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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위대한 7인의 정치가 6

넬슨 만델라, ‘화해와 용서’로 인종차별 없는 남아공을 만들다

박동운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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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세계를 바꾼 위대한 7인의 정치가>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세 가지다. 첫째, 나라와 국민은 뒷전에 두고 오로지 ‘편 가르기’에 여념이 없는 대부분의 한국 정치가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둘째, ‘거꾸로 가는 정책만 고집하여’ 잘 나가는 한국경제를 침몰시키고 있는 현 정부와 청와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경종이란 바로 7인의 정치가들의 위대한 통치철학이다. 셋째, 언젠가 오게 될 통일을 염두에 두고 통일된 한국의 정치가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7회에 걸쳐 연재한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는 남아공 백인 정권의 인종차별정책에 폭력으로 맞서 투쟁하다가 27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출옥 후 그는 투쟁 방법을 폭력에서 ‘화해와 용서’로 바꿔 인종차별정책 폐지를 이끌어냈다. 이 공로로 그는 1992년 74세 때 백인 대통령 데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대통령에도 당선되었다. 그의 자서전 A Long Walk to Freedom은 소설만큼이나 재미있다.
 
만델라는 한 작은 마을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친구 욘긴타바가 그를 돌봤다. 만델라는 클라크베리 학교를 마치고 19살 때 힐트타운 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 유학생들로 넘쳐났다. 만델라는 이 학교에서 아프리카인으로서 처음으로 자신을 깨달았다고 썼다.
 
만델라는 힐트타운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한 다음 포트헤르대학에 진학했다. 이 대학은 남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옥스퍼드나 하버드 같은 곳이었다. 욘긴타바는 만델라가 포트헤르대학에 입학하자 흥분할 정도로 좋아했다. 이 대학에는 15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만델라가 처음 만난 학생 중 하나가 3학년생 마탄지마였다. 그는 만델라에게 장래를 생각해서 법을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대학을 자퇴하고 투사가 되다
 
2학년이 되어 만델라는 6명의 학생회 대표로 뽑혔다. 투표 과정에서 학생들은 학생회의 권한 강화를 요구하며 전체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25명만이 투표에 참여했다. 6명의 대표는 다수 학생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진 사퇴했다. 총장은 다음날 재선거를 치르도록 했는데, 전날과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5명의 대표들은 전체 학생들이 모였으니 기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보았으나 만델라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만델라는 총장에게 불려갔다. 총장은 그에게 타협안을 제시했다. 만델라는 포트헤르대학을 그만둔다는 것이 바보짓임을 잘 알면서도 총장이 자신의 운명을 놓고 절대적 권한을 휘두르는 것에 분노했다. 그는 자진해서 포트헤르대학을 떠났다.
 
그는 양부모 집으로 돌아왔다. 양아버지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마침 양아버지의 친아들로 만델라보다 세 살 위이고 친한 사이였던 저스티스가 객지생활을 접고 돌아왔다. 둘이는 옛날처럼 집안일을 돌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양아버지가 두 아들을 결혼시키려고 짝을 구해놓고 예물까지 보낸 사실이 밝혀졌다. 저스티스와 만델라는 결혼이 싫어 가출하고 말았다. 그들은 광부, 야간 경비원 등으로 생계를 꾸렸으나 신분이 들통 나곤 했다. 만델라는 어렵사리 법률회사 견습서기로 일하면서 법학 학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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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사진=조선DB.

만델라는 남아공 현실을 보면서 투사가 되었고, 투사가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썼다.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들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정치화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아프리카 흑인 아이는 일반적으로 흑인전용 병원에서 태어나 흑인전용 버스만 타고, 흑인거주지역에서만 살아야 하고, 흑인전용 학교에만 다녀야 했다. 흑인 아이는 성장해서 흑인들이 다니는 직장에만 취직할 수 있고, 흑인거주지역 내에서만 집을 세낼 수 있고, 흑인전용 기차만 탈 수 있다. 흑인 아이는 성장을 막고 잠재력을 짓밟으며 삶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인종차별 법률과 규제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흑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통행증을 제시하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춰야만 하고, 통행증을 제시하지 못하면 경찰서에 연행된다. 이것이 남아프리카 흑인의 현실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만델라는 “‘자! 이제부터 나는 내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살겠다’라고 말했던 특정한 순간은 없었다”고 썼다. 그는 당시 아프리카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ference)가 남아프리카에서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흑인들의 소망과 열망의 결정체라고 확신했다. 1947년 초, 만델라는 3년 동안의 변호사 도제생활을 마치고 법률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해 만델라는 ANC 트란스발 지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만델라가 ANC에서 처음으로 맡은 직위로, 투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1948년 국민당이 정권을 잡자 남아프리카 역사상 처음으로 백인정권이 들어섰다. 국민당은 악명 높은 ‘인종분리정책(apartheid)’ 등을 도입했다.
 
ANC는 강력한 대응책으로 맞섰다. 그 무렵 만델라는 청년동맹 의장을 맡았다. 1952년 저항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만델라는 처음으로 법률사무소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9개월간의 강제노동 형, 2년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만델라, 군대를 결성하고 폭력투쟁에 들어가다
 
1952년. 만델라는 정식 변호사가 되기 위해 비트버터스란트 대학에서 공부할 계획이었지만 시험에 몇 번 떨어지자 그만두었다. 변호사 자격시험을 보기로 방향을 바꿨다. 변호사 자격을 땄다. 그는 투쟁활동과 변호사 두 가지 삶을 살았다. 그는 남아공의 유일한 흑인 변호사는 아니었지만 개업한 유일한 흑인 변호사였다. 일거리가 많았다.
 
남아공정부는 계속해서 흑인마을 강제 이주, 통행증 조사, 국토의 13%만을 할당받게 하는 비백인 자치지구 정책 등을 도입했다. 흑인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남아프리카 여기저기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샤프빌 학살이 뒤따랐다. 샤프빌 학살은 1960년 3월 21일 요하네스버그에 가까운 샤프빌에서 남아공정부가 ‘아파르트헤이드 폐지, 인종차별 반대,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과 흑인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69명의 사망자와 어린이 29명을 포함한 28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샤프빌 학살로 미국 국무성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남아프리카 문제에 개입했다.
 
샤프빌 학살은 새로운 상황을 불러왔다. 이를 계기로 여러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정부는 남아프리카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 무렵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비폭력 투쟁’을 이어갔다. 만델라는 ANC 집행위원회에서 ‘비폭력 투쟁’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므로 폐기되어야 할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밤새도록 루툴리 추장을 설득했고, 추장은 어렵사리 폭력투쟁 결정을 승인했다. ANC는 50년 동안 비폭력을 가장 핵심적 투쟁 원리로 규정해 왔었는데, ANC는 이제 전혀 다른 조직으로 바뀌게 되었다. ANC는 군 경험이 전혀 없는 만델라에게 군대 조직 임무를 맡겼다. 그들은 국가를 상대로 폭력투쟁을 벌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로빈 섬 감옥에 갇히다
 
1961년. 만델라는 지하생활을 하면서 남아프리카의 주요 신문에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그는 정부가 거국적 헌법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구하며 “투쟁은 나의 삶이다. 나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일 것이다”고 선언했다. 만델라는 곧 체포되어 1964년 6월 12일 동료들과 함께 종신형을 선고받고 로빈 섬으로 이송되었다. 그의 나이 46세.
 
정부는 만델라의 감옥을 로빈 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만델라의 감옥 생활이 국민들에게 ‘투쟁의 신화’가 되어 가는 것을 정부가 막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정부는 만델라와의 비밀 협상에 들어갔다. 감옥 밖에서는 투쟁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정부와의 대화는 너무나 중요하고 민감한 사항이어서 ANC 본부가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정부와의 대화는 반드시 시작할 필요가 있고, 자기들 측에서 누군가가 첫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그의 고립상태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와 비밀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했다.
 
1988년 5월. 비밀협상 1차 회의가 정부 측 4명과 만델라가 모인 가운데 열렸다. 주요 안건은 역시 무장투쟁이었다. 정부 측 대표들은 보타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ANC가 폭력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델라는 “폭력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에게 달린 일입니다”며 맞섰다. 회담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1989년 9월 선거에서 데 클레르크가 대통령에 선출된 후 정부와의 비밀 협상은 계속되었다.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 등이 곧 석방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들은 곧바로 석방되었다. 이는 ANC에 대한 금지명령이 사실상 해제되었음을 의미했다. 데 클레르크는 남아프리카 인종차별정책의 많은 부분을 조직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협상은 계속 이어졌다.
 
1990년 2월 2일. 데 클레르크는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ANC, PAC, 남아프리카 공산당, 기타 31개의 비합법적 조직에 대한 금지령을 해제하고, 비폭력활동이라는 죄목으로 투옥된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긴급사태에 의해 부과된 여러 규제 사항을 폐지한다.” 이를 놓고, 만델라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숨 막힐 듯한 순간이었다. 거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그는 남아프리카 상황을 정상화시켰다. 40년에 걸친 처벌과 추방 끝에 ANC는 이제 합법적인 조직이 되었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더 이상 ANC 회원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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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3월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에서 열린 국경일 행사에서 넬슨 만델라(왼쪽) 당시 아프리카민족회의 부의장과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이 군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사진=조선DB.
 
 
드디어 만델라의 27년 6개월 동안의 감옥 생활이 막을 내렸다. 이어 1991년 7월에 ANC 연례회의가 30년 만에 처음으로 남아프리카 국내에서 열렸다. 만델라가 만장일치로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 후로도 정부와 ANC 및 동맹단체들과의 관계는 순탄하지 않았다. ANC와 정부는 비밀 양자회담을 이어갔다. 드디어 ‘5년간의 민족통합정부 원칙’에 양측이 동의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일정이 짜여졌다. 1994년 4월 27일이 선거일로 확정되었다. 이 날은, 남아프리카 역사상 처음으로 다수 흑인들이 자신의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가는 날이었다.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고, 의회에서 일하게 될 국회의원 400명을 선거를 통해 선출하고, 국회 구성 후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했다.
 
만델라, 데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다
 
1993년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에게 노벨평화상이 주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만델라는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썼다. 남아프리카인으로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모두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한 사람들인데, 1960년 알버트 루툴리 추장, 1984년 데스몬드 투투 주교, 그리고 1994년 데 클레르크·만델라. 다음은 만델라의 노벨평화상 수상 연설이다.
  
“….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이 상의 가치는, 큰 성공을 거둘 즐거운 평화를 기준으로 평가될 것이고, 평가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지 않는 세상에서 인류 모두가 천국의 아이들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만델라는 대통령에 출마했다. 투표 날, 만델라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내 일생에 첫 번째 투표를 했다.” ANC는 국민투표에서 62.6%를 얻었다. 만델라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여기 참석한 우리 모두는 새로 태어난 자유에 대한 찬양과 희망을 확인합니다. …. 이토록 아름다운 땅에서 사람에 의한 다른 사람의 탄압이라는 경험이 절대로, 절대로, 그리고 또 절대로 재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인간 승리 위에 태양은 계속 비칠 것입니다. 자유가 번창하게 합시다. 아프리카에 신의 은총을!”
  
만델라의 진정한 ‘용기 있는 삶’은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우리는 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어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 후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용서와 화해’를 실천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비참하고도 추악한 과거사를 밝히기 위해 만들어 낸 타협의 산물이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정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샤프빌 학살사건이 일어난 1960년부터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한 1994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만 조사한다.
(2) 정치적 동기에 의해 일어난 사건만 다룬다.
(3) 사면을 청원하는 사람은 그 사건에 관련된 진실을 모두 충분히 밝혀야 한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처리한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종차별 시절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벌인 흑인들을 화형이나 총살 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면 사면했고, 나중에는 그들에게 경제적인 보상도 베풀었다. 피해자 가족들에게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 무덤에 비석을 세워줌으로써 아파르트헤이드 시절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잊히지 않도록 처리했다. 이렇게 하여 만델라의 ‘용서하는 마음’은 남아공을 ‘화해의 나라’로 만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는 교훈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7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정과제 보고대회’ 인사말에서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적폐청산(積幣淸算)’을 첫머리에 올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기간에 공약으로 내세운 적폐청산을 ‘임기 내내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적폐청산’에 갇혀 과거에 함몰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사청산위원회’는 일제 치하에서 살았던, 한 때 ‘대단한 분’으로 존경받던 선배들을 하루아침에 ‘용서받지 못할 친일파’나 ‘역적’으로 몰아세웠고, ‘좌파’로 지목 받아 수감생활을 했거나 사형당한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영웅’으로 돌려세웠다. 리콴유는 일본치하에서 먹고살기 위해 일본어를 배워 일본회사에 취직했고, 총리가 된 후에는 일본치하에서의 경험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핍박을 받은 적도 없는데’ 적폐청산을 입에 달고 다닌다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만델라는 27년간 옥고를 치르고도 백인들을 용서했는데, 핍박을 받은 적도 없는 우리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입에 달고 다닌다. 만델라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지지 세력을 설득했는데, 지금 정부는 ‘촛불 정부’로 스스로를 명명하고 지지층 명(命) 받들기에 여념이 없다. 정치적 관용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전직 대통령 두 명을 감옥소에 가둬두고 전 세계를 다니며 자신들이 ‘포용 정부’라고 선전한다. 한반도를 갈라놓은 뿌리 깊은 이념의 골을 좁히기는커녕 이 땅의 자유 보수 세력을 바퀴벌레 보듯 ‘궤멸’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분열된 대한민국의 복잡한 심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정은 답방에 정성을 쏟는다.”(조선일보, 2018.12.5. ‘넬슨 만델라가 그리운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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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운 저 | 북앤피플 | 420쪽 | 2만 3,000원

입력 : 2019.05.27

조회 : 3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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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경제 대한민국 가꾸기

1941년 광주 출생, 광주제일고 졸업, 전남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업. 美 하와이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 받음.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의 자유』(1979)를 읽고 시장경제’에 빠져들었고, 시장경제’ 강의를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교수로 인정받고 있다. 왕성한 집필활동으로 적잖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처리즘: 자유시장경제의 위대한 승리』는 마거릿 대처의 삶과 정치를 연구·정리한 중요한 저작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 외에도 자유시장경제가 우리를 잘살게 해준다’는 확신을 갖고, 『좋은 정책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 『성경과 함께 떠나는 시장경제 여행』, 『노동시장 개혁은 슈뢰더처럼, 대처처럼』, 『7인의 위대한 정치가』 등 자유시장경제를 널리 알리기 위한 책들을 30여 권 집필했으며, 지금도 어느 작업실에서 다음 책 집필에 혼신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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