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읽는 시집⑥] 등단 반세기 이기라 시인의 시선집 《나를 따라온 길》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길은 걷는 자에게만 있다’고 한다.

끝 간 데 없이 멀고 먼 시의 길은, 낮이나 밤이나

나 홀로 걸어온 외로우면서도 외롭지 않은 길이었다.”


올해로 시문학 등단 50년, 월간문학 등단 52년을 맞은 시인 이기라가 시선집 《나를 따라온 길》(글나무)을 펴냈다. 반세기의 시간을 관통해 온 한 시인의 곧은 행로가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시조의 운율을 바탕에 깔고 인생의 단면을 벼린 시들이다. 

 

시어가 옛스럽고 단아하며, 결이 곱다. 오랜 시력이 쌓아 올린 내공 덕에 한 편 한 편이 모두 반짝인다. 시론의 원리를 진실성에 둘 것이냐 언어유희에 둘 것이냐는 논쟁거리지만, 이기라 시인의 시는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을 잡는다. 삶의 진실을 품되, 언어는 아름답다.

 

삶의 진실을 품되, 언어는 아름다워

 

수록 시 '거울'은 시집 전체의 서문처럼 읽힌다.


조금도 거짓이란

지닐 줄 모르기에


모든 걸 보는 족족

사실대로 일렀지요


솔직히 살아가는 일

마음 이리

편합니다.

-'거울' 전문


거울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 시인은 그 거울처럼, 삶을 꾸밈 없이 바라보고 기록해 왔다. 솔직함이야말로 시인의 오랜 문학적 태도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봄을 노래한 '봄 출력 중'에서는 시인 특유의 발랄한 감각이 빛난다.


나무가 겨울잠만 자는 줄 알았더니

이 봄에 펼칠 일을 궁리하고 있었구나

해마다 같은 이력서

새롭게는 보이고자


오는 봄 한쪽 볼이 추위로 얼얼해서

계절을 보는 눈이 더디기는 하였지만

연초록 전단지 한 장

가지마다 출력 중.

-'봄 출력 중' 전문


겨울 내내 나무가 잠만 잔 것이 아니라,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발견. '이력서'와 '출력 중'이라는 현대적 어휘가 시조의 리듬 위에 올라타며 유쾌한 긴장을 만들어낸다.

 

'첫눈 오는 날'은 오래 묵혀 둔 감정을 끄집어내다 다시 접어 두는 인간의 내밀한 순간을 포착한다.

 

그간 하지 못했던말

속속들이 적어 둔 걸


이제 와 꺼내 보고

도로 접어 망설이다


조금은 잊어 보자고

발기

발기

찢어 흩누나.

-'첫눈 오는 날' 전문


'발기 발기 찢어 흩누나'에서 행갈이로 구현된 리듬이 감정의 파열을 그대로 전한다. 말하지 못한 것들을 눈처럼 흩뿌리는 이 장면은 긴 여운을 남긴다.

 

해학과 풍자가 어우러진 '무고(誣告)-심야 폐월도(深夜 吠月圖)'도 눈길을 끈다.


어젯밤

마님 방을 들른 게 저놈이지 싶어


아무런 물증 없이

의심을 받던 달이


방문을 기웃거리다

깜짝 놀라

달아난다.

-'무고(誣告)-심야 폐월도(深夜 吠月圖)' 전문


아무런 물증도 없이 의심받는 달. 인간 세상의 억울한 누명을 달에 빗댄 이 시는 웃음과 씁쓸함을 동시에 자아낸다.

 

시집의 정서적 중심부에는 삶의 동반자를 향한 시선이 있다. '고무신'은 오랜 부부의 삶을 꽃무늬 고무신 두 켤레에 담아낸다.


나란히 벗어 놓은 꽃무늬 두개 자욱

하나와 하나로서 불을 맞댄 인연들이

씻겨 간 삶의 원리를 조리질로 건지고


이따금 부재(不在)하는 나들이 길섶엔가

내 일상(日常) 거두어 갈 귀로의 돛 내리면

해 질 녘 노을을 밟고 다정히도 머무네. 


어질디 어진 둘레 별빛 고인 섬돌밤은

나뉘인 가슴마다 여며 안은 이야기로

긴여정 굽이로 사려 꿈을 걷는 원앙일레.

-'고무신' 전문


시조의 형식미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씻겨 간 삶의 원리를 조리질로 건지고'라는 구절은 수십 년 동안 함께 걸러내고 건져 온 부부의 세월을 한 줄에 압축한다.


'추(錘)'는 벽에 걸린 시계 추의 갈팡질팡을 인생의 방황에 비유한다.


이쪽일까 저쪽일까

저쪽일까 이쪽일까


시간은 째각째각 쉼 없이 재촉는데

아직도 판단 못 한 채 갈팡질팡 제자리.


나는 내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지

하루가 가는 것도 내 힘인 줄 알았지

빈 벽에 거꾸로 걸린 몸인 줄도 모르고.


내일을 바라고 오늘이 되었지만

무엇을 찾았던가 소망을 이뤘던가

갈수록 빠른 일월에 헛걸음만 깊어가네.

-'추(錘)' 전문


'빈 벽에 거꾸로 걸린 몸인 줄도 모르고'—이 한 줄이 시 전체를 당긴다.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던 인간이 결국 누군가의 벽에 걸려 흔들리는 추에 불과하다는 통찰이다.

 

01212014040203824072.jpg

일러스트=조선일보DB

 

生을 담은 시들

 

시집의 백미로 꼽힐 만한 '연필'은 단 네 줄에 삶의 전부를 담는다.


살이 깎이고 뼈가 닳는 고행의 삶입니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설원의 길


몽당이 되도록 지나온

어제가 다 경전입니다

-'연필' 전문


연필이 깎여 몽당연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시인은 고행에 빗댄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 자체가 수행의 기록이요 경전이라는 인식은, 등단 반세기를 돌아보는 시인의 고백처럼 들린다.

 

'들러리'에서는 중심이 아닌 존재의 가치를 조용히 역설한다.


나 하나 빠진다고 안 될 일은 아니지만

자리를 채워 주고 빛내주기 위해서

나 오늘 초대를 받고 행사에 참석한다.


중심이 되지 못하고 주변만 늘 맴도는

꽃잎은 꽃술의 들러리일 뿐이지만

한 송이 꽃의 품격은 꽃잎에게 달렸다

-'들러리' 전문


꽃술의 들러리인 꽃잎이 꽃의 품격을 완성하듯, 중심이 아닌 자리에서도 세계를 빛낼 수 있다는 것. 소박하지만 단단한 자존의 시학이다.


'생의 의미'는 도시 아파트의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응축한다.


상냥갑 쌓은 듯한 아파트


그 속의 성냥개비들


하느님의 담배 시간마다


머리에 불을 쓰고 무심히 사라진다.

-'생의 의미' 전문


불이 켜진 아파트, 그 속의 인간들은 성냥개비다. 잠깐 타오르다 사그라지는 불꽃.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이 피우는 담배 한 대가 타들어 가는 시간일지 모른다는 이 짧은 통찰은, 오랜 세월 벼려진 시인의 눈이 아니고서는 나오기 어렵다.

 

시 '저 사이'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물과 뭍에 빗댄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속이 푸른 수면일까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면 죽음에 들고

뭍 것은 물속으로 들면 목숨을 놓는다


세상의 이승이란 것도 어쩌면 저승일 터

저승도 먼 것 같지만 이승이 끼고 있다

이저승 넘나드는 일 물수제비 돌 같은


강물에 배 한 척 쏜살처럼 달린다

놓치면 달아날까 고삐 당겨 잡은 스키

유희도 스치는 인생도 저 사이의 잠시 한때

-'저 사이' 전문


물수제비 돌이 수면 위를 튀듯, 인생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스치듯 건너가는 잠깐의 순간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이토록 고요하고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만큼의 세월을 살아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이다.


이기라 시인의 시는 쉽게 나오지 않는 종류의 것들이다. 거친 삶을 통과하고, 내공이 쌓이고, 세월의 군살을 덜어낸 뒤에야 비로소 써낼 수 있는 시들. 등단 50년이라는 숫자는 숫자가 아니라, 한 편 한 편의 시 속에 새겨진 시간의 밀도다. 시선집 《나를 따라온 길》은 그 길을 따라온 독자에게도 오래 남을 책이다.


시인이 고른 시 '접시'

 

지금까지는 기자가 시들을 선정해 소개했다. 이번에는 시인에게 부탁했다. 저마다 지체와 같은 시들이겠지만 노시인은 '접시' 한 편을 골랐다.

시를 처음 읽으면 단순하다. 접시 이야기다. 그런데 두 번 읽으면 이상하다. 이게 접시 이야기가 맞나?


몸을 낮추니

마음이 넓어지고

 

마음이 넓어지니

품을 게 많아진다

 

품어서

넉넉한 둘레

누릴수록 여유롭다.

-'접시' 전문


접시는 낮다. 테이블 위에 납작 엎드려 있다. 그 낮음 때문에 무엇이든 올려놓을 수 있다. 함부로 눈 깔지 않아도 된다. 부릅뜨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접시 주변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음식을 나눌 수 있다. 이기라 시인은 그 단순한 사실 앞에서 멈췄다.

낮아지는 것은 굴복이 아니다. 자세를 낮추면 시야가 달라진다. 품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등단 반세기. 시인이 걸어온 시간의 무게를 생각해보면, 이 짧은 연이 다르게 읽힌다. 50년이면 숱하게 높아지고 싶었을 것이다. 인정받고 싶고, 기억되고 싶고, 남고 싶었을 것이다. 문학도 그렇고 삶도 그렇다. 그런데 수백, 수천 편 중에서 하필 이 시를 꺼내 들었다. 납작하고 조용한 이 시를.


그것은 아마도 고백일 것이다.


높아지려 했던 시간들을 지나, 낮아지는 것이 오히려 넉넉해지는 일임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의 고백. 시론(詩論)이 아니라 생론(生論)으로서의 고백.


먹먹해지는 이유가 거기 있다.

이 시는 늙음에 관한 시가 아니다. 완숙에 관한 시다. 50년을 걸어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지만, 동시에 지금 막 시작하는 사람도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자리에 관한 시다.

납작한 접시 하나가, 한 사람의 등단 50년을 다 담고 있다.

 

경북 상주 출생인 시인의 본명은 동수(東洙)다. 《월간문학》(1974) 신인상 및 《시문학》(1976. 1.) 천료로 등단했다. 중앙시조대상 신인상(1984), 현대시조문학상(2004), 중랑문화예술인상(2006), 중랑문학 대상(2009), 한국문인협회 서울시문학상(2013) 수상했다.

시집으로 《꿈에 꾼 꿈》(1986), 《지푸라기 한 줌》(2013), 《그래봤자》(2018), 《오시는 봄》(2023)이 있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많이 본 뉴스
  • 세계속 코이카'
  • 배진영의 '어제 오늘 내일'
  • 김태완 'Stand Up Daddy'
  • 권세진 ‘별별이슈’
  • 정혜연 ‘세상 속으로’
  • 박희석 ‘시시비비’
  • 이정현 ‘블루오션을 찾아서’
  • 박지현 ‘포켓 저널리즘’
  • 하주희 ‘블루칩’
  • 이경훈 현장으로’
  • 김광주의 뒤끝
  • 백재호의 레이더
  • 고기정의 特別靑春
  • 슬기로운 지방생활
  • 이상곤의 흐름
  • 서봉대의 되짚기
  • 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 취재본부는 지금’
  • 조갑제 기자의 최신정보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