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관은 관대하고 문명화된 사회의 핵심적인 수호자다. 정보기관이 실패한다면 엄청난 代價가 뒤따른다. 정보 작성자와 정보 사용자는 정책결정을 위해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판단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충분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정보기관의 휴먼네트워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경륜이나 경험을 통해 축적된다.
⊙ “국정원의 실수는 과거 정권부터의 人事亂脈에서 비롯된 것”
⊙ “정보기관의 치명적인 실수는 자만심과 공명심의 합작품”
⊙ “과거 북측 대표단의 서울 방문 때 마취제 품고 북측 숙소 잠입”
⊙ “UAE 원전 수주와 삼호주얼리호 선원 구출작전 때 국정원 큰 역할해”
⊙ “국정원의 실수는 과거 정권부터의 人事亂脈에서 비롯된 것”
⊙ “정보기관의 치명적인 실수는 자만심과 공명심의 합작품”
⊙ “과거 북측 대표단의 서울 방문 때 마취제 품고 북측 숙소 잠입”
⊙ “UAE 원전 수주와 삼호주얼리호 선원 구출작전 때 국정원 큰 역할해”
- 창설 50주년을 맞은 국정원이 인사난맥으로 공작(工作) 실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1월, 독일 주재(駐在) 북한 이익대표부에 근무하던 K씨가 유럽의 한 미국대사관에 급히 망명하는 일이 발생했다.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소속이었던 그는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각국의 한인(韓人) 교포사회를 대상으로 공작을 맡았던 인물이다. K씨는 미국 CIA 보호하에 모처로 옮겨져 5개월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유럽에서 활동한 내역을 상세히 털어놓았다. 그의 증언에는 노무현 정권 당시 한국에 들어와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재독(在獨)학자 송두율(宋斗律)의 정체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K씨가 서방으로 탈출한 이유는 탈출 전년도(1998년)에 있었던 ‘컴퓨터 교체’ 사건 때문이었다. 1998년 어느 날 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북(親北)인사 C씨로부터 “내 컴퓨터가 고장났다”는 말을 듣게 된다. 때마침 컴퓨터를 바꾸려 했던 K씨는 C씨에게 “새 것 사지 말고 내 컴퓨터를 쓰라”며 컴퓨터를 공짜로 줬다. 그는 컴퓨터를 건네기 전 하드디스크에 있던 자료를 모두 삭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K씨는 삭제된 파일이 복원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工作 성공과 실패 사례
그 무렵 둘의 만남을 예의주시한 이들이 있었다. 당시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C씨가 가져간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입수, 삭제된 파일을 그대로 복원했다. 하드디스크에는 북측의 유럽 공작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국정원이 1982년부터 송두율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치밀하게 쳐 놓은 그물망에 대어(大魚)가 걸려 드는 순간이었다. 국정원은 하드디스크에서 송두율에 대한 결정적 자료를 확보했다.
이런 상황을 몰랐던 K씨는 1998년 연말 갑자기 북으로부터 “한 달 안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갑작스런 귀환명령에 불안해할 무렵 그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국정원 요원이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K씨는 부인과 함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방으로 탈출했다.
한 편의 영화 같지만 국정원의 실제 공작(工作) 사례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2010년 5월, 무대는 대한민국 서울. 국정원 국내파트 직원들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일행을 미행(尾行)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국내 좌파성향의 한 단체가 초청한 프랭크 라뤼(Frank La Rue) 유엔(UN) 특별보고관과 그의 수행원들이었다. 국정원 직원들은 라뤼 특별보고관 일행의 움직임을 몰래 감시하던 중이었다. 국정원 직원들은 차량을 이용해 라뤼 특별보고관 일행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이튿날 라뤼 특별보고관은 국정원에 “미행하는 이유가 뭐냐”며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정원은 미행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라뤼 특별보고관 측은 자신들을 따라다니던 국정원 직원 탑승차량의 사진을 제시했다. 국정원의 거짓말이 들통난 것이다.
미행 발각 사실이 있은 지 한 달 뒤, 이번 무대는 리비아. 리비아에 파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국정원 정보관이 리비아에서 추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리비아와 북한 간 무기거래 현황과 현지 거주 북한 근로자의 건설정보를 수집하다가 발각된 것이다. 이 일로 한-리비아 간 외교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리비아에 나가 있던 국내 건설업체는 한동안 크고 작은 제약을 받았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李相得) 의원이 리비아에 급히 날아갔고, 사태는 가까스로 수습됐다.
그리고 2011년 2월, 서울 한복판에서 마침내 대형 사건이 터졌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이 묵고 있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 국정원 직원이 잠입해 특사단 노트북에 들어 있던 자료를 빼내려다 들킨 것이다. 국정원 직원은 줄행랑쳤다.
얼마 전 중국 상하이총영사관에서 발생한 중국 여성 추문(醜聞)사건에서도 국정원이 거론되고 있다.
최근 들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국정원은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불법 정치정보 수집, 민간인 사찰, 도청사건 등으로 수차례 개혁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동안 논의된 국정원의 개혁방향은 조직과 기능 개편, 외부통제 강화 등이다. 한때 국내기능과 국외기능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견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테러와 국제범죄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정보를 통합·관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정원의 근본적인 능력문제 대두
최근 벌어진 일련의 ‘국정원 사태’는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 “국정원의 능력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흥신소보다 못한 국정원’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정보기관은 관대하고 문명화된 사회의 핵심적인 수호자다. 정보기관이 실패한다면 엄청난 대가(代價)가 뒤따른다”는 말이 있다. 국내 최상위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공작 실패는 대한민국 국익(國益)과 직결된다.
국정원은 해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대공, 대정부 전복, 방첩, 대테러, 국제범죄조직)의 수집·작성·배포를 주요 업무로 한다. 이를 위해 국정원은 인간첩보(human intelligence)와 기술첩보(technical intelligence)를 활용한다.
전통적으로 정보기관은 인간첩보에 의존해 왔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기술첩보 수집능력이 강화되고 있다. 국정원도 과거에 비해 기술첩보 수집능력이 상대적으로 향상됐다고 한다. 그러나 기술첩보는 인간첩보의 보완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첩보가 약화된다면 기술첩보가 빛을 발할 수 없다.
국정원의 실력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보수집 능력부터 따져 봐야 한다. 아울러 생산된 정보의 객관성도 검증해야 한다. 정보요원이 수집한 정보(첩보)에는 ‘불확실’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이를 제거해야만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생산되는 것이다.
정보기관의 실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정치화’도 계산해야 한다. 정보가 정치화하면 왜곡된 정보가 생산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인 이유로 목표물(적·스파이·기타 정보수집 대상 인물)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방첩능력도 살펴봐야 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고정간첩·이중간첩에 대한 감시활동과 활용도를 체크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외공작(工作) 수준과 준(準)군사작전 활약상도 확인해야 한다.
해외공작 파트에서 평생을 보낸 전직 국정원 인사를 만났다. 그는 이론과 실전에 밝은 정보통(情報通)이다. 그는 최근 벌어진 사건에 대해 “안타깝다”고 했다.
“제가 몸 담았던 조직이 나날이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오히려 퇴보해 가는 느낌입니다. 우수한 인재가 국정원에 들어가지만 3년 내에 바보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능력이라는 게 참 희한해요. 바보도 제대로 교육만 받으면 훌륭한 첩보요원이 될 수 있지요. 사람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어떤 역할을 맡기느냐에 따라 생산성이 완전히 달라져요. 자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정보요원에게는 열정도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자(記者)와 비슷해요. 자기 분야에서 열정을 갖지 않으면 좋은 기사를 쓰지 못하지 않습니까. 열정 못지않게 노하우도 중요해요. 기자는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선배로부터 취재원 관리방법과 기사작성법을 도제식(徒弟式)으로 배우잖아요. 정보요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보요원에게는 정형화된 매뉴얼이라는 게 없어요. 일반 행정공무원이라면 매뉴얼대로 일하면 되겠지요.”
지금의 국정원은 행정기관처럼 운영돼
―최근 국정원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국정원 요원이라고 하면 대부분 공작 전문가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과거 정권에서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퇴출시켜 지금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지금의 국정원은 행정기관처럼 운영되고 있어요. 행정조직으로 운영되는 정보기관은 죽은 조직입니다. 정보기관은 사람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요. 업무를 맡길 때는 철저히 준비하지요. 작은 실수가 치명적인 국익손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잠입 실패와 리비아 정보파견관 추방사건의 공통점은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경험과 전문성이 부족하고 훈련이 제대로 안된 직원을 공작에 투입하니 일을 제대로 해내겠습니까. 국내에서 전화통 붙잡고 ‘이 자료 가져오라, 저 자료 달라’며 일해 온 국내정보 파트 출신 직원들이었습니다. 유능한 정보요원은 흔적을 남기지 않아요.”
―과거에는 실패한 적이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국제 정보공동체(intelligence community)의 일원으로서 양해를 구한 후 조용히 마무리합니다. 해당 정보요원을 추방하는 선에서 정리하지요. 정보요원들 사이에 그런 일이 있으면 ‘PNG(persona non grata·기피인물) 먹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리비아 사건 때는 그게 안됐어요. 왜 그럴까요. 지금의 국정원이 국제적으로 네트워크화(化)가 안돼 있다는 증거입니다. 현직 대통령의 형이 해결사로 나선 것도 국제 정보기관 사회에서는 볼썽사나운 일입니다.”
―치명적인 실수는 왜 일어나는 겁니까.
“자만심과 공명심 때문이지요. 그게 결합될 때 치명적인 실수를 합니다. ‘이걸로 한 건 해야겠다’는 공명심과 ‘내게 실패란 없다’는 자만심 말입니다. 공작을 실행할 때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둬야 해요. 사전 공작계획서에 이런 것들을 기록해 실수를 방지해야 합니다. 실패했을 때의 행동계획도 준비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의 국정원은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만약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에 들어갔다가 이번처럼 발각됐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단순절도 사건으로 처리되도록 철저히 준비했을 겁니다.”
정보기관은 정보수집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외국 대통령 특사단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우리 대표단이 외국을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다.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정보기관끼리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북측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할 때는 과연 어떨까. 전직 국정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외국 대표단이 방한(訪韓)할 때보다 훨씬 민감해진다고 한다. 숙소잠입은 물론 대화내용까지 감청한다는 것이다. 오래전 공작에 참여했던 한 인사의 경험을 들어보자.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들의 숨소리까지 들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묵는 호텔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우리 요원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남녀 요원 네 명이 한 팀이 돼 움직였어요. 북측 인사들이 회담장으로 나가면 그들 방에 들어가 가방부터 뒤집니다. 필요한 자료는 다 복사하고요. 혹시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마취제까지 소지했지요. 그들도 우리가 방을 뒤지는 것 알아요. 신경전을 벌일 때는 가방을 일부러 흩트려 놓기도 합니다. 마치 도둑이 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우리 대표단이 북에 갈 때 그들도 똑같이 합니다.”
소 정액 입수작전 벌인 국정원
해외공작 무대는 국내와는 토양 자체가 다르다고 한다. 해외파견 정보관은 주재국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감시를 받는다는 것이다. 신분을 숨기고 스파이 활동을 하는 흑색요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해외 주재국 정보관 출신의 말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 아파트 창문을 열어 보면 길가에 양복 입은 친구 서넛이 서 있곤 했어요. 그 나라 정보기관 사람들입니다. 미행하는 것을 고의(故意)로 보여줄 때도 있고, 몰래 미행하는 경우도 있어요.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지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할 때는 더욱 조심해요. 요인(要人)을 만날 때는 관용차를 중간에 놔두고 택시를 타기도 하고, 때론 걸어서 약속장소에 가되 한 바퀴 우회해서 갑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모(某)주재국에 근무할 때였는데 그 나라 카지노에 가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온 사람과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거죠. 그런데 그 다음날 주재국 정보기관 간부가 만나자고 하더니 제게 대뜸 ‘요즘 우리나라 카지노 업장의 치안상태가 별로 안 좋다. 혹시 카지노에 가려면 사전에 우리에게 알려 달라. 경호원을 붙여 주겠다’고 합디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 ‘네가 움직이는 거 우리가 보고 있으니 까불지 마라’는 얘기죠. 해외에서 활동할 때 그 나라 기관원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면 만나기로 한 약속을 중도에 포기해요. 중요 업무를 노출시킬 수는 없잖아요. 그럴 경우를 대비해 다음 접선(接線)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한다는 것을 미리 정해 놓습니다.”
국정원 산업정보 분야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면 분쟁이 일어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과거 국정원이 거둔 성과는 적지 않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휴대폰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게 된 데는 국정원의 역할이 큽니다. 휴대폰 핵심기술을 외국에서 모종(某種)의 과정을 거쳐 가져왔지요. 반도체 정보도 들고 왔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육우(肉牛)의 정액(精液)도 가져와 한우 종자 개량에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입장이 뒤바뀌었습니다. 외국 산업스파이들이 우리 정보를 가져가려고 아우성입니다. 공격에서 방어로 바뀐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산업정보 방어능력이 신통치 않아요.”
국정원의 핵심업무 중 하나인 대북(對北)공작 능력은 과연 어떨까. 대북공작 활동에 직접 가담했던 전직 요원은 “현재 국정원의 대북정보 수집실력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고 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국정원의 대북정보 수집능력이 어느 정도라고 봅니까.
“북한정보에 관한 한 미국 CIA도 감탄할 정도였어요. 최소한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 말입니다.”
―고급정보를 어떻게 수집했습니까.
“여러 방법이 있지요. 우선 정보수집 라인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관리하는 사람이 평양 깊숙이 들어가 최상 정보를 가져왔어요. 김일성(金日成), 김정일(金正日)에 대한 정보까지 빼 오곤 했지요. 정보수집은 기본적으로 상대의 의지(意志)를 읽기 위함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의지를 읽기 위해 각종 수법이 동원됐습니다.”
―미인계도 썼습니까.
“….”
―지금은 대북정보 수집라인이 얼마나 됩니까.
“과거에 10개의 대북정보 라인을 갖고 있었다면 지금은 2~3개에 불과해요. 요 몇 년 사이에 거물급 간첩을 잡았다는 얘기가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해외요원 절반넘게 국내파트 출신
―언제부터 와해된 겁니까.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들어서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년 만에 집권세력이 바뀌자 호남 출신 인사들이 득세했습니다. 이들은 경험 없는 사람을 공작요원으로 파견했어요. 그러다 보니 활동 미숙으로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많았지요. 결정적으로 망가진 것은 노무현(盧武鉉) 정권 때입니다. 노무현의 국정원은 해외인사 독점방지 명목으로 국내파트 직원을 해외로 나가게 했습니다. 국내파트 출신 비율을 30%까지 맞추라는 지침까지 만들었지요. 정보의 기본도 모르는 처사였어요. 해외공관에 파견하는 정보관은 접수국에서 봤을 때 스파이입니다. 스파이를 선발하는 만큼 숙련된 요원을 뽑아야 했습니다. 이 일을 해외공작국장이 하지 않고 총무국장이 했으니 제대로 되겠습니까. 지금은 해외요원의 절반 이상이 국내파트 출신입니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자는 2만여 명에 달한다. 탈북자를 제대로 활용하면 저하된 대북정보 수준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고 한다. 대북정보 수집에 관여하고 있는 한 관계자의 말이다.
“탈북자들이 국내에 들어오면 먼저 하나원에서 일차 조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조사가 형식적으로 이뤄져요. 위장 탈북자도 걸러 내지 못해요. 몇몇 탈북자는 정보수집 협력자로 활용되는 데 한계가 있어요.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업무에 대한 국정원 담당자들의 긍지와 사명감이 낮다는 사실입니다. 담당자가 자주 바뀌다 보니 근무하는 동안 한두 건의 실적만 올리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국정원 직원이 탈북자를 독촉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지나친 독촉으로 북한 내부 정보제공자가 노출되거나 체포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어요.”
탈북자에 대한 국정원 직원의 인식도 잘못돼 있다고 한다. 탈북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탈북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해 정보가치가 없으면 그냥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관계자의 말이다.
“국정원으로부터 버림받은 탈북자는 미국이나 일본 쪽 정보기관에 유입돼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정부가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해요.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사태는 대북정보 사업의 근본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해요. 대북정보 사업의 대대적인 개혁 없이는 북한 급변사태가 발생할 때 오히려 대한민국이 위기에 빠질 수 있어요. 국정원의 정보수집 활동방식, 절차, 전술·전략 등에서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해요.”
“전직 직원 만나지 마라”
몇몇 인사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국정원의 국내정보 수집, 해외공작은 물론 대북정보 수집 체계에서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압축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 고위 간부를 지낸 한 관계자의 말이다.
“정권 교체 때마다 숙련된 정보요원을 정치적인 이유로 쳐냈기 때문입니다. 자기네 정권 세력들을 핵심조직에 박으려다 보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요. 전(前) 정권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이유로, 특정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쫓겨납니다. 선배의 축적된 경험이 후배에게 전수될 기회가 사라지죠. 국정원의 능력이 저하된 결정적 원인입니다.”
이 인사는 김대중 정권 때 이뤄진 국정원 직원 대량해고 사건은 치명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때부터 국정원의 뿌리가 노면(路面)에 드러나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거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1974년 CIA가 반전(反戰)인사를 포함한 미국시민 수천 명을 사찰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議會)는 CIA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CIA 국장으로 임명된 해군 제독 출신 터너 국장은 2년 동안 공작요원 820여 명을 해고했다. 이른바 ‘할로윈 대학살’을 단행한 것이다. 이 일로 CIA의 해외공작 능력이 급격히 저하됐다. 1979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레이건 후보는 강력한 안보와 CIA 재건(再建)을 내세웠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 CIA 회복조치를 취했다. 해고됐던 직원 중 700여 명이 복직돼 활동을 재개했다. 미국은 CIA의 활약으로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했고 소련은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국정원에는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과거와 다른 점은 직원을 일거에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합법적으로 사람을 내몬다는 것이다.
2009년 2월 취임한 원세훈 원장은 지금까지 세 번의 인사를 단행했다. 그는 취임 직후 국정원의 실·국장 및 시·도지부장 등 고위직 인사를 대부분 물갈이했다. 두 번째 인사는 그해 9월 단행했고, 세 번째 인사는 2010년 9월 실시했다. 육사 출신의 김남수 국가위기상황팀장을 3차장으로 승진·임명했고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목영만(睦榮晩) 행정안전부 차관보를 기조실장으로 임명했다. 원세훈 친정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국정원의 인사난맥
원세훈 원장은 전임(前任) 김성호(金成浩) 원장이 하지 않은 국정원 조직·기능 개편도 단행했다. 대북정보 수집을 3차장 산하에서 1차장 산하로 이관했고, 과학정보 수집과 외사방첩 분야를 3차장 산하로 뒀다.
조직·기능 개편의 잡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일련의 국정원 사건은 무리한 조직개편과 잦은 인사에 따른 후유증이라는 지적이 있다. 기자가 만난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했다. 자신의 이름이 거론될 경우 자신을 아는 현직 직원들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은 “원세훈 원장이 부서장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전직 직원들을 만나지 말라’고 두 차례에 걸쳐 지시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업무 보안유지를 위함이었으나 일부 직원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정원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의 말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정원 내 특정지역 출신이 당하고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인사난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현직 공관장을 만났는데 제게 ‘직원을 시도 때도 없이 바꾼다. 이 자리에 있는 동안 얼마나 바꾸는지 한 번 세어나 보자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일을 제대로 맡길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냥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상황변화라는 게 뭐를 뜻하겠습니까. 정권이 바뀌거나 원장이 바뀌는 것 아니겠어요.”
―국정원장 한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습니까.
“정보조직은 상명하복이 분명한 조직입니다. 국정원은 원장의 의지에 따라 빨간 물을 들이면 순식간에 빨간 조직이 되고, 파란 물을 들이면 순식간에 파란 조직이 됩니다. 원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조직 전체가 바뀝니다. 장점이면서도 단점이기도 하죠. 원장은 조직에 영향을 주는 것이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과거 원장을 ‘천황폐하’에 비유하기도 했어요.”
―10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으니 국정원이 변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국정원이 무슨 점령지나 됩니까. 그렇게 하려면 따로 공화국을 만들어야지요. 정보조직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밑에서 활동한 사람은 명령을 수행한 죄밖에 없어요. 실무자까지 책임을 물으면 안 됩니다. 그들은 피해자예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북풍(北風) 사건 만들어 대북공작 라인에 있던 하급직원까지 잘라 버린 일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런 게 정권 때마다 반복되니까, 지금은 윗사람들은 겁을 내고 아랫사람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현지어 못하는 직원이 해외요원으로 선발돼
또 다른 전직 인사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현지어(現地語)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국내요원을 어떻게 해외에 보냅니까. 현재 해외조직은 전문성 측면에서 낙제점입니다. 원세훈 원장이 취임한 후 호남 출신 직원들은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어요. 휴대폰 통화기록 조회는 수시로 하고요.
원세훈 원장에 대한 원성이 많은 이유는 또 있어요. 이명박 서울시장 때 서울시를 출입했던 국정원 직원 때문입니다. 그 직원은 현재 감찰실 소속인데 주요 업무가 간부동향 감시입니다. 고위 간부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과거 원세훈 원장은 서울시에 근무할 때 기자를 만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이런 취향은 국정원 운영방식에도 투영되고 있다. 국정원이 잘했든 못했든 언론에 등장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원 원장은 오후 일과가 끝나면 주로 공관(公館)에 머문다고 한다. 저녁약속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일련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원세훈 원장에 대한 신임에 변함이 없다고 한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의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신임이 대단합니다. 원 원장은 구두보고를 주로 하는데 그만큼 신뢰한다는 얘기지요. 대통령에 대한 원 원장의 충성심도 대단합니다. 대통령이 움직일 때면 꼬박꼬박 문안인사를 드리곤 합니다.”
과거 정치사찰로 문제가 됐던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현재 근절된 것일까. 기자가 만난 한 인사는 “정치공작은 안 하지만 정치정보 수집은 계속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적대관계에 있는 정치인은 물론 박근혜 전 대표 측의 움직임도 유심히 살피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한 여당 국회의원의 한 보좌관은 “국정원 직원이 정치현안과 관련해 물어보는 경우가 있는데 질문 수준이 기본도 안돼 오히려 걱정이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여의도정치 기피성향이 국정원으로 전이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는 것이다.
이제 언론도 국정원을 권력기관으로 봐선 안돼
최근 원세훈 원장을 만난 한 인사는 정치·해외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얘기를 전했다.
“원 원장은 국정원장으로서 과거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을 바꾸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사람도 바꾸고 조직도 바꿨다는 것입니다. 간부들 대상으로 안보강연도 자주 열었다고 해요. 이념무장을 위해서랍니다. 인사와 관련해 조직 내 반발도 일부 있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이 많이 안정됐다고 해요. 언론에 공개할 수 없지만 성과도 많았다고 합니다.”
2009년 12월 역사상 처음으로 따낸 UAE 원전(原電) 해외수주와 2011년 1월 해군이 성공리에 수행한 ‘아덴만 여명작전’(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 선원구출 작전) 때 국정원의 역할이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국정원과 관련해 언론에는 안 좋은 일만 보도되지만 그동안 국정원이 성공한 업무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인사문제도 개선됐다”고 했다.
노무현 정권 당시 국정원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도 “당시 국정원도 언론으로부터 좌파성향의 정부에 아부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국정원 내부에서는 ‘노무현 청와대’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무척 노력했다”며 “정보기관의 생리상 모든 것을 일일이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정원 사건 보도와 관련해 언론계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전직 국정원 고위인사의 말이다.
“언론 입장에서는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잠입 사건의 실체가 국정원이라는 사실이 특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특종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 김일성이 한 여인과 통화한 내용이 국내 언론에 공개됐는데, 결국 그 정보수집 라인은 완전히 깨져 버렸어요. 복원이 불가능했습니다. 계산할 수 없는 국익손실을 입었어요.
언론도 이제 국정원을 권력기관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관성대로 국정원장을 ‘빅4’로 보고 있는데 그런 인식은 언론 스스로 국정원이 정권의 시녀이기를 바라는 것과 같아요. 정치권이나 언론이 지금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으면 국정원의 발전은 요원(遼遠)합니다.
물론 국정원이 먼저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해요. 국정원장은 CIA 초대 분석국장을 지낸 셔먼 켄트가 ‘정보 작성자와 정보 사용자는 정책결정을 위해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판단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서는 충분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지적한 대목을 명심해야 합니다. 국정원은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일하는 조직입니다.”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의 反省
김대중 정권의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李鍾贊) 전 원장은 《월간조선(月刊朝鮮)》 2008년 12월호에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우리의 국정원은 미국 CIA처럼 행정부의 일부분으로 돼 있다. 대통령과 직결되다 보니 정치바람을 탈 수밖에 없다. 국정원 개혁이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는 기능위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측근들이 정보기관을 정권의 부속기관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이 권력의 시녀로 추락하면 결국 국익저하를 초래한다. 필자도 국정원장으로 있을 때 살생부로 인해 피해자가 있었음을 지금도 부담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보기관의 휴먼네트워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경륜이나 경험을 통해 축적된다. 이런 이유로 아까운 인재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도태시킨 사례가 허다하다. 정보기관은 전직 직원이나 공작원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모사드는 필요에 따라 퇴직한 요원도 동원한다.”
국정원은 오는 6월 창설 50주년을 맞는다. 국정원은 반공(反共)과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버팀목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안고 출범했다.
세계 최고 정보기관인 이스라엘 모사드는 건국과정에서 핵심역할을 한 하가나(Haganah)라는 독립군 조직이 모태가 됐다. 아랍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정보기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사드 요원의 피에 독립과 국가보위의 신념이 흐르는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 국정원이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K씨가 서방으로 탈출한 이유는 탈출 전년도(1998년)에 있었던 ‘컴퓨터 교체’ 사건 때문이었다. 1998년 어느 날 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북(親北)인사 C씨로부터 “내 컴퓨터가 고장났다”는 말을 듣게 된다. 때마침 컴퓨터를 바꾸려 했던 K씨는 C씨에게 “새 것 사지 말고 내 컴퓨터를 쓰라”며 컴퓨터를 공짜로 줬다. 그는 컴퓨터를 건네기 전 하드디스크에 있던 자료를 모두 삭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K씨는 삭제된 파일이 복원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工作 성공과 실패 사례
 |
| 재독학자 송두율. 1999년 1월 서방으로 탈출한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소속 간부의 컴퓨터 파일에는 그의 정체에 관한 상세한 자료가 들어있었다. |
이런 상황을 몰랐던 K씨는 1998년 연말 갑자기 북으로부터 “한 달 안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갑작스런 귀환명령에 불안해할 무렵 그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국정원 요원이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K씨는 부인과 함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방으로 탈출했다.
한 편의 영화 같지만 국정원의 실제 공작(工作) 사례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2010년 5월, 무대는 대한민국 서울. 국정원 국내파트 직원들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일행을 미행(尾行)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국내 좌파성향의 한 단체가 초청한 프랭크 라뤼(Frank La Rue) 유엔(UN) 특별보고관과 그의 수행원들이었다. 국정원 직원들은 라뤼 특별보고관 일행의 움직임을 몰래 감시하던 중이었다. 국정원 직원들은 차량을 이용해 라뤼 특별보고관 일행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이튿날 라뤼 특별보고관은 국정원에 “미행하는 이유가 뭐냐”며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국정원은 미행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라뤼 특별보고관 측은 자신들을 따라다니던 국정원 직원 탑승차량의 사진을 제시했다. 국정원의 거짓말이 들통난 것이다.
 |
|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은 취임 이후 세 번의 인사를 단행했다. |
그리고 2011년 2월, 서울 한복판에서 마침내 대형 사건이 터졌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이 묵고 있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 국정원 직원이 잠입해 특사단 노트북에 들어 있던 자료를 빼내려다 들킨 것이다. 국정원 직원은 줄행랑쳤다.
얼마 전 중국 상하이총영사관에서 발생한 중국 여성 추문(醜聞)사건에서도 국정원이 거론되고 있다.
최근 들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국정원은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불법 정치정보 수집, 민간인 사찰, 도청사건 등으로 수차례 개혁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동안 논의된 국정원의 개혁방향은 조직과 기능 개편, 외부통제 강화 등이다. 한때 국내기능과 국외기능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견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테러와 국제범죄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내외 정보를 통합·관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정원의 근본적인 능력문제 대두
 |
| 2010년 리비아 주재 국정원 해외 정보파견관 추방 사건으로 한-리비아 관계가 악화되자 사태 수습에 나선 이상득 의원. |
“정보기관은 관대하고 문명화된 사회의 핵심적인 수호자다. 정보기관이 실패한다면 엄청난 대가(代價)가 뒤따른다”는 말이 있다. 국내 최상위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공작 실패는 대한민국 국익(國益)과 직결된다.
국정원은 해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대공, 대정부 전복, 방첩, 대테러, 국제범죄조직)의 수집·작성·배포를 주요 업무로 한다. 이를 위해 국정원은 인간첩보(human intelligence)와 기술첩보(technical intelligence)를 활용한다.
전통적으로 정보기관은 인간첩보에 의존해 왔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기술첩보 수집능력이 강화되고 있다. 국정원도 과거에 비해 기술첩보 수집능력이 상대적으로 향상됐다고 한다. 그러나 기술첩보는 인간첩보의 보완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첩보가 약화된다면 기술첩보가 빛을 발할 수 없다.
국정원의 실력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보수집 능력부터 따져 봐야 한다. 아울러 생산된 정보의 객관성도 검증해야 한다. 정보요원이 수집한 정보(첩보)에는 ‘불확실’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이를 제거해야만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생산되는 것이다.
정보기관의 실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정보의 정치화’도 계산해야 한다. 정보가 정치화하면 왜곡된 정보가 생산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인 이유로 목표물(적·스파이·기타 정보수집 대상 인물)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방첩능력도 살펴봐야 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고정간첩·이중간첩에 대한 감시활동과 활용도를 체크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외공작(工作) 수준과 준(準)군사작전 활약상도 확인해야 한다.
해외공작 파트에서 평생을 보낸 전직 국정원 인사를 만났다. 그는 이론과 실전에 밝은 정보통(情報通)이다. 그는 최근 벌어진 사건에 대해 “안타깝다”고 했다.
“제가 몸 담았던 조직이 나날이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오히려 퇴보해 가는 느낌입니다. 우수한 인재가 국정원에 들어가지만 3년 내에 바보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능력이라는 게 참 희한해요. 바보도 제대로 교육만 받으면 훌륭한 첩보요원이 될 수 있지요. 사람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어떤 역할을 맡기느냐에 따라 생산성이 완전히 달라져요. 자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정보요원에게는 열정도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자(記者)와 비슷해요. 자기 분야에서 열정을 갖지 않으면 좋은 기사를 쓰지 못하지 않습니까. 열정 못지않게 노하우도 중요해요. 기자는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선배로부터 취재원 관리방법과 기사작성법을 도제식(徒弟式)으로 배우잖아요. 정보요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보요원에게는 정형화된 매뉴얼이라는 게 없어요. 일반 행정공무원이라면 매뉴얼대로 일하면 되겠지요.”
지금의 국정원은 행정기관처럼 운영돼
 |
| 남북정상회담의 두 당사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김대중 정권의 출범은 국정원 기능 약화의 시발점이었다. |
“국정원 요원이라고 하면 대부분 공작 전문가로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과거 정권에서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퇴출시켜 지금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지금의 국정원은 행정기관처럼 운영되고 있어요. 행정조직으로 운영되는 정보기관은 죽은 조직입니다. 정보기관은 사람을 함부로 움직이지 않아요. 업무를 맡길 때는 철저히 준비하지요. 작은 실수가 치명적인 국익손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잠입 실패와 리비아 정보파견관 추방사건의 공통점은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경험과 전문성이 부족하고 훈련이 제대로 안된 직원을 공작에 투입하니 일을 제대로 해내겠습니까. 국내에서 전화통 붙잡고 ‘이 자료 가져오라, 저 자료 달라’며 일해 온 국내정보 파트 출신 직원들이었습니다. 유능한 정보요원은 흔적을 남기지 않아요.”
―과거에는 실패한 적이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국제 정보공동체(intelligence community)의 일원으로서 양해를 구한 후 조용히 마무리합니다. 해당 정보요원을 추방하는 선에서 정리하지요. 정보요원들 사이에 그런 일이 있으면 ‘PNG(persona non grata·기피인물) 먹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리비아 사건 때는 그게 안됐어요. 왜 그럴까요. 지금의 국정원이 국제적으로 네트워크화(化)가 안돼 있다는 증거입니다. 현직 대통령의 형이 해결사로 나선 것도 국제 정보기관 사회에서는 볼썽사나운 일입니다.”
―치명적인 실수는 왜 일어나는 겁니까.
“자만심과 공명심 때문이지요. 그게 결합될 때 치명적인 실수를 합니다. ‘이걸로 한 건 해야겠다’는 공명심과 ‘내게 실패란 없다’는 자만심 말입니다. 공작을 실행할 때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둬야 해요. 사전 공작계획서에 이런 것들을 기록해 실수를 방지해야 합니다. 실패했을 때의 행동계획도 준비해야 해요. 그런데 지금의 국정원은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만약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에 들어갔다가 이번처럼 발각됐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단순절도 사건으로 처리되도록 철저히 준비했을 겁니다.”
정보기관은 정보수집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외국 대통령 특사단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우리 대표단이 외국을 방문할 때도 마찬가지다.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정보기관끼리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북측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할 때는 과연 어떨까. 전직 국정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외국 대표단이 방한(訪韓)할 때보다 훨씬 민감해진다고 한다. 숙소잠입은 물론 대화내용까지 감청한다는 것이다. 오래전 공작에 참여했던 한 인사의 경험을 들어보자.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들의 숨소리까지 들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묵는 호텔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우리 요원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남녀 요원 네 명이 한 팀이 돼 움직였어요. 북측 인사들이 회담장으로 나가면 그들 방에 들어가 가방부터 뒤집니다. 필요한 자료는 다 복사하고요. 혹시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마취제까지 소지했지요. 그들도 우리가 방을 뒤지는 것 알아요. 신경전을 벌일 때는 가방을 일부러 흩트려 놓기도 합니다. 마치 도둑이 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우리 대표단이 북에 갈 때 그들도 똑같이 합니다.”
소 정액 입수작전 벌인 국정원
 |
| DJ정권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전 원장(왼쪽)과 신건 전 원장. 이 전 원장은 국정원 직원을 대거 해고했고, 신 전 원장은 국정원 도청을 인정, 도청기계 파기를 지시했다. |
“아침에 출근할 때 아파트 창문을 열어 보면 길가에 양복 입은 친구 서넛이 서 있곤 했어요. 그 나라 정보기관 사람들입니다. 미행하는 것을 고의(故意)로 보여줄 때도 있고, 몰래 미행하는 경우도 있어요.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지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할 때는 더욱 조심해요. 요인(要人)을 만날 때는 관용차를 중간에 놔두고 택시를 타기도 하고, 때론 걸어서 약속장소에 가되 한 바퀴 우회해서 갑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모(某)주재국에 근무할 때였는데 그 나라 카지노에 가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온 사람과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거죠. 그런데 그 다음날 주재국 정보기관 간부가 만나자고 하더니 제게 대뜸 ‘요즘 우리나라 카지노 업장의 치안상태가 별로 안 좋다. 혹시 카지노에 가려면 사전에 우리에게 알려 달라. 경호원을 붙여 주겠다’고 합디다. 그 말이 무슨 뜻이냐. ‘네가 움직이는 거 우리가 보고 있으니 까불지 마라’는 얘기죠. 해외에서 활동할 때 그 나라 기관원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면 만나기로 한 약속을 중도에 포기해요. 중요 업무를 노출시킬 수는 없잖아요. 그럴 경우를 대비해 다음 접선(接線)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한다는 것을 미리 정해 놓습니다.”
국정원 산업정보 분야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면 분쟁이 일어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과거 국정원이 거둔 성과는 적지 않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휴대폰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하게 된 데는 국정원의 역할이 큽니다. 휴대폰 핵심기술을 외국에서 모종(某種)의 과정을 거쳐 가져왔지요. 반도체 정보도 들고 왔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육우(肉牛)의 정액(精液)도 가져와 한우 종자 개량에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입장이 뒤바뀌었습니다. 외국 산업스파이들이 우리 정보를 가져가려고 아우성입니다. 공격에서 방어로 바뀐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산업정보 방어능력이 신통치 않아요.”
국정원의 핵심업무 중 하나인 대북(對北)공작 능력은 과연 어떨까. 대북공작 활동에 직접 가담했던 전직 요원은 “현재 국정원의 대북정보 수집실력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고 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국정원의 대북정보 수집능력이 어느 정도라고 봅니까.
“북한정보에 관한 한 미국 CIA도 감탄할 정도였어요. 최소한 김대중 정부 이전까지 말입니다.”
―고급정보를 어떻게 수집했습니까.
“여러 방법이 있지요. 우선 정보수집 라인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관리하는 사람이 평양 깊숙이 들어가 최상 정보를 가져왔어요. 김일성(金日成), 김정일(金正日)에 대한 정보까지 빼 오곤 했지요. 정보수집은 기본적으로 상대의 의지(意志)를 읽기 위함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의지를 읽기 위해 각종 수법이 동원됐습니다.”
―미인계도 썼습니까.
“….”
―지금은 대북정보 수집라인이 얼마나 됩니까.
“과거에 10개의 대북정보 라인을 갖고 있었다면 지금은 2~3개에 불과해요. 요 몇 년 사이에 거물급 간첩을 잡았다는 얘기가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해외요원 절반넘게 국내파트 출신
―언제부터 와해된 겁니까.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들어서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년 만에 집권세력이 바뀌자 호남 출신 인사들이 득세했습니다. 이들은 경험 없는 사람을 공작요원으로 파견했어요. 그러다 보니 활동 미숙으로 중국과 러시아 등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많았지요. 결정적으로 망가진 것은 노무현(盧武鉉) 정권 때입니다. 노무현의 국정원은 해외인사 독점방지 명목으로 국내파트 직원을 해외로 나가게 했습니다. 국내파트 출신 비율을 30%까지 맞추라는 지침까지 만들었지요. 정보의 기본도 모르는 처사였어요. 해외공관에 파견하는 정보관은 접수국에서 봤을 때 스파이입니다. 스파이를 선발하는 만큼 숙련된 요원을 뽑아야 했습니다. 이 일을 해외공작국장이 하지 않고 총무국장이 했으니 제대로 되겠습니까. 지금은 해외요원의 절반 이상이 국내파트 출신입니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자는 2만여 명에 달한다. 탈북자를 제대로 활용하면 저하된 대북정보 수준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고 한다. 대북정보 수집에 관여하고 있는 한 관계자의 말이다.
“탈북자들이 국내에 들어오면 먼저 하나원에서 일차 조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탈북자가 늘어나면서 조사가 형식적으로 이뤄져요. 위장 탈북자도 걸러 내지 못해요. 몇몇 탈북자는 정보수집 협력자로 활용되는 데 한계가 있어요.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업무에 대한 국정원 담당자들의 긍지와 사명감이 낮다는 사실입니다. 담당자가 자주 바뀌다 보니 근무하는 동안 한두 건의 실적만 올리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국정원 직원이 탈북자를 독촉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지나친 독촉으로 북한 내부 정보제공자가 노출되거나 체포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어요.”
탈북자에 대한 국정원 직원의 인식도 잘못돼 있다고 한다. 탈북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이다. 탈북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해 정보가치가 없으면 그냥 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다른 관계자의 말이다.
“국정원으로부터 버림받은 탈북자는 미국이나 일본 쪽 정보기관에 유입돼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정부가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해요.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사태는 대북정보 사업의 근본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해요. 대북정보 사업의 대대적인 개혁 없이는 북한 급변사태가 발생할 때 오히려 대한민국이 위기에 빠질 수 있어요. 국정원의 정보수집 활동방식, 절차, 전술·전략 등에서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해요.”
“전직 직원 만나지 마라”
 |
| 미국 버지니아주 랭글리 소재 CIA 본부. 1970년대 당시 CIA는 정치적인 이유로 공작요원 수백 명을 해고해 기능 약화를 자초했다. |
“정권 교체 때마다 숙련된 정보요원을 정치적인 이유로 쳐냈기 때문입니다. 자기네 정권 세력들을 핵심조직에 박으려다 보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요. 전(前) 정권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이유로, 특정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쫓겨납니다. 선배의 축적된 경험이 후배에게 전수될 기회가 사라지죠. 국정원의 능력이 저하된 결정적 원인입니다.”
이 인사는 김대중 정권 때 이뤄진 국정원 직원 대량해고 사건은 치명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때부터 국정원의 뿌리가 노면(路面)에 드러나 생명력을 잃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거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1974년 CIA가 반전(反戰)인사를 포함한 미국시민 수천 명을 사찰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議會)는 CIA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CIA 국장으로 임명된 해군 제독 출신 터너 국장은 2년 동안 공작요원 820여 명을 해고했다. 이른바 ‘할로윈 대학살’을 단행한 것이다. 이 일로 CIA의 해외공작 능력이 급격히 저하됐다. 1979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레이건 후보는 강력한 안보와 CIA 재건(再建)을 내세웠고 대통령에 당선된 후 CIA 회복조치를 취했다. 해고됐던 직원 중 700여 명이 복직돼 활동을 재개했다. 미국은 CIA의 활약으로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했고 소련은 해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국정원에는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과거와 다른 점은 직원을 일거에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합법적으로 사람을 내몬다는 것이다.
2009년 2월 취임한 원세훈 원장은 지금까지 세 번의 인사를 단행했다. 그는 취임 직후 국정원의 실·국장 및 시·도지부장 등 고위직 인사를 대부분 물갈이했다. 두 번째 인사는 그해 9월 단행했고, 세 번째 인사는 2010년 9월 실시했다. 육사 출신의 김남수 국가위기상황팀장을 3차장으로 승진·임명했고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목영만(睦榮晩) 행정안전부 차관보를 기조실장으로 임명했다. 원세훈 친정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국정원의 인사난맥
 |
|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당시 임동원 국정원장은 국정원 계좌를 통해 북측에 거액을 송금했다. |
조직·기능 개편의 잡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일련의 국정원 사건은 무리한 조직개편과 잦은 인사에 따른 후유증이라는 지적이 있다. 기자가 만난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했다. 자신의 이름이 거론될 경우 자신을 아는 현직 직원들이 불이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들은 “원세훈 원장이 부서장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전직 직원들을 만나지 말라’고 두 차례에 걸쳐 지시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업무 보안유지를 위함이었으나 일부 직원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정원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의 말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정원 내 특정지역 출신이 당하고 있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인사난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현직 공관장을 만났는데 제게 ‘직원을 시도 때도 없이 바꾼다. 이 자리에 있는 동안 얼마나 바꾸는지 한 번 세어나 보자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일을 제대로 맡길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냥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상황변화라는 게 뭐를 뜻하겠습니까. 정권이 바뀌거나 원장이 바뀌는 것 아니겠어요.”
―국정원장 한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습니까.
“정보조직은 상명하복이 분명한 조직입니다. 국정원은 원장의 의지에 따라 빨간 물을 들이면 순식간에 빨간 조직이 되고, 파란 물을 들이면 순식간에 파란 조직이 됩니다. 원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조직 전체가 바뀝니다. 장점이면서도 단점이기도 하죠. 원장은 조직에 영향을 주는 것이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과거 원장을 ‘천황폐하’에 비유하기도 했어요.”
―10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으니 국정원이 변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국정원이 무슨 점령지나 됩니까. 그렇게 하려면 따로 공화국을 만들어야지요. 정보조직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 밑에서 활동한 사람은 명령을 수행한 죄밖에 없어요. 실무자까지 책임을 물으면 안 됩니다. 그들은 피해자예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북풍(北風) 사건 만들어 대북공작 라인에 있던 하급직원까지 잘라 버린 일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런 게 정권 때마다 반복되니까, 지금은 윗사람들은 겁을 내고 아랫사람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현지어 못하는 직원이 해외요원으로 선발돼
또 다른 전직 인사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현지어(現地語)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국내요원을 어떻게 해외에 보냅니까. 현재 해외조직은 전문성 측면에서 낙제점입니다. 원세훈 원장이 취임한 후 호남 출신 직원들은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어요. 휴대폰 통화기록 조회는 수시로 하고요.
원세훈 원장에 대한 원성이 많은 이유는 또 있어요. 이명박 서울시장 때 서울시를 출입했던 국정원 직원 때문입니다. 그 직원은 현재 감찰실 소속인데 주요 업무가 간부동향 감시입니다. 고위 간부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과거 원세훈 원장은 서울시에 근무할 때 기자를 만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이런 취향은 국정원 운영방식에도 투영되고 있다. 국정원이 잘했든 못했든 언론에 등장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원 원장은 오후 일과가 끝나면 주로 공관(公館)에 머문다고 한다. 저녁약속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일련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원세훈 원장에 대한 신임에 변함이 없다고 한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한 인사의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신임이 대단합니다. 원 원장은 구두보고를 주로 하는데 그만큼 신뢰한다는 얘기지요. 대통령에 대한 원 원장의 충성심도 대단합니다. 대통령이 움직일 때면 꼬박꼬박 문안인사를 드리곤 합니다.”
과거 정치사찰로 문제가 됐던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현재 근절된 것일까. 기자가 만난 한 인사는 “정치공작은 안 하지만 정치정보 수집은 계속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적대관계에 있는 정치인은 물론 박근혜 전 대표 측의 움직임도 유심히 살피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한 여당 국회의원의 한 보좌관은 “국정원 직원이 정치현안과 관련해 물어보는 경우가 있는데 질문 수준이 기본도 안돼 오히려 걱정이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여의도정치 기피성향이 국정원으로 전이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는 것이다.
이제 언론도 국정원을 권력기관으로 봐선 안돼
최근 원세훈 원장을 만난 한 인사는 정치·해외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얘기를 전했다.
“원 원장은 국정원장으로서 과거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을 바꾸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사람도 바꾸고 조직도 바꿨다는 것입니다. 간부들 대상으로 안보강연도 자주 열었다고 해요. 이념무장을 위해서랍니다. 인사와 관련해 조직 내 반발도 일부 있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이 많이 안정됐다고 해요. 언론에 공개할 수 없지만 성과도 많았다고 합니다.”
2009년 12월 역사상 처음으로 따낸 UAE 원전(原電) 해외수주와 2011년 1월 해군이 성공리에 수행한 ‘아덴만 여명작전’(해적에게 피랍된 삼호주얼리호 선원구출 작전) 때 국정원의 역할이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국정원과 관련해 언론에는 안 좋은 일만 보도되지만 그동안 국정원이 성공한 업무는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인사문제도 개선됐다”고 했다.
노무현 정권 당시 국정원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도 “당시 국정원도 언론으로부터 좌파성향의 정부에 아부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국정원 내부에서는 ‘노무현 청와대’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무척 노력했다”며 “정보기관의 생리상 모든 것을 일일이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정원 사건 보도와 관련해 언론계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전직 국정원 고위인사의 말이다.
“언론 입장에서는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잠입 사건의 실체가 국정원이라는 사실이 특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특종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 김일성이 한 여인과 통화한 내용이 국내 언론에 공개됐는데, 결국 그 정보수집 라인은 완전히 깨져 버렸어요. 복원이 불가능했습니다. 계산할 수 없는 국익손실을 입었어요.
언론도 이제 국정원을 권력기관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관성대로 국정원장을 ‘빅4’로 보고 있는데 그런 인식은 언론 스스로 국정원이 정권의 시녀이기를 바라는 것과 같아요. 정치권이나 언론이 지금과 같은 의식을 갖고 있으면 국정원의 발전은 요원(遼遠)합니다.
물론 국정원이 먼저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해요. 국정원장은 CIA 초대 분석국장을 지낸 셔먼 켄트가 ‘정보 작성자와 정보 사용자는 정책결정을 위해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판단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서는 충분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지적한 대목을 명심해야 합니다. 국정원은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일하는 조직입니다.”
 |
| 해적에게 납치됐던 삼호주얼리호 선원 구출작전 상황도. 이른바 ‘아덴만 여명작전’ 때 국정원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
이종찬 초대 국정원장의 反省
김대중 정권의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李鍾贊) 전 원장은 《월간조선(月刊朝鮮)》 2008년 12월호에 이런 요지의 글을 썼다.
“우리의 국정원은 미국 CIA처럼 행정부의 일부분으로 돼 있다. 대통령과 직결되다 보니 정치바람을 탈 수밖에 없다. 국정원 개혁이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는 기능위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측근들이 정보기관을 정권의 부속기관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이 권력의 시녀로 추락하면 결국 국익저하를 초래한다. 필자도 국정원장으로 있을 때 살생부로 인해 피해자가 있었음을 지금도 부담으로 생각하고 있다. 정보기관의 휴먼네트워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경륜이나 경험을 통해 축적된다. 이런 이유로 아까운 인재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도태시킨 사례가 허다하다. 정보기관은 전직 직원이나 공작원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모사드는 필요에 따라 퇴직한 요원도 동원한다.”
국정원은 오는 6월 창설 50주년을 맞는다. 국정원은 반공(反共)과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버팀목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안고 출범했다.
세계 최고 정보기관인 이스라엘 모사드는 건국과정에서 핵심역할을 한 하가나(Haganah)라는 독립군 조직이 모태가 됐다. 아랍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정보기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사드 요원의 피에 독립과 국가보위의 신념이 흐르는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 국정원이 되새겨야 할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