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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북한 주민 6명과의 통화기록

“배불리 먹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글 : 박승민  日 문예춘추 서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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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장대로 모여서 모두 (김정은) 대장님께 충성선서했다”(44세 남성)
⊙ “앞이 캄캄하고. 나이도 어리지 뭘 알겠습니까?”(20세 여대생)
⊙ “나이 어린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힘이 안 난다”(50세 남성)
⊙ “중국으로 넘어가다 밖에서 죽어도 괜찮다”(62세 여성)
김정일 사망 직후인 작년 12월 20일 오후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바라본 신의주 마을의 모습.
  평안북도에서 함경북도에 이르는 북·중(北中) 국경 부근에 사는 북한 주민들 중에는 중국의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중국 기지국의 전파가 국경을 넘어오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초 기자는 중국 휴대폰을 이용해 북·중 국경지대에 사는 북한 주민들과 통화했다. 인민보안원(경찰) 출신 탈북자가 다리를 놔줬다. 이 통화를 통해 기자는 김정일(金正日) 사망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 김정일의 뒤를 이어 최고지도자가 된 김정은(金正恩)에 대한 평가, 앞으로의 북한의 향방, 식량난 등에 대한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자와 통화한 북한 주민들의 육성과 TV에서 비쳤던 김정일 장례식 때의 평양 시민 표정 사이에는 슬픔의 정도에서 온도차가 느껴졌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국경 부근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정보가 들어오니까 북한의 형편에 대해 어느 정도 냉철한 판단이 가능하다. 한편 수도 평양의 시민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며, ‘장군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왔기 때문에 슬픔도 다른 지역보다 실제 컸을지도 모른다. 장례식의 TV영상이 심하게 울고 있는 시민만을 촬영한 ‘과잉연출’의 광경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취재에 응해준 주민들의 이름은 모두 밝히지 못했다. 자세한 거주 장소도 밝히지 않았다. 북한 당국에 신원이 알려지면, 그들에게 큰 위험이 미치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의 전화통화 표현은 어감을 살리기 위해 가능한 한 그대로 옮겼다.(괄호 안은 이해를 돕기 위한 필자 설명이다)
 
 
“우리는 장군님을 끝까지 모셔야” (김○○·44·남성)
  함경북도의 농장에서 일하는 김씨와 통화를 시작했지만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를 좀 더 크게 해달라고 부탁하자 김씨는, “옆집에서 다 듣는다 말입니다. 우리는 호상이(서로가) 다 감시반이지 않습니까(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모두 감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번에 장군님 서거 때문에, 감시가 더…”라고 말했다. 김씨는 통화 내용이 옆집에까지 들릴까 봐 두려워서 끝까지 큰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김정일 사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우리는 모두 비통한…”(김씨는 말끝을 흐렸다)
 
  ―김정은씨가 후계자가 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 말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그걸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농장대로 모여서 모두 (김정은) 대장님께 충성선서했습니다. 우리는 장군님을 끝까지 모셔야 되지요. 장군님께 기대야 되지요.”
 
  ―김정은 대장은 아직 20대 후반인데 잘해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장군님 말씀대로 생활합니다.”
 
  ―아직 젊은데, 북한의 신문이나 방송에서 ‘최고영도자’ ‘어버이’ 등으로 부르고 있는 데 대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김일성 사망 때와 이번 김정일 위원장 사망을 비교하면 슬픔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것은 옳습니다. 우리 시대는, 장군님(김정일 위원장) 시대이지 않습니까.”
 
  김일성 주석 사망 때가 더 슬펐다는 뜻이다.
 
  ―요즈음 배급은 나오나요.
 
  “배급 나왔습니다. 우리 식구는 부부와 아들, 딸 네 식구인데, 강냉이 양백 키로(200㎏) 배급을 받았습니다. 장군님의 배려로 네 명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옥수수 200㎏은 네 명 가족의 1년분 식량이라고 한다. 그는 고생해서 쌀을 조금 사서, 옥수수와 섞어서 밥을 해먹는다고 했다.
 
  김씨는 이쪽 질문에 대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내일 점심 무렵에 산에 올라가서 다시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김씨는 통화 도중에 계속 기침을 했다. 그는 체제나 후계문제에 대해서는 끝까지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로 김씨와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정일이 사망 때는 ‘으 시원하다’ 했지요” (윤○○·45·남성)
  북·중 국경지대에 사는 윤씨는,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몇 마디를 중국어로 말했다. 북한 당국의 도청(단속)을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중국의 휴대전화 전파가 잘 잡히도록, 사람의 눈을 피해 산 위에 올라가 통화하고 있다고 했다.
 
  ―김정일의 사망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교대 일이 끝나 집에 돌아와서 텔레비전으로 발표를 보고 알았습니다. (김정일이) 사망한 뒤로 기업소나 직장 단위까지, 음주 못 하게 하고 오락을 몽땅 차단시켜 놨습니다. 장기 주패치기(트럼프의 북한말), 당구장 그런 류의 오락을 장군님 장례식 할 때까지 몽땅 차단시켜 놨습니다. 두만강 경비대는 2배로 증강해 놓았습니다.”
 
  ―김정일의 사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에헤헤~! (너털웃음을 웃고 난 후) 아! 백성들이 너무 고생하니까, 빨리 정권이 바뀌었으면 하지요. 백성들이야, 더러는 앞에서는 말 못 하지만, 속마음은 모두 다르단 말입니다. 조선에서는, 사람들 앞에서는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백성들과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속마음은 좀 다릅니다.”
 
  ―주변에선 김정일의 죽음에 대해 모두 슬퍼하고 있습니까.
 
  “추모행사는 주체행사들이니까 가기야 가지 뭐 예. 아하하~, 그래도 속마음은 다르지 뭐. 추모행사에 가지 않으면 온 가족을 빗자루로 쓸듯이 몽땅 쓱쓱 쓸어서 (강제수용소에) 처넣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행사들은 가는데 그에 대한 비난은 좀 많습니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와 이번을 비교하면, 분위기는 어떤가요. 
 
  “수령님(김일성) 서거 때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런데 이번 정일이 사망 때는 다릅니다. 속으로야 ‘으~! 시원한 노릇을 했다’ 하지 뭐(으~! 시원하다 하지요).”
 
 
  “그 똥물에 그 똥물”
 
  ―김정은씨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에이~! 뭐야, 위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평백성들 놓고 보는 경우에는(일반 주민들은), 그 뭐라고 할까, 재수 없다고 하지요. 아이! 이제 서른 살도 아이 된 게(안 된 것이), 지도자를 한다니까, X꺼풀도 벗겨지지 않은 게 지도자를 한다니까 말이 됩니까. 반가 아이 합니다(반가워하지 않습니다). 백성들도 찬성하는 숫자가 얼마 아이 됩니다. 좋아 안 합니다. 최고사령관으로 또 올라갈지 아직 모르겠지만 백성들은 좋아 아이 합니다. 그 똥물에 그 똥물이지 않습니까.”
 
  ―김정은의 존재를 언제 알았습니까.
 
  “김정은이가 재작년(2010년) 당 창건기념일 열병식 때, 첫 출현했습니다.”
 
  ―그 이전에 이름은 듣지 못했나요.
 
  “못 들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김정일의 자식들이 몇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밑에 단위 입장이니까(일반 주민들이니까) 그런 것 말 안 합니다. 재작년 10월 10일 당 창건기념일 때 정은이가 처음 나왔는데, (사람들이) 그때는 영 희한하게 보던데, 점점 날이(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도 옳지 않으니까(3대 세습도 옳지 않으니까)….”
 
  ―그때 김정은을 처음 보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허허허!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그 똥물에 또 그 똥물을 같이 먹겠구나!’ 했습니다.”
 
  ―김정은에게는 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에이! 기대 아이 합니다!”
 
  ―식량 사정은 어떤가요. 배급은 잘 나옵니까.
 
  “식량 주지 않습니다. 일을 해도 월급이라는 것 없습니다. 사는 게 한심하게 삽니다.”
 
  ―월급은 얼마 받기로 되어 있습니까.
 
  “3000원 조금 더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만, 생산을 조금 하게 되면 돈이 조금 나오고….”
 
  ―3000원이면 쌀을 어느 정도 살 수 있나요.
 
  “지금 여기서는 쌀 한 키로에(1㎏에) 1500원씩 한다 말입니다. 그럼 두어 키로(2㎏) 정도 사지요. 그것 가지고 가정살림을 어떻게 합니까? 사는 게 막 귀찮습니다!.”
 
  ―배급도 안 되고 월급도 제대로 안 나오면 생활은, 식량은 어떻게 구하나요.
 
  “소토지, 산을 벗겨서 소토지 땅, 산을 발가벗겨서 땅뙈기로 만든다 말입니다. 거기서 농사한 것 가지고 거저 먹습네다.”
 
  윤씨는 통화하면서 톤이 점점 높아졌다. 처음에는 ‘장군님’이라고 부르더니 이내 ‘위원장’이라는 직함도 부르지 않고, ‘정일이’라며 경칭도 생략했다. 그의 억양과 말투는 점차 불만을 표출하며 격정적으로 바뀌어갔다. 하지만 그는 김일성에 대해서는 끝까지 ‘수령님’이라고 불렀다.
 
 
“김정은에 기대 안 해” (최○○·20·여대생)
  통화하면서 진실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개방’이란 말을 쓰며 서방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문제점을 그녀 나름 분석하고, 김정은에 대한 호칭은 거의 경칭을 생략하고 이름만 불렀다. 그러나 후계세습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말해 놀랐다.
 
  “저는 대학생입니다. 12월 19일 아침 학교에 갔는데, 12시에 중대방송이 있다고 했습니다. 학생들 모두 함께 강의실에 모여서, 작은 텔레비전으로 (김 위원장의) 사망 발표를 보았습니다. 사망소식을 맨 처음 들었을 때는 2008년도에 뇌수술을 했다고 했으니까, 내 혼자 마음으로는 ‘오래 못 살아계시겠다’ 이렇게 생각했으니까, 혼자 생각으로는 ‘아! 올 때가 왔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는 사람들도 있고, 분위기에 맞춰서 울지 않으면 우리는 간첩이라고 말할까 봐서 한 사람이 울면 다 같이 울어야 되고, 분위기에 맞춰서 울고 싶지 않아도 실은 눈물이 안 나는데 함께 울었습니다.
 
  나중에 내 짝 친한 동무와 말할 때는, 살 만큼 살고 서거하셨으니까, 우리는 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그것이 더 궁금했습니다. 정말 친하고 속에 있는 말까지 다 하는 동무끼리 앉아서 ‘실제로는 (눈물이) 안 났는데 같이 울어야 되니까 울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정은 대장에 대해서는 언제 알았습니까.
 
  “노래로 선전사업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배우고 그랬습니다. 김정은 노래가 있습니다. 2008년도에 ‘척.척.척. 발걸음’이라는 노래를 후계자 노래라고 배우라고 해서 모두 함께 배웠습니다.”
 
  ―김정은 대장이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후계자가 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렇게 말해서 되는지 모르겠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앞이 막 캄캄합니다. 그래도 나이가 좀 있으면 살아온 경험도 있고 해서 어떨는지 모르겠는데, 제 생각에는 앞이 캄캄하고. 나이도 어리지 뭘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무 기대가 없고 그냥 앞으로 나도 어떻게 하면 살아가겠는가 하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데, (김정은이) 나이가 너무 어려가지고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작년 12월 28일 김정일 장례식. 북한 주민들은 나이 어린 지도자의 등장에 불안해하고 있다.
 
  “소기업소 다니면 배급 없다”
 
  ―배급은 받고 있나요. 월급과 식량 사정은.
 
  “광산 다니는 사람들은 배급이 나오는데, 아버지가 소기업소 다니는데, 거기는 배급이 없습니다. 이번 가을에 농원(농장)에 가서 감자 한 250㎏ 받았습니다. 엄마, 아버지, 저 세 식구인데, 어머니가 장사하고 해서 쌀은 조금씩 사서 섞어서 먹습니다. 아버지는 월급이 없습니다. 엄마는 이것저것 장사하고 있습니다. 밭에서 기른 배추 같은 것을 가져다가 팔기도 하고, 여름에 심은 토마토 같은 것을 가을에 내다 팔기도 하고, 또 다른 것을 팔기도 합니다.”
 
  ―일을 하는데 월급은 안 나오나요.
 
  “명절 때에 기름(식용유)이나 술이나 이런 것밖에 주는 것이 없습니다. 광산이 아니기 때문에.”
 
  ―배급도 없고 월급도 없으면 장사해서 스스로 먹고살아야 하는 건가요.
 
  “그런데 안 다니면(직장에 나가서 일을 안 하면) 잡아가고 그러니까…”
 
  ―왜 북조선은 그렇게 생활이 어렵다고 생각하나요.
 
  “한국이나 중국처럼 개방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 동무들끼리 앉아서 말합니다. 친한 동무들끼리 이런 얘기하지, 다른 사람들하고는 그런 말 하지 않습니다. 개방되면 잘살 것 같다. 통일되면 잘살 것 같다. 이런 말도 친구들과 하고 그럽니다.”
 
  ―3대(代)가 세습하면서 독재정치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나라는 유치원 다닐 때부터 장군님 어린 시절, 대원수님 어린 시절, 이렇게 배우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데 대해서는 ‘응당 내려오면서 김정일 동지의 자식이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는 (별) 생각이 없습니다.”
 
  ―김정은은 앞으로 개방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까.
 
  “그건 좀 더 봐야. 아직은 난 너무… 더 살아봐야 알 수 있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렇게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름을 말해 줄 수 있는가.(어떤 대답이 나오는지 반응을 보기 위해 질문해 보았다)
 
  “이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름이 밝혀지면, (내가) 누구라고 알게 되면 큰일 납니다. 전화도 오래 못 하지만 지금 동무가 망보면서 전화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장시간 통화할 수 없다고 해서 전화를 끊었다.
 
 
“(김정은) 나이 어려 믿음 없다” (정○○·50·남자)
  함경북도에 사는 정씨와 전화가 연결되었을 때, 그가 사는 지역은 정전(停電)이었다.
 
  “지금 이쪽은 정전이 되었습니다. 지역마다 다 다릅니다. 공장지역은 좀 정전이 덜하고 인민들이 사는 아파트는 대부분 정전이 됐습니다.”
 
  ―전기는 하루에 몇 시간 들어옵니까.
 
  “아침에 한 40분 보내주고 저녁에 한 40분 보내주고 그러고 있습니다. 조금 더 보낼 때도 있습니다. 전선이 있어야 집에 전기가 들어옵니다. 그거 없으면 전기도 못 받습니다. 어떤 집은 (전선이 없어) 몽땅 쇠줄로 하다 보니까 사고가 많이 납니다. 그러니까 12월 19일 (김정일 위원장 사망발표) 중대방송 할 때 이쪽은 정전이 되어서 직접 텔레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슬펐습니까. 솔직한 심정을 말해 보세요.
 
  “우리 전체 다 나와서 어머니 동상 앞에서 다 묵도를 하고 있었어요. 우리 시(市)의 전 인민이, 십몇 만 인구가 다 슬픔에 잠겼습니다. 집에 오면 아버지가 다 같듯이, 우리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다 한 이틀, 사흘 슬펐습니다.”
 
  ―친구들끼리는 어떤 얘기를 하나요.
 
  “우리 그저 나이 어린 사람이 통치하고 있으니까, 요전 중국사람을 통해 들은 말에 의하면, 김정일이 17년 동안 통치하는데 우리 북조선 사람들이 죽어나간 숫자가 900만명이 된다는 거예요(1990년대 중후반에 걸쳐 아사자가 900만명이라는 말은 잘못된 정보 같다. 당시 기아로 약 200만~300만명이 숨졌다는 보도가 일반적이었다).
 
  우리 지역에는 여자나 남자나 눈치 빠른 사람은 다 없어지고(모두 탈북하고)…. 이쪽은 현재 치료비가 너무 비쌉니다. 김정은이 국경을 넘는 사람은 총을 쏘라고 지시하니까, 못 움직이는 상태에서 집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거기에 대한 근심이 대단합니다.”
 
 
  “배 굶지 않았으면 하는 욕망”
 
  ―김정은 대장이 이제 스물여덟, 20대 후반인데.
 
  “‘나이 어린 사람이 우리를 통치하지 못하지, 어떻게 통치하겠는가’ 거기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이 엄청 큽니다. 우리 백성들이 사는 생활에 관심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또 나이 어린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으니까 힘이 안 나고 지금 그저 모여 앉아서 갑갑합니다. 만약 노출시키기라도 하면(그런 말을 밖에서 하면) 모두 (당국에) 끌려가니까 말은 못 하고 그저 눈을 다 감고 앉아 한 사람 두 사람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북조선이 어떻게 되길 원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좀 편안할까, 해마다 굶지 않았으면 하는 욕망입니다. 한국처럼 잘 되지는 못하지만, 배 굶지 않았으면 하는 욕망입니다. 쌀이 있으면 배를 굶지 않고 그것이 우리의 만족(희망)입니다.”
 
  ―지금 하는 일은.
 
  “장사를 좀 하고 있습니다.”
 
  ―김정은 대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우린 믿음이 없습니다. 나이가 어리니까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가지고 어찌 살겠는가? 지금 겁에 질려가지고 하루하루 촛불 밑에서 시간 보냅니다.”
 
  ―식량은 어떻게 구하고, 주로 뭘 먹고 생활합니까.
 
  “하루 벌어서 하루 시래깃국에 밥 먹고 보냅니다. 시래기를 모아서 힘들게 삽니다. 강냉이에다 쌀을 조금 섞어가지고 먹습니다. 사는 게 힘듭니다. 지금 식량 배급은 전혀 안 나옵니다. 장마당에 가서 다 사먹어야 됩니다.”
 
 
  “3대 독재로 내려와가지고…”
 
작년 12월 28일 김정일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평양시민들. 기자와 통화한 북한주민들은 김정일의 죽음에 대해 이와는 상당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번에 김정일이 돌아갔으니까, 새사람이 우리를 통치했으면 하는 생각이 있는데, 두 가지 생각인데, 하나는 김정은이 앞으로 우리를 어떻게 통치하고 착취하고 압박을 할 것인지, 또 핍박할 것인지, 이게 지금 두려운 감이 있고, 다른 사람 좀 좋은 사람, 한 사람이 우리를 보살펴줄 수 있겠는가, 다 밥 먹고 살게 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를 생각하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냅니다. 그것가지고 두어 마디 하다가(좀 얘기하다가) 말은 못하고 헤어집니다. 이런 얘기는 밖에 나가서 못 하지요. 친한 친구들하고만 그런 얘기 합니다. 지금 이 시기에는 단속이 심해가지고 말 한번 잘못하면 다 끌려갑니다.”
 
  ―지난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이번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했을 때를 비교하면, 그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지금 심정하고 그때 심정하고 완전히 바뀌었지요. 그때는 우리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슬픔이 더 했는데, 우리가 살길이 아주 허망하고 두려운 감이 앞서 났습니다. 김정일이 돌아가고 김정은이 아무 일 않으니까 미련이 한 점도 없습니다. 그래도 김일성 장군님 돌아가셨을 때는, ‘다 김정일을 도와드려라 이렇게 (김일성) 아버지께서 말한 것이 있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3대 독재로 내려와가지고, ‘김정일의 유훈이 우리를 죽이겠다(우리를 더 힘들게 하겠다), 취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라며 많은 친구하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남조선에서는 최고지도자를 국민들이 직접 투표해서 뽑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지요. 그런 말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김정은 대장한테 주민들이 충성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나요.
 
  “위에서 그저 어떻게든 협박을 해서 뭘 하라고 하면 할 뿐이지, 인민 스스로가 충성하겠다고 우러나오는 것은 없습니다. 우러나와서 김정은에 대해서 한 주먹이 되어서(일심 단결해서) 보위하자, 그런 피 한 방울까지 싸우겠다 그런 결심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씨는 김정일과 김정은을 부를 때, 처음부터 끝까지 경칭을 붙이지 않았다. 후계 세습체제와 지금의 생활에 불만이 많은 듯, 주저 없이 최고권력자에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독재’라는 말까지 했다.
 
 
“15세짜리가 되든, 20세짜리가 되든…” (이○○·44·여성)
  ―김정일 사망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소감은.
 
  “그 순간은 허황하고 당황했습니다. 그렇지만 김일성 동지가 서거했을 때보다는 감정이 달랐습니다. 많이 슬프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돌아가셨을 때는 저도 그랬고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때는 까무러치는 사람도 있고 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는 윗상에(조문시설) 가서 인민반별로 조직별로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묵도하고 울기도 하고, 조직별로 진행하는 것이니까, 빠지지도 못하고 계속 나가야 했습니다. 윗상 옆에 마이크를 잡은 방송원들이 있습니다. 그 방송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좀 슬퍼집니다. 머리를 숙이고 묵도하고, 앉아서 통곡하며 우는 사람도 있고, 대체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웁니다. 그냥 우는 행사지요.”
 
  ―이제 20대 후반의 김정은 대장이 최고사령관에 추대되었는데요.
 
  “별로 큰 기대는 없습니다. 아직 젊은데다 경험도 없지, (북조선의) 모든 사람이 생각하기에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큰 기대가 없습니다. 지금 먹고살기 바쁜데 그런 것은….”
 
  ―앞으로 북조선은 어떻게 되기를 바랍니까.
 
  “(한숨 쉬고 나서) 인민들이 잘살고 편안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잘 먹고 잘살고 아무 걱정 없이… 사람들이 먹는 문제만 풀리면 무슨 근심 걱정 있겠습니까. 배급 주는 것도 없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장사해서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고달픕니다. 통제는 심하지, 벌어먹고 살 것은 없지, 국가에서 주는 것도 없지, 사람이 벌어먹고 산다는 게 보통이 아닙니다.”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나요.
 
  “저는 약초 장사를 합니다. 농촌에 있는 사람들이 약초를 캐서 말려서, 겨울에 말린 약초를 파는데, 약초를 사서 조금 이익을 남기고, 예를 들면 5원에 사서 7원에 팔아 2원의 이익금으로 삽니다.”
 
  ―3대째 권력 세습이 되었는데요.
 
  “그냥 아무 생각 없습니다. 국가에서 김정은 동지에 대한 칭송, 탁아소 유치원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그런 교육을 계속하니까, (김일성 주석의) 자식들이 대대로 후계자가 되는 법(제도)이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15세짜리가 후계자가 되든, 20세짜리가 후계자가 되든 응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세뇌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이씨의 말에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씨도 김정은에 대해 경칭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3대 세습에 대해서도 위화감을 갖지 않았다. 이씨의 얘기에서 북한은 아직도 ‘왕조국가’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탈북자 소식 들으니 정말 부럽다” (문○○·62·여성)
  문씨는 국경 지역에서 탈북을 준비하고 있는 여성이다. 기자가 어떤 질문을 해도 그의 대답은 탈북하고 싶다는 얘기뿐이었다.
 
  ―김정일 사망 소식을 어디서 들었습니까.
 
  “나는 거기에 대해서 신경 안 씁니다. 본인이 북한에 대해서는 불만도 많습니다. 내가 행복하고, 세 끼 배불리 먹고 살기 위해서 최고의(큰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이렇게 나섰습니다. 김정일이 사망했다고 해서 거기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하루 한 끼 정도 먹고 굶다시피 합니다. 애들 좀 먹게 하고,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가족은 부부와 딸과 세 식구입니다.”
 
  ―북한의 어떤 점이 가장 불만인가요.
 
  “모든 것이 불만입니다.”
 
  통화하기 시작해 5분 정도 지나 문씨는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더 이상 통화를 못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만성적인 연료난인 북한에서는 극한의 동절기에도 가정에 난방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았다. 5일 후 두 번째 통화에서 문씨는 갑자기 “북조선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며, 통화 시간 거의 대부분을 탈북에 대한 얘기밖에 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북조선에 대해 모든 것이 불만이라고 말했는데, 어떤 점이 가장 불만입니까.
 
  “내가 지금 살기가 힘드니까, 내가 건너가든 못 가든 가다가 죽더라도 목숨 내건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라도 배불리 먹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건너가든 못 가든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남한으로 넘어오겠다는 말인가요.
 
  “북조선에 대해서는 이제 너무 힘들게 살다 보니까 털끝만치의 생각도 없습니다. (한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얘기를 다 듣고 보면, 거기(남한) 가서 너무 행복하게 보내고 이러니까 아주 부럽습니다. 어디 가서 밥 한 끼라도 배불리 먹다가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전화하는 것도 나는 이불 밑에서 가만 가만히(조용조용히) 해야 됩니다. 지금은 정세가 좀 복잡해가지고 (누가) 문 앞에 와서 듣고 있는 것 같고 내가 마음이 많이 불안합니다. 전화를 가만 가만 받고 있습니다.”
 
 
  “우리 식구에 좋은 세상 보여주고 싶어”
 
  ―지금 그쪽에는 국가지도자가 바뀌었는데요. 그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나는 얘기할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올라앉아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일절 신경 쓰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는 북조선에 대해서는 털끝만치도 이제는 생각이 없습니다. 우선 사람이 사는 게 배가 부르고 그래야 행복인데, 쌀알을 세다시피 먹어야 되고 이러니까, 난 정말 너무너무 힘들고 피곤합니다.”
 
  ―배급이 전혀 없습니까.
 
  “그것가지고 엄청 모자랍니다. 북조선은 내가 태어난 나라니까 내가 어지간하면 같이 지켜야 하겠지만 너무나 힘듭니다. 강냉이 같은 것도 딱 한 줌 정도 주는데 한 줌이라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는 두만강 건너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내가 하루라도 빨리 넘어가서 내 경제상황이 허락되면, 우리 집 식구들한테도 좋은 세상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밖에 없습니다.”
 
  ―왜 지금 북한의 생활이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지만, 내 나라를 배반하고 가는 여자니까 나쁜 여자입니다. 나도 압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하는 생각으로 목숨 걸고 나갑니다. 그저 일 초라도 빨리 그저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습니다.
 
  나는 어느 순간이라도 이 나라를 떠나야 되기 때문에, 그 소식만 기다리기 때문에, 난 아무 데도 안 가고 그저 집에서 이불 쓰고 눈만 깜빡거리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심장이 몹시 뛰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전화하는데 손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습니다.”
 
  탈북에 대한 문씨의 처절한 외침에 더 이상 질문을 계속할 수 없었다. 취재에 응해준 모두가 굶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했다. 북한 주민들의 삶이 얼마만큼 어렵고 힘든 것인지, 그 심경과 내부 실정의 단면이 그림을 보듯 전해져 왔다.
 
  김정은 체제하에서 북한은 과연 먹고사는 문제만이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핵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가슴 답답함, 그들만큼은 못하겠지만, 사연을 듣고 있는 필자도 답답함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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