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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스위스 기자의 슈타지(STASI) 자료 발굴] 5명 사망, 29명 부상한 1986년 9월 14일 김포공항 테러의 진실

“북한 청부 받은 ‘아부 니달’ 조직이 저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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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테러리스트 아부 니달에게 500만 달러 제공하고 청부테러 부탁.
행동대원은 독일 적군파 소속 프레데리케 크라베(女)와 팔레스타인 테러 전문가 아부 이브라힘(男)”


⊙ “서독 적군파 출신 여성 테러리스트 크라베가 폭탄 소지하고 영국인으로 위장 입국,
    공항 쓰레기통에 넣고 홍콩으로 출국”
⊙ “청부테러 사실 東獨 정보기관 슈타지가 아부 니달을 추궁하여 자백 받아”
⊙ “북한으로부터 받은 500만 달러는 오스트리아 은행에 묶여. 범인 크라베와 남편 아부 이브라힘은
    지금 시리아에서 살고 있다”
⊙ “金日成은 아부 니달을 中東 내 대리인으로 생각.
    아부 니달은 북한 청탁 받고 레바논에서도 4명 납치”
⊙ 이 테러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이듬해 KAL기 폭파를 자행

무라타 노부히코(村田信彦) 스위스 베른신문 기자
⊙ 1962년 도쿄 출생.
⊙ 메이지대학 법학부, 베를린 자유대학, 同 대학원 졸업.
⊙ 現 스위스 베른신문 기자.
1986년 9월 14일 김포공항 폭탄테러 사건 현장.
  필자(무라타 노부히코·村田信彦)는 1962년 도쿄(東京)에서 태어났다. 메이지(明治)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과 대학원에서 ‘전쟁범죄론’을 공부했다. 지금은 스위스 베른 신문사의 기자로 일한다. 특히 이슬람 테러조직, 그 가운데서도 ‘사막의 毒蛇(독사)’로 불린 아부 니달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그에 대하여 추적해온 지도 10년이 넘는다.
 
  서울아시안게임 개막 1주일 전에 일어났던, 1986년 9월 14일 김포공항 폭파사건(5명 사망, 29명 부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다만 9월에 일어난 사건이라 직감적으로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테러 사건과 어떤 관련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한 정부는 이 사건의 범인은 밝혀내지 못했으나 그해 9월 하순에 열리게 되어 있었던 서울아시안게임을 방해하고 종국적으로는 88서울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해 북한 공작원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01년 9·11 테러도 그렇지만 이슬람 과격파에 있어서 9월은 ‘복수와 행동의 달’, 즉 ‘테러의 9월’이다. 1970년 9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自國(자국) 내에 거점을 두고 있던 아라파트의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소탕했다.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戰士(전사)들이 도륙되고 요르단에서 쫓겨났다. 이슬람(主 멤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테러단체들은 복수를 다짐, ‘검은 9월단’ 등을 조직하여 특히 9월에 테러를 집중적으로 저질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72년 9월 5일 뮌헨 올림픽 기간 중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들을 학살한 사건이다.
 
  북한 정권으로부터 500만 달러를 받고 김포 테러를 자행한 아부 니달 조직((Abu Nidal Organization: ANO)은 1986년 9월에 김포 테러 이외에도 두 건을 더 저질렀다. 9월 5일 ANO는 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미국의 팬암 여객기를 납치, 승객 20명을 살해했다. 이튿날엔 이스탄불에 있는 유대인 교회당을 습격, 21명을 살해했다.
 
 
  슈타지가 내부 조사
 
  나는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베를린에 있는 ‘舊(구)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STASI) 자료관리 연방정부 특명센터’를 자주 이용했다. 10층 건물에 200여 명의 직원들이 冷戰(냉전) 시절의 자료를 관리하면서 公益(공익) 목적하에서 부분적으로 자료를 공개하고 있었다.
 
  냉전시대 東獨(동독)은 이스라엘 및 미국에 대항하는 이슬람 테러조직을 적극 지원했다. 이슬람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학살한 독일인들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아부 니달 조직 등 몇 개의 테러단은 베를린에 支部(지부) 사무실을 내고 이 사무실을 활동거점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동독 보안·정보기관 슈타지의 문서들은 이슬람의 테러를 연구하는 寶庫(보고)였다. 이 자료들을 뒤지다가 나는 1986년 9월 김포공항 테러 직후, 프란츠 대령이 지휘하는 슈타지의 한 부서(22국)가 김포공항 폭파사건에 대해 조사한 보고서를 읽게 됐다. 당시 동독은 이슬람 테러단을 지원했으나 自國(자국)이 테러기지로 이용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슈타지는 아부 니달 조직 안에 협조자를 두고 있었다. 그를 통해 김포공항 테러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도 있었다. 22국은 이 첩보수집 공작을 ‘잘라 공작’이라고 불렀다.
 
  종합적으로 정보를 수집한 22국의 한 간부가 아부 니달을 신문한 기록도 있었다. 아부 니달은 북한의 請負(청부)를 받고 김포공항 테러를 자행했다고 자백했다. 아부 니달은 그때 주로 폴란드의 바르샤바 별장에서 살면서 베를린 사무소를 통해서는 무기 밀무역, 청부테러, 청부암살 등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따라서 슈타지의 비호가 필요했기 때문에 순순히 자백했던 것 같다. 아부 니달을 신문했던 당시의 장교를 만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金日成의 中東 대리인
 
김일성과 밀접한 관계 아래 각종 테러를 저지른 아부 니달.
  2002년 이라크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아부 니달은 빈 라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슬람권에서 가장 잔인한 테러의 大家(대가)였다. 그는 한때 2000명의 테러리스트를 지휘하고 리비아·시리아·이란·이라크 등 이슬람 국가뿐 아니라 북한·동독·루마니아·폴란드 등 공산국가의 지원도 받았다. 그의 조직은 1970년 이후 100여 건의 테러를 통해 300명을 죽이고 600명을 다치게 했다. 유대인·미국인·이스라엘인을 표적으로 삼은 테러가 많았지만 피해자의 70%는 아랍인들이었다.
 
  아부 니달은 본명이 하산 사브리 알 바나인데, 1937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옆에 있는 야화에서 태어났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자 가족이 추방되어 요르단으로 이주했다. 1967년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끌던 파타(Fatah: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에 가입, 2년 뒤엔 駐(주)수단 파타 간부로 발탁됐다. 1970년부터는 이라크 주재 파타의 대표가 됐다.
 
  1970년 9월 아라파트가 이끌던 팔레스타인 세력이 요르단에서 추방당한 뒤 파타는 요르단 총리를 암살하는 등 보복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아라파트는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1972년 3월 28일부터 4월 8일 사이 아부 니달, 아부 다우드 등을 극동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로부터 냉대를 받고 평양에 도착, 金日成(김일성)을 만났다.
 
  첫 만남에서 김일성은 아부 니달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동석했던 아부 다우드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외설적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니달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빨치산 투쟁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 점에서 항일 빨치산 출신인 김일성과 통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자신이 티토와 같은 제3세계를 대표하는 혁명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라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자신의 국제적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김일성은 그 후 아부 니달을 중동에 심은 자신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니달은 그 뒤 평양에 사무실을 내고, 테러 戰士(전사)들을 북한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받도록 했다.
 
 
  북한의 청부로 레바논 여인들 납치하기도
 
  아부 니달은 평양에서 김일성을 후견자로 만들고 돌아온 후부터 국제 테러전선에서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는 뮌헨 올림픽 테러 배후 지휘자였고, 평양에 동행했던 아부 다우드는 작전책임자였다.
 
  1973년 9월 5일 아부 니달은 아라파트와 상의도 하지 않고 부하들을 시켜 駐(주)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을 점거, 사우디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던 아라파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파타 지도부의 설득으로 점거 사흘 후 범인들은 투항했다. 점거를 푸는 조건으로 아부 니달은 요르단이 억류하고 있던 아부 다우드의 석방을 요구했다. 쿠웨이트가 요르단 후세인 국왕에게 1200만 달러를 주기로 하고 요르단은 다우드를 풀어주었다.
 
  아라파트는 1974년 7월 아부 니달을 이라크 주재 대표 자리에서 해임하고,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아부 니달은 이에 맞서 ‘파타 혁명평의회’, 일명 ‘아부 니달 기구’(ANO)를 조직, 아라파트를 타도하기 위한 내부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전성기에 ANO는 조직원이 1000명, 準(준)조직원까지 합치면 2000명에 달해 파타에 이은 팔레스타인 제2의 무장투쟁 조직이었다. 아부 니달은 이 조직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테러와 사업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민족해방보다는 돈벌이에 집착하는 이상한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ANO는 20여개 국에서 100건 이상의 테러를 자행했는데, 상당수는 돈벌이 목적의 청부테러였다.
 
  한 예로 아부 니달은 김일성의 청탁을 받아 외국인 납치 사업도 했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일본 회사가 고급 비서를 모집한다’는 허위 광고를 내고 응모한 네 명의 여자를 북한으로 납치했다. 아부 니달은 시아파의 알라위 교도이므로 배신자라는 평을 듣지 않으려고 기독교 신자 3명, 수니파 1명을 골랐다고 한다. 이 납치사건이 언론에 폭로되자 당시 레바논 외무장관 호아드 부토로스의 노력으로 북한 정권은 기독교 신도 3명을 돌려보냈다.
 
  1979년에 아부 니달은 이라크에서 파타 대표로 있을 때 모금했다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400만 달러로 SAS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무기, 마약밀매뿐 아니라 청부살인, 납치유괴, 첩보교란작전을 통해 돈을 버는 종합범죄 상사가 되었다. 매출액이 연간 1억 달러에 달하고 1984년엔 레바논·키프로스·동독·북한에 사무실을 두었다.
 
  아부 니달에겐 1980대 중반이 전성기였다. 이때 그를 후원한 독재자는 김일성 이외에 리비아의 카다피, 시리아의 아사드, 이라크의 후세인, 수단의 파시르 등이었다. 아부 니달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UAE(아랍에미리트) 등 돈 많은 産油國(산유국) 지도부를 상대로 한 협박과 암살을 통해 수천만 달러씩을 뜯어내기도 했다.
 
 
  범인의 위조여권은 루마니아에서 만들어
 
김포공항 폭탄테러 사건을 저질렀다는 독일 적군파 테러리스트 프레데리케 크라베.
  1986년 11월 15일 일본 赤軍派(적군파)는 필리핀 내의 좌익 게릴라 新(신)인민군과 합작해 미쓰이물산 마닐라 지점장을 납치, 넉 달 뒤 2억 엔 상당의 달러를 받고 풀어주었다. 이 납치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한 사람은 적군파 최고간부 중 한 사람인 마루오카(丸岡修)였다. 그는 1972년 5월 텔아비브 로드공항 亂射(난사) 사건, 1977년 9월 다카에서 있었던 JAL기 납치사건 등에 관련되어 국제수배를 받고 있었다.
 
  이런 마루오카가 일본에 몰래 들어와 있던 중 1987년 11월에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은 마루오카가 그해 8월 24일~9월 3일 베이징(北京)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 88서울올림픽 방해테러 계획에 대해 논의했음을 밝혀냈다. 일본 경찰은 1988년 5월 6일 요도호 납치사건에 가담했던 시바다가 일본에 몰래 들어와 숨어 있는 것도 발견해 체포했다. 시바다는 북한 상사원으로 위장한 여권을 갖고 있었다. 이자의 妻(처)는 유럽에서 일본인을 납치한 사람이고, 북한 공작부서의 지시를 받아 테러활동에 종사해 온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 일본 적군파, 서독 적군파, 아부 니달 조직, 그리고 북한 공작부서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테러와 납치를 저질렀다. 국가조직인 북한의 공작부서가 동원 가능한 자원이 많아 이들 테러조직을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친밀한 관계 속에서 1986년 9월 14일의 김포공항 테러가 일어난 것이다. 북한 공작부서는 김포공항 폭파를 처음엔 일본 적군파에 부탁했으나 일의 진척이 없자 아부 니달에게 청부한 것으로 보인다.
 
  동독 보안 정보기관 슈타지의 조사에 따르면 아부 니달 평양사무소가 북한 당국으로부터 김포공항 청부를 받은 것은 1985년 말이었다. 아부 니달은 조직 내 서열이 2위이고 테러 담당이던 슐레이만 삼린(1946년생)에게 실행을 지시했다. 팔레스타인 출신인 삼린은 북한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적도 있다.
 
  그는 테러용 폭탄을 잘 만드는 아부 이브라힘에게 폭탄제조를 지시했고, 이브라힘은 同居(동거) 중이던 서독 적군파 요원 프레데리케 크라베에게 폭탄운반 임무를 맡겼다. 크라베는 영국인으로 위장해 김포공항에 입국, 폭탄을 5, 6번 게이트 사이 쓰레기통에 놓고 홍콩으로 출국했다. 김포공항 폭파사건이 성공한 후 북한 정권은 스위스에서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한 은행의 아부 니달 비밀계좌로 500만 달러를 송금했다.
 
  그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준 것은 루마니아의 보안기관 세크리타트였다. 당시 북한·동독·루마니아는 테러공작에서 共助(공조)하고 있었는데, 루마니아 측은 여권위조 전담이었다. 루마니아 보안기관에서 여권위조를 전담한 부서는 세르기오 니카 대령이 지휘한 부서였다. 루마니아에는 이 당시의 보안기관 문서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서독 적군파의 테러 행각
 
1977년 9월 적군파에 납치돼 살해된 한스 말틴 슐라이야 서독경영단체연맹 회장. 크라베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국제수배중이다.
  김포공항 테러범 아부 이브라힘(1942년 출생·본명 모하마 후세인 아르 우말리)은 ‘5월15일집단’(5월 15일은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난 날)이란 별도의 테러단을 이끌다가 아부 니달 조직에 들어온 인물로서, 테러용 폭탄 제조 전문가였다.
 
  1982년 8월 11일 도쿄發(발) 호놀룰루行(행) 팬암 830편 보잉747기가 274명을 태우고, 지상 12km 상공을 날고 있었다. 호놀룰루 공항을 향하여 降下(강하)하기 직전 일본인 학생이 앉은 좌석 쿠션 밑에 숨겨 놓았던 시한폭탄이 터졌다. 16세의 학생이 즉사하고 15명이 다쳤으나, 비행기에 구멍이 생기지 않아 호놀룰루 공항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다.
 
  이 폭탄은 ‘5월15일집단’ 소속 요르단인 모하메드 라시드가 놓고 내린 것이었다. 그는 1988년 그리스에서 체포되어 살인혐의로 8년간 복역하고 석방된 후 미국 법정에서 다시 7년刑(형)을 선고 받았다.
 
  아부 이브라힘은 1986년 무렵 크라베(1950년생)와 내연의 관계에 있었다. 크라베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공부하다 중퇴한 뒤 서독 적군파에 가담했고, 1975년부터는 지하로 잠적해서 이라크와 레바논으로 숨어 다니다 이브라힘을 만났다. 이 무렵 북한은 동베를린에 연락소를 운영하면서 ANO, 서독 적군파, 일본 적군파를 조종하고 있었다. 일본 적군파 니시카와 준은 이 북한 아지트에서 위조여권과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
 
  크라베가 소속된 서독 적군파는 1977년 가을에 여기저기서 테러를 일으켜 일대 위기상황을 조성했다. 적군파는 9월엔 서독경영단체연맹 회장 한스 말틴 슐라이야를 납치, 살해했다. 크라베는 슐라이야 납치에 관련되었다가 이라크로 달아났다. 10월엔 4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착륙시켜 놓고 옥중에 있던 11명의 적군파 간부 석방을 요구했다. 서독 정부는 특수부대를 보내 테러리스트를 사살, 인질들을 구출했다.
 
 
  아부 니달, 카다피와 손잡고 테러
 
  1982년 6월 3일 아부 니달 조직원 3명이 런던에서 이스라엘 대사 알고프를 저격,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흘 뒤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레바논을 침공, 팔레스타인 세력(PLO)을 쫓아냈다(제1차 레바논 전쟁).
 
  1986년 김포공항 폭파사건이 났을 때 아부 니달은 리비아에 거점을 설치, 카다피의 비호하에 미국과 이스라엘을 겨냥한 테러를 맹렬히 하고 있을 때였다.
 
  1986년 4월 5일 독일 西(서)베를린의 한 디스코텍에서 폭탄이 터져 미군 두 명과 터키인 한 사람이 죽고 230명이 부상했다. 부상자 가운데 50명은 미군이었다. 미국은 이 사건 직후 리비아에서 동베를린 주재 리비아 대사관으로 보낸 祝電(축전)을 盜聽(도청), 이 범행이 카다피의 소행이라고 단정했다. 그 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 중 하나는 아부 니달 조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다. 아부 니달은 카다피의 테러공작을 지원하고 있을 때였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디스코텍 폭파사건 열흘 뒤인 1986년 4월 15일 영국 내의 미군기지에서 발진한 공군기로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폭격, 카다피의 養女(양녀)를 포함해 수십 명을 사망케 했다. 카다피는 아부 니달에게 보복테러를 요청했다. 아부 니달은 폭격 이틀 후 레바논에서 두 명의 영국인과 한 명의 미국인을 납치, 살해했다.
 
  김포공항 폭파는 아부 니달에게는 副業(부업) 정도였다. 김포공항 폭파 9일 전인 1986년 9월 5일 아부 니달 조직원들은 파키스탄의 카라치 공항에서 뉴욕으로 출발하려던 미국의 팬암 여객기를 납치, 389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을 인질로 억류했다. 16시간 뒤 납치범들은 機內(기내)에서 수류탄을 터뜨리고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일부 승객들은 비상 도어를 열고 탈출했으나, 20명이 죽고 100명 이상이 부상했다.
 
  1988년 12월 21일 런던을 출발, 뉴욕으로 가던 미국의 팬암 소속 보잉 747기가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발했다. 이 사고로 승객 259명과 지상의 주민 11명을 합쳐 270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리비아 정보기관원이 꾸민 것으로 밝혀져 리비아는 유엔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고립된 리비아는 그 뒤 정보기관원들을 스코틀랜드 법원에 넘겨 재판을 받게 한 뒤 270명의 유족에게 27억 달러를 주기로 하고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아부 니달이 이 팬암 폭파 사건에도 관련된 것은 물론이다.
 
 
  두 범인은 시리아에서 살고 있다
 
  1989년 東歐(동구) 공산권 국가들이 차례로 넘어가 민주화되자 아부 니달도 큰 타격을 받게 됐다. 그의 테러공작을 지원했던 동독, 폴란드, 루마니아 정보기관이 무력화되는 것과 함께 리비아의 카다피도 아부 니달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1994년 김일성이 죽은 것도 그에겐 타격이었다. 김정일은 아부 니달을 옛날처럼 밀어 주지 않았다. 지금도 평양에는 아부 니달 지부에서 근무하던 30여 명의 ANO 소속원들이 남아 북한 공작부서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근거지를 잃은 아부 니달은 돈줄이 막히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의 후배인 오사마 빈 라덴이 급성장하기 시작, 그의 조직원들 중 상당수가 알 카에다로 옮겼다.
 
  1998년 아부 니달은 수단을 거쳐 옛 근거지 이라크로 돌아왔다. 2000년 1월 아부 니달은 재무담당 비서인 여성 하리마 니메르를 오스트리아 빈으로 보내 오스트리아은행(Bank of Austria)에서 740만 달러를 찾으려고 하는 순간 체포되었다. 김포공항 폭파의 代價(대가)로 아부 니달이 북한으로부터 받은 500만 달러가 포함된 돈이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로 돌입한 아메리칸 항공 11편의 납치를 주도했던 모하메드 아타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지아드 잘라였다. 그는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을 납치, 백악관을 공격하려다가 승객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펜실베이니아州(주)의 들판에 추락, 그를 포함한 승객 전원이 몰사했다.
 
  지아드 잘라를 테러리스트로 만든 사람은 그의 숙부로서, 동독에 있던 ANO의 아셈 오마르 잘라였다. 오마르 잘라는 동시에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ANO내 정보원이었다. 그의 암호명은 ‘가스텐베르크’였다. 김포공항 사건에 대해 슈타지에 내부 정보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2002년 8월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치는 전쟁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고 불안에 떨게 되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테러를 지원하고 있다는 점을 전쟁이 불가피한 이유로 내세우고 있을 때였다.
 
  후세인은 부하들을 보내 아부 니달을 암살했다. 자살로 발표되었으나 그의 屍身(시신)은 여러 발의 銃傷(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당시 아부 니달은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 이런 후세인의 誠意(성의) 표시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부시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고, 후세인은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2003년 4월 바그다드가 함락되기 직전 김포공항 폭파사건의 범인 크라베와 이브라힘 부부는 시리아로 달아나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북한 공작부서는 김포공항 폭파의 성공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여성이 폭탄을 운반하면 검색에서 잘 걸리지 않고, 특히 콤포지션 C4와 같은 플라스틱 폭탄은 엑스 레이로는 잡히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교훈을 살려 金賢姬(김현희)를 1987년 11월 29일의 KAL기 폭파에 투입한 것이 아닐까?⊙
 

  [인터뷰] 姜玟昌 김포공항 테러 당시 치안본부 본부장
 
  “폭약을 근거로 북한 소행일 것으로 추정”
 
   1986년 김포공항 테러사건 당시 치안본부 본부장이었던 姜玟昌(강민창·75)씨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터진 사건이라 수사에 전력을 다했지만,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고 했다. 다음은 강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최종 사건처리는 어떻게 됐는가.
 
  “‘히트 앤드 런’, 즉 치고 나간 것으로 잠정 처리됐다. 모든 수사력을 동원했지만, 당시 환경에선 시한폭탄을 터뜨리고 도주한 범인을 찾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사의 가장 큰 난관은 무엇이었나.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건이라 경찰로선 아무래도 어려운 점이 많았다. 당시엔 안기부(現 국가정보원) 상황도 특별히 나을 것이 없었다. 정권이 바뀐 후에도 조사는 이어졌지만, 결국 오리무중이 됐다. 수사가 어려웠던 것은 폭발물이 시한폭탄이었기 때문이다. 범인이 폭발시한을 언제로 정했느냐가 큰 문제였다. 한두 시간 전으로 해놨으면 비행기로 이미 떠난 뒤였을 텐데, 이미 폭발한 뒤라 시계바늘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가 없어,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사는 얼마나 오랫동안 했나.
 
  “정권 바뀔 때까지 계속한 것으로 안다. 인터폴과 협조하고, 폭발물 조회도 했다. 강하게 수사를 해서 범인을 잡았다면 88서울올림픽 對(대)테러 방지 대책으로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했었다.”
 
  ―당시 수사본부는 이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했는데, 어떤 근거와 단서로 그런 판단을 했는가.
 
  “폭약이다. 콤포지션 C4란 폭약이었는데, 한국군은 물론 민간에서도 구할 수 없는 고성능 폭약이었다. 일본, 북한 등에서만 구할 수 있는 폭약인 데다, 1983년 아웅산 폭발사건과 유사해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했던 것이다.”
 
  ―초동조치는 제대로 이뤄졌나.
 
  “폭발 장소가 대합실 밖 쓰레기통, 즉 공개된 장소였기 때문에 사건발생 직후 즉시 경찰이 출동했다. 86아시안게임을 대비해 기동타격대가 마침 공항에 있었다.”
 
  ―한 일본 저널리스트의 취재에 따르면 북한이 아랍 테러리스트 아부 니달을 고용해 청부테러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북한 외 다른 국가의 가능성에 대해선 수사하지 않았나.
 
  “단서가 부족했다. 정황상 북한이 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북한이 외국인을 고용해 테러를 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북한도 숱한 테러리스트들을 보유하고 있어 對南(대남)공작을 하다가 몇 명 죽어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스스로 죽는 건 일도 아닌 상황에서 굳이 거액을 주고 외국인을 동원할 이유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강씨는 수사담당자로부터 보고를 받고 전반적인 지휘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까지는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수사본부장은 현재 故人(고인)이 된 李永昶(이영창) 前(전) 국회의원(당시 서울시경 국장)이었다.
 
  강씨는 또 “희생당한 국민들과 유가족들을 봐서라도 꼭 범인을 잡았어야 했는데, 사건을 마무리짓지 못해 정말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인터뷰] 李海龜 김포공항 테러 당시 안기부 제1차장
 
   김포공항 테러 당시 안기부 제1차장(국내 담당)이었던 李海龜(이해구) 두원공대 학장은 당시 수사에 어려움이 많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테러예방을 위해 만반의 준비와 대책을 세워둔 상황에서 테러가 발생해 크게 긴장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알아봤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아시안게임이 너무 임박해 수사를 진행하면서도 사건이 너무 부각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수사는 어디에서 전담했나. 경찰인가 안기부인가.
 
  “국내에서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전담했다. 테러대책반에 안기부 직원이 파견 나가서 도움을 주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수사가 미궁에 빠졌다. 완전 미제사건이다. 지금 내 기억에 사건발생의 충격만 남아 있지, 수사진행 상황이 전혀 입력돼 있지 않다. 국내 담당이었던 안기부 1차장에게 보고될 만한 수사진척이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북한이 외부 테러단체나 외국의 전문 테러리스트들에게 청부테러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 혹은 제보는 없었나.
 
  “그 얘기는 오늘 처음 듣는다. ‘북한이 저질렀을 것’이라는 확실한 심증에서 수사를 벌였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김포공항 폭파사건 수사 뒷이야기]
 
  아시안 게임 임박하여 현장을 서둘러 청소
 
  서둘러 현장을 정리하는 바람에 폭탄의 흔적 찾지 못해 쇠공 하나만 수거. 콤포지션 C4 폭약을 쓴 것으로 추정
 
 
  1986년 9월 14일 오후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5, 6번 출입구 사이에 있던 쓰레기통 내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폭음 및 폭풍과 함께 쇳조각, 유리조각 등 파편이 날아가고 잿빛 연기가 피어 올랐다. 출국자를 환송 나온 玉潤哲(옥윤철)씨 가족 19명 중 네 명이 죽고 11명이 다쳤다. 모두 5명이 죽고 29명이 부상했다.
 
  김포공항 폭파현장은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다. 아시안 게임 개막이 6일 앞으로 다가와 선수단이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을 때였다.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다음날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당국은 폭파현장을 서둘러 정리하고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소방차가 달려와 폭파현장에 흩어진 물건들을 깨끗이 치웠다. 이 바람에 폭파 상황과 폭발물의 종류를 밝히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당시 안기부와 경찰은, 폭파 당시 잿빛 연기가 났다는 목격자 증언에 의해 폭약은 콤포지션 C4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했다. 도화선이나 뇌관 파편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자판기에 콩알만한 쇠공이 하나 박힌 것을 찾아냈다. 이것이 이 사건의 유일한 증거물이었다. 폭발물 전문가들은 원격조종이 아니라 시한폭탄이라고 추정했다.
 
  당시 국내에선 민간용으로는 콤포지션 C4를 쓰지 않았다. 수사당국은 1983년 10월 9일 全斗煥(전두환) 당시 대통령 일행을 노렸던 미얀마 아웅산묘소 테러사건 때 북한이 원격조종으로 터뜨린 폭발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북한 소행이라고 발표했으나 物證(물증)은 없었다. 당시 콤포지션 C4는 북한뿐 아니라 이슬람 테러조직이 즐겨 쓰던 폭약이었다.
 
  그때 김포공항 입국자들에 대한 사진자료는 확보된 것이 없다. 당시 입국자 명단이 현재 보존되어 있는지의 여부도 不明(불명)이다. 안기부 등 수사기관에선 외국인 입국자들을 상대로 한 수사를 거의 하지 못했고, 이슬람이나 유럽의 테러조직이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폭약 갖고 공항검색 통과 가능
 
  한 對(대)테러 전문가는 “당시 김포공항 폭파사건의 범인이 콤포지션 C4를 휴대하거나 화물로 반입했다 해도 이를 검색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엑스 레이 투시기로는 콤포지션 C4를 검색하기가 불가능했다. 2001년 아메리칸 에어라인 여객기에 테러리스트가 구두 밑창에 폭약을 숨기고 탄 뒤 이를 폭파시키려다 옆자리 손님들이 덮쳐 불발된 사건도 있었다.
 
  콤포지션은 밀가루 반죽처럼 쉽게 변형시킬 수 있어 갖고 다니기도 쉽다. 충격이나 불에 둔감해 안정성도 높다. 김포공항 사건의 범인이 외국인이라면 콤포지션, 뇌관 등을 갖고 들어와 간단하게 조립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다행히 수년 전 콤포지션의 한 성분을 검출하는 기계가 개발돼 세계 각 공항에 배치됐다.
 
  室外(실외)의 트인 공간에서 터뜨리는 폭약은 비행기를 機內(기내)에서 폭파시키는 데 드는 폭약보다 많아야 한다. 김포공항의 실외에서 터져 다섯 명을 죽게 하고 수십 명을 다치게 만든 폭약은 적어도 김현희·김승일이 대항항공기 폭파 때 쓴 폭탄의 폭약량보다는 많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1988년 미국 CIA가 작성한 1일 정보보고서에서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테러를 할 가능성이 있는 조직으로 아부 니달을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보고서는 “아부 니달이 테러를 하는데 있어 가장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김포공항 사건 1년여 뒤 터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수사 결과를 보면 이슬람 테러조직과 북한공작조직 사이에 테러용 폭탄에 대해 기술을 共有(공유)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다.
 
  대한항공 858편 보잉707기를 폭파시킨 폭탄은 두 개였다. 日製(일제) 파나소닉 라디오 폭탄과 그 곁에 두었던 양주병으로 위장한 액체폭탄이다. 라디오 폭탄이 시한장치에 의해 먼저 터지면서 곁에 둔 액체폭탄까지 터뜨린 것이다. 당시 안기부의 시험결과 라디오 안에는 약350g의 콤포지션 C4 폭약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이런 라디오 폭탄은 서독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당시 이슬람 테러조직에서 애용하던 것이었다.
 
 
  북한과 이슬람 조직, 라디오 폭탄 애용
 
  1988년 팬암기 폭파사건이 발생하기 두 달 전, 서독 경찰은 이슬람 사람들의 한 아지트를 급습, 라디오 카세트 폭탄을 압수했다. 라디오 안에 콤포지션 C4를 넣은 폭탄이었다. 1988년 12월 21일 영국 로커비 상공에서 폭파된 미국 팬암 보잉 747기는 주택가에 떨어져 주민 11명을 포함, 사망자 270명을 냈는데, 범인은 리비아 정보기관원이었다. 아부 니달 조직도 간여했다고 한다.
 
  여기서 사용된 폭탄도 카세트 라디오에 약 300g의 폭약(체코에서 만든 셈텍스)을 넣은 것이었다. 고도 11km 상공에서 순항 중 300g의 폭탄이 화물칸에서 터지자 점보기의 벽에 너비 50cm 가량의 구멍이 생기고, 내외의 압력 차이로 곧 비행기가 두 동강 나버렸다. 조종사는 구조신호를 보내지 못했다. 점보기보다 훨씬 작은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에선 300g의 고성능 라디오 폭탄과 액체폭탄이 동시에 터졌으므로 機體(기체)에 대한 손상이 팬암기보다 훨씬 심했을 것이다. 대한항공기도 구조신호를 보내지 못하고 추락해버렸다. 공중분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겸 조갑제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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