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 탄핵, 특검, 체포, 구속...등 극한 대립의 정치적 현실을 보면서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진주대첩의 역사를 돌아보고 싶습니다. 거기에는 경상·전라·충청의 의병은 물론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나라를 구하려는 절절한 마음들이 배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주에서 살면서 무역 업무를 위해 서울에 자주 오는 박술용(61) 씨의 말이다. 인터뷰는 지난 17일 영등포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잘 아시겠지만 진주대첩의 3대 특징을 든다면 논개(論介), 의암(義岩), 비거(飛車)입니다.”
그러면서 박술용 씨는 먼저 논개(論介)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논개는 기생이 아닙니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장군의 부인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에서 부군 최경회 장군이 전사하자 일본군이 촉석루에서 벌이는 잔치에 참석해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던 것입니다.”
논개의 성은 주씨(朱氏)이다. 출생한 곳은 전북 장수(長水) 임내면 주촌 마을. 논개에 대한 내용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어우야담(於于野談)>에 기록돼 있다.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단 한 줄이 있을 뿐이다.
당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인다. 논개는 부군 최경회 장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논개는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해 푸른 물줄기(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그를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다.
(사진: 논개가 왜장을 안고 뛰어내렸던 의암/ 네이버)
“훗날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습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해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세웠습니다.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을 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이트 형제보다도 앞선 세계 최초의 비행기
“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이 진주대첩이잖아요. 총통, 비격진천뢰 등 각각 신무기가 등장했지만, 진주대첩에서는 비거(飛車)가 압권이었습니다. 이 비거는 세계 최초의 비행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이트형제(Wright Brother)보다 320년이 앞선 세계 최초의 비행기라는 것입니다.”

(사진: 설계 중인 비거의 案/ 네이버)
실제로 그동안 ‘비거’에 대한 희망적인 보도가 많았다.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당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하늘을 나는 수레 ‘비거’를 보고 체험하는 ‘비거 테마공원’을 경남 진주시 망경공원 일원에 조성된다. ‘원더풀 남강프로젝트’ 사업의 하나인 비거 테마공원을 망경공원 일원에 조성할 계획이다.>
<비록 역사적 고증, 예산 등의 문제로 진행이 늦어지고 있지만, 진주시는 ‘망경동·주약동 일원에 비거 전시관, 복합전망타워, 비거 글라이더(짚 라인), 모노레일, 유스호텔 등으로 이뤄진 비거 테마공원 조성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일찍이 김동민 작가는 <진주대첩 비차, 나는 수레>라는 소설을 썼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대화도 흥미롭다.
“내 한 가지만 말해주리다. 돌아가거든 비차의 배를 두드리시오. 그리하면 바람이 일어나서 띄워 올릴 수가 있을 것이오.”
“비차, 비차라고 하셨습니까?”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나서 띄워 올릴 수가 있다고요?”
인터뷰를 한 박술용 씨는 누구인가?

(진지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임하는 박술용 씨)
진주시장과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도 했던 박술용 씨는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나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줄곧 주장하는 지도자에 대한 정의가 있다. ‘지도자(指導者)’란 ‘지도’하고 ‘자’만 있으면 된다면서, ‘정치인은 약속하는 바를 꼭 지키는 것이 도리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주대첩 당시의 진정한 지도자 김시민(1554-1593) 장군을 예로 들면서 정치인들에게 부탁했다.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은 3,8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10배가 넘는 왜군을 맞아 온몸으로 막았습니다. 그리고, 곡창지대인 호남의 진입을 막기 위해서 혈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진주가 호남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니까요. 오늘의 정치인들이 자기 당(黨)이나 자기 지역만을 위한 편견을 버리고 나라를 위한 거국적인 생각을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간직하고 있던 비밀 하나를 털어놨다.
“진주대첩 드라마 및 영화제작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의 꿈이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지기를 바라면서 인터뷰를 마쳤다.
바람이 무척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 ‘잠시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우리 민족의 우수성은 역사의 질곡(桎梏)속에서도 언제나 빛을 발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필자는 요동치는 정치권의 현실을 보면서 육사 출신으로 국방부에도 몸을 담았던 저자 김형기 선생의 책 <임진왜란, 대비하지 않으면 다시 온다>에 쓰인 한 대목을 떠올렸다.
“국가 리더십과 정치 실패는 국가 위기를 초래하고 국민을 희생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라는.
(참고 자료: 위키피디아, 경남일보, 야후재팬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