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홍갑표 이사장- 아즈텍 태양력 앞에서 책을 들어보이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재단법인 중남미문화원 홍갑표 이사장이 필자를 반갑게 맞았다. 가을의 끝자락인 지난 11월 13일 오후의 일이다. 중남미문화원은 단풍이 형형색색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인생에는 목표와 짐이 있어’
필자는 8년 전(2013년 9월), 홍갑표 이사장 인터뷰를 했었다. 주제는 <지금도 꿈을 꾼다>의 신간 출판 기념이었다. 그런데, 그 책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켜켜이 8쇄를 찍었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셔서 8쇄까지 찍었습니다. 감사할 일이죠.”
홍갑표 이사장은 이복형(90) 대사를 따라 중남미 지역에서 30년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 그 지역의 유물과 미술품을 수집했다. 1993년 이복형 대사의 은퇴와 동시에 재단법인 중남미 문화원 병설 박물관을 세웠다. 이 책은 중남미 골동품과 미술품의 수집 과정, 그리고, 문화원의 역사가 생생하게 쓰여 있다. 책을 열면 다음과 같은 글과 만난다.
<누구에게나 책임져야 할 인생의 몫이 있고, 지고 살아가야 하는 짐이 있다고 봅니다. 나는 팔순이 된 지금에서야 어느 정도 내 몫을 다하게 되어 그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내 인생을 회자정리(會者定離)하는 의미에서 책을 낼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팔순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내 몫을 다하게 되어...’라는 대목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젊은 나이에 인생을 통달한 듯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이어령(87) 전 문화부 장관은 책의 추천사에서 “고대의 마야문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늘의 중남미 문화에 이르기까지 내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공간과 시간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 넘은 문화의 위대함이요, 소중함 그 자체다.”라고 했다. 그것도 한 개인의 힘으로 한 것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풍성한 소유가 아니라 풍성한 존재가 중요해’
인터뷰는 ‘공간과 시간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조각공원’을 걸으면서 진행했다. 길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바람에 날리던 낙엽들이 머리 위에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어떤 생각으로 이토록 엄청난 일을 하셨나요?”
“제 인생의 목표는 풍성하게 소유하는 데에 있지 않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풍성한 소유가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한다.’
이 말은 홍갑표 이사장이 하루가 열릴 때마다 새벽 묵상을 하며 기도하는 심정으로 되뇌는 좌우명(座右銘)이기도 하다.

조각 공원에서 펄펄나는 홍갑표 이사장.
중남미문화원은 올해로 28년이 됐다. 홍 이사장은 조각품 하나하나와 대화하는 듯했다. 인디오의 여인(조각품)들이 환영의 눈길을 보냈다.
“저 조각품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답고 여유가 있습니까?”
홍 이사장은 화가 겸 조각가인 ‘페르난도 보테르(Fernando Botero·90)’의 ‘나부(裸婦)’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살이 통통하게 찐 조각품을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콜롬비아 작가 보테르(Botero)의 전시회에는 언제나 ‘뚱보들의 천국’이라는 별칭이 붙는다.
문화(文化)는 나눔이다.
조각 공원의 언덕길을 오르면서 홍 이사장은 ‘문화는 나눔’이라고 했다. 나눔은 곧 행복이기 때문이란다. 언덕에서 종교관을 바라봤다. 아름다움을 넘어 성(聖)스러운 작은 성당이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멕시코에서 가져온 ‘최후의 만찬(230cmx150cm)’이 눈에 들어왔다. 성가가 잔잔하게 흘렀다. 당장이라도 예배를 볼 수 있는 분위기였다. 종교관의 조각품·그림은 물론 스테인드글라스와 의자까지도 중남미에서 들여왔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결혼식을 한다’고 빌려달라고 하고, ‘영화 촬영 장소로 사용하고 싶다’고 해도 거절한다. 하나같이 소중한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벽화에 대해서 설명하는 홍갑표 이사장.
“고대 중남미에는 다양한 민족이 정착하여 훌륭한 문화유산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문화는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첫째는, 2만여년 전 베링 해협을 건너 중남미에 정착했던 우리와 비슷한 몽고 아시아계 인디오가 이룩한 아즈텍 문화입니다. 둘째는, 이색적인 풍모와 건축의 예술과 뛰어난 솜씨를 가진 마야족 문화이지요. 그리고 세 번째는, ‘제국의 지배자는 태양의 후예’라고 믿는 잉카제국입니다.”
홍 이사장의 설명은 끝이 없었다. 언덕 길 벤치에 앉아서 대화를 계속했다. 단풍나무 아래 모여 있는 새(鳥) 조각품들의 숫자가 8년 전보다 많아 보였다.
“새들의 숫자가 늘었군요.”
“맞습니다. 작가가 계속해서 보내옵니다. 저기 보세요! 새들도 마주보며 대화하고 있어요. 얼마나 다정스런 모습입니까? 사람들보다 낫죠?”
그렇다. 요즈음 사람들의 대화가 줄고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이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삶이 각박해진 듯싶다.
발걸음을 옮겨서 중남미 목(木)조각전(10. 20-11. 30)이 열리고 있는 미술관으로 갔다. 나라의 특성을 지닌 갖가지 조각품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선보이고 있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작가 로사 마리아 아세베도의 작품 ‘사색하는 예수(26x45x23cm)’가 발길을 멈추게 했다. 상념에 잠긴 예수의 모습을 아름답고 장엄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전통 의상 전시도 중남미의 독특한 컬러를 느끼게 했다.
‘외교관도 문화예술에 대한 지식과 관심 있어야’
90세 남편과 88세의 아내의 다정한 모습이다.
“여전히 건강하시군요?”
“아닙니다. 얼마 전 나무 가지를 자르다가 넘어져서 좀 불편해요.”
그는 가을·겨울이면 푸르스름한 여명(黎明) 속에서, 봄·여름이면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나무 손질과 잔디 깎기, 때로는 청소부(?)로 변신해서 문화원 곳곳을 정리한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이복형 원장은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이나 상장 보다는 올해 4월 주한 중남미-카리브해 국가외교사절단이 준 감사패를 으뜸으로 쳤고, 홍갑표 이사장은 지난해 10월 (사)한국박물관협회로부터 받은 특별 공로상을 ‘엄지척’했다. 이어서 이복형 원장은 필자에게 <한국 외교와 외교관>이라는 책을 사인해서 선물했다. 2015년에 나온 책이었다.
“외교관은 문화예술에도 많은 관심과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필자는 의자에 앉자마자 다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부인 홍갑표 이사장에게 물었다.
“이복형 대사님 아니, 원장님은 어떤 분이시나요?”
“멋진 사람이지요. 아주 멋진. 대사 시절에 그 누구와도 골프장 한 번 가지 않았어요. ‘접대 받는다’고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요. 대신, 주일이면 교회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원래 성악을 공부하기도 했어요. 코스타리카 대사 시절 독창회를 열었고, 아르헨티나 교회에서는 특송을 요청하면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습니다. 남편의 찬송가에 감동 받은 교민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멈출 줄 모르는 꿈
“아직도 꿈을 꾸고 계시나요?”
“꿈을 갖는 데는 돈이 들지 않아요. 저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이 저를 이끌어 오늘의 저를 만들었어요.”
홍 이사장은 책에서 “재물에 집착하면 그것이 곧 자신을 구속하는 사슬이 되고, 불행의 씨앗이 된다는 삶의 지혜를 실천한 가족들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했다.
“저서 <지금도 꿈을 꾼다>의 9쇄는 언제쯤 나올까요?”
“제 나이 90세가 될 때 나올 것입니다. 앞으로 2년 후가 되나요?”
잉카 제국의 태양신이 지켜주는 것일까. 책의 부제(副題) ‘태양의 열정으로’처럼 나이를 잊고 꿈을 꾸는 홍갑표 이사장-그의 꿈은 멈춤이 없을 듯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