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盧泰愚, ‘범죄와의 전쟁’ 선포로 청와대와 검찰 밀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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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2002년 한나라당 탈당 다음 날 전화 걸어와 “함께 정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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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정권 시절 다른 검사장들과 함께 청와대에 초치되어 대통령과 악수를 하는 필자(오른쪽). 김 대통령은 대구지역 민심을 묻는 등 필자에게 관심을 보였다.
내 변호사 사무실 책상 위에는 현직 검사 시절의 여러 사진이 크고 작은 틀에 담겨 늘어서 있다. 그 가운데 때때로, 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가벼운 화제가 되면서 그들을 미소 짓게 하는 ‘비슷한 장면’의 사진이 두 장 있다. 둘 다 내가 검사장일 때 다른 검사장들과 함께 청와대에 초청돼 당시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이다. 하나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다른 하나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다.
대통령을 마주보고 검사장들이 죽 횡렬로 늘어섰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대통령이 잡아주며 격려하는, 세상 사람들이 TV 등을 통해 자주 접하는 익숙한 장면이다. 그러니 굳이 특별하다고까지 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나란히 놓인 이들 두 사진에 사람들이 눈길을 두거나 그것을 화제로 삼는 이유는 대통령과 나의 ‘포즈’가 눈에 띄게 뒤바뀌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이 개방됐다 해도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나라님’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야 대통령에 대해 뭐라 말하든, 일단 대통령과 얼굴을 마주 대하면 누구든 자연스레 허리를 굽히게 마련이다. 국가원수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는 점에서 그것은 결코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내가 악수하는 장면을 찍은 예의 사진들은 그런 통념(?)과 다르다. 내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게다가 고개도 숙이지 않고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더더욱 공교롭게도, 뻣뻣하게 서 있는 나와는 달리 마치 두 대통령이 오히려 내게 인사하듯 허리를 숙이고 있어 이 사진은 (내가 보아도) 무례함을 넘어 불경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두 대통령에 걸쳐 이처럼 같은 느낌을 주는 ‘비슷한 포즈’가 촬영됐을까.
대통령과 검사
내가 의도적으로 이런 자세를 취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굳이 드러나게 대통령을 무시하거나 일부러 의전(儀典)에 어긋나게 행동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전혀 없었다. 개인적으로 김영삼·김대중 두 대통령에 대해 별다른 유감이나 은원(恩怨)을 가질 일이 내게는 없었다. 내가 대통령과 인사하는 동안 허리를 굽히지 않다 보니 청와대 사진기사로서도 그런 장면을 촬영하기가 난처했을 것이다.
권력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검사는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면서 원칙과 소신에 따라 검사 임무를 수행하는 검사, 둘째 원칙과 소신에 충실하지만 상황에 따라 권력과의 거리를 조절하며 운신(運身)을 달리하는 검사, 셋째 출세를 위해 늘 권력에 빌붙는 출세 지향적 검사다. 역대 대통령들은 어떤 검사를 총애하고 출세시켰을까? 앞의 두 사진은 오랫동안 내가 대통령이니 권력이니 정치니 하는 것에 대해 일관되게 유지해 온 신조랄까 의지를 나도 모르게 드러낸 것이다.
30여 년 검사로 일해 오는 동안 나는 오직 검사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자,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검사로서 만족했다. 출세니 승진이니 하는 것들은 관심 밖이었다. 정계 진출이나 ‘어찌어찌 한 자리’ 등 ‘검사 이후’에 대해서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성향’이 이렇다 보니 애당초 정치, 권력, 대통령 등과는 친해질 계기도 이유도 없었다. 내가 검사로 임명돼 퇴임할 때까지 7명의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쳐갔고 무수히 많은 정치인과 권력자들이 명멸했다. 검사일 때나 퇴임한 이후나, 나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다가오면 내가 뒤로 물러섰다. 당연한 결과로서, 그들과 나는 늘 서먹서먹했다.
나의 임명권자 朴正熙 대통령
내가 검사로 임명된 날짜는 1972년 4월 12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때다. 그때나 지금이나 검사는 대통령이 임명한다(검찰청법 제34조 1항).
지금은 검찰 수뇌부와 대검 주요간부 인사는 대통령이 직접 결재(決裁)하고 여타 검사는 국무총리가 전결(專決)한다. 박 대통령 시절에는 군(軍)인사 못지않게 검찰인사를 중요시한 것이다. 5·16에서 3선(選)개헌(改憲), 유신(維新)체제로 이어지는 18년 통치를 끌어가야 했던 그에게 있어서 검찰과 검사는 대단히 중요한 합법적 권력장치였을 것이다.
대통령이 한 사람 한 사람 꼼꼼히 따져가며 직접 인사 결재를 했던 만큼, 검사 신규임용 절차도 지금에 비해 대단히 까다로웠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임용을 앞둔 검사 후보들이라 해도 정보기관에서 사돈의 8촌까지 샅샅이 뒤지는 엄중한 신원조회를 거쳐야 했다. 일가 중에 이른바 ‘불순분자’가 한 사람이라도 발견되면 검사로 임용되기 어려웠다.
그런 만큼 박 대통령 시절에 검사의 위상이랄까 힘(=권력)은 법원(판사)에 비해 분명히 우위에 있었다. 그때만 해도 검사가 청구한 영장에 대해 판사가 이래저래 까다롭게 따지거나, 기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장 검찰과 법원 간에 영장을 둘러싸고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표현 또한 그 뉘앙스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은 으레 검사가 판사에게 영장을 요청할 때 ‘청구한다’고 한다. ‘부디 영장을 발급해 달라’는 ‘플리즈(please)’의 느낌이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영장을 요구한다’고 했다. 판사들은 대개 검사의 그러한 ‘요구’에 대해 기각(棄却)은커녕 이의(異議)를 다는 일도 별로 없었다. 범죄자 등의 사법처리에 있어 판사의 의지보다 검사의 의지가 그만큼 먼저, 강력하게 작용한 것이다.
30년간 28번 인사이동
검사로 임용된 뒤 근무지가 어디냐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관심사다. 두말할 것도 없이 대통령이나 청와대 혹은 당대 실력자와 줄이 닿아 있으면 아무래도 중앙(서울)에 배치될 가능성이 크다.
초임(初任) 검사 시절 사방팔방 기댈 곳 없던 나는 그런 쪽으로는 한 오라기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 검찰 임관 및 근무배치에서 사법시험과 사법대학원(지금은 사법연수원) 성적을 따졌다는 점이다. 나는 사법시험 차석(次席) 합격, 대학원 수석(졸업)이던 덕분에 같이 임관한 동기들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서울지검)에 배치됐다.
그러나 그때뿐, 이후 퇴임할 때까지 30여 년 동안 나는 28차례나 인사이동을 겪었다. 거의 매년 옮겨다닌 셈이다. 서울이나 수도권 혹은 요직으로 돌면 좋았겠지만 되돌아보면 불만일 때가 더 많았다. 더욱이 검찰 안팎을 가림 없이 ‘연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탓인지 나는 평검사 이후 간부인사 때는 대체로 동기들보다 1년가량 뒤처지기 일쑤였다. 인사 때가 되면 위에서는 으레 경향(京鄕)교류 원칙이니, 근무 실적을 반영했느니, 지역안배를 고려했느니라고 이유를 댄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실 인사권자가 얼마든지 갖다 붙이면 그만이었다.
박 대통령 이래 정권 수호의 주요장치였던 검찰 인사, 특히 검찰 수뇌부를 비롯한 고위 인사는 불행하게도 대통령과 ‘지리적·심리적 측근’들이 차지했다. 더욱이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습관화된 군(軍) 출신 대통령들은 누가 뭐래도 입속의 혀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을 선호했다.
이러한 현상은 처음에 군검찰관 출신 신직수(申稙秀) 총장·장관에서부터 마지막에는 김치열(金致烈) 장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영남 출신 대통령은 영남 사람, 호남 출신 대통령은 호남 사람을 검찰 윗선에 두어 온 게 사실이다. 어쩌다 예외가 있는 경우는 이른바 ‘지역안배 논리’ 말하자면 정치적 바람막이 인사를 할 때뿐이다.
군 출신 대통령들이 유지해 온 ‘내 고향 출신 검사 먼저’ 관행은 나중에 ‘문민(文民)’을 내세운 김영삼 대통령 때도, ‘국민’을 내세운 김대중 대통령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검찰 인사 역시 정치바람을 타고 내 고향 인사, 패거리 인사, 회전문 인사가 대세였다.
특히 검찰 수뇌부는 어떤 미사여구로 장식해도 정권에 따라, 정권에 의해 구축된 친정(親政) 체제이기 일쑤였다. 이미 태생적으로 우리 검찰은 ‘각하를 모실 수밖에 없는’ 정치검찰 혹은 어용검찰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검사를 정치검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집단체인 검찰은 결국 당대 체제 내에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5共 정권의 검찰 期數 파괴
박정희 대통령이 10·26으로 세상을 떠난 1979년 말 나는 영등포지검 검사였다. 최규하(崔圭夏) 총리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는 검찰에서 보내주는 단기유학 길에 올라 독일의 한 형법연구소에 머물고 있던 터라 국내 사정을 통 알 수 없었다. 한국 상황에 대해 독일 언론들은 ‘군의 파라슈트(낙하산부대) 대장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 리더인 김대중을 사형시키려 한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이윽고 돌아와 보니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5공화국 시대가 되어 있었다.
귀국한 직후인 1981년 7월 나는 대검찰청 연구관으로 발령됐다. 지방도 아니고 더욱이 대검(大檢)에 배치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좀 지나고 보니 전혀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검찰관 직급인 반면 동기생들은 고등검찰관으로 승진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나보다 후배기수인 사법시험 8회에서도 고등검찰관으로 승진한 이들이 있었다.
‘어라? 어떻게 된 거야’ 이리저리 사정을 알아보니 ‘해외 체류 중이어서 고등검찰관 인사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애매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처음으로 인사차별을 맛본 것이다. 힘도 배경도 없는 데다 권력과 정치의 비정함을 몰랐던 내게 그것은 응당한 대가였을지 모른다.
신군부(新軍部) 세력은 검찰개혁이라는 미명하에 검사들의 서열파괴를 자행했다. 사법시험 앞서 있었던 고등고시 13회 출신부터 사법시험 8회 출신까지, 그러니까 모두 12기에 걸친 검사들을 고등검찰관과 검찰관으로 구분하는 새 인사제도를 적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고등검찰관에 승진하지 못한 선배가 승진한 후배의 지휘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그 같은 인사에는 누가 보아도 ‘앞으로 출세하려면 혁명대열(?)에 적극 참여하라’는 메시지가 깔려 있었다.
힘도 없고 줄도 없는 처지라면 처세라도 능숙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마저도 영 숙맥이었다. 특히 전 대통령 시절은 나중에 ‘6공의 황태자’로 불리게 된 박철언(朴哲彦)과 김영일(金榮馹), 두 청와대 비서관이 급속히 권력을 키워가던 때였다. 두 사람 다 사법시험 8회 출신으로 나보다 한 기수 아래 검사 출신이었다. 내가 ‘그야말로 평검사’이던 그때 검찰 안팎에서는 ‘검사들에 대한 인사권은 8기생에게 있다’는 이야기가 정설(定說)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미 그런 분위기에서는 검사로서 성공(?)하려면 자연스럽게 그쪽 줄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둔감(?)했다. 둔감한 것을 넘어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아예 신경도 안 썼다.
검찰 지휘부를 소집한 박철언
이 무렵, 권력 혹은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치사하고 무서운 것인지 실감케 하는 일이 있었다.
내가 대검의 검찰수사연구관으로 있을 때인 1982년 4월경 소위 장영자(張英子)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李圭光)씨의 처제인 장영자와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인 그의 남편 이철희(李哲熙)가 권력을 등에 업고 6000억원대 어음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었다. 중견기업들이 도산하고 시중 은행이 흔들리고 은행장들이 대거 구속되는 등 사건의 파장은 매우 컸다. 무엇보다 국민들 사이에 국가 정치 경제체제 전반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검찰이 몇 달 동안이나 이 사건에 달려들어서야 겨우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비서관이 당시 검찰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던 검사들을 동교동의 국군보안사령부 안가로 소집했다. 점심식사를 겸한 이 자리에는 박 비서관과 박준병(朴俊炳) 보안사령관, 그리고 김석휘(金錫輝) 검찰총장과 이종남(李種南) 대검 중수부장을 비롯해 성민경, 이건개(李健介·전 대전고검장), 김도언(金道彦·전 검찰총장), 신건(辛建·전 국정원장), 이종찬(李鍾燦·전 민정수석비서관), 이명재(李明載·전 검찰총장) 등 중견검사들이 참석했다. 물론 나도 이날 자리에 불려나갔다. 밥이야 먹는 둥 마는 둥, 소집된 검사들은 검찰 기수로는 한참 아래인 박 비서관으로부터 질책성 훈시를 들어야 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국민들이 대통령 주변이며 정치권 주변에 대해 여전히 이런저런 의혹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검찰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검찰이 언제 국가에 제대로 기여한 적이 있었느냐. 이번 기회에 검찰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적극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 직접 국민들 앞에 나서서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또 모든 것이 제대로 깔끔하게 처리되었다고 안심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검사들이 직접 TV에 나가서 국민들과 만나라”고 했다.
일부 검사들 중에 “판사는 판결문으로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해야 한다”면서 TV 출연에 이견을 내는 이도 있었으나 적극 나서서 반대하는 경우는 없었다. 김 총장은 “검찰총장까지 TV에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안 좋으니…”라고 하며 빠졌다.
이윽고 며칠 뒤 이 중수부장 등 5~6명의 검사가 KBS 특별 프로그램 형식으로 TV에 출연해 이-장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TV 생중계 중에 슬그머니 한 분이 출연자로 합류했다. 별다른 소개나 코멘트 없이… 검찰총장이었다. 요행히 TV 출연을 피했는가 싶었던 김 총장이 윗분(?)들에게 밀려 나갔는지 아니면 충성도를 의심받을까 스스로 나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웃지 못할 촌극(寸劇)이었다. 이날 TV 출연 해프닝은 검찰 수난사 또는 정치와 검찰의 야합사로 기록할 만한 것이었다. TV 출연자 명단에서 제외됐던 나로서는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며칠 뒤 이 일과 관련해 검사들 몇 명이 청와대에 들어가 전 대통령의 칭찬을 듣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평검사 시절 겪은 이 일은 내게 참으로 아픈 기억이 되어 깊이 새겨졌다. 얼마 후 나는 저 남쪽, 밀양지청장으로 발령받아 서울을 떴다.
李會昌과의 인연
밀양지청장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대통령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될 뻔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바로 이회창(李會昌)씨다.
무엇보다 이회창씨 때문에 나는 ‘정치 근처에는 가지 않겠다’는 신조를 깨뜨렸다. 이씨가 두 번째 대선(大選)에 도전하던 2002년 말, 당시 공직을 그만둔 상태였던 나는 그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고 유세 지원에 나섰다. 그해 12월 9일부터 선거일 하루 전인 12월 18일까지, 딱 열흘간의 정치활동이었다.
앞서 훨씬 전부터 이씨는 여러 차례 내게 도와달라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거절했다. 너무 그러는 것이 미안해서 “정말 어려울 때가 오면 도와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대선 직전의 막판 여론조사 결과들이 일제히 이씨에게 불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예전 약속대로 그를 돕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나서긴 했지만 당시 나는 선거판세나 여론조사 결과보다 좀 더 짙은 걱정 한 가지가 마음속에 걸려 있었다. 밀양지청장 당시 이회창씨와 얽힌 기억이었다.
법조 선배인 이씨와 나의 인연은 아주 오래됐다. 내가 서울지검 송무부(訟務部) 초임 검사이던 1973년 무렵 이씨는 서울지방법원의 부장판사였다. 마침 내가 있던 사무실 바로 위층이 그의 방이어서 그는 수시로 우리 사무실에 드나들었다. 또 희한하게도 내가 송무부를 떠나 영등포지검으로 옮기자 이내 그도 영등포지원장(현 서울남부지원장)으로 나왔다. 한 지붕 아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때도 서로 편안하게 왕래했다.
제법 시간이 흘러 그를 다시 만난 것이 바로 내가 밀양지청장으로 있을 때였다. 이씨는 대법원 판사가 되어 있었다. 대법원 판사는 6년 임기의 장관급 직책으로 법조 서열이 높다. 그런 그가 밀양지방법원을 초도순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법원장과 지청장인 내가 함께 그를 영접하기로 하고, 밀양에서도 조촐하지만 한 솜씨 한다는 한정식 식당에 자리를 만들어 두었다.
이윽고 이씨가 밀양에 내려와 법원과 지청을 살피고 법원장실로 돌아와 셋이 앉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바깥에 식사를 준비해 두었으니 나가시지요”라며 법원장과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이씨가 특유의 굳은 표정, 부러지는 목소리로 우리를 나무랐다.
“아니 여기 안에서도 얼마든지 식사를 할 수 있는데…. 식사 한 끼 하는 거야 어떻게 먹어도 똑같은 것인데 뭣 하러 엉뚱한 데다 그런 낭비를 합니까. 그게 당신들 돈도 아니고, 우리가 먹고 쓰고 하는 게 다 나랏돈인데 판검사란 사람들이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게요, 없는 게요.”
정확하게 모든 말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법원장과 나는 그 자리에서 꽤 혼났다. 그러고는 식당 예약 취소, 법원 근처 밥집에서 백반을 주문해 법원장실 테이블에 셋이 둘러앉아 서먹서먹 점심을 먹었다. 이씨의 처신에 감동받아야 할 대목이었지만… 감동보다는 섭섭했다. ‘이 양반이 참으로 훌륭하긴 한데, 옆에 사람이 없겠구나…’
처음 대면한 대통령, 盧泰愚
내가 처음 대면한 대통령은 노태우(盧泰愚)씨였다. 1990년 서울지검 특별수사 1부장 때다. 청와대에서 먼저 말이 나왔는지 혹은 검찰에서 먼저 말이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해 어느 봄날 위에서 “청와대에 들어가야 하니 (대통령 앞에서 발언할) 인사말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청와대에서 수사 분야의 우수 검사들을 특별히 초청해 대통령이 격려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 표면화된 조직폭력을 비롯해 강도·폭력·인신매매 등 각종 강력사건이 잇달아 터져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검찰과 경찰은 물론 청와대와 정치권까지 민생치안(民生治安) 문제에 주목했다.
그전까지 검찰은 정치나 경제 분야의 큰 사건만을 다루고 민생(民生)범죄는 경찰이 전담했다. 그러나 민생범죄의 심각성이 커지면서 결국 검찰이 여기에 개입하는 쪽으로 일대 정책 전환이 일어났다. 서울지검을 필두로 전국 검찰에 민생특수부 혹은 강력부 등 민생치안 전담 부서가 속속 설치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청와대에서 난데없이 수사 분야 우수 검사들을 불러 격려하기로 한 것도 아마 그런 시류를 의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윽고 어느 월요일 전국에서 선정된 수사검사 30여 명이 청와대에 모였다. 참석자 명단을 훑어보니 맨 앞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날 모인 검사들 가운데 아마 내가 경력으로 따져 서열 1위였던 모양이다. 나에게 ‘인사말’을 준비하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예정된 일정대로 우리 일행은 대회의실쯤으로 보이는 넓은 방으로 들어가 도열했다. 10여 분쯤 지나 늘 TV로만 보아오던 대통령이 활짝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나는 일행을 대표해 맨 앞에 나서서 준비한 의례적인 인사말을 차분히 마쳤다. 뭐 대통령을 만나는 일이 별거냐,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 그런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대통령 앞에, 그것도 앞에 쑥 나서서 인사말을 하려니 당시로서는 아직 젊은 편이어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게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후 노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청와대와 검찰이 민생치안이란 구호 아래 의기투합하던 이 시절, 나는 검·경을 통틀어 그 선봉에 서 있었다. 서울지검 특수1부장에 이어 초대 민생특수부장, 초대 강력부장 등 현장수사 관련 세 가지 직함을 한꺼번에 가지기도 했다. 분주했지만 행복했다. 서울지검 강력부장을 거쳐 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로 승진할 때까지 줄곧 민생, 강력, 조폭 분야의 수사에 있어서 요즘 말로 나의 ‘화려한 스펙’이 쌓이던 시절이었다.
金泳三 대통령과의 만남
엄밀히 따지면 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감사해야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나는 검사들이 선망하는 (1993년 3월 서울지검 3차장에서 대검 감찰부장으로) 검사장이 되었다. 그 전후 과정이야 어떻든 나를 대검 중수부장에 임명한 것은 김 대통령이다. 사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자리다. 그 덕분에 나는 한보사건 수사를 맡았고 과분하게도 ‘국민검사’ 칭호를 들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참으로 얄궂다. 정작 김 대통령과는 웃는 얼굴로 마주보기 어려운 악연(惡緣)이 되고 말았으니…. 자신이 임명한 검사에 의해 자신의 아들(현철)이 구속되던 때 김 대통령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한보 수사가 끝나고 현철씨에 대한 첫 공판이 열리던 1997년 8월 18일 나는 중수부장에서 대구고검장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비슷한 시기 법무부장관에 김종구(金鍾求), 검찰총장에 김태정(金泰政)씨가 임명됐다. 장관과 총장 인사 뒤에는 으레 청와대에서 전국 검사장급 이상 간부들을 불러 대통령이 격려하는 자리를 갖는다. 김 장관, 김 총장의 취임 직후인 그해 9월에도 검사장들이 청와대에 초치됐다.
아들이 감옥에 갇힌 상황. 그럼에도 김 대통령은 밝은 얼굴로 검사들을 맞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반갑게 악수하며 격려했다. ‘저렇게 웃고 있어도 이제 곧 나를 보면 한순간 분위기가 달라지겠구나’ 대통령과 마주할 순간이 다가오면서 나는 다소 걱정스러웠다. 이윽고 내가 그의 앞에 서서 대구고검장이라고 인사했다. 놀랍게도 그는 아주 반갑다는 듯 만면에 활짝 웃음을 띠고 맞잡은 손도 유난히 힘차게 흔들었다.
YS의 매력
한보 수사가 진행되던 앞서 석 달 동안 원체 내 얼굴이 TV를 통해 알려지다 보니, 이날 오랜 정치인답게 김영삼 대통령도 내가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곤혹스러운 순간을 잘 넘겼다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청와대 쪽에서 미처 생각을 못 했는지, 하필이면 대통령과 얼굴을 바로 맞대야 하는 헤드 테이블에 내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도리없이 다른 검사들 몇몇과 자리에 앉았다.
그러던 잠시 후, 나와 몇 차례 눈이 마주치던 김 대통령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가시는가 싶더니 누가 보아도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아챈 듯싶었다. 그런 김 대통령의 표정 변화를 바로 앞에서 보고 있어야 하는 나 또한 곤혹스러웠다. 방금 전까지도 쾌활하게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김 대통령의 말수도 확 줄었다. 그러다 뭔가 이야기할 때는 자기 옆에 붙어 앉은 장관과 총장하고만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물론 이날 자리가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 어린 아이처럼 쾌활하고 밝은 얼굴, 반면 노여울 때는 그 노여움이 곧이곧대로 드러나는 뻣뻣한 표정…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김 대통령의 얼굴은 자기 속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김 대통령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차츰 곤혹스러움보다는 빙그레, 그에 대한 친근감이 일어났다. ‘정글보다 무섭다는 정치판에서 평생을 지내온 사람이 어찌 저리도 자기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낼까. 세상을 겪을수록, 노련해질수록 자기 속을 감추고 겹겹이 가면을 쓰게 마련인데 저 양반은 어째서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을까….’
솔직한 표현이 용서된다면, 그날 나는 김 대통령과 마주앉은 내내 천진난만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세상 사람들이 왜 그를 말할 때 “사람이 모인다”고들 하는지, 정치인으로서 그의 매력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金大中 대통령의 관심 표명
김대중 대통령 때도 검찰총장 이하 검사장들은 연중 한두 차례 청와대를 찾아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었다. 김 대통령이 집권한 1998년 초에도 대검에서 전국검사장회의를 가진 뒤 다들 청와대에 들어갔다.
검사장들을 만나면 김 대통령은 으레 두세 사람에게 말을 건넨 뒤 그로부터 현안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곤 했다. 아무래도 고검장보다는 지검장이 현장에 밀착한 까닭에 그 대상은 늘 지검장들이었다. 그래서 지검장들은 이래저래 긴장했던 반면 고검장들은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되었다. 대구고검장이던 나 역시 별다른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검사장들을 죽 둘러보던 김 대통령이 갑자기 나를 향해 “고검장께서 보시기에 요즘 대구 쪽 민심은 어떻습니까. 그쪽도 이런저런 고민이 많지요”라고 물었다. 기습하듯 대통령이 물음을 던져오는데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대답했다.
“호남 쪽에서 대통령이 나온 것을 계기로 무엇보다도 영호남 간 소원했던 인적·물적 교류에 대한 이야기나 관심이 부쩍 늘었습니다. 대구가 경북의 중심지인 만큼 지역 간 문제를 해소하는 쪽으로 노력을 쏟는다, 그렇게 다들 매진하는 분위기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아무래도 대구가 섬유가 주축이다 보니…(하략)”
김 대통령은 특유의 습관인 메모까지 해가며 내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그러고는 내 이야기를 되받아 대구·경북 지역에 대한 자신의 이런저런 생각을 3~4분 동안이나 피력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우호적인 대화,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그 자리의 누구라도 ‘대통령이 심 검사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분위기였다.
史上 初有의 ‘無補職고검장’
나중에야 알아차린 것이지만, 결국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내게 보인 ‘관심’은 검찰 내 나와 경쟁관계에 있던 이들에게는 경계신호가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불과 1년도 지나기 전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리며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소위 대전법조비리 사건으로 모략을 당하고 항명(抗命)파동을 일으킨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나와 대한민국 검찰은 검찰사에 유례가 없는 부끄럽고도 희한한 경험을 해야 했다. 부르기도 어색한 ‘무보직(無補職)고검장’이란 자리가 생겨났다 없어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사태는 외견상 1999년 1월 27일 나의 항명파동에서 시작됐다(누구보다 더 검찰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던 내가 왜 항명파동까지 일으켜야 했는지, 그 전말과 진실에 대해서도 곧 소상히 밝힐 것이다). 뜬금없는 사태에 휘말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면직(免職)-소송-복직(復職)이라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수십 년 동안 내가 몸담아 오던 법무부와 검찰을 상대로 험한 송사(訟事)를 벌여야 했으니 아이러니도 그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법원에서 나에 대한 복직 판정이 내려진 뒤 검찰이 부랴부랴 궁여지책으로 내게 만들어준 자리가 무보직고검장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때 정점에서 김대중 대통령 때 바닥으로, 그야말로 극과 극을 오르내린 10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다시 대면한 것은 내가 무보직고검장에서 부산고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2002년 새해 초도순시차 부산고검을 찾은 김 대통령은 나와 인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미소를 지으며 딱 한마디를 건넸다.
“그동안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 양반이 참으로 노련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관급인 고등검사장에 대한 인사는 단순히 법무부나 검찰 조직 내부의 일이 아니라 민감한 정치행위다. 고검장의 인사변동에 관해서는 검찰총장-법무부장관-민정수석 라인을 따라 대통령에게 사전(事前) 또는 사후(事後) 보고가 있게 마련이다. 항명파동에서 김 대통령과 내가 다시 대면한 그때까지 2년 동안 검찰과 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들을 김대중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각료인 법무부장관, 검찰총장에게 반기(反旗)를 든 내가 달갑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명파동부터 그때까지, 김 대통령은 물론 청와대에서도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사태의 전말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고는 굳이 순시하지 않아도 됐을, 더욱이 내가 고검장으로 있는 부산고검에 찾아와 다른 이야기 없이 다만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라고 나를 위로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인 1월 18일, 나는 그제야 공식 퇴임(退任)하겠노라, 사의(辭意)를 밝혔다. 그리고 내 발로 검찰을 나왔다. 조용히 물러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퇴임사를 통해 “오늘 검찰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인사권을 가진 대통령 책임”이라고 신랄한 비판을 던진 것이다.
나를 놀라게 한 朴槿惠씨의 ‘스피드’
사람의 인연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검사로 임명되고 30년, 한 세대를 건너 그의 딸인 박근혜(朴槿惠)씨에게서 문득 연락이 왔다. 정가(政街)가 서서히 그해 연말에 있을 대선 무드에 접어들기 시작하던 2002년 2월의 일이었다.
이회창씨가 한나라당 총재이던 당시 박근혜씨는 부총재였다. 앞서 1997년 대선에서 이미 한 차례 고배를 마셨던 이 총재는 권토중래(捲土重來), 거듭 대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이 총재에게 근혜씨가 당내 민주화를 요구했다. 양측의 이해와 주장이 엇갈렸다. 사태는 결국 박근혜씨의 한나라당 탈당(脫黨)으로 일단락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근혜씨가 탈당한 이튿날인 3월 1일,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오전 중에 그로부터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그 무렵 나는 집에서 칩거(蟄居)중이었다. 이른바 항명파동으로 검찰에서 면직됐다 소송을 통해 복직,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한 지 한 달여쯤 지났을 때였다.
그전까지 서로 일면식도 없었지만 박근혜씨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밀하게 “고검장님과 제가 뜻이 잘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근혜씨가 전화한 용건은 한마디로 “이제 내가 새로이 함께할 분들을 찾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정치라면 뭐가 어찌됐든 일단 손사래를 치던 나다. 그런데다 만나본 적도 없는 박근혜씨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것도, 더욱이 날더러 정치에 뛰어들어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당혹스러웠다. 막 검찰을 떠나온 터였던 나는 “도와드리고 싶어도 지금은 일단 이것저것 정리할 일들이 많아 그럴 수가 없다”고 완곡하게 답했다. 박근혜씨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우호적인 분위기로 통화는 끝났다.
이날 박근혜씨와의 통화를 통해 나는 평소 그의 차분한 외모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면모를 느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치밀함, 무엇보다 ‘스피드’에 놀랐다.
이회창 지원 유세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것은 그가 무작정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탈당을 앞두고 ‘이후 구상’까지 다 해 놓았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고는 지체없이, 자기 생각대로 ‘액션’을 취한 것으로 짐작된다. 비록 길지 않은 통화였지만 박근혜씨는 이처럼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아니나 다를까. 내가 느꼈던 그대로 박근혜씨는 한나라당을 탈당한 지 불과 석 달 만인 그해 5월 각계 인사들을 모아 신생정당인 한국미래연합을 발족시키는, 놀랍도록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이때 목소리만으로 인사를 나눈 박근혜씨와 내가 처음 대면한 것은 그로부터 열 달 뒤인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일 하루 전 이회창 후보의 막바지 유세장에서였다. 한나라당을 떠났던 박근혜씨는 당으로 돌아가 이 후보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던 터였고, 나는 대선 열흘 전인 12월 9일 이 후보 지지 의사를 밝힌 뒤 그의 유세를 지원하고 있을 때였다. 이 후보가 노무현(盧武鉉) 후보에게 뒤지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들이 나오던 상황이었다.
서울 사당동에서 유세를 마친 뒤 인근 한정식집에서 이 후보와 나, 서청원(徐淸源)씨와 박근혜씨 등 넷이 식사를 하며 선거판세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주로 당시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튿날의 선거 결과를 예견이라도 했는지, 혹은 평소 스타일이 그러한지 박근혜씨는 이날 거의 말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이회창 후보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상황을 낙관하는 듯 보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곧이곧대로,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꺼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유세 지원까지 나온 이유는 판세가 영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도와드리려는 것입니다.”
이 후보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럴까요?”
이회창 후보를 돕겠다고 나섰던 당시 열흘이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정치활동(?)이었던 것처럼, 박근혜씨와의 만남 또한 그날 그 자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10년, 이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씨는 자신이 여권의 유력 정치인이자 대선후보가 되어 대권에 도전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
2002년 1월,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자마자 하루가 멀다 하고 정계로 들어오라는 권유가 잇따랐다. 김대중 정부의 검찰에 항명했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그런 권유는 전부 야당, 곧 한나라당에서 오는 것이었다. 전화는 물론 굵직굵직한 정치인들이 번갈아가며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나는 이회창씨와의 약속을 지키려 2002년 대선 직전 10일간 정치에 뛰어들었던(?) 것 말고는 정치 쪽 모든 권유를 거절했다. 그저 조용히, 변호사로서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1년여 지난 2004년 1월 26일 오후. 창 밖으로 법원 청사가 마주 보이는 서초동 내 변호사 사무실로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검찰 후배인 청와대 양인석(梁仁錫) 민정비서관이었다. 검사 시절 해남지청장을 지낸 그는 이른바 ‘옷로비 사건’ 때 특검 수사관으로 활약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에 발탁된 터였다.
―고검장님, 안녕하십니까.
“아니, 높은 데 계신 분이 웬일이셔?”
―그동안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해서…. 한번 뵈려고요.
“아유, 좋지. 그쪽에서 원하시면 나야 언제든지 좋지.”
―모레, 1월 28일인데요. 시간이 어떠십니까.
“괜찮아요. 많이 바쁠 텐데 양 선생께서 이쪽으로 넘어오실 수는 있고?”
―사실은, 제가 아니라 윗분 스케줄이라서요.
“윗분? 누구? 문 수석(문재인 민정수석)?”
―아뇨. 그 윗분이요.
머릿속에서 띵~ 가벼운 쇳소리가 울렸다. 대통령이?
“그 양반이 날 보자고 할 이유가 있나?”
―아마 직접 뵙고 말씀드릴 모양인데요. 일단 저희 쪽에는 일정만 잡으라고 하셨거든요.
“뭐 강제로 잡아가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내가 지금 대통령을 만나기가 참 곤란하거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 제안
2004년 17대 총선(總選)을 석 달 앞둔 시점이었다. 앞서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은 다가오는 총선에서는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그 준비작업 가운데 하나가 검찰에서 막 퇴임한 나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영입해 당의 분위기를 일신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최병렬(崔秉烈) 대표는 한나라당의 선거대책위원회 부(副)본부장을 맡고 있던 윤여준(尹汝寯)씨(현 문재인 후보 캠프의 국민통합위원장)를 세 차례나 내게 보내며 설득을 거듭했다.
정당, 그것도 메이저 정당의 공천심사위원장이라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당의 비례대표 1번이나 2번을 받는 게 당시 관행이다(지금은 중립성 문제로 오히려 비례대표 순번에서 제외한다). 따라서 그 자리를 맡는다는 것은 곧 국회의원 당선을 보장받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정치 쪽은 기웃거리지 않겠다는 기질(氣質)을 어쩌랴. 나는 끝내 그 제안을 거절하고 말았다.
나는 양 비서관에게 이런 속사정까지 이야기하면서 노 대통령과의 만남을 거절했다. 그러나 속절없는 일이었다. 양 비서관은 “사실은 이미 일정이 잡혀 있고, 대통령님께서도 그렇게 알고 계셔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만 거듭했다. 낭패였다. 도리가 없었다.
다짜고짜 들어오라고만 하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전화를 끊고 그때부터 ‘추리’를 시작했다.
노 대통령이 나를 보자는 것은 단순히 밥이나 먹자는 뜻이 아닐 것이었다. 앞서 대선 때 나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공개 지지한다고 했었다. 그러니 노 대통령 입장에서 나는 분명히 적군(敵軍)이었다. 그런 나를 청와대로 부른다? 모르긴 몰라도 십중팔구 검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게 틀림없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검찰이 권력을 내놓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러면서 검찰 인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그 상징적인 인사가 바로 강금실(康錦實) 변호사를 첫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법무부는 아무래도 판사들보다는 검사들의 ‘영역’이다. 그런데도 검사 경험이 전혀 없는 판사 출신 인사를 덜컥 장관에 앉힌 것이다. 더욱이 강 장관은 사법시험 기수로 따져도 당시 송광수(宋光洙) 검찰총장 내정자보다 무려 10년이나 아래인 23회 출신이었다. 유사시 법무부장관이 통솔, 제어해야 할 검찰총장이 장관의 법조 대선배다. 당장 모양새로만 보아도 어색하다.
盧武鉉과 검찰의 충돌
강 장관에 이어 단행된 검사장급 인사에서도 난리가 났다. 당시 유창종(柳昌宗) 서울지검장이 대검 마약부장으로, 장윤석(張倫碩) 법무부 검찰국장이 서울고검 차장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관행에 없던 인사요, 명백한 좌천성 인사였다. 이 일로 장윤석 검찰국장은 결국 검찰을 떠나 정계로 나갔다.
이를 바라보던 검사들은 분노했다. 평검사들이 ‘전국평검사회의’를 열어 집단으로 불만을 토하는 등 검란(檢亂)이 일어났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그런 검찰을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강공으로 나갔다. 검찰사(檢察史)에서 듣도 보도 못한 ‘검사와의 대화’라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그러고는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이 자리를 통해 검사들을 면박했다.
그런 가운데 2003년 중반 대검 중수부의 대선자금 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수사결과는 다분히 검찰이 노 대통령에 반격을 가하는 것이 됐다. 여야(與野) 모두를 대상으로 한 불법 대선자금 수사였지만 공교롭게도 안희정(安熙正)·여택수 당시 청와대 행정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 노 대통령의 주요 측근들이 대거 구속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노 대통령은 다시 “내가 쓴 대선자금은 한나라당의 10분의 1도 넘지 않을 것”이라며 검찰 수사를 맞받아쳤다.
노 대통령이 내게 만나자고 한 시점은 이처럼 대통령과 검찰이 대립각을 세우고 끝이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거듭할 때였다. 결국 노 대통령이 나를 불러 나눌 얘기는 검찰개혁 문제? 대충 그 정도로 짚어질 뿐, 더 이상은 짐작할 수 없었다.
노 대통령의 검찰개혁 제안
이윽고 1월 28일 오후 5시50분, 삼청동 민정수석실에서 문재인(文在寅) 민정수석과 만나 곧바로 청와대로 들어갔다. 잠시 후인 오후 6시30분, 청와대 접견실로 노 대통령과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함께 들어섰다. 내외는 한복 차림이었다.
“오늘 제 안사람까지 나왔는데, 이 정도면 국빈(國賓) 대접입니다.”
대통령이 웃으며 말했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 수석까지 포함해 네 사람을 위한 식사 채비가 돼 있었다. 식사가 시작되자 대통령이 다시 말을 꺼냈다.
“진작부터 법조계에서 신뢰받고 존경받는 선배님한테 좋은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와 나의 대화 내용을 여기에 일일이 옮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떻게든 검찰을 개혁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법무부장관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앞으로 검찰을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개혁하고 싶으니 당신이 장관이 되어서 내 생각대로 검찰개혁을 이끌어달라’는 것이었다.
검찰개혁과 관련해 노 대통령은 ▲검찰의 수사권을 견제해 균형을 이루게 하고 ▲검찰에 대한 감찰권을 강화하며 ▲특별검사 및 고등검찰청 검사들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것을 제시했다. 특히 고위간부 인사에 다면(多面)평가제를 도입하고 형식적인 인사청문회 대신 실질적인 청문회가 되게 하고, 고검 인사는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등 인사 부문의 개혁에 대해 힘주어 강조했다.
법무부장관 문제에 대해서는 “강 장관은 어차피 총선을 거쳐 국회로 나갈 사람이니 두세 달 인사를 앞당긴다 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검찰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갈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개혁을 지속해 가야 하는데 지금이 가장 어려운 때인 만큼 당신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당시 강 장관으로는 송광수 검찰총장 체제의 검찰을 통제할 수 없으니 내가 나서서 그 역할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말미에 “눈 딱 감고 서명만 하시면 된다. 도와달라”고 부러지게 말했다.
대통령이 면전에서, 그것도 함께 식사를 하면서 꺼내놓는 제안을 대놓고 거절하는 사람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설사 대통령과 생각이 다르다 해도 그 앞에서는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하는 게 예의다. 노 대통령이 입각(入閣) 얘기를 꺼내기 전, 검찰개혁은 물론 자신이 걸어온 길이나 인간적인 측면 등에 대해 진솔하게 말한 것도 내가 응당 법무부장관 자리를 맡을 것으로 생각했던 까닭일 것이다.
더욱이 선거 때 맞은편에 섰던 ‘적군’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그런 자리를 만들고 또 입각 제안까지 내놓은 것은 인간적으로도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고마운 처사였다. ‘나 같으면 이렇게 못했을 것이다. 아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속으로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는 견디기 힘들 만큼 인간적 갈등이 일었다.
“내가 고단수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나는 관심도 없었고 싫기도 했다. 그렇다고 대통령 면전에서 곧이곧대로 그렇게 잘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앞서 양인석 비서관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한나라당의 제안을 뿌리친 사정을 노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도저히 한나라당 뒤통수를 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돌려 얘기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노 대통령보다도 옆에 앉은 문 수석이 더 당혹스러워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대통령의 호의를 거절하는 게 미안하고 예우가 아닌 듯싶어 화제를 돌렸다.
“항간에서는 대통령께서 굉장히 포용력 있고 또 사람들을 끌어당길 때 단수로 치면 고(高)단수라고들 하더군요.”
노 대통령은 환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제가 포용력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단수인 것은 맞습니다.”
노 대통령은 더는 입각 권유를 하지 않았다. 다만 이날 자리가 끝날 때까지 “정말 서운하네요”라는 말을 거듭했다. 그동안 나와 접촉했던 여느 정계 인사들처럼 노 대통령과의 만남과 인연 역시 그 한 차례로 끝이었다.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허망하다고 하지 않는가. 나와, 대통령 및 그 측근들과는 이데올로기가 사뭇 다른 것이 내내 꽉 가슴을 짓누른 상태였다. 모든 것이 급조되고 인위적인 데서 무엇을 도모하겠는가. 출세를 위해서 불안한 공존(共存) 속에 내 몸을 팔 수 없다고 거절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리라 지금도 자위(自慰)하고 있다.⊙
대통령을 마주보고 검사장들이 죽 횡렬로 늘어섰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대통령이 잡아주며 격려하는, 세상 사람들이 TV 등을 통해 자주 접하는 익숙한 장면이다. 그러니 굳이 특별하다고까지 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나란히 놓인 이들 두 사진에 사람들이 눈길을 두거나 그것을 화제로 삼는 이유는 대통령과 나의 ‘포즈’가 눈에 띄게 뒤바뀌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이 개방됐다 해도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은 ‘나라님’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야 대통령에 대해 뭐라 말하든, 일단 대통령과 얼굴을 마주 대하면 누구든 자연스레 허리를 굽히게 마련이다. 국가원수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는 점에서 그것은 결코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내가 악수하는 장면을 찍은 예의 사진들은 그런 통념(?)과 다르다. 내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게다가 고개도 숙이지 않고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더더욱 공교롭게도, 뻣뻣하게 서 있는 나와는 달리 마치 두 대통령이 오히려 내게 인사하듯 허리를 숙이고 있어 이 사진은 (내가 보아도) 무례함을 넘어 불경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참으로 희한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두 대통령에 걸쳐 이처럼 같은 느낌을 주는 ‘비슷한 포즈’가 촬영됐을까.
대통령과 검사
내가 의도적으로 이런 자세를 취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굳이 드러나게 대통령을 무시하거나 일부러 의전(儀典)에 어긋나게 행동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전혀 없었다. 개인적으로 김영삼·김대중 두 대통령에 대해 별다른 유감이나 은원(恩怨)을 가질 일이 내게는 없었다. 내가 대통령과 인사하는 동안 허리를 굽히지 않다 보니 청와대 사진기사로서도 그런 장면을 촬영하기가 난처했을 것이다.
권력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검사는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면서 원칙과 소신에 따라 검사 임무를 수행하는 검사, 둘째 원칙과 소신에 충실하지만 상황에 따라 권력과의 거리를 조절하며 운신(運身)을 달리하는 검사, 셋째 출세를 위해 늘 권력에 빌붙는 출세 지향적 검사다. 역대 대통령들은 어떤 검사를 총애하고 출세시켰을까? 앞의 두 사진은 오랫동안 내가 대통령이니 권력이니 정치니 하는 것에 대해 일관되게 유지해 온 신조랄까 의지를 나도 모르게 드러낸 것이다.
30여 년 검사로 일해 오는 동안 나는 오직 검사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자, 그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검사로서 만족했다. 출세니 승진이니 하는 것들은 관심 밖이었다. 정계 진출이나 ‘어찌어찌 한 자리’ 등 ‘검사 이후’에 대해서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성향’이 이렇다 보니 애당초 정치, 권력, 대통령 등과는 친해질 계기도 이유도 없었다. 내가 검사로 임명돼 퇴임할 때까지 7명의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쳐갔고 무수히 많은 정치인과 권력자들이 명멸했다. 검사일 때나 퇴임한 이후나, 나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다가오면 내가 뒤로 물러섰다. 당연한 결과로서, 그들과 나는 늘 서먹서먹했다.
나의 임명권자 朴正熙 대통령
내가 검사로 임명된 날짜는 1972년 4월 12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때다. 그때나 지금이나 검사는 대통령이 임명한다(검찰청법 제34조 1항).
지금은 검찰 수뇌부와 대검 주요간부 인사는 대통령이 직접 결재(決裁)하고 여타 검사는 국무총리가 전결(專決)한다. 박 대통령 시절에는 군(軍)인사 못지않게 검찰인사를 중요시한 것이다. 5·16에서 3선(選)개헌(改憲), 유신(維新)체제로 이어지는 18년 통치를 끌어가야 했던 그에게 있어서 검찰과 검사는 대단히 중요한 합법적 권력장치였을 것이다.
대통령이 한 사람 한 사람 꼼꼼히 따져가며 직접 인사 결재를 했던 만큼, 검사 신규임용 절차도 지금에 비해 대단히 까다로웠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임용을 앞둔 검사 후보들이라 해도 정보기관에서 사돈의 8촌까지 샅샅이 뒤지는 엄중한 신원조회를 거쳐야 했다. 일가 중에 이른바 ‘불순분자’가 한 사람이라도 발견되면 검사로 임용되기 어려웠다.
그런 만큼 박 대통령 시절에 검사의 위상이랄까 힘(=권력)은 법원(판사)에 비해 분명히 우위에 있었다. 그때만 해도 검사가 청구한 영장에 대해 판사가 이래저래 까다롭게 따지거나, 기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장 검찰과 법원 간에 영장을 둘러싸고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표현 또한 그 뉘앙스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은 으레 검사가 판사에게 영장을 요청할 때 ‘청구한다’고 한다. ‘부디 영장을 발급해 달라’는 ‘플리즈(please)’의 느낌이 있다. 하지만 과거에는 ‘영장을 요구한다’고 했다. 판사들은 대개 검사의 그러한 ‘요구’에 대해 기각(棄却)은커녕 이의(異議)를 다는 일도 별로 없었다. 범죄자 등의 사법처리에 있어 판사의 의지보다 검사의 의지가 그만큼 먼저, 강력하게 작용한 것이다.
30년간 28번 인사이동
검사로 임용된 뒤 근무지가 어디냐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관심사다. 두말할 것도 없이 대통령이나 청와대 혹은 당대 실력자와 줄이 닿아 있으면 아무래도 중앙(서울)에 배치될 가능성이 크다.
초임(初任) 검사 시절 사방팔방 기댈 곳 없던 나는 그런 쪽으로는 한 오라기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당시 검찰 임관 및 근무배치에서 사법시험과 사법대학원(지금은 사법연수원) 성적을 따졌다는 점이다. 나는 사법시험 차석(次席) 합격, 대학원 수석(졸업)이던 덕분에 같이 임관한 동기들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서울지검)에 배치됐다.
그러나 그때뿐, 이후 퇴임할 때까지 30여 년 동안 나는 28차례나 인사이동을 겪었다. 거의 매년 옮겨다닌 셈이다. 서울이나 수도권 혹은 요직으로 돌면 좋았겠지만 되돌아보면 불만일 때가 더 많았다. 더욱이 검찰 안팎을 가림 없이 ‘연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탓인지 나는 평검사 이후 간부인사 때는 대체로 동기들보다 1년가량 뒤처지기 일쑤였다. 인사 때가 되면 위에서는 으레 경향(京鄕)교류 원칙이니, 근무 실적을 반영했느니, 지역안배를 고려했느니라고 이유를 댄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실 인사권자가 얼마든지 갖다 붙이면 그만이었다.
박 대통령 이래 정권 수호의 주요장치였던 검찰 인사, 특히 검찰 수뇌부를 비롯한 고위 인사는 불행하게도 대통령과 ‘지리적·심리적 측근’들이 차지했다. 더욱이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습관화된 군(軍) 출신 대통령들은 누가 뭐래도 입속의 혀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을 선호했다.
이러한 현상은 처음에 군검찰관 출신 신직수(申稙秀) 총장·장관에서부터 마지막에는 김치열(金致烈) 장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영남 출신 대통령은 영남 사람, 호남 출신 대통령은 호남 사람을 검찰 윗선에 두어 온 게 사실이다. 어쩌다 예외가 있는 경우는 이른바 ‘지역안배 논리’ 말하자면 정치적 바람막이 인사를 할 때뿐이다.
군 출신 대통령들이 유지해 온 ‘내 고향 출신 검사 먼저’ 관행은 나중에 ‘문민(文民)’을 내세운 김영삼 대통령 때도, ‘국민’을 내세운 김대중 대통령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검찰 인사 역시 정치바람을 타고 내 고향 인사, 패거리 인사, 회전문 인사가 대세였다.
특히 검찰 수뇌부는 어떤 미사여구로 장식해도 정권에 따라, 정권에 의해 구축된 친정(親政) 체제이기 일쑤였다. 이미 태생적으로 우리 검찰은 ‘각하를 모실 수밖에 없는’ 정치검찰 혹은 어용검찰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검사를 정치검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집단체인 검찰은 결국 당대 체제 내에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5共 정권의 검찰 期數 파괴
박정희 대통령이 10·26으로 세상을 떠난 1979년 말 나는 영등포지검 검사였다. 최규하(崔圭夏) 총리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는 검찰에서 보내주는 단기유학 길에 올라 독일의 한 형법연구소에 머물고 있던 터라 국내 사정을 통 알 수 없었다. 한국 상황에 대해 독일 언론들은 ‘군의 파라슈트(낙하산부대) 대장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 리더인 김대중을 사형시키려 한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이윽고 돌아와 보니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5공화국 시대가 되어 있었다.
귀국한 직후인 1981년 7월 나는 대검찰청 연구관으로 발령됐다. 지방도 아니고 더욱이 대검(大檢)에 배치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좀 지나고 보니 전혀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검찰관 직급인 반면 동기생들은 고등검찰관으로 승진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나보다 후배기수인 사법시험 8회에서도 고등검찰관으로 승진한 이들이 있었다.
‘어라? 어떻게 된 거야’ 이리저리 사정을 알아보니 ‘해외 체류 중이어서 고등검찰관 인사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애매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처음으로 인사차별을 맛본 것이다. 힘도 배경도 없는 데다 권력과 정치의 비정함을 몰랐던 내게 그것은 응당한 대가였을지 모른다.
신군부(新軍部) 세력은 검찰개혁이라는 미명하에 검사들의 서열파괴를 자행했다. 사법시험 앞서 있었던 고등고시 13회 출신부터 사법시험 8회 출신까지, 그러니까 모두 12기에 걸친 검사들을 고등검찰관과 검찰관으로 구분하는 새 인사제도를 적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고등검찰관에 승진하지 못한 선배가 승진한 후배의 지휘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그 같은 인사에는 누가 보아도 ‘앞으로 출세하려면 혁명대열(?)에 적극 참여하라’는 메시지가 깔려 있었다.
힘도 없고 줄도 없는 처지라면 처세라도 능숙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마저도 영 숙맥이었다. 특히 전 대통령 시절은 나중에 ‘6공의 황태자’로 불리게 된 박철언(朴哲彦)과 김영일(金榮馹), 두 청와대 비서관이 급속히 권력을 키워가던 때였다. 두 사람 다 사법시험 8회 출신으로 나보다 한 기수 아래 검사 출신이었다. 내가 ‘그야말로 평검사’이던 그때 검찰 안팎에서는 ‘검사들에 대한 인사권은 8기생에게 있다’는 이야기가 정설(定說)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미 그런 분위기에서는 검사로서 성공(?)하려면 자연스럽게 그쪽 줄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둔감(?)했다. 둔감한 것을 넘어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아예 신경도 안 썼다.
검찰 지휘부를 소집한 박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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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법시험 8기 출신인 박철언씨는 5공 시절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선배 검사들을 보안사 안가에 집합시키는 등 위세가 대단했다. |
내가 대검의 검찰수사연구관으로 있을 때인 1982년 4월경 소위 장영자(張英子) 사건이 터졌다.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李圭光)씨의 처제인 장영자와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인 그의 남편 이철희(李哲熙)가 권력을 등에 업고 6000억원대 어음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었다. 중견기업들이 도산하고 시중 은행이 흔들리고 은행장들이 대거 구속되는 등 사건의 파장은 매우 컸다. 무엇보다 국민들 사이에 국가 정치 경제체제 전반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검찰이 몇 달 동안이나 이 사건에 달려들어서야 겨우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철언 비서관이 당시 검찰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던 검사들을 동교동의 국군보안사령부 안가로 소집했다. 점심식사를 겸한 이 자리에는 박 비서관과 박준병(朴俊炳) 보안사령관, 그리고 김석휘(金錫輝) 검찰총장과 이종남(李種南) 대검 중수부장을 비롯해 성민경, 이건개(李健介·전 대전고검장), 김도언(金道彦·전 검찰총장), 신건(辛建·전 국정원장), 이종찬(李鍾燦·전 민정수석비서관), 이명재(李明載·전 검찰총장) 등 중견검사들이 참석했다. 물론 나도 이날 자리에 불려나갔다. 밥이야 먹는 둥 마는 둥, 소집된 검사들은 검찰 기수로는 한참 아래인 박 비서관으로부터 질책성 훈시를 들어야 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국민들이 대통령 주변이며 정치권 주변에 대해 여전히 이런저런 의혹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검찰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검찰이 언제 국가에 제대로 기여한 적이 있었느냐. 이번 기회에 검찰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적극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 직접 국민들 앞에 나서서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또 모든 것이 제대로 깔끔하게 처리되었다고 안심시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검사들이 직접 TV에 나가서 국민들과 만나라”고 했다.
일부 검사들 중에 “판사는 판결문으로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해야 한다”면서 TV 출연에 이견을 내는 이도 있었으나 적극 나서서 반대하는 경우는 없었다. 김 총장은 “검찰총장까지 TV에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모양새가 안 좋으니…”라고 하며 빠졌다.
이윽고 며칠 뒤 이 중수부장 등 5~6명의 검사가 KBS 특별 프로그램 형식으로 TV에 출연해 이-장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TV 생중계 중에 슬그머니 한 분이 출연자로 합류했다. 별다른 소개나 코멘트 없이… 검찰총장이었다. 요행히 TV 출연을 피했는가 싶었던 김 총장이 윗분(?)들에게 밀려 나갔는지 아니면 충성도를 의심받을까 스스로 나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웃지 못할 촌극(寸劇)이었다. 이날 TV 출연 해프닝은 검찰 수난사 또는 정치와 검찰의 야합사로 기록할 만한 것이었다. TV 출연자 명단에서 제외됐던 나로서는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며칠 뒤 이 일과 관련해 검사들 몇 명이 청와대에 들어가 전 대통령의 칭찬을 듣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평검사 시절 겪은 이 일은 내게 참으로 아픈 기억이 되어 깊이 새겨졌다. 얼마 후 나는 저 남쪽, 밀양지청장으로 발령받아 서울을 떴다.
李會昌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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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임 판사 시절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필자가 서울지검 송무부(訟務部) 초임 검사이던 1973년 무렵, 사시 선배인 그는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였다. |
무엇보다 이회창씨 때문에 나는 ‘정치 근처에는 가지 않겠다’는 신조를 깨뜨렸다. 이씨가 두 번째 대선(大選)에 도전하던 2002년 말, 당시 공직을 그만둔 상태였던 나는 그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고 유세 지원에 나섰다. 그해 12월 9일부터 선거일 하루 전인 12월 18일까지, 딱 열흘간의 정치활동이었다.
앞서 훨씬 전부터 이씨는 여러 차례 내게 도와달라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거절했다. 너무 그러는 것이 미안해서 “정말 어려울 때가 오면 도와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대선 직전의 막판 여론조사 결과들이 일제히 이씨에게 불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예전 약속대로 그를 돕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나서긴 했지만 당시 나는 선거판세나 여론조사 결과보다 좀 더 짙은 걱정 한 가지가 마음속에 걸려 있었다. 밀양지청장 당시 이회창씨와 얽힌 기억이었다.
법조 선배인 이씨와 나의 인연은 아주 오래됐다. 내가 서울지검 송무부(訟務部) 초임 검사이던 1973년 무렵 이씨는 서울지방법원의 부장판사였다. 마침 내가 있던 사무실 바로 위층이 그의 방이어서 그는 수시로 우리 사무실에 드나들었다. 또 희한하게도 내가 송무부를 떠나 영등포지검으로 옮기자 이내 그도 영등포지원장(현 서울남부지원장)으로 나왔다. 한 지붕 아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때도 서로 편안하게 왕래했다.
제법 시간이 흘러 그를 다시 만난 것이 바로 내가 밀양지청장으로 있을 때였다. 이씨는 대법원 판사가 되어 있었다. 대법원 판사는 6년 임기의 장관급 직책으로 법조 서열이 높다. 그런 그가 밀양지방법원을 초도순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법원장과 지청장인 내가 함께 그를 영접하기로 하고, 밀양에서도 조촐하지만 한 솜씨 한다는 한정식 식당에 자리를 만들어 두었다.
이윽고 이씨가 밀양에 내려와 법원과 지청을 살피고 법원장실로 돌아와 셋이 앉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바깥에 식사를 준비해 두었으니 나가시지요”라며 법원장과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갑자기 이씨가 특유의 굳은 표정, 부러지는 목소리로 우리를 나무랐다.
“아니 여기 안에서도 얼마든지 식사를 할 수 있는데…. 식사 한 끼 하는 거야 어떻게 먹어도 똑같은 것인데 뭣 하러 엉뚱한 데다 그런 낭비를 합니까. 그게 당신들 돈도 아니고, 우리가 먹고 쓰고 하는 게 다 나랏돈인데 판검사란 사람들이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게요, 없는 게요.”
정확하게 모든 말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법원장과 나는 그 자리에서 꽤 혼났다. 그러고는 식당 예약 취소, 법원 근처 밥집에서 백반을 주문해 법원장실 테이블에 셋이 둘러앉아 서먹서먹 점심을 먹었다. 이씨의 처신에 감동받아야 할 대목이었지만… 감동보다는 섭섭했다. ‘이 양반이 참으로 훌륭하긴 한데, 옆에 사람이 없겠구나…’
처음 대면한 대통령, 盧泰愚
내가 처음 대면한 대통령은 노태우(盧泰愚)씨였다. 1990년 서울지검 특별수사 1부장 때다. 청와대에서 먼저 말이 나왔는지 혹은 검찰에서 먼저 말이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그해 어느 봄날 위에서 “청와대에 들어가야 하니 (대통령 앞에서 발언할) 인사말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청와대에서 수사 분야의 우수 검사들을 특별히 초청해 대통령이 격려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본격 표면화된 조직폭력을 비롯해 강도·폭력·인신매매 등 각종 강력사건이 잇달아 터져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검찰과 경찰은 물론 청와대와 정치권까지 민생치안(民生治安) 문제에 주목했다.
그전까지 검찰은 정치나 경제 분야의 큰 사건만을 다루고 민생(民生)범죄는 경찰이 전담했다. 그러나 민생범죄의 심각성이 커지면서 결국 검찰이 여기에 개입하는 쪽으로 일대 정책 전환이 일어났다. 서울지검을 필두로 전국 검찰에 민생특수부 혹은 강력부 등 민생치안 전담 부서가 속속 설치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청와대에서 난데없이 수사 분야 우수 검사들을 불러 격려하기로 한 것도 아마 그런 시류를 의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윽고 어느 월요일 전국에서 선정된 수사검사 30여 명이 청와대에 모였다. 참석자 명단을 훑어보니 맨 앞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날 모인 검사들 가운데 아마 내가 경력으로 따져 서열 1위였던 모양이다. 나에게 ‘인사말’을 준비하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예정된 일정대로 우리 일행은 대회의실쯤으로 보이는 넓은 방으로 들어가 도열했다. 10여 분쯤 지나 늘 TV로만 보아오던 대통령이 활짝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나는 일행을 대표해 맨 앞에 나서서 준비한 의례적인 인사말을 차분히 마쳤다. 뭐 대통령을 만나는 일이 별거냐,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 그런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대통령 앞에, 그것도 앞에 쑥 나서서 인사말을 하려니 당시로서는 아직 젊은 편이어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게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후 노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청와대와 검찰이 민생치안이란 구호 아래 의기투합하던 이 시절, 나는 검·경을 통틀어 그 선봉에 서 있었다. 서울지검 특수1부장에 이어 초대 민생특수부장, 초대 강력부장 등 현장수사 관련 세 가지 직함을 한꺼번에 가지기도 했다. 분주했지만 행복했다. 서울지검 강력부장을 거쳐 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로 승진할 때까지 줄곧 민생, 강력, 조폭 분야의 수사에 있어서 요즘 말로 나의 ‘화려한 스펙’이 쌓이던 시절이었다.
金泳三 대통령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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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에 초치되어 김영삼 대통령과 악수를 하는 필자. 김 대통령은 뒤늦게 필자가 아들을 구속시킨 장본인이라는 걸 알고 불편해했다. |
그러나 세상사는 참으로 얄궂다. 정작 김 대통령과는 웃는 얼굴로 마주보기 어려운 악연(惡緣)이 되고 말았으니…. 자신이 임명한 검사에 의해 자신의 아들(현철)이 구속되던 때 김 대통령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한보 수사가 끝나고 현철씨에 대한 첫 공판이 열리던 1997년 8월 18일 나는 중수부장에서 대구고검장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비슷한 시기 법무부장관에 김종구(金鍾求), 검찰총장에 김태정(金泰政)씨가 임명됐다. 장관과 총장 인사 뒤에는 으레 청와대에서 전국 검사장급 이상 간부들을 불러 대통령이 격려하는 자리를 갖는다. 김 장관, 김 총장의 취임 직후인 그해 9월에도 검사장들이 청와대에 초치됐다.
아들이 감옥에 갇힌 상황. 그럼에도 김 대통령은 밝은 얼굴로 검사들을 맞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반갑게 악수하며 격려했다. ‘저렇게 웃고 있어도 이제 곧 나를 보면 한순간 분위기가 달라지겠구나’ 대통령과 마주할 순간이 다가오면서 나는 다소 걱정스러웠다. 이윽고 내가 그의 앞에 서서 대구고검장이라고 인사했다. 놀랍게도 그는 아주 반갑다는 듯 만면에 활짝 웃음을 띠고 맞잡은 손도 유난히 힘차게 흔들었다.
YS의 매력
한보 수사가 진행되던 앞서 석 달 동안 원체 내 얼굴이 TV를 통해 알려지다 보니, 이날 오랜 정치인답게 김영삼 대통령도 내가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곤혹스러운 순간을 잘 넘겼다 싶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청와대 쪽에서 미처 생각을 못 했는지, 하필이면 대통령과 얼굴을 바로 맞대야 하는 헤드 테이블에 내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도리없이 다른 검사들 몇몇과 자리에 앉았다.
그러던 잠시 후, 나와 몇 차례 눈이 마주치던 김 대통령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가시는가 싶더니 누가 보아도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아챈 듯싶었다. 그런 김 대통령의 표정 변화를 바로 앞에서 보고 있어야 하는 나 또한 곤혹스러웠다. 방금 전까지도 쾌활하게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김 대통령의 말수도 확 줄었다. 그러다 뭔가 이야기할 때는 자기 옆에 붙어 앉은 장관과 총장하고만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물론 이날 자리가 끝날 때까지 두 번 다시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 어린 아이처럼 쾌활하고 밝은 얼굴, 반면 노여울 때는 그 노여움이 곧이곧대로 드러나는 뻣뻣한 표정…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김 대통령의 얼굴은 자기 속마음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김 대통령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차츰 곤혹스러움보다는 빙그레, 그에 대한 친근감이 일어났다. ‘정글보다 무섭다는 정치판에서 평생을 지내온 사람이 어찌 저리도 자기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낼까. 세상을 겪을수록, 노련해질수록 자기 속을 감추고 겹겹이 가면을 쓰게 마련인데 저 양반은 어째서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을까….’
솔직한 표현이 용서된다면, 그날 나는 김 대통령과 마주앉은 내내 천진난만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세상 사람들이 왜 그를 말할 때 “사람이 모인다”고들 하는지, 정치인으로서 그의 매력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金大中 대통령의 관심 표명
김대중 대통령 때도 검찰총장 이하 검사장들은 연중 한두 차례 청와대를 찾아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었다. 김 대통령이 집권한 1998년 초에도 대검에서 전국검사장회의를 가진 뒤 다들 청와대에 들어갔다.
검사장들을 만나면 김 대통령은 으레 두세 사람에게 말을 건넨 뒤 그로부터 현안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곤 했다. 아무래도 고검장보다는 지검장이 현장에 밀착한 까닭에 그 대상은 늘 지검장들이었다. 그래서 지검장들은 이래저래 긴장했던 반면 고검장들은 느긋하게 자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되었다. 대구고검장이던 나 역시 별다른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검사장들을 죽 둘러보던 김 대통령이 갑자기 나를 향해 “고검장께서 보시기에 요즘 대구 쪽 민심은 어떻습니까. 그쪽도 이런저런 고민이 많지요”라고 물었다. 기습하듯 대통령이 물음을 던져오는데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으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대답했다.
“호남 쪽에서 대통령이 나온 것을 계기로 무엇보다도 영호남 간 소원했던 인적·물적 교류에 대한 이야기나 관심이 부쩍 늘었습니다. 대구가 경북의 중심지인 만큼 지역 간 문제를 해소하는 쪽으로 노력을 쏟는다, 그렇게 다들 매진하는 분위기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아무래도 대구가 섬유가 주축이다 보니…(하략)”
김 대통령은 특유의 습관인 메모까지 해가며 내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그러고는 내 이야기를 되받아 대구·경북 지역에 대한 자신의 이런저런 생각을 3~4분 동안이나 피력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우호적인 대화,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그 자리의 누구라도 ‘대통령이 심 검사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분위기였다.
史上 初有의 ‘無補職고검장’
나중에야 알아차린 것이지만, 결국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내게 보인 ‘관심’은 검찰 내 나와 경쟁관계에 있던 이들에게는 경계신호가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불과 1년도 지나기 전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리며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소위 대전법조비리 사건으로 모략을 당하고 항명(抗命)파동을 일으킨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나와 대한민국 검찰은 검찰사에 유례가 없는 부끄럽고도 희한한 경험을 해야 했다. 부르기도 어색한 ‘무보직(無補職)고검장’이란 자리가 생겨났다 없어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사태는 외견상 1999년 1월 27일 나의 항명파동에서 시작됐다(누구보다 더 검찰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던 내가 왜 항명파동까지 일으켜야 했는지, 그 전말과 진실에 대해서도 곧 소상히 밝힐 것이다). 뜬금없는 사태에 휘말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면직(免職)-소송-복직(復職)이라는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수십 년 동안 내가 몸담아 오던 법무부와 검찰을 상대로 험한 송사(訟事)를 벌여야 했으니 아이러니도 그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법원에서 나에 대한 복직 판정이 내려진 뒤 검찰이 부랴부랴 궁여지책으로 내게 만들어준 자리가 무보직고검장이었다. 김영삼 대통령 때 정점에서 김대중 대통령 때 바닥으로, 그야말로 극과 극을 오르내린 10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다시 대면한 것은 내가 무보직고검장에서 부산고검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2002년 새해 초도순시차 부산고검을 찾은 김 대통령은 나와 인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미소를 지으며 딱 한마디를 건넸다.
“그동안 이래저래 마음고생이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 양반이 참으로 노련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관급인 고등검사장에 대한 인사는 단순히 법무부나 검찰 조직 내부의 일이 아니라 민감한 정치행위다. 고검장의 인사변동에 관해서는 검찰총장-법무부장관-민정수석 라인을 따라 대통령에게 사전(事前) 또는 사후(事後) 보고가 있게 마련이다. 항명파동에서 김 대통령과 내가 다시 대면한 그때까지 2년 동안 검찰과 나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들을 김대중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각료인 법무부장관, 검찰총장에게 반기(反旗)를 든 내가 달갑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명파동부터 그때까지, 김 대통령은 물론 청와대에서도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사태의 전말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고는 굳이 순시하지 않아도 됐을, 더욱이 내가 고검장으로 있는 부산고검에 찾아와 다른 이야기 없이 다만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라고 나를 위로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인 1월 18일, 나는 그제야 공식 퇴임(退任)하겠노라, 사의(辭意)를 밝혔다. 그리고 내 발로 검찰을 나왔다. 조용히 물러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퇴임사를 통해 “오늘 검찰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인사권을 가진 대통령 책임”이라고 신랄한 비판을 던진 것이다.
나를 놀라게 한 朴槿惠씨의 ‘스피드’
사람의 인연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검사로 임명되고 30년, 한 세대를 건너 그의 딸인 박근혜(朴槿惠)씨에게서 문득 연락이 왔다. 정가(政街)가 서서히 그해 연말에 있을 대선 무드에 접어들기 시작하던 2002년 2월의 일이었다.
이회창씨가 한나라당 총재이던 당시 박근혜씨는 부총재였다. 앞서 1997년 대선에서 이미 한 차례 고배를 마셨던 이 총재는 권토중래(捲土重來), 거듭 대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이 총재에게 근혜씨가 당내 민주화를 요구했다. 양측의 이해와 주장이 엇갈렸다. 사태는 결국 박근혜씨의 한나라당 탈당(脫黨)으로 일단락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근혜씨가 탈당한 이튿날인 3월 1일,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오전 중에 그로부터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그 무렵 나는 집에서 칩거(蟄居)중이었다. 이른바 항명파동으로 검찰에서 면직됐다 소송을 통해 복직,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정년퇴임한 지 한 달여쯤 지났을 때였다.
그전까지 서로 일면식도 없었지만 박근혜씨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밀하게 “고검장님과 제가 뜻이 잘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근혜씨가 전화한 용건은 한마디로 “이제 내가 새로이 함께할 분들을 찾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정치라면 뭐가 어찌됐든 일단 손사래를 치던 나다. 그런데다 만나본 적도 없는 박근혜씨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것도, 더욱이 날더러 정치에 뛰어들어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당혹스러웠다. 막 검찰을 떠나온 터였던 나는 “도와드리고 싶어도 지금은 일단 이것저것 정리할 일들이 많아 그럴 수가 없다”고 완곡하게 답했다. 박근혜씨도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우호적인 분위기로 통화는 끝났다.
이날 박근혜씨와의 통화를 통해 나는 평소 그의 차분한 외모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면모를 느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치밀함, 무엇보다 ‘스피드’에 놀랐다.
이회창 지원 유세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것은 그가 무작정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탈당을 앞두고 ‘이후 구상’까지 다 해 놓았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고는 지체없이, 자기 생각대로 ‘액션’을 취한 것으로 짐작된다. 비록 길지 않은 통화였지만 박근혜씨는 이처럼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아니나 다를까. 내가 느꼈던 그대로 박근혜씨는 한나라당을 탈당한 지 불과 석 달 만인 그해 5월 각계 인사들을 모아 신생정당인 한국미래연합을 발족시키는, 놀랍도록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이때 목소리만으로 인사를 나눈 박근혜씨와 내가 처음 대면한 것은 그로부터 열 달 뒤인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일 하루 전 이회창 후보의 막바지 유세장에서였다. 한나라당을 떠났던 박근혜씨는 당으로 돌아가 이 후보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던 터였고, 나는 대선 열흘 전인 12월 9일 이 후보 지지 의사를 밝힌 뒤 그의 유세를 지원하고 있을 때였다. 이 후보가 노무현(盧武鉉) 후보에게 뒤지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들이 나오던 상황이었다.
서울 사당동에서 유세를 마친 뒤 인근 한정식집에서 이 후보와 나, 서청원(徐淸源)씨와 박근혜씨 등 넷이 식사를 하며 선거판세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었다. 주로 당시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이튿날의 선거 결과를 예견이라도 했는지, 혹은 평소 스타일이 그러한지 박근혜씨는 이날 거의 말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이회창 후보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상황을 낙관하는 듯 보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곧이곧대로,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꺼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유세 지원까지 나온 이유는 판세가 영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도와드리려는 것입니다.”
이 후보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럴까요?”
이회창 후보를 돕겠다고 나섰던 당시 열흘이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정치활동(?)이었던 것처럼, 박근혜씨와의 만남 또한 그날 그 자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10년, 이제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씨는 자신이 여권의 유력 정치인이자 대선후보가 되어 대권에 도전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
2002년 1월, 부산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나자마자 하루가 멀다 하고 정계로 들어오라는 권유가 잇따랐다. 김대중 정부의 검찰에 항명했다는 이미지 때문인지 그런 권유는 전부 야당, 곧 한나라당에서 오는 것이었다. 전화는 물론 굵직굵직한 정치인들이 번갈아가며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나는 이회창씨와의 약속을 지키려 2002년 대선 직전 10일간 정치에 뛰어들었던(?) 것 말고는 정치 쪽 모든 권유를 거절했다. 그저 조용히, 변호사로서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1년여 지난 2004년 1월 26일 오후. 창 밖으로 법원 청사가 마주 보이는 서초동 내 변호사 사무실로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검찰 후배인 청와대 양인석(梁仁錫) 민정비서관이었다. 검사 시절 해남지청장을 지낸 그는 이른바 ‘옷로비 사건’ 때 특검 수사관으로 활약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에 발탁된 터였다.
―고검장님, 안녕하십니까.
“아니, 높은 데 계신 분이 웬일이셔?”
―그동안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해서…. 한번 뵈려고요.
“아유, 좋지. 그쪽에서 원하시면 나야 언제든지 좋지.”
―모레, 1월 28일인데요. 시간이 어떠십니까.
“괜찮아요. 많이 바쁠 텐데 양 선생께서 이쪽으로 넘어오실 수는 있고?”
―사실은, 제가 아니라 윗분 스케줄이라서요.
“윗분? 누구? 문 수석(문재인 민정수석)?”
―아뇨. 그 윗분이요.
머릿속에서 띵~ 가벼운 쇳소리가 울렸다. 대통령이?
“그 양반이 날 보자고 할 이유가 있나?”
―아마 직접 뵙고 말씀드릴 모양인데요. 일단 저희 쪽에는 일정만 잡으라고 하셨거든요.
“뭐 강제로 잡아가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내가 지금 대통령을 만나기가 참 곤란하거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 제안
2004년 17대 총선(總選)을 석 달 앞둔 시점이었다. 앞서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은 다가오는 총선에서는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그 준비작업 가운데 하나가 검찰에서 막 퇴임한 나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영입해 당의 분위기를 일신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최병렬(崔秉烈) 대표는 한나라당의 선거대책위원회 부(副)본부장을 맡고 있던 윤여준(尹汝寯)씨(현 문재인 후보 캠프의 국민통합위원장)를 세 차례나 내게 보내며 설득을 거듭했다.
정당, 그것도 메이저 정당의 공천심사위원장이라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당의 비례대표 1번이나 2번을 받는 게 당시 관행이다(지금은 중립성 문제로 오히려 비례대표 순번에서 제외한다). 따라서 그 자리를 맡는다는 것은 곧 국회의원 당선을 보장받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정치 쪽은 기웃거리지 않겠다는 기질(氣質)을 어쩌랴. 나는 끝내 그 제안을 거절하고 말았다.
나는 양 비서관에게 이런 속사정까지 이야기하면서 노 대통령과의 만남을 거절했다. 그러나 속절없는 일이었다. 양 비서관은 “사실은 이미 일정이 잡혀 있고, 대통령님께서도 그렇게 알고 계셔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만 거듭했다. 낭패였다. 도리가 없었다.
다짜고짜 들어오라고만 하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전화를 끊고 그때부터 ‘추리’를 시작했다.
노 대통령이 나를 보자는 것은 단순히 밥이나 먹자는 뜻이 아닐 것이었다. 앞서 대선 때 나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공개 지지한다고 했었다. 그러니 노 대통령 입장에서 나는 분명히 적군(敵軍)이었다. 그런 나를 청와대로 부른다? 모르긴 몰라도 십중팔구 검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게 틀림없었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검찰이 권력을 내놓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러면서 검찰 인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그 상징적인 인사가 바로 강금실(康錦實) 변호사를 첫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법무부는 아무래도 판사들보다는 검사들의 ‘영역’이다. 그런데도 검사 경험이 전혀 없는 판사 출신 인사를 덜컥 장관에 앉힌 것이다. 더욱이 강 장관은 사법시험 기수로 따져도 당시 송광수(宋光洙) 검찰총장 내정자보다 무려 10년이나 아래인 23회 출신이었다. 유사시 법무부장관이 통솔, 제어해야 할 검찰총장이 장관의 법조 대선배다. 당장 모양새로만 보아도 어색하다.
盧武鉉과 검찰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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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3월 9일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배석한 ‘검사와의 대화’에서 검사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이를 바라보던 검사들은 분노했다. 평검사들이 ‘전국평검사회의’를 열어 집단으로 불만을 토하는 등 검란(檢亂)이 일어났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그런 검찰을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강공으로 나갔다. 검찰사(檢察史)에서 듣도 보도 못한 ‘검사와의 대화’라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그러고는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이 자리를 통해 검사들을 면박했다.
그런 가운데 2003년 중반 대검 중수부의 대선자금 수사가 시작됐다. 검찰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수사결과는 다분히 검찰이 노 대통령에 반격을 가하는 것이 됐다. 여야(與野) 모두를 대상으로 한 불법 대선자금 수사였지만 공교롭게도 안희정(安熙正)·여택수 당시 청와대 행정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 노 대통령의 주요 측근들이 대거 구속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노 대통령은 다시 “내가 쓴 대선자금은 한나라당의 10분의 1도 넘지 않을 것”이라며 검찰 수사를 맞받아쳤다.
노 대통령이 내게 만나자고 한 시점은 이처럼 대통령과 검찰이 대립각을 세우고 끝이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거듭할 때였다. 결국 노 대통령이 나를 불러 나눌 얘기는 검찰개혁 문제? 대충 그 정도로 짚어질 뿐, 더 이상은 짐작할 수 없었다.
노 대통령의 검찰개혁 제안
이윽고 1월 28일 오후 5시50분, 삼청동 민정수석실에서 문재인(文在寅) 민정수석과 만나 곧바로 청와대로 들어갔다. 잠시 후인 오후 6시30분, 청와대 접견실로 노 대통령과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함께 들어섰다. 내외는 한복 차림이었다.
“오늘 제 안사람까지 나왔는데, 이 정도면 국빈(國賓) 대접입니다.”
대통령이 웃으며 말했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 수석까지 포함해 네 사람을 위한 식사 채비가 돼 있었다. 식사가 시작되자 대통령이 다시 말을 꺼냈다.
“진작부터 법조계에서 신뢰받고 존경받는 선배님한테 좋은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와 나의 대화 내용을 여기에 일일이 옮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떻게든 검찰을 개혁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법무부장관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앞으로 검찰을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개혁하고 싶으니 당신이 장관이 되어서 내 생각대로 검찰개혁을 이끌어달라’는 것이었다.
검찰개혁과 관련해 노 대통령은 ▲검찰의 수사권을 견제해 균형을 이루게 하고 ▲검찰에 대한 감찰권을 강화하며 ▲특별검사 및 고등검찰청 검사들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것을 제시했다. 특히 고위간부 인사에 다면(多面)평가제를 도입하고 형식적인 인사청문회 대신 실질적인 청문회가 되게 하고, 고검 인사는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등 인사 부문의 개혁에 대해 힘주어 강조했다.
법무부장관 문제에 대해서는 “강 장관은 어차피 총선을 거쳐 국회로 나갈 사람이니 두세 달 인사를 앞당긴다 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검찰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갈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개혁을 지속해 가야 하는데 지금이 가장 어려운 때인 만큼 당신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당시 강 장관으로는 송광수 검찰총장 체제의 검찰을 통제할 수 없으니 내가 나서서 그 역할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말미에 “눈 딱 감고 서명만 하시면 된다. 도와달라”고 부러지게 말했다.
대통령이 면전에서, 그것도 함께 식사를 하면서 꺼내놓는 제안을 대놓고 거절하는 사람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설사 대통령과 생각이 다르다 해도 그 앞에서는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하는 게 예의다. 노 대통령이 입각(入閣) 얘기를 꺼내기 전, 검찰개혁은 물론 자신이 걸어온 길이나 인간적인 측면 등에 대해 진솔하게 말한 것도 내가 응당 법무부장관 자리를 맡을 것으로 생각했던 까닭일 것이다.
더욱이 선거 때 맞은편에 섰던 ‘적군’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그런 자리를 만들고 또 입각 제안까지 내놓은 것은 인간적으로도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고마운 처사였다. ‘나 같으면 이렇게 못했을 것이다. 아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속으로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는 견디기 힘들 만큼 인간적 갈등이 일었다.
“내가 고단수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나는 관심도 없었고 싫기도 했다. 그렇다고 대통령 면전에서 곧이곧대로 그렇게 잘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앞서 양인석 비서관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한나라당의 제안을 뿌리친 사정을 노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도저히 한나라당 뒤통수를 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돌려 얘기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노 대통령보다도 옆에 앉은 문 수석이 더 당혹스러워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대통령의 호의를 거절하는 게 미안하고 예우가 아닌 듯싶어 화제를 돌렸다.
“항간에서는 대통령께서 굉장히 포용력 있고 또 사람들을 끌어당길 때 단수로 치면 고(高)단수라고들 하더군요.”
노 대통령은 환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제가 포용력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단수인 것은 맞습니다.”
노 대통령은 더는 입각 권유를 하지 않았다. 다만 이날 자리가 끝날 때까지 “정말 서운하네요”라는 말을 거듭했다. 그동안 나와 접촉했던 여느 정계 인사들처럼 노 대통령과의 만남과 인연 역시 그 한 차례로 끝이었다.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나면 모든 것이 허망하다고 하지 않는가. 나와, 대통령 및 그 측근들과는 이데올로기가 사뭇 다른 것이 내내 꽉 가슴을 짓누른 상태였다. 모든 것이 급조되고 인위적인 데서 무엇을 도모하겠는가. 출세를 위해서 불안한 공존(共存) 속에 내 몸을 팔 수 없다고 거절한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리라 지금도 자위(自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