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헤이마켓 집회를 주도했던 스파이스는 사형장에서
『우리의 침묵이 당신들의 목소리보다 커질 것』이라고 외쳐
이 사건으로「미국 사회주의」의 싹 완전히 소멸
『우리의 침묵이 당신들의 목소리보다 커질 것』이라고 외쳐
이 사건으로「미국 사회주의」의 싹 완전히 소멸

- 제임스 그린,「헤이마켓에서의 죽음」
(판테온 북스, 2006, 383쪽, 26.95달러)
<1886년 5월1일 시카고에서 당시 하루에 16시간 노동을 하던 근로자들이 8시간 노동을 주장하면서 파업을 일으키자 경찰이 발포해서 소녀 1명을 포함한 근로자 6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이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 30만 명이 시카고 시내의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누군가 폭탄을 투척해서 아수라장이 됐다. 법원은 그 책임을 물어 파업지도자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나중에는 이 사건의 기획자가 자본가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5월1일을 메이데이로 정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소설에 가깝다. 이 사건은 자본가들에 의해 기획된 노조탄압 사건이 아니었다. 최근 매사추세츠 대학의 제임스 그린 교수가 펴낸 「헤이마켓에서의 죽음」은 120년 전에 있었던 헤이마켓 사건을 생생하게 그려내서, 사건의 진실과 사건이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알게 해준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시카고는 급성장했다. 많은 공장이 세워져서 동부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건너온 노동자들로 북적거렸다. 철도 교통의 중심지인 시카고는 처리하는 物動量(물동량)이 대단했다. 시카고의 기업가들은 대단한 富(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들은 低(저)임금과 긴 노동시간에 시달렸다. 독일 등 유럽에서 온 노동자들은 시카고 북쪽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는데, 그곳의 생활여건은 매우 열악했다. 당시 유럽에선 마르크스가 이끄는 공산주의 운동과 바쿠닌이 이끄는 아나키즘이 사회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경쟁을 하고 있었다.
산업화로 인한 계층 간 갈등이 위험수위에 달한 시카고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여건이 성숙한 것처럼 보였다. 시카고의 기업가들과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화당 정치인들, 그리고 이들을 대변하는 「시카고 트리뷴」紙(지)는 위기를 느꼈다. 노동자들은 勞組(노조)를 결성해서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감축을 내걸고 파업을 했다.
1867년 일리노이州(주)는 미국 최초로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는 州法(주법)을 제정했다. 사업주들은 8시간 노동제에 저항했다. 노동자들은 당시 관행이던 10시간 노동에 따른 총액 임금을 줄이지 않고 근로시간만 8시간으로 단축할 것을 요구하면서 파업과 시위를 빈번히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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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고의 사건현장에 세워진 경찰관 추모비(왼쪽), 루시 파슨스가 건립한 희생자 추모비(오른쪽). |
1886년 5월4일 밤, 헤이마켓
1877년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자 경찰이 강경하게 진압해서 100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 후 노동자와 경찰이 거리에서 충돌하는 일은 일상사가 돼버렸고, 경찰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사업주들은 무장 경호원들을 고용했다.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은 테러를 공공연하게 주장했고, 일부는 실제로 총기와 폭발물을 소지했다.
1886년 5월1일을 기해 시카고의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내걸고 市 전역에서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매코믹 농기구 제작소는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조업을 하고 있었다. 5월3일 매코믹 제작소에서 파업 노동자들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생겼고,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4명이 사망했다.
5월4일 오후 7시30분, 약 1500명의 군중이 시카고 다운타운의 헤이마켓이라고 부르는 농산물 장터에 모여 전날 있었던 발포 사건에 항의하기 위한 집회를 열었다.
집회를 주도한 독일 태생의 사회주의자 오거스트 스파이스는 대중연설가로 잘 알려진 앨버트 파슨스를 소개했다. 파슨스는 한 시간 정도 연설을 했다. 마지막으로 사무엘 필던이 연단에 올라왔을 때에는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필던이 경찰의 폭력을 비난하는 연설을 마친 밤 10시20분경 청중은 5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때 176명으로 구성된 시카고 경찰 支隊(지대)가 헤이마켓으로 다가왔다. 경찰 책임자는 집회 군중에게 해산을 명했다. 그 순간 어디로부터 폭탄이 날아와서 폭발했고, 놀란 경찰관들은 어둠 속에서 총을 발사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폭탄이 터지자 아나키스트들이 경찰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경찰이 응사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사실은 군중과 경찰이 뒤엉켜 있어서 경찰이 쏜 총탄에 경찰관과 민간인이 맞았던 것이다. 한 시간 후 경찰 지원병력이 도착해서 상황을 수습했다. 경찰관 1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6명이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으며,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민간인 몇 명도 총상으로 사망했다.
앨버트 파슨스와 오거스트 스파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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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마켓 사건으로 처형된 아나키스트 앨버트 파슨스(좌)과 오거스트 스파이스(우). |
앨라배마에서 태어난 앨버트 파슨스는 소년 시절에 텍사스로 이사한 후 인쇄기술을 익혔다. 남북전쟁 중에 南軍(남군)으로 참전했으나, 전쟁 후에는 대학을 다닌 후 해방된 흑인을 돕는 일을 했다. 파슨스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멕시코系(계) 혼혈 흑인 루시를 만나 1872년에 결혼했다. 남부에선 흑백인 부부가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2년 후 시카고로 이주했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시카고의 신문사에 인쇄기술자로 취직한 그는 勞組활동에 열성적이었다.
1870년대 시카고는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자들로 붐볐다.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자가 20만 명이 넘어서 전체 시카고 인구의 40%, 전체 노동자의 56%를 차지했다. 독일系 이주자가 특히 많았는데, 17세에 시카고에 도착한 오거스트 스파이스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가구공장 노동자인 스파이스는 역사책을 많이 읽은, 知的(지적) 호기심이 많은 젊은이였다.
시카고 북부 외곽에 모여 살던 유럽 출신 노동자들 사이엔 사회주의가 만연했다. 시카고의 기업가와 정치인들은 경찰력을 강화해서 노동자의 소요에 대처했다. 1877년 여름, 경기침체로 인해 임금을 삭감당한 노동자들의 집회에서 파슨스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파슨스는 해고됐고, 경찰로부터 도시를 떠나라는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파슨스는 노동자 정당 운동에 나서게 됐다.
스파이스는 독일어로 발행하는 「아르바이터 차이퉁」(노동자 신문)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됐다. 그는 신문의 독자층을 넓혀서 사회주의 혁명 이념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시켰다. 경찰과 기업의 경호대가 노동자를 탄압하는 모습을 본 스파이스와 그의 동료들은 노동단체가 무장을 해야 한다고 믿게 됐다.
『노동자들이여, 무기를 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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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私製폭탄을 제조한 아나키스트 루이 링그. |
1886년 5월3일 스파이스는 매코믹 농기구 제작소 파업 시위에서 경찰이 노동자 6명을 죽였다는 과장된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는 『복수하라! 노동자들이여, 무기를 들라! 당신들의 고용주들이 피에 굶주린 경찰을 동원해서 오늘 오후 매코믹에서 여섯 명을 죽였다』고 쓴 전단을 수백 장 인쇄해서 돌렸다.
한편 조지 엔젤, 아돌프 피셔 등 좀더 과격한 아나키스트들은 다음날 저녁에 헤이마켓에서 군중집회를 열기로 하고 전단을 인쇄해서 뿌렸다. 집회의 사회를 보기로 한 스파이스는 파슨스에게 연설을 부탁했다. 그러나 스파이스는 루이 링그와 윌리엄 셀리거라는 젊은 아나키스트들이 그날 셀리거의 집에서 私製(사제) 폭탄을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5월4일 밤에 헤이마켓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셀리거의 집을 수색해서 폭탄을 압수했다.
「누가 폭탄을 투척했고, 누가 총을 먼저 발사했나」 하는 문제가 쟁점이 됐다. 경찰관들은 『폭탄이 터지자 총탄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고 증언했다. 반면 노동자들은 그들의 집회가 평화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현장을 목격한 사업가 3명은 『노동자들의 집회가 평화적이었고, 경찰이 폭발 소리를 듣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총상으로 사망한 경찰관들은 동료들이 쏜 총에 맞은 것으로 밝혀졌다.
파슨스의 아내와 친구들은 파슨스에게 시카고를 떠나라고 했다. 파슨스는 기차 편으로 일리노이의 친구 집을 거쳐 위스콘신의 사회주의 동료의 집에 숨었다. 5월6일 경찰은 영장도 없이 「아르바이터 차이퉁」의 사무실을 수색했고, 스파이스·펠던·스와브 및 링그를 연행했다. 스파이스는 폭탄 투척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5월7일에 체포했다가 실수로 풀어 준 루돌프 슈나우벨트라는 아나키스트를 폭탄 투척혐의자로 수배했다. 슈나우벨트는 경찰에서 풀려난 후 사라져 버렸다. 경찰은 파슨스도 수배했다.
시카고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스파이스 등을 변호할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모금활동을 벌였다. 두 명의 젊은 변호사 외에 北軍(북군) 대령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윌리엄 블랙이란 유명한 변호사가 사건을 맡기로 했다.
6월5일에 대배심은 사건을 법원에 이송했다. 뉴욕 출신의 조지프 개리 판사가 사건을 담당하게 됐다. 블랙 변호사는 재판 연기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블랙은 파슨스의 부인 루시를 만나 남편의 소재에 대해 물었다. 블랙은 『파슨스가 폭판 투척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없는데도 그가 도피하고 있으면 罪(죄)가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법정에 출두해서 無罪(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들을 처형해서 노동운동을 잠재울 수 있다면 우리들을 처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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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프 개리 판사. |
검찰은 『스파이스가 폭탄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았다』는 두 명의 증인을 내세웠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들의 증언은 어설펐다. 그리넬 검사는 『피고인들이 폭탄을 제조한 집단이며, 경찰과 私有(사유)재산을 파괴하려고 모의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검사는 『피고인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기도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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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블랙 변호사. |
개리 판사는 『폭탄이 피고인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투척됐다고 하더라도 피고인들을 有罪로 판정할 수 있다』고 배심원들에게 지시했다. 8월19일, 배심은 합의에 도달했고 배심원 대표가 판결을 읽었다. 스파이스 등 7명은 살인죄로 사형, 오스카 니베는 살인죄로 15년 징역형에 처하기로 한 것이다.
판결은 미국 전역의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시카고 트리뷴」은 판결이 法을 정당하게 구현했다고 평했다.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최종 진술을 했다. 스파이스는 『우리들을 처형해서 노동운동을 잠재울 수 있다면 우리들을 처형하라』고 소리쳤다. 개리 판사는 사형집행일을 12월3일 전으로 정했다.
사형수와 결혼한 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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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스와 결혼한 니나 반 잔트. |
독일의 사회당 당수, 칼 마르크스의 딸 엘리노어 등 유럽의 저명인사들이 시카고의 교도소로 이들을 만나러 왔다. 조지프 퓰리처가 운영하는 「뉴욕 월드」紙의 찰스 러셀 기자는 파슨스를 면회한 후 그에게 매료되어 피고인들을 옹호하는 기사를 많이 썼다. 파슨스를 자주 면회한 아나키스트 동지로는 다이어 럼이 있는데, 그는 나중에 자살해서 많은 의혹을 남겼다.
시카고의 부유한 기업가의 외동딸로 명문 여자대학을 졸업한 니나 반 잔트라는 미모의 젊은 여인은 재판을 방청하면서 피고인들의 無罪를 확신하게 됐다. 니나는 교도소로 스파이스를 면회하러 오다가 그를 사랑하게 됐다. 그녀에 관한 기사가 신문을 장식하자 교도소 측은 면회를 제한했다.
그러자 니나는 「수감자의 가족은 면회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이용하기 위해 스파이스와 결혼할 계획을 세웠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전역이 떠들썩해졌다. 부모와 上流(상류)사회의 반대와 조롱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法的으로 스파이스와 결혼했다.
1887년에 들어서 급진적 노동운동은 세력이 약해졌다. 노동자 정당은 와해됐고 한때 막강하던 노동기사단도 회원을 많이 상실했다. 일리노이 州의회는 혁명을 敎唆(교사)하거나 치안을 교란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해 9월13일 일리노이州 대법원은 이들의 上告를 棄却(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우리들은 正義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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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오글스비 州지사. |
변호인단은 州지사에서 赦免 請願(사면 청원)을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스파이스와 파슨스는 『우리들은 罪가 없기 때문에 減刑(감형)을 구걸할 생각이 없으며, 우리들은 正義(정의)를 요구한다』고 버텼다.
10월20일, 임박한 처형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뉴욕市에서 열렸다. 이 집회에서 새로 탄생한 全美노동연합대표가 된 새뮤얼 곰퍼스는 『이들을 처형하는 것은 미국의 수치』라고 연설했다. 11월2일 연방대법원은 『헌법의 適法(적법)절차 조항은 州법원 절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上告를 기각했다.
이제 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州지사의 사면이었다. 사면을 청하기 위해선 피고인들의 참회문이 필요했다. 하지만 파슨스와 스파이스는 자신들은 참회할 것이 없다고 했다. 오직 필덴과 슈와브만이 참회문을 제출했다.
변호사들과 가족은 스파이스 등 5명에게 참회문을 쓰라고 애원했지만 이들은 『차라리 명예롭게 죽겠다』고 버텼다. 시카고 변호사협회 회장, 전직 상원의원 등 저명인사들이 州지사에게 감형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11월7일에는 10만 명이 서명한 탄원서가 州지사에게 제출됐다. 리처드 오글스비 州지사는 노예 해방에 앞장섰던 존경받는 정치인이어서 감형할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바로 11월7일 큰 사건이 발생했다. 루이 링그의 감방에서 네 개의 작은 폭탄이 발견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들의 減刑을 요청하는 탄원서와 연판장이 州지사 집무실에 몰려 들었다. 州지사는 이제 며칠 안에 결심을 해야만 했다.
11월10일 루이 링그가 감방에서 작은 폭약을 입 속에 터뜨려서 자살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자기가 증오하는 정부가 자신의 생명을 빼앗기 전에 자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자신의 감방 속에 폭탄을 4개나 숨겼다가 발각됐고, 또 어떻게 작은 폭약을 반입해서 자살했는지는 당시로서는 알 수없었다. 나중에 피고인들을 자주 면회했던 다이어 럼이 죽은 후에 그가 링그에게 폭약을 전해 주었다는 편지가 발견되어 수수께끼가 풀렸다.
링그가 폭발물을 터뜨려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州지사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참회문을 제출한 필덴과 슈와브는 종신징역으로 감형하고, 파슨스·스파이스·피셔 그리고 엔젤은 교수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州지사의 결정이 알려졌음에도 파슨스 등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엔젤의 딸, 피셔의 아내, 그리고 이제는 스파이스의 아내가 된 니나가 마지막으로 이들을 면회했다.
루시 파슨스는 失性(실성)해서 남편을 면회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마지막에 볼 수 없게 된 파슨스는 어린 아들과 딸에게 편지를 썼다. 死後(사후) 1년이 지나 공개된 편지에서 파슨스는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여인인 너희 엄마를 사랑하고 존중하라. 너희들만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죽은 아빠를 기억해 달라』고 했다.
처형
11월11일 시카고 교도소에서 이들 4명에 대한 교수형이 공개적으로 집행됐다. 250명의 기자와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스파이스는 『우리의 침묵이 우리를 絞殺(교살)하는 당신들의 목소리보다 강력해질 때가 올 것이다』고 외쳤다. 이들의 시체는 가족에게 인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빈소를 찾았다. 그들의 시신은 시카고 북부에서 시내를 거쳐 기차 편으로 월드하임 묘지로 향했는데, 2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장례 행렬을 지켜보았다.
파슨스 등이 처형된 후 시카고는 표면적으로는 평온해졌다. 우려했던 폭동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시카고 트리뷴」은 헤이마켓 사건으로 사망한 경찰관들을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는 모금을 시작했고, 1889년에 경찰관 추모 기념물이 헤이마켓에 세워졌다.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파슨스 등을 순교자로 추모했고, 1890년부터는 5월1일을 「노동절」로 정했다.
경찰에 대한 적개심으로 폭탄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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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 파슨스 |
많은 사람들은 폭탄을 투척한 범인은 사건 발생 후 사라져 버린 슈나우벨트일 것이라고 믿었다. 슈나우벨트는 사건 후 캐나다로 도망갔고, 영국을 거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해서 살았다.
노동자들은 기업가들이 고용한 비밀공작원이 경찰관을 공격해서 8시간 근로법에 대한 반대여론을 조성하려 했다고 믿었다.
몇 년이 지난 후 한 학자가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한 후 폭탄 투척범은 다이어 럼이 알고 있는 시카고의 아나키스트이거나 뉴욕에서 온 독일계 아나키스트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럼은 1893년에 자살했는데, 폭탄 투척에 대해서 아무런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앨트겔드 지사의 사면으로 풀려난 이들은 정상적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슈와브와 니베는 죽은 후에 월드하임 묘지의 동료 옆에 묻혔다. 루시 파슨스는 계속해서 아나키 운동을 이끌었다.
1901년 매킨리 대통령이 시카고 출신의 아나키스트에 의해 암살되자,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아나키즘을 뿌리 뽑아야 한다』고 力說(역설)했다. 1903년 의회는 아나키스트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루시 파슨스는 아나키즘을 포기하고 유진 뎁스가 이끄는 사회당에 가담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뎁스와 루시 파슨스는 이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동했다. 미국 정부는 뎁스 등 사회당 간부들을 치안법 위반으로 체포해서 기소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법무부는 공산주의 혐의자 1만 명을 구금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1930년대 들어서 새뮤얼 곰퍼스는 『과격한 노동운동이 오히려 기업주들의 입장을 도와주었다』고 주장했다. 1938년 미국 의회는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공정노동법을 통과시켰다.
갈등과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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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건립한 헤이마켓 사건 기념 조형물 |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1886년 헤이마켓의 비극을 초래한 시카고의 갈등은 치유되지 못했다. 1968년 4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피살되자 시카고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고,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해서 4명이 경찰의 총을 맞고 죽었다. 1969년 가을, 헤이마켓에 서 있는 경찰관 동상이 폭파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해 12월에는 블랙 팬더의 지도자 2명이 경찰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
1970년 4월 시카고市는 경찰관 동상을 복원해서 헤이마켓에 다시 세워 놓았다. 그러나 그해 10월 左派(좌파) 폭력단체인 웨더맨이 헤이마켓의 경찰관 동상을 또다시 파괴했다. 市 정부는 동상을 보수해서 시카고 경찰학교의 교정 구석으로 옮겼다.
2004년 10월 헤이마켓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 제막식이 헤이마켓에서 열렸다. 이 조형물은 상처의 치유와 화합을 상징했다. 시카고 사람들이 대립을 잊고 헤이마켓 사건 자체를 기리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헤이마켓에서의 죽음」의 저자인 제임스 그린은 『헤이마켓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면서 『1886년 5월1일의 노동자 집회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미국 역사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다』고 아쉬워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