 개수 확충' '궁방전의 정리' '일본인 관리의 고용' 등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1000만 원의 기업자금채를 들여올 것을 결정했고 같은 해 3월 이 가운데 500만 원의 돈을 들여왔다. 당시 국채보상운동 당시 "나랏빚 1300만 원을 갚자"는 주장의 근거는 1905년부터 1906년 동안에 진 빛과 이자까지 합친 금액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1,300만 원은 얼마나 큰돈이었을까.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기 바로 전 해인 1906년 당시 대한제국의 한 해 세출예산은 790만 원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빚은 1년 치 예산을 훨씬 뛰어넘는 액수였다. 
 
더 쉽게 말하면 당시 조선인이 세운 은행 가운데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이하 천일은행)이 있었는데 이 은행은 서울과 지방인 인천과 개성에도 지점을 두고 있다. 당시 천일은행의 전체 자본금은 5만 6000원이었다. 빛의 규모는 은행을 수 백 개 세울 수 있는 액수였던 셈이다. 

"딱 3개월만 담배를 끊자"

국채보상운동이 공식적으로 언론에 공개된 시점은 1907년 2월 16일 자 《제국신문》이나 국민적인 관심사로 부각된 시점은 5일이 지난 《대한매일신보》의 2월 21일이다.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기성회 취지>가 있는데 해당 글은 김광제와 서상돈이 함께 작성했다. 아래는 취지서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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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아, 우리 2000만 동포가 이렇게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때를 만나 어느 한 사람 결심하지도 않고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단지 우리 황상(皇上)이 지극히 근심하시는 것만 바라보면서 수수방관한 채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면, 이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근래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면, 나라가 무너져서 멸망한 이집트·베트남·폴란드 등의 민족이 모두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단지 자기 몸과 자기 집만 알았을 뿐 군주와 국가를 생각하지 않아 결국 스스로 멸망하고 말았다. 지금이 바로 정신을 차리고 충성과 의리를 분발할 때가 아닌가? 지금 나라의 빚이 1300만 원이며, 이는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관계된 일이다. 이를 갚으면 나라를 보존하게 되고 못 갚으면 나라를 잃고 만다.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나 현재 국고로는 보상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삼천리강토는 장차 우리나라가 아니게 될 것이다. 땅을 한 번 잃으면 돌이킬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과 같은 나라의 민족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일반 국민도 이 국채 보상에 대한 의무에 대해 모른 체하거나,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다. 모두가 보상에 참여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2000만의 백성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각 사람마다 20전씩 낸다면 1,300만 원을 모을 수 있다. 만약 부족하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 등 따로 기부를 받으면 될 것이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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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 취지서로 촉발된 국채보상운동은 《만세보》 《경성일보》 《황성신문》 등에 보도되면서 더 확산됐다. 서울에서는 1907년 2월 22일에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됐고 기성회는 회칙을 제정하는 등 본격적인 모금 운동의 형식을 갖췄다. 
 

대한매일신보.jpg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국채보상기성회 취지>. 김형목 전(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김광제 선생은 무관 출신이지만 뛰어난 경제이론가 면모를 보였다"며 "언변과 작문실력도 매우 우수했다"고 말한다.
 
기금 모금소는 대한매일신보사를 포함해 전국 서점과 약국, 잡지사 등으로 지정됐다. 국채보상운동은 1910년 5월까지(1908년 3월 이후 간혈적으로 전개) 지속되는데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8월까지였다. 

일제의 공작과 실패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지 1년 3개월이 지난 1908년 4월 30일 시점에 대한매일신보사에 설치된 총합소에 모인 의연금(義捐金·사회적 공익을 위하여 기부하는 돈) 총액은 약 14만 3542원이었다. 그 후 3개월이 지난 7월 27일 시점에 일본 헌병대가 집계한 수치는 18만 7842원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여러 단체에서 경쟁적으로 추진해 해당 액수가 모금된 의연금 전부라고 보긴 어렵다. 다만 당초의 목표였던 1300만 원과 비교하면 많이 미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이 국권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장 《대한매일신보》만 보더라도 일제의 국권침탈에 비판적인 논조를 보였고 이를 이유로 표적이 됐다.

일제는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었던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1872~1909)이 반일(反日)적 보도를 하였다는 이유로 베델을 영국 사법당국에 고소했다.
 
이 떄문에 베델은 이 때문에 서울 주재 영국영사관에 설치된 법정에 출석하여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 자연스레 그는 재판이 시작됨과 동시에 국채보상운동에 더 이상 힘을 보태기 어려웠다. 재판 결과 베델은 금고 3주와 벌금형에 처해졌다. 
 
《대한매일신보》의 총무이자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의 검사원이었던 양기탁(梁起鐸·1871~1938)도 무사할 수 없었다. 일제는 양기탁이 국채보상금으로 들어온 돈 가운데 일부를 횡령하여 사적인 용도로 유용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구속했다. 이후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 과정에서 국채보상운동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모금 운동은 중단됐고 모금된 의연금의 처리를 위해 1909년 국채보상금처리회가 조직됐다.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국채보상금처리회 사무소를 유길준과 안창호가 세운 흥사단(興士團) 회관에 두었다. 
 
국채보상금처리회는 모금된 돈으로 토지재단을 세워 그 수익으로 교육사업을 벌이기로 했고 1910년부터 토지매수가 시작되었는데 곧바로 국권이 피탈(被奪)됨에 따라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국채보상금처리회는 교육기본금관리회로 개칭되면서 조선총독부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후 국채보상운동에 모금된 의연금의 행방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위기에 강한 대한민국

지난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진행됐던 ‘금 모으기 운동’ 이후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학계는 물론 시민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지난 2007년 대구광역시는 국채보상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채보상운동자료집(전 5권)》을 발간하기도 했다. (사)국채보상기념사업회도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건립과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를 착수했고 딱 10년 만인 지난 2017년 10월 30일에 마침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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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제 선생이 손자인 故 김병렬 씨는 보령산업 대표이사 전무를 역임했다. 사진은 지난 2007년 2월 27일 독립기념관에서 김병열 씨가 김광제 서상돈 어록비 제막식장 행사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조선DB
 
등재 준비 당시 유네스코위원회에 제출된 자료는 2,457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이를 기념해 기념사업회는 2017년부터 2022년까지 16권에 달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을 번역 및 발간하기도 했다. 

'위기에 강한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위기에 닥칠 때마다 어떻게든 극복하고자 하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오늘은 광복 80주년으로 우리 민족에게 뜻깊고 행복한 날 중 하루이나 지금 대한민국은 외교·안보 ·경제 등 대·내외적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이 냉정한 지금의 현실이다. 

기자는 국채보상운동의 사례를 들며 오늘날의 국가적 위기를 ‘전 국민적 통합’을 통해 해결해 나가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 민족이 두 번 다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절박하고 처절한 상황에 놓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기자는 '위기에 강한 대한민국'에서 '위기를 먼저 대비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글=백재호 월간조선 기자
정리=김형목 전(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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