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읽는 시집②] 이상록 시인의 《극장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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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성채도 언젠간 무너지지만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

 

삼팔장은 파장 흐느끼는 뽕짝 무대래야 장터 마당 우리는 들뜨지 학교에선 기죽던 강둑 아래 녀석도 나방처럼 설치지 노란 등 꺼지고 영사기 소리 밤하늘 긁으면 어김없이 죽죽 장대비 내리지 매가리 없는 삶 눈물처럼 때도 없이 내리지 사랑해선 안 될 사람 통통배는 서울로 가는데 소나무에 기대 바라만 보는 여인 아, 문 희, 눈물도 예쁜 저런 여자라면 삶이 한두 번 속여야지 그래도 지금 여자 갸름한 목덜미는 꼭 닮았다네

 

촌구석에 극장이라니 거무죽죽 지붕 사이 우뚝한 국제극장 김일 박치기를 단체로 볼 줄이야 허장강도 도금봉도 막걸리 안주 희갑이는 애들도 만만하게 보는데 장돌뱅이로 돌고 돈 필름은 장군들 셈처럼 자꾸만 끊어져 하필 두 입술이 닿을 찰나에 건달들 도끼고함에 다시 이어져도 꼴도 보기 싫은 놈 자르고픈 컷, . 정말 도끼로 뭉툭 도려내고 사는 맛도 있어야지 한 떨기 장미 꽃잎이 젖을 때라나 아직도 콩거린다네

 

범일동 시궁창 강구 군단도 촌놈 부산 구경 못 막있지 가무잡잡 삼화고무 앳된 처자들 삼일극장이 비좁네 뽕도 딸 겸 들어서면 분내 땀내 찐득거려 삼성극장으로 건너가면 지린내가 폴폴 따라붙지 헛헛하지 액션으로 한 방 멜로로 또 한 방 동시에 달래주곤 남진까지 불러다 구장집 봉순이 봉긋한 가슴에 바람 넣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진 봉순이 태화고무 고무신처럼 어디서 질기게 살아갈 테지 그 보림극장도 문을 닫았다네

 

내려진 그 극장 간판 헛바람 안 빠진 물컹한 가슴에나 달아야겠네

이상록 시인의 시 극장의 추억전문

 

이상록의 시집 극장의 추억》(인문학사)는 한 시대의 집단 기억을 품고 있다. 산업화와 이농,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가난의 시간들. 그 기억은 대개 눅눅하고, 궁핍하고, 애잔하다. 그러나 그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그 모든 궁핍이 묘하게 따뜻해진다. 창비 계열의 서정처럼 익숙한 발상이지만, 그 익숙함을 자기 체온으로 데워낸다는 점에서 다르다. 아픔 아닌 것이 없고, 슬픔 아닌 장면이 없는데도, 시인의 붓끝은 그것을 다시 어루만진다.

 

샛강에서 사라호 홍수의 참혹한 기억은 모래밭은 금빛 / 조약돌은 은빛으로 변주된다. 물에 쓸려간 삶의 자리, 아홉 살의 섬뜩한 연례행사까지도 끝내는 은어처럼 반짝이는 이미지로 회귀한다. 상처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통과한 뒤에야 보이는 빛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늙어가는 샛강의 풍경에는 사라짐의 쓸쓸함과 함께, 한 시대를 건너온 생의 윤기가 함께 흐른다.

 

극장의 추억에서는 그 생의 무대가 더욱 선명하다. 범일동 시궁창, 국제극장과 삼일극장, 삼성극장, 보림극장, 삼화고무와 태화고무 신발까지. 지린내와 분내, 땀내가 뒤섞인 장터 같은 기억 속에서 인생은 한 편의 B급 영화처럼 상영된다. 필름이 끊어지고, ‘도끼고함이 터지고, 두 입술이 닿을 찰나가 잘려 나가는 삶. 그러나 시인은 그 장면들을 자르고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내 인생극장은 막을 내릴 수 없다네라고 말하며, 기억의 간판을 자신의 물컹한 가슴에 다시 건다.

 

죽은 줄 알았던 기억은 그의 시 속에서 다시 숨을 쉰다. ‘극장의 추억구장집 봉순이봉긋한 가슴처럼, 한때 스쳐 간 인물과 풍경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가난과 눈물, 홍수와 시궁창을 통과했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은빛과 금빛으로 반짝인다. 이상록의 시는 상처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빛으로 환치하는 힘을 지녔다. 그 힘이야말로, 그의 시를 마법처럼 보이게 하는 따뜻한 감성의 정체일 것이다.

 

차례상 물리고 음복할 겨를도 없이

나를 업고 몸만 빠져나와야 했다는데

종구 아버지는 돼지 새끼 안고 쓸려갔다지

사라호 때 눈물 자국 서까래 끝 물때는

새마 을 운 동 때야 지워졌다

 

소침쟁이 상이용사 고집 센 두 어른이

수문 손잡이에 또 엉겨 붙었다

강물은 불어나고 뒷물은 밀어닥치는데

열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

비는 야속하게 퍼붓는데

 

축담까지 물이 차 살강에서 보리 소쿠리 챙겨

어깨에 메는데 목덜미를 타는 생명체

소쿠리 내동댕이치고 삽짝 밖으로 내달리니

생쥐 식구도 놀라 붉덩물에 찰방찰방

아홉 살 연례행사는 지금도 섬득하다

 

담장엔 살구꽃 연분홍 강마을

샛강에 큰물 한번 나고 나면

모래밭은 금빛

조약돌은 은빛

 

둑이 실해지고 뒷물도 물길을 찾았다는데

첨벙대는 아이들 보이지 않고

번쩍대던 은어가 올라오지 않아

샛강도 가불가불 늙어간단다

이상록의 시 샛강전문

 

백화춘하구에서를 함께 읽으면, 이상록 시의 결이 더 또렷해진다. 전자는 청도의 비파강과 장터, 배갈 냄새와 국밥집 가시내, 그리고 꺼이꺼이 생목을 짜던꺼병이 형의 울음으로 가득하다. 느릅나무 풋내와 피라미 떼, 장날 해거름 햇발 같은 청춘의 풍경은 짙은 향수에 젖어 있다. 그러나 그리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다시는 다리를 건너오지 않는다지라는 구절에서 보이듯, 한 번 건너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내 가슴에 달아놓은 백화춘은 간판이 아니라, 상실을 품은 표지판이다.

 

느릅나무 풋내 맡고 피라미 가맣게 깔리면

비파강 여울은 낮에도 별밭

건너 잿빛 목조 아래 오도카니 앉은 백화춘

재건중학교 도니다만 꺼병이 형이

마술처럼 배갈에 불을 붙이던

봄비 추적 대는 저녁 어스름

불처럼 뜨거운 걸 홀짝

홀짝두어 모금 마시고는

아홉 해나 풍을 앓은 엄마 생각난다며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니

므으으을꺼이꺼이 생목을 짜면

처마를 낮추고 같이 울던 백화춘

배갈 향에 청춘이 비척거려도

장터 국밥집 가무잡잡한 가시내가

장날 해거름 햇발처럼 우리를 달궈

큰물 나면 잠기던 장터 다리를

큰뜻 품은 양 겅중겅중 건너곤 했지

지금도 피라미 사부작사부작 잔자갈 헤집고

비파강 퍼렇게 느릅나무 풀물 풀지만

삼팔장 유천장은 서지 않아

지붕 나지막한 무슨 옥이었지

간판 내리고 떠난 그 집 가시내

원아랫들 적시고 간 강물처럼

다시는 다리를 건너오지 않는다지

흰 간판 빨간 글씨

내 가슴에 달아놓은 백화춘

 

*비파강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이호우 이영도 오누이 생가 앞을 흐르는 강

 

이상록의 시 백화춘’ 전문

 

하구에서는 그 기억의 물길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여준다. 강은 결국 하구에 다다르고, “여정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 고단한 몸을 이끌고온 시간을 돌아본다. 강물이 모래섬에 써 내려간 서사는 한 인간의 생애와 겹쳐진다. 무엇을 떠나보내고 무엇을 묻었는지, 어디서 손을 잡았고 어떻게 놓았는지를 묻는 대목에서는 추억을 넘어선 진지한 성찰이 드러난다. 강의 끝처럼 느긋하고 넉넉한마무리를 꿈꾸지만, 그 바탕에는 뜨겁게 살아온 시간의 체온이 깔려 있다.

 

이상록의 시는 분명 추억을 기조로 한다. 그러나 그 요체는 향수가 아니라 진지함이다. 지나간 시절을 미화하기보다, 그 시간을 통과해 온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 선다. 홍수와 장터, 극장과 하구를 건너오며 그는 삶을 한 편의 영화처럼 상영하면서도, 끝내 눈을 돌리지 않는다. 생을 대하는 격정, 끝까지 붙드는 태도, 그리고 마지막까지 뜨겁게 묻는 질문. 그것이 그의 행간을 채우는 힘이다.

 

우리네 삶도 저 강 같은 것

언젠간 모두 하구에 다다르지

저기 백합등 아래 가로누운 도요등

부지런한 강물이 긴 세월

물살의 흘림체로 쓴 모래섬의 서사

바람이 한 페이지 넘기면

불새가 행간을 짚어 가는 곳

각진 표정 지워 낸 모래알이

고스란히 서로에게 스며드는

여정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왔겠지

흥그럽게 들판을 가로지르다

맹렬히 기술을 후비긴 해도

물가 오두막 검게 탄 얼굴은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했으리

무엇을 떠나보내고

무엇을 깊숙이 묻어

그 많은 생명에 방을 마련해 두었나

어디서 손을 잡았고

어떻게 손을 놓았든

삶의 끝에서도 저럴 수 있다면

느긋하고 넉넉한 강의 끝처럼

물새가 노을을 가르는 저녁

하루의 생이 저리 뜨거운데

우리 한 생은 어떨까

 

*백합등, 도요등 : 낙동강 하구의 모래섬 이름으로, 백합조개와 도요새의 서식지

 

이상록의 시 하구에서전문

 

이상록 시인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제1회 사하모래톱문학상 시부문 최우수상(2015)을 수상했고 서울시인협회 추천시인상(2017),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2023)으로 문단에 나왔다. 30여년 동안 고교 국어교사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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