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읽는 시집①] 서하 시인의 《우리 슬픔은 기쁨의 그림자래》(파란)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우리 슬픔은 기쁨의 그림자래.'

 

이 한 문장이 시집의 제목이자,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부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듯이 기쁜 것도 슬픈 것에서 나와, 보이지 않을 뿐 기쁨이 함께 오기 때문에, 슬픔이 결코 어둡지 않다'는 고백. 서하의 시는 바로 그 고백 한 줄에서 시작된다.

 

슬픔을 어둠의 감정으로만 가두지 않겠다는 결의, 그 곁에 늘 기쁨의 그림자를 겹쳐 놓겠다는 의지. 시집 전편에 유독 '슬픔'이라는 말이 자주 호출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은 슬픔을 회피하지 않는다. 다만 그 슬픔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세계를 바라보는 서하의 시선은 근원적으로 비극의 자장(磁場) 안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 비극은 단색이 아니다. 슬픔은 기쁨과 뒤엉켜 있고, 웃음과 맞물려 있으며, 종종 능청스러운 어조 속에 자신을 감추고 앉아 있다. '히비스커스와 희비 섞어서'에서 드러나듯, ()와 비()는 분리된 두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진 두 가지다.

 

경상도 방언이 배어 있는 그의 시어는 얼핏 다정하고 구수하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슬픔과 기쁨이 양념 잔뜩 밴 봄나물처럼 뒤섞여 있다. 짭조름하고 매콤하면서도 끝내 고소한 맛이 도는 그 문장들 속에서, 독자는 감정의 단순한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을 맞는다.

 

서하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유머와 언어유희는 단순한 재치가 아니다. 말장난처럼 스쳐 가는 문장, 뜻을 겹쳐 놓는 위트, 리듬을 타고 흐르는 방언의 결에는 쉽게 말해지지 않는 마음이 숨어 있다. 웃음은 장식이 아니라, 금이 간 자리를 스스로 덧바르는 손놀림이다. 울음을 곧장 드러내기보다 한 번 비틀어 건네는 방식, 그것이 그의 언어다.

 

서하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힘은 삶을 바라보는 진솔함과 따스함이다. 과장하지 않고, 높이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그대로 바라보는 눈. 그 눈이 언어가 될 때, 그의 시는 비극을 말하면서도 사람을 놓치지 않는다.

그런 시선이 오롯이 담긴 시 한 편을 읽어 보자

 

지붕도 없는 좌판, 농협 달력 뒷장에

고구마 쭐기 한 무디기 삼처넌

묵언이 밑천이다

 

물꼬 보러 나왔다가 삽자루 깔고 앉은 듯한 노구에서

저승에는 장이 안 서는지, 수년 전에 죽은 동생이 얼핏,

자전거 앞뒤로 마늘종 가득 싣고 금호장 갔던

내 열네 살도 설핏,

 

이웃과 농갈라 묵께요 고마, 다 주이소

 

어허, 안 돼요 공짜로 날아오는 국밥집 냄새도 좀 맡고요, 뻥튀기 소리에 깜짝 놀래도 보고요, 지나가는 아지매 얼굴도 좀 쳐다보고요, 까만 고무 원피스 배밀이 하는 아재 깔깔이 수세미도 한 장 팔아 주고요, 장 사람들캉 탁배기도 한 꼬뿌 혀야지요, 저 해가 아직 대그빡 우에 있잖소, 퍼떡 팔고 손 털어 뿌문 고구마 줄기도 고마 섭섭다 안캤능교

 

다 팔릴까 봐 시들지도 못하는 저 노령

백화점에서도 쿠팡에서도 팔지 않는

고구마 줄기 같은 저 의지가

여기엔

 

없는 듯 있다

서하의 시 다 팔아 뿌문 나는 머 하는교전문

 

다 팔아 뿌문 나는 머 하는교.’ 제목이자 물음이자, 이 시 전체를 받치고 있는 문장이다. 장사꾼의 농담처럼 들리지만, 실은 삶 전체를 향한 질문이다. 다 팔고 나면, 다 끝내고 나면, 나는 무엇으로 남는가.

 

고구마 줄기를 파는 일은 생계이면서 동시에 하루를 붙드는 이유다. 그래서 노인은 '퍼떡 팔고 손 털어 뿌문' 것을 오히려 아쉬워한다. 국밥집 냄새도 맡아야 하고, 뻥튀기 소리에 놀라기도 해야 하고, 지나가는 아지매 얼굴도 쳐다봐야 하고, 탁배기 한 꼬뿌도 기울여야 한다. 장이 서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는 세상과 이어져 있다. 팔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팔리고 나면 그 연결이 끊어지기 때문에 노인은 서두르지 않는다. '다 팔릴까 봐 시들지도 못하는 저 노령'이라는 구절에는 쓴웃음과 뜨거운 연민이 함께 고여 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시 한 편이다.

 

맨홀 앞에서도 언니 들어가, 부엌 아궁이 앞에서도 언니 들어가, 깜깜한 냉동실 앞에서도 언니 들어가, 필필 끓는 국솥 앞에서도 언니 들어가, 기저귀 갈아 주는 엄마 앞에서도 언니 들어가, 화장장 앞에서도 언니 들어가, 무덤 앞에서도 언니 들어가

 

긴 통화 끝낼 때 그녀가 즐겨 쓰는 말,

언니 들어가

 

우체통에 사정없이 밀어 넣는 편지 같은, 와글대는 종량제 봉투 꾹꾹 눌러 묶은 매듭 같은, 무한 재생 여자의 일생을 꼭 눌러 꺼 버리는 스위치 같은, 소낙비 쏟아진 후 접은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 같은, 숙변 쏟아낸 뒤 쓰윽 닦은 휴지 같은

 

따르르, 따르르 뚫은 구멍으로 청딱따구리 들어가듯, 언니 들어가, 기준도 표준도 없이 계속 번지는 들불처럼 그녀 입안에, 내 귀에 소복한 언니 들어가

서하의 시 언니 들어가전문

 

반복되는 "언니 들어가"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맨홀, 아궁이, 냉동실, 화장장, 그리고 무덤 앞까지, 삶과 죽음의 경계마다 그 말이 놓인다. 점점 깊어지는 그 호명 안에는 보호하고 싶은 마음과 대신할 수 없는 무력감, 그리고 끝내 놓지 못하는 그리움이 층층이 배어 있다. 평범한 작별 인사처럼 들리지만, 실은 위험과 상실의 자리마다 서서 건네는 간절한 음성이다.

 

그러나 이 시는 슬픔에만 머물지 않는다. "들불처럼" 번지고 "청딱따구리 들어가듯" 살아 움직이는 비유 속에서, 말은 오히려 생의 리듬을 얻는다. "언니 들어가"는 끝을 알리는 말이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부름이다. 작별의 언어 안에 남아 있는 따뜻한 숨결, 그것이 이 시를 오래 울리게 한다.

 

서하의 시를 읽고 나면,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그 어떤 결론이나 교훈이 아니다. '없는 듯 있다'는 감각이다. 슬픔도 기쁨도, 삶도 죽음도, 작별도 그리움도 그렇게 겹쳐 있다. 그 겹침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눈, 그리고 그것을 낮은 언어로 건네는 손. 서하의 시가 봄에 읽히기에 더없이 좋은 이유다.

 

냉정도 정일까요 유통기한이 없는 것들도 때론 변해요 변심은 가파른 계단처럼 소심해요 결심 따윈 필요 없어요 자연스럽게 구르되 부디 선 넘진 마세요 냉랭에도 중심이 있어야지요

 

빛을 등진 사각지대가 아니어도 위악과 위선은 서로 싸워요 그게 계란 속껍질 같은 보호막인가요 감정 소모는 너무 피곤해요 요점만 말해 줄래요

 

무거운 짐 진 사람 외면하니 새털처럼 가볍던가요 아랫목에도 경계와 한계는 있다지요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확신은 신발이 아니에요

 

지저귀는 새는 제 노래를 결코 자랑하지 않아요 이해합니다 자랑해야겠으면 고요한 못물에게 해요 입 없는 뒷산 무덤에게 해요

 

발바닥이 흰 것은 항상 숨어 있어서래요

 

꽃이 꿀을 품고 있으면 부르지 않아도 나비는 날아와요

시간은 거꾸로 돌지 않아요

 

두툼한 구름 책이 말해요 뿌리는 열매 자랑하지 않고 열매는 뿌리 흉보지 않는 게 세상사라고

 

내심과 뒷심 부근이에요 냉담은 담이 아니어서 무꽃 향기는 냉담을 넘지 않는대요

서하의 시 따뜻한 무관심전문

 

시인 서하는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1999시안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아주 작은 아침》 《저 환한 어둠》 《먼 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 《외등은 외로워서 환할까》 《우리 슬픔은 기쁨의 그림자래를 썼다. 33회 대구문학상, 1회 이윤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여기서 글을 마치려니 아쉬워 한 편 더 소개한다.

 

눈물의 수문 조절은 누가 할까

 

가화만사성이란 말 밥 먹듯 하면서 정작 가화에 관심 없던 아버지, 네 일 내 일 가리지 않더니 용산못 수문 관리까지 도맡았지 팬티만 데리고 물속으로 두레박 던지듯 몸 던질 때, 못 둑의 지칭개, 망초, 질경이, 메꽃이 눈을 찔끔 감았다 떴다

 

낮달이 서쪽으로 헤엄칠 동안, 사랑하지도 않는 아버지 옷을 끌어안고 여기 있어도 될까 햇살의 속눈썹이 까만 단발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아지풀이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노름하는 아버지가 죽도록 싫었지만, 싫어하는 것조차 싫었지만. 그 아버지에게 나는 왜 또 빠지는지, 혓바닥 갈라진 물뱀이 지나갈 때 내 몸도 갈라졌다

 

한참 후, 수면의 여러 겹 동그라미 속으로 돌고래처럼 쑥 올라온 아버지,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눈을 푹 덮었다 파르스름한 입술이 뱉어 내는 푸푸소리는 한여름인데도 추웠다


죽은 아버지를 건져 올린 듯, 넘치기 직전의 못물은 숙변 밀어낸 듯 더 푸르렀다

 

아부지요. 물에 드가는 거 고만하문 안 되예?

니 여태 여기 있었나 개얀타, 걱정 마라

 

소 판 놈이 구루마는 못 팔까만

 

가화만사성에 발목 잡혀 끝내 팔 수 없었던, 수문 관리 대가로 부치던 그 밭 푸성귀 씹을 때

 

눈물이 돌처럼 바작바작 씹혔다

서하의 시 눈물이 돌처럼 바작바작 씹혔다전문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많이 본 뉴스
  • 세계속 코이카'
  • 배진영의 '어제 오늘 내일'
  • 김태완 'Stand Up Daddy'
  • 권세진 ‘별별이슈’
  • 정혜연 ‘세상 속으로’
  • 박희석 ‘시시비비’
  • 이정현 ‘블루오션을 찾아서’
  • 박지현 ‘포켓 저널리즘’
  • 하주희 ‘블루칩’
  • 이경훈 현장으로’
  • 김광주의 뒤끝
  • 백재호의 레이더
  • 고기정의 特別靑春
  • 슬기로운 지방생활
  • 이상곤의 흐름
  • 서봉대의 되짚기
  • 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 취재본부는 지금’
  • 조갑제 기자의 최신정보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