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6년 대한웅변협회에서 金大中과 처음 만나
⊙ 1968년 만난 朴正熙, “내가 장기집권 꾀하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하라”
⊙ 후보지명권 행사 주장하는 珍山에게 “당내 원로 합의에 의한 후보 지명” 逆제안, 大選 후보 競選 유도
⊙ 신민당 후보 지명대회에서 黨權을 매개로 李哲承 측 趙淵夏씨와 협상해 지지 이끌어내
金相賢
⊙ 77세. 한영高 중퇴.
⊙ 제6·7·8·14·15·16대 국회의원, 김대중 대통령후보 비서실장,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권한대행,
통일민주당 부총재,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회 의장, 국민회의 고문,
대한산악회장, 아시아산악연맹 회장,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고문 역임.
유신반대로 2년간 복역,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2년3개월간 복역.
⊙ 1968년 만난 朴正熙, “내가 장기집권 꾀하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하라”
⊙ 후보지명권 행사 주장하는 珍山에게 “당내 원로 합의에 의한 후보 지명” 逆제안, 大選 후보 競選 유도
⊙ 신민당 후보 지명대회에서 黨權을 매개로 李哲承 측 趙淵夏씨와 협상해 지지 이끌어내
金相賢
⊙ 77세. 한영高 중퇴.
⊙ 제6·7·8·14·15·16대 국회의원, 김대중 대통령후보 비서실장,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권한대행,
통일민주당 부총재, 민주당 최고위원, 새정치국민회의 지도위원회 의장, 국민회의 고문,
대한산악회장, 아시아산악연맹 회장,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고문 역임.
유신반대로 2년간 복역,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2년3개월간 복역.
잡초 같던 젊은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6·25 때 공비(共匪)들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마을 부녀자들과 함께 국군에게 학살당했다. 서울에서 나와 함께 자취를 하던 형(김상수)은 6·25 때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된 후 행방불명이 됐다. 내 밑으로는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세 명이 있었지만, 내 힘으로는 그들을 건사할 수 없었다. 동생들은 친척들에게 의지하다가 그게 안 되면 고아원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모진 삶을 살아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부산 피란 시절에는 구두닦이를 했다. 휴전 후에는 상경해서 신문팔이를 하면서 한영고등학교 야간부에 다녔다. 어떻게든 학업을 마쳐보려 했지만, 결국 3학년 2학기 때 중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담임선생님이던 황종원 선생님이 직장을 소개해 주려 했으나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산됐다. ‘전라도’라는 이유로 까닭 모를 차별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 일은 내게 상처로 남았다.
1953년 첫눈이 내리던 생일날 하루종일 굶고 남산에서 밤을 새우면서 나는 결심했다. 나처럼 춥고 배고프고 집없는 사람들, 상처받고 피 흘리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겠다고,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으면서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정치가가 되겠다고….
野黨과의 첫 인연
1954년 4월 황종원 선생님의 소개로 고시위원회(이승만 정부 시절 인사담당 기관) 사환으로 취직했다. 박봉이지만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던 당시가 내 젊은 시절 가운데 그나마 안정되고 미래를 설계할 여유를 가질 수 있던 때였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 고시위원회가 폐지되면서 나는 다시 실업자가 됐다.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나는 친구 윤재식·김방정 등과 함께 문맹퇴치운동 농촌계몽운동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정치가가 되려면 다양한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는 서울 인사동의 민주당사를 찾아가서 섭외부장 정일형(鄭一亨) 박사를 만났다. 정 박사는 우리를 격려해 주면서 미국인 선교사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나는 친구들과 전라도 일대의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 앞에서 농촌생활개선, 애국, 이승만 정부의 실정(失政)비판 등을 주제로 시국강연을 했다.
강연에서 돌아온 후 정일형 박사를 뵈러 다시 민주당사를 찾아갔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대표최고위원실에는 신익희(申翼熙)·조병옥(趙炳玉)·장면(張勉) 선생 등 당대의 거물 정치인들이 앉아 있었다. 정일형 박사가 나를 신익희 선생에게 소개했다. 신익희 선생은 “자넬 위해 글을 하나 써줌세”라더니 화선지를 펼쳤다. 일필휘지하고 난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때, 우남(雩南)보다 낫지요?”
대선(大選)을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경쟁심리 같은 게 느껴졌다. 신익희 선생이 내게 써준 내용은 ‘우리나라 앞날이 김상현의 두 어깨에 달려 있으니 분발하라’는 것이었는데, 워낙 정처없이 살다 보니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야당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나는 정치유세장을 쫓아다니면서 웅변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1956년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고려대 주최 아남민국 모의국회에서 1등상(부통령상)을 받은 것은, 어떤 때는 매혈(賣血)까지 해가면서 어렵게 살던 그 시절 내게 큰 힘이 되었다.
金大中과의 만남
여기에 고무된 나는 본격적으로 웅변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대한웅변협회에 가입한 것도 그때였다. 나는 웅변협회 학생부장으로 일하면서 저녁에는 협회 부설(附設) 동양웅변전문학원에 나가 웅변공부를 했다.
그러던 1956년 어느 날이었다. 30대 초반의 멀끔하게 잘생긴 젊은이가 동양웅변전문학원 부원장으로 왔다. 그가 바로 김대중(金大中)씨였다. 목포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는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당시 그는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살림이 무척 어려웠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김대중씨에게는 평생 ‘용공(容共)’이라는 딱지가 붙어다녔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그런 기미를 느낀 적이 결코 없다.
김대중씨는 1959년 강원도 인제 재선거에 출마했다. 나도 열심히 선거운동을 도왔다. 하지만 군인이 대다수인 그곳에서, 자유당 정권의 조직적인 방해로 유권자와의 접촉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씨는 낙선했다. 얼마 후 나는 군(軍)에 자원입대했다.
1960년 4·19가 일어났다. 당시 부산8기지창에서 군(軍)복무 중이던 나는 3·15 부정선거 직후 서울로 휴가를 나왔다가 학생시위에 휘말렸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下野)한 후 거리에서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다가 계엄군에 의해 ‘학생대표’로 지목되어 시국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이재형 국회부의장)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해 연말 나는 친구 소개로 만난 아내 정희원(鄭熙媛)과 결혼을 했다. 처가는 수원에서 양조장을 하는 부잣집이었고, 아내는 숙명여대를 나온 재원(才媛)이었다. 장인 장모는 귀한 딸이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나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처남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해야 한다”고 거들어준 덕분에 아내와 결혼할 수 있었다.
1963년 8월 나는 육군병장으로 제대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육군대장으로 전역하는 날이었다.
6·3사태 당시 의원직 사퇴 반대
제대 직후 나는 민주당에 입당했다. 나는 서울 서대문갑(甲) 부위원장 겸 민주당 중앙당 선전부 차장을 맡았다. 부장은 김대중 의원이었다. 그는 6대 총선 때 고향 목포에서 당선됐다.
나는 열심히 사람들을 사귀었다. 당시 야당은 민주당 구파(舊派) 중심인 민정당(民政黨)과 신파(新派) 중심인 민주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김대중씨는 물론 나도 굳이 따지자면 신파였지만, 나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았다.
1965년 5월 민정당과 민주당은 민중당으로 통합했다. 대표최고위원으로는 박순천(朴順天) 여사가 뽑혔다.
당시 정국은 한일(韓日)국교정상화반대 문제로 들끓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6월 3일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맞섰다.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됐다.
원래 민중당은 의원총회에서 한일협정 비준을 막지 못할 경우 의원직을 총사퇴하기로 했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민중당 임시 전당대회가 열렸다. 나는 제일 먼저 긴급동의 발언권을 얻어 단상(壇上)으로 나갔다.
“의원직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비유하자면 전쟁터에서 군인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인이나 작가가 붓을 쥐고 있을 때 언론인이고 작가지 붓을 놓고서야 무슨 언론인이고 작가입니까? 끝까지 의원직을 지키면서 굴욕외교비준 반대 또는 무효화 투쟁을 벌이는 것이 옳습니다.”
강경파 쪽 청년당원들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와 내 마이크를 뺏고, 멱살을 잡아 연단 밑으로 끌어내렸다. 전당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결국 의원직 총사퇴를 주장하던 강경파의 수장(首長)인 윤보선(尹潽善) 의원을 비롯해 정성태·김도연(金度演)·서민호(徐珉濠)·정일형·정해영(鄭海永)·윤제술(尹濟述)·김재광 의원 등이 의원직을 던졌다.
‘記者團 공천’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국회의원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 5·16으로 중단된 지방자치가 부활하면 시(市)의원을 해보는 게 꿈이었다. 감히 국회의원을 꿈꾸기에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가 왔다.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한 8명 의원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보궐선거가 실시되게 된 것이다. 선거일은 1965년 11월 9일이었다.
나는 경험이라도 쌓아보겠다는 심정으로 출마를 결심했다. 북창동의 개인사무실로 김대중 의원을 찾아갔다. 지난 10년간 친형제처럼 지내온 터라 그와 제일 먼저 의논하고 싶었다. 내 얘기를 들은 그는 “국회의원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닐세”라면서 “자네는 이담에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 시의원이나 나가라”고 했다. 당연히 반가워하면서 힘껏 밀어주겠다고 나설 줄 알았는데, 서운했다.
서대문 갑구에 공천(公薦)신청을 낸 사람은 14명이나 됐다. 변호사, 전직 국회의원,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이들이었다. 아무도 내가 공천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공천을 받은 것이다. 당내에서는 “그런 이름도 돈도 경력도 없는 젊은 친구를 내보낼 수가 있느냐?”, “세상에서 민중당에는 사람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 친구 한 마흔 표나 얻겠느냐?”는 등 수군거림이 있었다. 제일 놀라워한 사람은 김대중씨였다.
사람들은 ‘기자단(記者團) 공천’이라고 했다. 야당을 출입하던 기자들이 공천심사위원들에게 “김상현은 우리 기자들이 민다”면서 적극 추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대문 갑구에 출마한 사람은 모두 7명이었다. 단상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구두닦이도 하고, 신문배달도 하고, 한 끼 밥과 하룻밤 잠자리를 얻기 위해 피를 팔기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 제 앞에 서 계신 여러분의 구두를 닦은 손이 바로 이 손이고, 여러분의 가정에 신문을 집어넣은 손이 바로 이 손입니다. 구두를 닦는다는 것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요, 신문을 배달한다는 것은 새롭고 올바른 세상소식을 전해준다는 말입니다. 저는 언제나 신문을 배달하고 구두를 닦는 심정으로 정치를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 사람이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면 찍지 마십시오. 하지만 저를 통해 여러분의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면, 돈이 없다면, 배가 고프다면, 춥다면, 쓸쓸하고 외로우시다면, 그런 분은 저를 찍어주십시오.”
예나 지금이나 국회의원들은 도로를 닦아준다, 다리를 놓아준다 하면서 지역공약으로 표를 얻으려 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지역공약을 하지 않았다. 유세장에서도 나는 당당하게 얘기했다.
“국회에는 200명이 넘는 국회의원이 있으며 다들 지역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예산을 편성하는 데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경상도 지방에 수리(水利)시설이 필요하다면 서대문구 아스팔트 포장 예산을 경상도로 돌리고, 전라도 지방에 수재가 났다면 서대문구 상수도 시설 예산을 전라도로 돌려야 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서대문구는 작은 가지에 불과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나무라는 그 자체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물을 주고 비료를 뿌려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무 전체를 가꾸자는 사람이지, 뿌리는 썩는데 서대문이라는 작은 가지 하나를 보호하는 데 급급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대문의 발전을 위해 싸우는 작은 정치인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뜻으로 찍는 표라면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 나를 찍지 못하겠으면, 김상현 군을 찍어주시오”
홍은동 산꼭대기 판자촌 주민들을 찾아갔다. 50명가량의 나이 든 주민들이 내게 말했다.
“우리 동네 표가 모두 2000표인데, 우리가 그 대표다. 상수도를 놔주겠다는 약속만 해라. 그러면 당신을 찍어주겠다.”
나는 “보궐선거로 뽑히더라도 임기가 1년 반 남짓인데, 그동안에 못 지킬 약속이 뻔한데 어떻게 거짓말을 합니까? 거짓말을 해서 1년 반짜리 국회의원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노인 한 분이 말했다. “좋다. 그런 정신과 자세를 영원히 간직해라. 우리가 지켜볼 것이다.”
그 동네에서는 나중에 80%의 몰표가 쏟아졌다.
가장 버거운 상대는 공화당 후보 임흥순(任興淳)씨였다. 그는 자유당 시절 서울시장 등을 지낸 거물이었다. 무명(無名)의 젊은이였던 나는 유세 때면 그의 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유권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다른 후보들은 그를 자유당 잔당, 부정선거의 원흉(元兇)이라고 비난했지만, 나는 그런 인신공격을 삼갔다. 대신 그에게, 유권자들 앞에서 “많은 관록을 쌓은 정계 원로이신 임 선생님께서 자식 같은 사람 키워주시는 의미에서 입후보를 사퇴하신다면 훌륭한 귀감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인신공격에 시달리던 임흥순씨는 그게 고마웠던 모양인지 마지막 유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국회에 보내주신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찍지 못하시겠다면 여기 젊은 청년 김상현 군을 찍어주십시오.”
임흥순씨의 이 한마디는 결정적이었다. 나는 조직원들을 총동원해서 이 사실을 열심히 전파(傳播)했다. 결국 나는 1만1402표를 얻어 당선됐다. 임흥순씨는 9103표를 얻었다.
《경향신문》 강제 매각 사건
이렇게 해서 나는 제6대 국회의원이 됐다. 내 나이 서른 살 때였다. 김대중씨가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도 1963년 제6대 총선이었다. 젊은 시절 나는 가끔 김대중씨에게 농담을 했다.
“나도 형님처럼 6대 국회에 등원을 했소.”
“예끼, 이 사람아. 나는 5대 국회였어. (김대중씨는 5·16 직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등원하지 못했음)”
“등원도 못 했잖습니까?”
“그래도 의원등록은 했어.”
1년 반의 짧은 임기였지만, 열심히 일했다. 1966년 어느 날 점잖게 생긴 부인이 날 찾아왔다. 이준구(李俊九) 《경향신문》 사장 부인이었다. 당시 이준구 사장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빌미로 신문사를 공매에 넘겨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이 사장 부인은 울면서 “여러 야당 의원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무서워한다. 김 의원님은 이번에 처음 당선된 초선의원이라 정의감이 있을 것 같아 찾아왔다”고 호소했다. 그는 중앙정보부 국장이 경향신문사 간부를 협박하는 녹음테이프를 넘겨주었다.
국회 문공위원회에서 나는 홍종철 공보부 장관에게 《경향신문》 사태에 대해 따졌다. 다음 날 중앙정보부 언론담당 과장이 찾아왔다. 그는 “잘못하면 김 의원만 다친다”면서 “우리 부장님(김형욱 부장)이 한 번 만나자고 한다”고 말했다. 나는 거절했다.
일주일 후 나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대(對)정부질의를 하면서, 문제의 녹음테이프를 공개했다. 테이프에는 중앙정보부 국장이 경향신문사 간부에게 대놓고 “요컨대 정부에서 신문사가 필요하니 크게 밑지는 가격으로 달라”고 말하는 내용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정 총리와 관련 국무위원들은 “신문사 공매에 간여한 바 없다”고 잡아뗐다.
국회에서 문제가 되자, 이준구 사장은 석방되고, 이 문제에 관여했던 중앙정보부 간부들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경향신문사는 결국 정부의 뜻대로 처리되고 말았다.
全國區는 錢國區
1967년 2월 7일 통합야당인 신민당이 출범했다. 자유당 시절 야당이던 민주당은 장면 정권 시절 구파 의원들이 신민당을 만들어 딴살림을 차리면서 분열됐다. 이들은 3공(共) 출범 이후 민정당(구파)과 민주당(신파)으로 분열됐다. 6·3사태 이후 두 당은 민중당으로 하나가 됐지만, 다시 대여(對與) 투쟁에서 강경론을 내세우는 윤보선씨 등 구파가 신한당을 만들어 나갔다. 그것이 다시 하나가 된 것이다.
원래 민중당은 재야(在野)의 명망가였던 유진오(兪鎭午) 전 고려대 총장을 대통령 후보로 영입했었다. 하지만 신민당이 출범하면서 대통령 후보 자리는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유 전 총장은 당수를 맡았다.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에게 116만여 표 차이로 패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바로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민중당과 신한당이 신민당으로 통합되면서 서대문 갑구에는 원래 주인이던 김재광씨가 돌아왔다. 나는 마포구에 공천신청을 냈지만, 김홍일(金弘壹) 장군에게 밀려 떨어졌다. 남은 길은 전국구(全國區)뿐이었다. 전국구 후보가 되려면 공천헌금을 내야 했다. 최하가 1500만원(굳이 현재 가치로 따지자면 약 15억원)이었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공천헌금은 그때 이미 관례화되어 있었다. 전국구(錢國區)였다. 우리 집에는 단돈 5만원도 없었다. 유진오 당수를 찾아갔다.
“어떻게든 원내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자라나는 싹을 잘라서야 되겠습니까?”
유 당수가 말했다.
“14번에 넣어주지. 1000만원만 만들어 오게.”
“그런 큰돈이 제겐 없습니다.”
“어떻게 800만원이라도 안 되겠는가?”
“300만원이라면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렵겠네. 전국구 공천을 나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포기했다. 이 기회에 공부나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순천 여사와 김대중씨가 내 여비를 대주는 것은 물론 유학기간 동안 가족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전국구 후보자 명단이 나왔다. 나는 17번이었다. 당선 안정권은 14번까지였다. 15번까지는 1500만~2000만원의 공천헌금을 낸 사람들이었고, 16번부터는 ‘당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전국구 후보였던 재일동포 김재화씨가 간첩혐의로 구속되는 바람에 나는 한 단계 올라가 16번이 됐다.
나는 목포로 내려가 김대중씨의 지원유세를 했다. 개표일, 개표 결과를 바라보고 있는데 달려온 기자들이 말했다. “김 의원, 축하합니다.”
在日동포 실태 조사와 《다리》 창간
다시 국회의원이 된 나는 뭔가 나만의 전문영역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노동문제, 공해문제 등에 관심이 있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해외동포 문제에 주목했다.
나는 1968년 7월, 40일간의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재일동포 실태 조사를 해보니, 정부에 교민(僑民)정책은 없었다. 기민(棄民)정책만 있을 뿐이었다. 귀국 후 나는 <재일동포실태조사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한 데 이어, 이를 바탕으로 《재일한국인-교포80년사》를 냈다.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어주었다.
그해 12월, 정일권 국무총리가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나와 만난 정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께서 김 의원 책을 보고, 대량 구입해서 일본으로 보내라고 공보부 장관에게 명하셨습니다. 공화당에도 김 의원 같은 분이 있어야 한다면서 칭찬이 대단하십니다.”
정 총리는 “일부 국무위원들이 ‘어떻게 일개 야당 의원이 낸 책을 예산으로 구입하느냐’고 반대했지만, ‘대통령 각하 지시’라는 말로 무마시켰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재일한국인-교포80년사》 5000부를 공보부에 납품하고 책값으로 600만원을 받았다. 나는 이 돈을 가지고 해외교포문제연구소를 확대 개편하는 한편, 1970년 9월 잡지 《다리》를 창간했다. 이홍구(李洪九·전 국무총리), 장을병(張乙炳·전 성균관대 총장), 이어령(李御寧·전 문화부 장관), 정광모(鄭光模), 남재희(南載熙·전 노동부 장관), 한승헌(韓勝憲·전 감사원장) 등 쟁쟁한 지식인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다리》지는 1971년 2월 문학평론가 임중빈(任重彬)씨가 쓴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이 문제가 되어 윤재식 사장, 윤형두(尹炯斗·현 범우사 대표) 등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필화(筆禍)사건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이들은 결국 무죄(無罪) 판결을 받고 석방되는데, 당시 담당 판사가 목요상(睦堯相) 전 국회의원(현 헌정회장)이었다.
朴 대통령에게 면담신청
1967년 6월 8일 치러진 제7대 총선에서 정부와 여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공화당은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129석을 차지했다. 야당 의석은 신민당 45석, 사회대중당 1석을 합쳐 46석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이 이렇게 무리수를 둔 것은 3선 개헌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신민당의 부정선거 규탄 투쟁으로 정국은 얼어붙었다. 1968년에 접어들면서는 1·21사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이 발생한다.
나는 안팎의 위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여야(與野) 영수(領袖)회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야당 안에서는 정권과의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 ‘사꾸라’로 몰리는 풍조가 조성되어 있었다.
나는 3월 6일 유진오 당수를 만나 영수회담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 당수는 “내가 영수회담을 제안한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 받아주겠느냐?”면서 회의적(懷疑的)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럼 제가 먼저 국회의원 입장에서 박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유진오 당수의 비서인 박찬세씨를 통해 이후락(李厚洛) 청와대비서실장에게 대통령 면담신청을 넣었다.
다음 날 나는 서울시청 인근 뉴서울호텔 커피숍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전 11시경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에 내 앞으로 연락이 온 것이 없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그 시절에는 그런 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전화를 받은 아내는 “청와대에서 이후락 실장이 아침부터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빨리 연결시켜 달라고 재촉이 심했다”고 말했다. 아내가 불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이후락 실장이 직접 받았다.
“아이고, 김 의원님. 왜 이렇게 통화가 어렵습니까? 각하께서 김 의원님의 면담신청을 받고 바로 만나자고 하십니다. 2시까지 들어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朴 대통령, 與野 領袖회담 흔쾌히 응낙
청와대로 갔더니 이후락 실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나를 안내했다. 집무실로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확대경으로 무슨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김 의원, 이거 좀 보시오. 김신조가 얘기한 비행장 시설을 고공(高空)촬영한 것이오. 비행장 시설 하나는 참 잘해 놓지 않았소?”
잠시 후 박 대통령은 자리에 앉았다. 이후 나는 박 대통령과 정치 현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석유세법 통과 등 정부정책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여야 관계의 경색 등에 대해 박 대통령이 여당이나 정보기관으로부터 일방적인 보고만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생각을 박 대통령에게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김 의원을 만나고 있는 것 아니오? 오늘 오전 시민회관에서 전국 도지사 회의에 참석하고 나오는데 이 실장이 김 의원의 면담신청에 대해 말하기에, 12시부터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지금 나에게 면담신청을 해놓은 여당 의원이 62명이오. 그걸 제쳐놓고 김 의원을 만나기로 한 겁니다.”
이때다 싶어 나는 여야 영수회담 얘기를 꺼냈다.
“이런 어려울 때일수록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여야 영수회담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박 대통령은 흔쾌히 응낙했다.
“좋습니다. 어떤 형식을 취할지는 야당 편한 대로 하세요. 내 쪽에서 회담을 먼저 제의하는 형식으로 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하고, 유 당수 쪽에서 먼저 제의하는 형식을 취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장소도 꼭 청와대가 아니라 우이동 같은 데도 좋습니다.”
“정치자금은 생선 먹듯 하라”
옆에서 이후락 비서실장이 거들었다.
“각하. 김상현 의원이 각하께 면담신청을 한 것은 오늘날 야당 분위기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칫 사꾸라로 몰려서 정치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박 대통령은 “김 의원 입장이 그렇다면, 오늘 김 의원이 오신 건 비밀로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떳떳했기 때문에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내 임기가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았소. 만약 앞으로 내가 장기집권을 꾀한다든가 하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을 하시오.”
“만에 하나라도 그런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되면, 각하와의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헤어지기 전 박 대통령은 말했다. “김 의원이라면 문을 열고 기다릴 테니 언제든지 연락하시오.”
박 대통령은 이후락 실장에게 뭐라고 귀엣말을 하고 난 후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 실장은 잠깐 자기 방에 들렀다 가라며, 2층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이 실장은 “각하께서 드리는 것”이라면서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받으면 내가 여기 온 뜻이 없어진다”며 사양했다.
내가 정계에 입문할 때, 민주당 원로인 이상철 전 국회부의장이 “정치를 하자면 돈이 필요한데, 정치자금을 받을 때는 생선 먹듯 하라”고 한 적이 있다. 가시 있는 생선을 먹으면 목에 걸리고, 부패한 생선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 나중에 탈이 날 수 있는 돈은 받지 말라는 얘기였다.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이 나와 박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발표하자 난리가 났다. 이발을 하다 말고 달려온 유진오 당수에게 나는 “이번은 첫 영수회담이니만큼 무엇을 한번에 얻겠다고 하기보다는 시국 전반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했다.
사꾸라
그런데 다음 날 유진오 당수 댁으로 갔더니, 그의 안색이 안 좋았다. 그는 “다 틀렸소, 다 틀렸소”라며 탄식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 중진들이, 만약 영수회담을 하면 사꾸라로 몰려 내 정치생명이 죽는 것은 물론, 우리 신민당까지 큰일 난다고 합디다.”
나는 모처럼 열린 박정희 정권과의 대화 창구가 막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이후 보름 동안 유진오 당수 댁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영수회담 수용을 권했다. 하지만 유 당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당내에서는 “김상현이 지가 뭔데 대통령과 면담을 하느냐?”는 성토의 소리가 나오더니, 급기야 중앙당 부·차장단에서 내 화형식까지 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김상현이가 체구는 작지만, 화형식에 사용할 허수아비만큼은 좀 큰 것으로 해달라”고 전했다. 화형식은 유야무야됐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과 유진오 당수의 영수회담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도 이런 야당을 보면서 ‘저런 야당에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와 만난 자리에서 분명히 “만약 앞으로 내가 장기집권을 꾀한다든가 하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을 하시오”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은 장기집권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3선 개헌을 단행한 것이다.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은 1969년 9월 13일 야당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본회의장 점거농성을 하고, 3000여 명의 학생이 의사당 밖에서 농성을 벌이자, 9월 15일 회의를 속개하기로 하고 산회(散會)를 선포했다. 그리고 야당 의원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9월 14일 새벽 2시50분, 공화당과 정우회, 일부 무소속 의원들을 태평로 국회제3별관으로 불러들여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개헌안 통과에 걸린 시간은 25분에 불과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제3별관으로 달려간 나는 투표함을 집어던지면서 노호(怒號)했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간 뒤였다. 3선 개헌을 막지 못한 야당은 무력감(無力感)에 빠져들었다.
40代 旗手論
이를 깨고 나온 사람이 김영삼(金泳三) 원내총무였다. 그는 1969년 11월 8일,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40대 기수론(旗手論)’의 막이 오른 것이다. 김영삼 의원의 출마선언은 광복 이후 60대 장로(長老)들이 지배해 온 야당 풍토에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뉴서울호텔에서 김대중 의원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김영삼 의원이 대선출마 선언을 했는데, 형님도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하십시오.”
김대중 의원은 깜짝 놀랐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하나도 준비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출마선언을 한단 말인가?”
김대중 의원은 그때까지 출마를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사실 1953년 3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민중당·신민당 원내총무 등을 역임한 김영삼 의원과는 달리, 김대중 의원은 의정(議政) 능력을 인정받고는 있었지만 대변인 이외에는 별다른 당직을 맡지 못했었다. 내가 말했다.
“출마선언이 곧 준비의 신호탄 아니겠습니까? 출마선언을 하면 사람도 모이게 마련입니다. 이번에 출마선언을 하지 못하면, 영원히 못하게 됩니다.”
“생각해 볼 테니, 하루만 시간을 주소.”
다음 날 우리는 뉴서울호텔 인근 한식집 풍림에서 만났다. 김대중 의원은 대선에 나서겠다고 했다. 김대중 의원은 1969년 11월 18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듬해 2월 12일에는 이철승(李哲承)씨가 출마 의사를 피력했다.
이런 40대의 도전에 대해 1970년 1월 26일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잡은 유진산(柳珍山) 당수는 “아직 정치적 미성년자에 지나지 않은 40대들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는 것은 구상유취(口尙乳臭)한 짓이다”라고 일축했다. 유 당수는 자신은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면서, 대신 후보지명권을 자기에게 달라고 주장했다.
逆제안
일부 당내 원로들도 대선출마 의사를 시사(示唆)하는 가운데, 9월 25일 상도동에 있는 유진산 당수 자택에서 김대중·김영삼·이철승 세 사람이 회동하기로 했다. 그 전날 저녁, 나는 뉴코리아호텔에서 김대중 의원과 만났다. 김 의원이 입을 열었다.
“진산에게 지명권을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게 되면 형님이 지명받지 못할 게 뻔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으니, 일단 시간을 달라고 합시다.”
그렇게 되자 언론에서는 “김영삼, 이철승씨는 유진산 당수에게 후보지명권을 맡겼는데, 김대중씨만 거부하고 있어 당이 파국에 처하게 됐다”는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김대중 의원을 지지하고 있던 신민당 원로 정일형, 김응주씨도 김대중 의원에게 “진산에게 지명권을 맡겨서 당이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내가 제안했다.
“진산 요구에 응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시비를 벌일 게 아니라, 우리가 진산에게 거꾸로 제안을 하면 어떨까요? 유진산 당수가 윤보선·박순천·유진오·이상철 선생 등 고문단, 양일동·홍익표 정무회의 부의장, 이재형·김홍일·서범석·윤제술 선생 등 원로들과 합의해서 단일 후보를 내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면 전당대회에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대의원들의 선택을 받는 거지요.”
정일형, 김응주씨는 좋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김대중 의원이 슬그머니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그가 말했다.
“이 사람아, 어쩌자고 그런 소릴 하나?”
“진산이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면 형님은 지명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산은 지금 흥분해 있습니다. 자기 권위를 형님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형님의 제안을 거부할 겁니다. 그럼 당을 깨는 것은 진산이지, 형님이 아니게 됩니다.”
김대중 의원도 수긍했다.
물밑에서 대의원 포섭
다음 날 우리는 당사로 갔다. 김대중 의원은 전날 나와 의논한 내용을 담은 문건(文件)을 유진산 당수에게 건넸다. 그걸 읽는 유진산 당수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유 당수는 “내일 아침 10시까지 통보하겠소”라고 말했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사를 나오면서 나는 김대중 의원에게 말했다.
“틀림없이 거부할 것입니다.”
며칠 후 유진산 당수는 중앙상무위원회 회의석상에서 일방적으로 김영삼 의원을 대선 후보로 지명했다. 김대중 의원이 여기에 불복하면서 신민당은 대선 후보 경선전으로 접어들었다.
48명의 신민당 의원 가운데 김대중 의원을 지지하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김영삼 의원이었고, 그 다음이 이철승씨였다. 9월 29일 후보지명대회 전날 나는 김대중 의원과 함께 전국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을 찾아다녔다.
“이번에 신민당 지명대회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김대중 선생 덕분입니다. 김대중 선생마저 후보지명권을 행사하겠다는 유진산 당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여러분이 서울에 올라올 일도 없었을 것이고, 올라왔다고 하더라도 박수나 치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국민 지지를 못 받는 진산의 지명을 받은 사람이, 진산 바짓가랑이 밑에서 나온 사람이 박정희와 싸울 수 있겠습니까?”
지명대회 날 아침 일찍부터 나는 서대문지구당 당원 200여 명에게 김대중 의원의 사진이 담긴 피켓과 ‘김대중 대통령 후보로 군사독재 끝장내자’는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전당대회장인 시민회관 앞에서 시위를 하게 했다. 이들은 대회장 입구에서 피켓을 흔들며 ‘김대중! 김대중!’을 연호(連呼)했다. 김대중 의원의 정치철학과 국회연설문이 담긴 소책자도 대의원에게 배포했다. 이런 것들은 그때까지는 없던 일들이었다.
李哲承 진영과의 제휴
지명대회가 시작되자 이철승씨는 “유진산 당수의 뜻대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선언했다. 그는 뒷일을 조연하(趙淵夏)씨에게 일임한 후 테니스를 치러 가 버렸다. 오전에 나온 《동아일보》 등에서는 이미 ‘김영삼씨, 신민당 대통령 후보 확실’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개표 결과 김영삼씨가 421표, 김대중씨가 382표를 얻었다. 총 885명의 대의원 가운데 지명에 필요한 과반수는 443명이었다. 김영삼씨가 과반수를 얻는 데 실패하는 바람에 2차 투표를 하게 됐다.
나는 이철승씨의 참모장격인 조연하씨를 만나, 김대중 의원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조연하씨는 각서를 요구했다. 나는 김대중씨로부터 “앞으로 모든 정치문제는 소석(素石·이철승씨의 아호)과 협의하여 결정하고, 앞으로 소석이 당권에 도전하는 경우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아서 조연하씨에게 전달했다. 김홍일 전당대회 의장이 2차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기타 16표.”
대역전극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김영삼 의원 측에서는 1000여 명 규모의 후보지명 축하연(祝賀宴)을 준비해 놓고 있다가 그걸 취소하느라고 혼이 났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은 후보지명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지역감정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 나는 김대중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를 비난하면서, 공화국연방제통일방안, 4대국 안전보장론, 향토예비군 폐지 등 참신한 공약을 내걸어 국민들의 마음을 샀다. 이에 맞서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 후보를 용공으로 매도하는 한편, 노골적인 관권(官權) 금권(金權)선거를 자행했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원래부터 당내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김대중 후보의 한계가 대선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김영삼 의원은 후보지명에 실패한 후 정권교체를 위해 김대중 후보를 전력을 다해 돕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는 부산 지역 유세에서 “김영삼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여러분이 원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인지, 김영삼 의원 본인의 유세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부산 지역의 신민당 지구당 위원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가운데는 “대통령은 박정희를 찍고, 다음 선거에서 국회의원은 나를 찍어달라”고 얘기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투표 전날, 부산 지역에는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부산시민들의 지역감정을 부추기려는 음모였다.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본격화된 것이 바로 이 1971년 대통령 선거였다. 하지만 그때는 지역감정이 있기는 했어도 약했다. 지역감정이 지금처럼 악화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7년 김대중·김영삼 대선 후보 단일화 실패이다.
결국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박정희 후보는 634만2828표(득표율 53.2％)를, 김대중 후보는 539만5900표(득표율 45.2％)를 얻었다.
DJ에게 朴 대통령 취임식 참석 권유
선거 결과가 나온 후 나는 김대중 후보에게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성명을 내고 박 대통령에게 축하화분을 보내주라고 권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그런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김대중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화를 벌컥 냈다.
“이 사람아, 자네 말을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라며 들고 일어나 아우성을 치는데, 박정희의 당선을 인정하면 어떻게 하나?”
“부정선거를 못 막은 것도 우리의 능력 부족입니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합시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그에게 대통령 취임식은 꼭 참석하라고 권했다. 김대중씨도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7월 1일 아침, 동교동으로 전화를 걸자 김대중씨가 전화를 받는 것이 아닌가?
“아니 취임식에 안 가고 왜 형님이 전화를 받으십니까?”
김대중씨는 불쾌한 목소리로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큰일 났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박 대통령과 김대중씨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중씨의 앞날이 걱정됐다. 나는 택시를 타고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사가 끝나려는 참이었다. 공화당의 길재호, 김성곤씨가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아이쿠, 김 의원이라도 와줘서 정말 고맙소.”
珍山파동
대선에서 패배한 신민당은 다시 한 번 홍역을 앓아야 했다. 1971년 5월 25일 제8대 총선을 앞두고 유진산 당수가 자신의 지역구인 영등포 갑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옮겨간 것이 발단이 됐다. 영등포 갑구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인 장덕진(張德鎭)씨가 공화당 후보로 출마할 예정이었다. 때문에 “진산이 박정희 정권과 뒷거래해 수억원을 받고 선거구를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원래 총선 공천은 유진산 당수와 김대중 후보가 상의해서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후보가 대선에서 패하면서 그의 발언권은 급속히 약해졌고, 진산이 독단적으로 공천을 좌우했다. 결국 반(反)진산계 청년당원들이 유진산씨 자택과 당사로 난입해 그에게 정계은퇴를 요구하는 소동을 벌였다. 이것이 ‘진산파동’이다.
김대중씨는 정일형, 홍익표, 고흥문씨 등 수습대책위원들과 의논해 진산을 제명하고 스스로 당수 권한대행을 맡기로 했다. 이를 논의하기 위한 운영위원회가 중앙당사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진산계인 양일동 부총재 측 청년당원들이 몰려와 난동을 부렸다.
이런 집안싸움 끝에 치러진 제8대 총선이었지만, 신민당은 204석의 의석 가운데 89석을 차지했다. 제7대 총선에 비해 2배나 의석이 증가했다. 그만큼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 염증을 내고 있었고, 제 역할을 하는 야당의 존재를 갈구하고 있었다.
이 선거에서 나는 서대문을(乙)에 출마해 당선됐다. 내 상대로 나선 공화당 후보는 아나운서로 유명했던 임택근씨였다. 나는 “국보적(國寶的)인 아나운서 임택근씨는 방송국으로 보내고, 정치가인 이 김상현이를 국회로 보내달라”고 유세했다. 김대중 전 후보도 내 유세를 적극 도왔다.
“김상현씨는 저와 어머니의 배만 다를 뿐 친형제나 다름없습니다. 김대중이 하면 김상현이고, 김상현이 하면 김대중입니다. 김상현의 승리는 김대중의 승리고, 김대중의 승리는 김상현의 승리인 것입니다.”
결국 나는 6만3575표를 얻어, 3만7210표를 얻은 임택근씨를 누르고 당선됐다.
동교동계의 태동
김대중 의원은 1971년 7월 2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권(黨權)에 도전했다. 진산계 등 범(汎)주류의 지원을 받는 김홍일씨와 진산계였다가 독립한 양일동씨가 경쟁자였다. 김홍일씨는 진산계는 물론 김영삼·이철승씨 등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국 3차 투표에서 김홍일씨가 444표를 얻어 370표를 얻은 김대중씨를 꺾고 당수가 됐다.
하지만 김홍일씨 측은 당내 여러 계파의 연합군이었던 반면, 김대중씨는 단일세력이었다. 차기 ‘대권주자 김대중’의 가능성을 본 당내 세력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교동계의 태동(胎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부산 피란 시절에는 구두닦이를 했다. 휴전 후에는 상경해서 신문팔이를 하면서 한영고등학교 야간부에 다녔다. 어떻게든 학업을 마쳐보려 했지만, 결국 3학년 2학기 때 중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담임선생님이던 황종원 선생님이 직장을 소개해 주려 했으나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산됐다. ‘전라도’라는 이유로 까닭 모를 차별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 일은 내게 상처로 남았다.
1953년 첫눈이 내리던 생일날 하루종일 굶고 남산에서 밤을 새우면서 나는 결심했다. 나처럼 춥고 배고프고 집없는 사람들, 상처받고 피 흘리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겠다고,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으면서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정치가가 되겠다고….
野黨과의 첫 인연
1954년 4월 황종원 선생님의 소개로 고시위원회(이승만 정부 시절 인사담당 기관) 사환으로 취직했다. 박봉이지만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던 당시가 내 젊은 시절 가운데 그나마 안정되고 미래를 설계할 여유를 가질 수 있던 때였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듬해 고시위원회가 폐지되면서 나는 다시 실업자가 됐다.
끼니와 잠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나는 친구 윤재식·김방정 등과 함께 문맹퇴치운동 농촌계몽운동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정치가가 되려면 다양한 경험을 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는 서울 인사동의 민주당사를 찾아가서 섭외부장 정일형(鄭一亨) 박사를 만났다. 정 박사는 우리를 격려해 주면서 미국인 선교사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나는 친구들과 전라도 일대의 섬들을 돌아다니면서 주민들 앞에서 농촌생활개선, 애국, 이승만 정부의 실정(失政)비판 등을 주제로 시국강연을 했다.
강연에서 돌아온 후 정일형 박사를 뵈러 다시 민주당사를 찾아갔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대표최고위원실에는 신익희(申翼熙)·조병옥(趙炳玉)·장면(張勉) 선생 등 당대의 거물 정치인들이 앉아 있었다. 정일형 박사가 나를 신익희 선생에게 소개했다. 신익희 선생은 “자넬 위해 글을 하나 써줌세”라더니 화선지를 펼쳤다. 일필휘지하고 난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때, 우남(雩南)보다 낫지요?”
대선(大選)을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경쟁심리 같은 게 느껴졌다. 신익희 선생이 내게 써준 내용은 ‘우리나라 앞날이 김상현의 두 어깨에 달려 있으니 분발하라’는 것이었는데, 워낙 정처없이 살다 보니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야당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나는 정치유세장을 쫓아다니면서 웅변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1956년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고려대 주최 아남민국 모의국회에서 1등상(부통령상)을 받은 것은, 어떤 때는 매혈(賣血)까지 해가면서 어렵게 살던 그 시절 내게 큰 힘이 되었다.
金大中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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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제6대 국회 시절의 김대중 의원. |
그러던 1956년 어느 날이었다. 30대 초반의 멀끔하게 잘생긴 젊은이가 동양웅변전문학원 부원장으로 왔다. 그가 바로 김대중(金大中)씨였다. 목포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는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당시 그는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살림이 무척 어려웠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바로 의기투합,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됐다. 김대중씨에게는 평생 ‘용공(容共)’이라는 딱지가 붙어다녔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그런 기미를 느낀 적이 결코 없다.
김대중씨는 1959년 강원도 인제 재선거에 출마했다. 나도 열심히 선거운동을 도왔다. 하지만 군인이 대다수인 그곳에서, 자유당 정권의 조직적인 방해로 유권자와의 접촉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씨는 낙선했다. 얼마 후 나는 군(軍)에 자원입대했다.
1960년 4·19가 일어났다. 당시 부산8기지창에서 군(軍)복무 중이던 나는 3·15 부정선거 직후 서울로 휴가를 나왔다가 학생시위에 휘말렸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下野)한 후 거리에서 사태의 평화적 수습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다가 계엄군에 의해 ‘학생대표’로 지목되어 시국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이재형 국회부의장)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해 연말 나는 친구 소개로 만난 아내 정희원(鄭熙媛)과 결혼을 했다. 처가는 수원에서 양조장을 하는 부잣집이었고, 아내는 숙명여대를 나온 재원(才媛)이었다. 장인 장모는 귀한 딸이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나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처남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해야 한다”고 거들어준 덕분에 아내와 결혼할 수 있었다.
1963년 8월 나는 육군병장으로 제대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육군대장으로 전역하는 날이었다.
6·3사태 당시 의원직 사퇴 반대
제대 직후 나는 민주당에 입당했다. 나는 서울 서대문갑(甲) 부위원장 겸 민주당 중앙당 선전부 차장을 맡았다. 부장은 김대중 의원이었다. 그는 6대 총선 때 고향 목포에서 당선됐다.
나는 열심히 사람들을 사귀었다. 당시 야당은 민주당 구파(舊派) 중심인 민정당(民政黨)과 신파(新派) 중심인 민주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김대중씨는 물론 나도 굳이 따지자면 신파였지만, 나는 거기에 구애받지 않았다.
1965년 5월 민정당과 민주당은 민중당으로 통합했다. 대표최고위원으로는 박순천(朴順天) 여사가 뽑혔다.
당시 정국은 한일(韓日)국교정상화반대 문제로 들끓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6월 3일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맞섰다.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됐다.
원래 민중당은 의원총회에서 한일협정 비준을 막지 못할 경우 의원직을 총사퇴하기로 했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민중당 임시 전당대회가 열렸다. 나는 제일 먼저 긴급동의 발언권을 얻어 단상(壇上)으로 나갔다.
“의원직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비유하자면 전쟁터에서 군인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인이나 작가가 붓을 쥐고 있을 때 언론인이고 작가지 붓을 놓고서야 무슨 언론인이고 작가입니까? 끝까지 의원직을 지키면서 굴욕외교비준 반대 또는 무효화 투쟁을 벌이는 것이 옳습니다.”
강경파 쪽 청년당원들이 단상으로 뛰어올라 와 내 마이크를 뺏고, 멱살을 잡아 연단 밑으로 끌어내렸다. 전당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결국 의원직 총사퇴를 주장하던 강경파의 수장(首長)인 윤보선(尹潽善) 의원을 비롯해 정성태·김도연(金度演)·서민호(徐珉濠)·정일형·정해영(鄭海永)·윤제술(尹濟述)·김재광 의원 등이 의원직을 던졌다.
‘記者團 공천’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국회의원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 5·16으로 중단된 지방자치가 부활하면 시(市)의원을 해보는 게 꿈이었다. 감히 국회의원을 꿈꾸기에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가 왔다.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한 8명 의원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보궐선거가 실시되게 된 것이다. 선거일은 1965년 11월 9일이었다.
나는 경험이라도 쌓아보겠다는 심정으로 출마를 결심했다. 북창동의 개인사무실로 김대중 의원을 찾아갔다. 지난 10년간 친형제처럼 지내온 터라 그와 제일 먼저 의논하고 싶었다. 내 얘기를 들은 그는 “국회의원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닐세”라면서 “자네는 이담에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 시의원이나 나가라”고 했다. 당연히 반가워하면서 힘껏 밀어주겠다고 나설 줄 알았는데, 서운했다.
서대문 갑구에 공천(公薦)신청을 낸 사람은 14명이나 됐다. 변호사, 전직 국회의원,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이들이었다. 아무도 내가 공천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공천을 받은 것이다. 당내에서는 “그런 이름도 돈도 경력도 없는 젊은 친구를 내보낼 수가 있느냐?”, “세상에서 민중당에는 사람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 친구 한 마흔 표나 얻겠느냐?”는 등 수군거림이 있었다. 제일 놀라워한 사람은 김대중씨였다.
사람들은 ‘기자단(記者團) 공천’이라고 했다. 야당을 출입하던 기자들이 공천심사위원들에게 “김상현은 우리 기자들이 민다”면서 적극 추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대문 갑구에 출마한 사람은 모두 7명이었다. 단상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구두닦이도 하고, 신문배달도 하고, 한 끼 밥과 하룻밤 잠자리를 얻기 위해 피를 팔기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 제 앞에 서 계신 여러분의 구두를 닦은 손이 바로 이 손이고, 여러분의 가정에 신문을 집어넣은 손이 바로 이 손입니다. 구두를 닦는다는 것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요, 신문을 배달한다는 것은 새롭고 올바른 세상소식을 전해준다는 말입니다. 저는 언제나 신문을 배달하고 구두를 닦는 심정으로 정치를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 사람이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면 찍지 마십시오. 하지만 저를 통해 여러분의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면, 돈이 없다면, 배가 고프다면, 춥다면, 쓸쓸하고 외로우시다면, 그런 분은 저를 찍어주십시오.”
예나 지금이나 국회의원들은 도로를 닦아준다, 다리를 놓아준다 하면서 지역공약으로 표를 얻으려 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지역공약을 하지 않았다. 유세장에서도 나는 당당하게 얘기했다.
“국회에는 200명이 넘는 국회의원이 있으며 다들 지역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예산을 편성하는 데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경상도 지방에 수리(水利)시설이 필요하다면 서대문구 아스팔트 포장 예산을 경상도로 돌리고, 전라도 지방에 수재가 났다면 서대문구 상수도 시설 예산을 전라도로 돌려야 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서대문구는 작은 가지에 불과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나무라는 그 자체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물을 주고 비료를 뿌려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무 전체를 가꾸자는 사람이지, 뿌리는 썩는데 서대문이라는 작은 가지 하나를 보호하는 데 급급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대문의 발전을 위해 싸우는 작은 정치인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뜻으로 찍는 표라면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 나를 찍지 못하겠으면, 김상현 군을 찍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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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대 국회의원 시절인 1966년 3월 15일 국회에서 대일청구권자금 사용안 반대 연설을 하고 있는 김상현 의원. 그는 이날 4시간30분간 연설을 해 제6대 국회에서 최장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웠다. |
“우리 동네 표가 모두 2000표인데, 우리가 그 대표다. 상수도를 놔주겠다는 약속만 해라. 그러면 당신을 찍어주겠다.”
나는 “보궐선거로 뽑히더라도 임기가 1년 반 남짓인데, 그동안에 못 지킬 약속이 뻔한데 어떻게 거짓말을 합니까? 거짓말을 해서 1년 반짜리 국회의원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노인 한 분이 말했다. “좋다. 그런 정신과 자세를 영원히 간직해라. 우리가 지켜볼 것이다.”
그 동네에서는 나중에 80%의 몰표가 쏟아졌다.
가장 버거운 상대는 공화당 후보 임흥순(任興淳)씨였다. 그는 자유당 시절 서울시장 등을 지낸 거물이었다. 무명(無名)의 젊은이였던 나는 유세 때면 그의 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유권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였다.
다른 후보들은 그를 자유당 잔당, 부정선거의 원흉(元兇)이라고 비난했지만, 나는 그런 인신공격을 삼갔다. 대신 그에게, 유권자들 앞에서 “많은 관록을 쌓은 정계 원로이신 임 선생님께서 자식 같은 사람 키워주시는 의미에서 입후보를 사퇴하신다면 훌륭한 귀감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인신공격에 시달리던 임흥순씨는 그게 고마웠던 모양인지 마지막 유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국회에 보내주신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찍지 못하시겠다면 여기 젊은 청년 김상현 군을 찍어주십시오.”
임흥순씨의 이 한마디는 결정적이었다. 나는 조직원들을 총동원해서 이 사실을 열심히 전파(傳播)했다. 결국 나는 1만1402표를 얻어 당선됐다. 임흥순씨는 9103표를 얻었다.
《경향신문》 강제 매각 사건
이렇게 해서 나는 제6대 국회의원이 됐다. 내 나이 서른 살 때였다. 김대중씨가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도 1963년 제6대 총선이었다. 젊은 시절 나는 가끔 김대중씨에게 농담을 했다.
“나도 형님처럼 6대 국회에 등원을 했소.”
“예끼, 이 사람아. 나는 5대 국회였어. (김대중씨는 5·16 직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등원하지 못했음)”
“등원도 못 했잖습니까?”
“그래도 의원등록은 했어.”
1년 반의 짧은 임기였지만, 열심히 일했다. 1966년 어느 날 점잖게 생긴 부인이 날 찾아왔다. 이준구(李俊九) 《경향신문》 사장 부인이었다. 당시 이준구 사장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빌미로 신문사를 공매에 넘겨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이 사장 부인은 울면서 “여러 야당 의원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무서워한다. 김 의원님은 이번에 처음 당선된 초선의원이라 정의감이 있을 것 같아 찾아왔다”고 호소했다. 그는 중앙정보부 국장이 경향신문사 간부를 협박하는 녹음테이프를 넘겨주었다.
국회 문공위원회에서 나는 홍종철 공보부 장관에게 《경향신문》 사태에 대해 따졌다. 다음 날 중앙정보부 언론담당 과장이 찾아왔다. 그는 “잘못하면 김 의원만 다친다”면서 “우리 부장님(김형욱 부장)이 한 번 만나자고 한다”고 말했다. 나는 거절했다.
일주일 후 나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대(對)정부질의를 하면서, 문제의 녹음테이프를 공개했다. 테이프에는 중앙정보부 국장이 경향신문사 간부에게 대놓고 “요컨대 정부에서 신문사가 필요하니 크게 밑지는 가격으로 달라”고 말하는 내용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정 총리와 관련 국무위원들은 “신문사 공매에 간여한 바 없다”고 잡아뗐다.
국회에서 문제가 되자, 이준구 사장은 석방되고, 이 문제에 관여했던 중앙정보부 간부들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경향신문사는 결국 정부의 뜻대로 처리되고 말았다.
全國區는 錢國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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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당과 신한당이 통합을 선언한 1967년 2월 7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지망된 윤보선씨와 당수로 선출된 유진오씨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유진오씨는 원래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영입됐었다. |
원래 민중당은 재야(在野)의 명망가였던 유진오(兪鎭午) 전 고려대 총장을 대통령 후보로 영입했었다. 하지만 신민당이 출범하면서 대통령 후보 자리는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유 전 총장은 당수를 맡았다.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후보에게 116만여 표 차이로 패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바로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민중당과 신한당이 신민당으로 통합되면서 서대문 갑구에는 원래 주인이던 김재광씨가 돌아왔다. 나는 마포구에 공천신청을 냈지만, 김홍일(金弘壹) 장군에게 밀려 떨어졌다. 남은 길은 전국구(全國區)뿐이었다. 전국구 후보가 되려면 공천헌금을 내야 했다. 최하가 1500만원(굳이 현재 가치로 따지자면 약 15억원)이었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는 공천헌금은 그때 이미 관례화되어 있었다. 전국구(錢國區)였다. 우리 집에는 단돈 5만원도 없었다. 유진오 당수를 찾아갔다.
“어떻게든 원내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자라나는 싹을 잘라서야 되겠습니까?”
유 당수가 말했다.
“14번에 넣어주지. 1000만원만 만들어 오게.”
“그런 큰돈이 제겐 없습니다.”
“어떻게 800만원이라도 안 되겠는가?”
“300만원이라면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렵겠네. 전국구 공천을 나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포기했다. 이 기회에 공부나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순천 여사와 김대중씨가 내 여비를 대주는 것은 물론 유학기간 동안 가족을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
전국구 후보자 명단이 나왔다. 나는 17번이었다. 당선 안정권은 14번까지였다. 15번까지는 1500만~2000만원의 공천헌금을 낸 사람들이었고, 16번부터는 ‘당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전국구 후보였던 재일동포 김재화씨가 간첩혐의로 구속되는 바람에 나는 한 단계 올라가 16번이 됐다.
나는 목포로 내려가 김대중씨의 지원유세를 했다. 개표일, 개표 결과를 바라보고 있는데 달려온 기자들이 말했다. “김 의원, 축하합니다.”
在日동포 실태 조사와 《다리》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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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한국인-교포80년사》. 이 책을 정부에 납품하고 받은 돈으로 《다리》를 창간했다. |
나는 1968년 7월, 40일간의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재일동포 실태 조사를 해보니, 정부에 교민(僑民)정책은 없었다. 기민(棄民)정책만 있을 뿐이었다. 귀국 후 나는 <재일동포실태조사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한 데 이어, 이를 바탕으로 《재일한국인-교포80년사》를 냈다.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어주었다.
그해 12월, 정일권 국무총리가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나와 만난 정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께서 김 의원 책을 보고, 대량 구입해서 일본으로 보내라고 공보부 장관에게 명하셨습니다. 공화당에도 김 의원 같은 분이 있어야 한다면서 칭찬이 대단하십니다.”
정 총리는 “일부 국무위원들이 ‘어떻게 일개 야당 의원이 낸 책을 예산으로 구입하느냐’고 반대했지만, ‘대통령 각하 지시’라는 말로 무마시켰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재일한국인-교포80년사》 5000부를 공보부에 납품하고 책값으로 600만원을 받았다. 나는 이 돈을 가지고 해외교포문제연구소를 확대 개편하는 한편, 1970년 9월 잡지 《다리》를 창간했다. 이홍구(李洪九·전 국무총리), 장을병(張乙炳·전 성균관대 총장), 이어령(李御寧·전 문화부 장관), 정광모(鄭光模), 남재희(南載熙·전 노동부 장관), 한승헌(韓勝憲·전 감사원장) 등 쟁쟁한 지식인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다리》지는 1971년 2월 문학평론가 임중빈(任重彬)씨가 쓴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이 문제가 되어 윤재식 사장, 윤형두(尹炯斗·현 범우사 대표) 등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필화(筆禍)사건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이들은 결국 무죄(無罪) 판결을 받고 석방되는데, 당시 담당 판사가 목요상(睦堯相) 전 국회의원(현 헌정회장)이었다.
朴 대통령에게 면담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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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2월 18일 충남도청에서 도정보고를 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뒤에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이 보인다. |
나는 안팎의 위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여야(與野) 영수(領袖)회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야당 안에서는 정권과의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 ‘사꾸라’로 몰리는 풍조가 조성되어 있었다.
나는 3월 6일 유진오 당수를 만나 영수회담 필요성을 역설했다. 유 당수는 “내가 영수회담을 제안한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 받아주겠느냐?”면서 회의적(懷疑的)인 태도를 보였다. 나는 “그럼 제가 먼저 국회의원 입장에서 박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유진오 당수의 비서인 박찬세씨를 통해 이후락(李厚洛) 청와대비서실장에게 대통령 면담신청을 넣었다.
다음 날 나는 서울시청 인근 뉴서울호텔 커피숍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전 11시경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에 내 앞으로 연락이 온 것이 없었는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휴대전화가 없던 그 시절에는 그런 식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전화를 받은 아내는 “청와대에서 이후락 실장이 아침부터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빨리 연결시켜 달라고 재촉이 심했다”고 말했다. 아내가 불러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이후락 실장이 직접 받았다.
“아이고, 김 의원님. 왜 이렇게 통화가 어렵습니까? 각하께서 김 의원님의 면담신청을 받고 바로 만나자고 하십니다. 2시까지 들어와 주실 수 있으십니까?”
朴 대통령, 與野 領袖회담 흔쾌히 응낙
청와대로 갔더니 이후락 실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나를 안내했다. 집무실로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확대경으로 무슨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김 의원, 이거 좀 보시오. 김신조가 얘기한 비행장 시설을 고공(高空)촬영한 것이오. 비행장 시설 하나는 참 잘해 놓지 않았소?”
잠시 후 박 대통령은 자리에 앉았다. 이후 나는 박 대통령과 정치 현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야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한 석유세법 통과 등 정부정책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나는 여야 관계의 경색 등에 대해 박 대통령이 여당이나 정보기관으로부터 일방적인 보고만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생각을 박 대통령에게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김 의원을 만나고 있는 것 아니오? 오늘 오전 시민회관에서 전국 도지사 회의에 참석하고 나오는데 이 실장이 김 의원의 면담신청에 대해 말하기에, 12시부터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지금 나에게 면담신청을 해놓은 여당 의원이 62명이오. 그걸 제쳐놓고 김 의원을 만나기로 한 겁니다.”
이때다 싶어 나는 여야 영수회담 얘기를 꺼냈다.
“이런 어려울 때일수록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여야 영수회담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박 대통령은 흔쾌히 응낙했다.
“좋습니다. 어떤 형식을 취할지는 야당 편한 대로 하세요. 내 쪽에서 회담을 먼저 제의하는 형식으로 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하고, 유 당수 쪽에서 먼저 제의하는 형식을 취하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장소도 꼭 청와대가 아니라 우이동 같은 데도 좋습니다.”
“정치자금은 생선 먹듯 하라”
옆에서 이후락 비서실장이 거들었다.
“각하. 김상현 의원이 각하께 면담신청을 한 것은 오늘날 야당 분위기로는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칫 사꾸라로 몰려서 정치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박 대통령은 “김 의원 입장이 그렇다면, 오늘 김 의원이 오신 건 비밀로 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떳떳했기 때문에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내 임기가 이제 2년밖에 남지 않았소. 만약 앞으로 내가 장기집권을 꾀한다든가 하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을 하시오.”
“만에 하나라도 그런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게 되면, 각하와의 약속을 꼭 지키겠습니다.”
헤어지기 전 박 대통령은 말했다. “김 의원이라면 문을 열고 기다릴 테니 언제든지 연락하시오.”
박 대통령은 이후락 실장에게 뭐라고 귀엣말을 하고 난 후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 실장은 잠깐 자기 방에 들렀다 가라며, 2층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이 실장은 “각하께서 드리는 것”이라면서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받으면 내가 여기 온 뜻이 없어진다”며 사양했다.
내가 정계에 입문할 때, 민주당 원로인 이상철 전 국회부의장이 “정치를 하자면 돈이 필요한데, 정치자금을 받을 때는 생선 먹듯 하라”고 한 적이 있다. 가시 있는 생선을 먹으면 목에 걸리고, 부패한 생선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 나중에 탈이 날 수 있는 돈은 받지 말라는 얘기였다.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이 나와 박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발표하자 난리가 났다. 이발을 하다 말고 달려온 유진오 당수에게 나는 “이번은 첫 영수회담이니만큼 무엇을 한번에 얻겠다고 하기보다는 시국 전반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권했다.
사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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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9월 14일 새벽 3선 개헌안이 통과된 후 국회제3별관으로 달려가 투표함을 집어던지면서 분노하는 김상현 의원. |
“당 중진들이, 만약 영수회담을 하면 사꾸라로 몰려 내 정치생명이 죽는 것은 물론, 우리 신민당까지 큰일 난다고 합디다.”
나는 모처럼 열린 박정희 정권과의 대화 창구가 막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이후 보름 동안 유진오 당수 댁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영수회담 수용을 권했다. 하지만 유 당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당내에서는 “김상현이 지가 뭔데 대통령과 면담을 하느냐?”는 성토의 소리가 나오더니, 급기야 중앙당 부·차장단에서 내 화형식까지 하겠다고 나섰다. 나는 “김상현이가 체구는 작지만, 화형식에 사용할 허수아비만큼은 좀 큰 것으로 해달라”고 전했다. 화형식은 유야무야됐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과 유진오 당수의 영수회담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내가 박정희 대통령이라도 이런 야당을 보면서 ‘저런 야당에 어떻게 나라를 맡기겠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와 만난 자리에서 분명히 “만약 앞으로 내가 장기집권을 꾀한다든가 하면, 김 의원이 앞장서서 극한투쟁을 하시오”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은 장기집권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3선 개헌을 단행한 것이다.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은 1969년 9월 13일 야당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본회의장 점거농성을 하고, 3000여 명의 학생이 의사당 밖에서 농성을 벌이자, 9월 15일 회의를 속개하기로 하고 산회(散會)를 선포했다. 그리고 야당 의원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9월 14일 새벽 2시50분, 공화당과 정우회, 일부 무소속 의원들을 태평로 국회제3별관으로 불러들여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개헌안 통과에 걸린 시간은 25분에 불과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제3별관으로 달려간 나는 투표함을 집어던지면서 노호(怒號)했다.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간 뒤였다. 3선 개헌을 막지 못한 야당은 무력감(無力感)에 빠져들었다.
40代 旗手論
이를 깨고 나온 사람이 김영삼(金泳三) 원내총무였다. 그는 1969년 11월 8일,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40대 기수론(旗手論)’의 막이 오른 것이다. 김영삼 의원의 출마선언은 광복 이후 60대 장로(長老)들이 지배해 온 야당 풍토에 큰 충격을 주었다. 나는 뉴서울호텔에서 김대중 의원을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김영삼 의원이 대선출마 선언을 했는데, 형님도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하십시오.”
김대중 의원은 깜짝 놀랐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하나도 준비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출마선언을 한단 말인가?”
김대중 의원은 그때까지 출마를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사실 1953년 3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민중당·신민당 원내총무 등을 역임한 김영삼 의원과는 달리, 김대중 의원은 의정(議政) 능력을 인정받고는 있었지만 대변인 이외에는 별다른 당직을 맡지 못했었다. 내가 말했다.
“출마선언이 곧 준비의 신호탄 아니겠습니까? 출마선언을 하면 사람도 모이게 마련입니다. 이번에 출마선언을 하지 못하면, 영원히 못하게 됩니다.”
“생각해 볼 테니, 하루만 시간을 주소.”
다음 날 우리는 뉴서울호텔 인근 한식집 풍림에서 만났다. 김대중 의원은 대선에 나서겠다고 했다. 김대중 의원은 1969년 11월 18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듬해 2월 12일에는 이철승(李哲承)씨가 출마 의사를 피력했다.
이런 40대의 도전에 대해 1970년 1월 26일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잡은 유진산(柳珍山) 당수는 “아직 정치적 미성년자에 지나지 않은 40대들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는 것은 구상유취(口尙乳臭)한 짓이다”라고 일축했다. 유 당수는 자신은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면서, 대신 후보지명권을 자기에게 달라고 주장했다.
逆제안
일부 당내 원로들도 대선출마 의사를 시사(示唆)하는 가운데, 9월 25일 상도동에 있는 유진산 당수 자택에서 김대중·김영삼·이철승 세 사람이 회동하기로 했다. 그 전날 저녁, 나는 뉴코리아호텔에서 김대중 의원과 만났다. 김 의원이 입을 열었다.
“진산에게 지명권을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게 되면 형님이 지명받지 못할 게 뻔합니다. 하지만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으니, 일단 시간을 달라고 합시다.”
그렇게 되자 언론에서는 “김영삼, 이철승씨는 유진산 당수에게 후보지명권을 맡겼는데, 김대중씨만 거부하고 있어 당이 파국에 처하게 됐다”는 보도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김대중 의원을 지지하고 있던 신민당 원로 정일형, 김응주씨도 김대중 의원에게 “진산에게 지명권을 맡겨서 당이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내가 제안했다.
“진산 요구에 응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시비를 벌일 게 아니라, 우리가 진산에게 거꾸로 제안을 하면 어떨까요? 유진산 당수가 윤보선·박순천·유진오·이상철 선생 등 고문단, 양일동·홍익표 정무회의 부의장, 이재형·김홍일·서범석·윤제술 선생 등 원로들과 합의해서 단일 후보를 내면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면 전당대회에서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대의원들의 선택을 받는 거지요.”
정일형, 김응주씨는 좋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김대중 의원이 슬그머니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그가 말했다.
“이 사람아, 어쩌자고 그런 소릴 하나?”
“진산이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면 형님은 지명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산은 지금 흥분해 있습니다. 자기 권위를 형님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형님의 제안을 거부할 겁니다. 그럼 당을 깨는 것은 진산이지, 형님이 아니게 됩니다.”
김대중 의원도 수긍했다.
물밑에서 대의원 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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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9월 25일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세 사람이 유진산 당수 자택을 방문해 후보 단일화를 협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대중, 유진산 당수, 고흥문 사무총장, 이철승, 김영삼. |
“틀림없이 거부할 것입니다.”
며칠 후 유진산 당수는 중앙상무위원회 회의석상에서 일방적으로 김영삼 의원을 대선 후보로 지명했다. 김대중 의원이 여기에 불복하면서 신민당은 대선 후보 경선전으로 접어들었다.
48명의 신민당 의원 가운데 김대중 의원을 지지하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김영삼 의원이었고, 그 다음이 이철승씨였다. 9월 29일 후보지명대회 전날 나는 김대중 의원과 함께 전국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을 찾아다녔다.
“이번에 신민당 지명대회가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김대중 선생 덕분입니다. 김대중 선생마저 후보지명권을 행사하겠다는 유진산 당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여러분이 서울에 올라올 일도 없었을 것이고, 올라왔다고 하더라도 박수나 치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국민 지지를 못 받는 진산의 지명을 받은 사람이, 진산 바짓가랑이 밑에서 나온 사람이 박정희와 싸울 수 있겠습니까?”
지명대회 날 아침 일찍부터 나는 서대문지구당 당원 200여 명에게 김대중 의원의 사진이 담긴 피켓과 ‘김대중 대통령 후보로 군사독재 끝장내자’는 등의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전당대회장인 시민회관 앞에서 시위를 하게 했다. 이들은 대회장 입구에서 피켓을 흔들며 ‘김대중! 김대중!’을 연호(連呼)했다. 김대중 의원의 정치철학과 국회연설문이 담긴 소책자도 대의원에게 배포했다. 이런 것들은 그때까지는 없던 일들이었다.
李哲承 진영과의 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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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4월 18일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김대중 후보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희호 여사, 권노갑씨, 김상현 의원. |
나는 이철승씨의 참모장격인 조연하씨를 만나, 김대중 의원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조연하씨는 각서를 요구했다. 나는 김대중씨로부터 “앞으로 모든 정치문제는 소석(素石·이철승씨의 아호)과 협의하여 결정하고, 앞으로 소석이 당권에 도전하는 경우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아서 조연하씨에게 전달했다. 김홍일 전당대회 의장이 2차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기타 16표.”
대역전극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김영삼 의원 측에서는 1000여 명 규모의 후보지명 축하연(祝賀宴)을 준비해 놓고 있다가 그걸 취소하느라고 혼이 났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은 후보지명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지역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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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4월 10일 부산유세에서 김영삼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손을 들어주며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원래부터 당내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김대중 후보의 한계가 대선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김영삼 의원은 후보지명에 실패한 후 정권교체를 위해 김대중 후보를 전력을 다해 돕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는 부산 지역 유세에서 “김영삼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여러분이 원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인지, 김영삼 의원 본인의 유세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부산 지역의 신민당 지구당 위원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가운데는 “대통령은 박정희를 찍고, 다음 선거에서 국회의원은 나를 찍어달라”고 얘기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투표 전날, 부산 지역에는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부산시민들의 지역감정을 부추기려는 음모였다.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본격화된 것이 바로 이 1971년 대통령 선거였다. 하지만 그때는 지역감정이 있기는 했어도 약했다. 지역감정이 지금처럼 악화된 결정적인 계기는 1987년 김대중·김영삼 대선 후보 단일화 실패이다.
결국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박정희 후보는 634만2828표(득표율 53.2％)를, 김대중 후보는 539만5900표(득표율 45.2％)를 얻었다.
DJ에게 朴 대통령 취임식 참석 권유
선거 결과가 나온 후 나는 김대중 후보에게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성명을 내고 박 대통령에게 축하화분을 보내주라고 권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신문에는 그런 얘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김대중씨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화를 벌컥 냈다.
“이 사람아, 자네 말을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라며 들고 일어나 아우성을 치는데, 박정희의 당선을 인정하면 어떻게 하나?”
“부정선거를 못 막은 것도 우리의 능력 부족입니다.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합시다.”
하지만 김대중씨는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나는 그에게 대통령 취임식은 꼭 참석하라고 권했다. 김대중씨도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7월 1일 아침, 동교동으로 전화를 걸자 김대중씨가 전화를 받는 것이 아닌가?
“아니 취임식에 안 가고 왜 형님이 전화를 받으십니까?”
김대중씨는 불쾌한 목소리로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큰일 났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박 대통령과 김대중씨는 돌이킬 수 없는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중씨의 앞날이 걱정됐다. 나는 택시를 타고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사가 끝나려는 참이었다. 공화당의 길재호, 김성곤씨가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아이쿠, 김 의원이라도 와줘서 정말 고맙소.”
珍山파동
대선에서 패배한 신민당은 다시 한 번 홍역을 앓아야 했다. 1971년 5월 25일 제8대 총선을 앞두고 유진산 당수가 자신의 지역구인 영등포 갑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으로 옮겨간 것이 발단이 됐다. 영등포 갑구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인 장덕진(張德鎭)씨가 공화당 후보로 출마할 예정이었다. 때문에 “진산이 박정희 정권과 뒷거래해 수억원을 받고 선거구를 팔아먹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원래 총선 공천은 유진산 당수와 김대중 후보가 상의해서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후보가 대선에서 패하면서 그의 발언권은 급속히 약해졌고, 진산이 독단적으로 공천을 좌우했다. 결국 반(反)진산계 청년당원들이 유진산씨 자택과 당사로 난입해 그에게 정계은퇴를 요구하는 소동을 벌였다. 이것이 ‘진산파동’이다.
김대중씨는 정일형, 홍익표, 고흥문씨 등 수습대책위원들과 의논해 진산을 제명하고 스스로 당수 권한대행을 맡기로 했다. 이를 논의하기 위한 운영위원회가 중앙당사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진산계인 양일동 부총재 측 청년당원들이 몰려와 난동을 부렸다.
이런 집안싸움 끝에 치러진 제8대 총선이었지만, 신민당은 204석의 의석 가운데 89석을 차지했다. 제7대 총선에 비해 2배나 의석이 증가했다. 그만큼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 염증을 내고 있었고, 제 역할을 하는 야당의 존재를 갈구하고 있었다.
이 선거에서 나는 서대문을(乙)에 출마해 당선됐다. 내 상대로 나선 공화당 후보는 아나운서로 유명했던 임택근씨였다. 나는 “국보적(國寶的)인 아나운서 임택근씨는 방송국으로 보내고, 정치가인 이 김상현이를 국회로 보내달라”고 유세했다. 김대중 전 후보도 내 유세를 적극 도왔다.
“김상현씨는 저와 어머니의 배만 다를 뿐 친형제나 다름없습니다. 김대중이 하면 김상현이고, 김상현이 하면 김대중입니다. 김상현의 승리는 김대중의 승리고, 김대중의 승리는 김상현의 승리인 것입니다.”
결국 나는 6만3575표를 얻어, 3만7210표를 얻은 임택근씨를 누르고 당선됐다.
동교동계의 태동
김대중 의원은 1971년 7월 2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권(黨權)에 도전했다. 진산계 등 범(汎)주류의 지원을 받는 김홍일씨와 진산계였다가 독립한 양일동씨가 경쟁자였다. 김홍일씨는 진산계는 물론 김영삼·이철승씨 등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국 3차 투표에서 김홍일씨가 444표를 얻어 370표를 얻은 김대중씨를 꺾고 당수가 됐다.
하지만 김홍일씨 측은 당내 여러 계파의 연합군이었던 반면, 김대중씨는 단일세력이었다. 차기 ‘대권주자 김대중’의 가능성을 본 당내 세력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교동계의 태동(胎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