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생도들이 낙동강 방어선을 찾아간 이유는?

육사 군사사학과 전쟁연구 전공 생도와 교수진, 1박 2일 일정으로 6·25전쟁 격전지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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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군사사학과 전쟁연구 전공 생도가 영천 전투 전적비 앞에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지난 3월 27~28일 육군사관학교(육사) 군사사학과 전쟁연구 전공 생도(25명, 83~85기)와 교수진(8명)이 6·25전쟁 당시 선배 전우들이 피와 땀을 흘리며 싸웠던 낙동강 방어선 일대를 찾았다.


이번 전적지 답사는 27일 오전 육사(서울 노원구)를 출발해 소백산맥 골짜기에 있는 죽령루(경북 영주시)에서 시작했다. 이후 안동~경주~포항~영천을 거쳐 다음 날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27일 오후에는 풍산 안강사업장(경북 경주)을 찾아 포탄 제조 공정을 견학했다.

 

6·25전쟁 초기 지연전과 낙동강선 방어작전


이번 답사는 ‘6·25전쟁 초기 지연전과 낙동강선 방어작전’을 주제로 했다. 전적지 답사는 책에서 배운 지식을 현장에서 검증하며 자기 지식으로 체화하는 시간이다. 6·25전쟁 휴전 이후 시간은 흘렀어도 국군이 상대해야 할 적(敵)과 지켜야 할 가치는 변함없기 때문이다.


군사사학과에서는 매년 전적지 답사를 한다. 군사사학과 4학년 이민형 생도는 “1박 2일 일정으로 진행하는 전적지 답사는 군사사학과의 전통”이라고 했다. 4학년 이현철 생도는 “답사만을 생각하며 힘든 생도 생활을 이겨내왔다”고 했다.


육사에서는 1학년을 마칠 때쯤 전공을 정한 뒤 3학년부터 전공 관련 수업을 듣는다. 전쟁사를 배운 적이 없는 2학년(85기) 생도들은 ‘풍기·영주·안동 전투’를 따로 공부하며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기 직전까지 국군이 벌인 지연전을 발표했다.

 

험준한 산세, 죽령에서 답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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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병장 출신인 김영석 생도가 죽령루에서 발표하고 있다.

  

27일 오전 9시경 충북 제천을 지나 단양에 이르자 산세가 달라졌다. 풍기(경북 영주)로 향하는 굽이진 오르막길은 산과 산이 겹쳐 만든 능선에 둘러싸여 있었다.


답사 시작 지점인 죽령(竹嶺, 해발 696m) 도착에 앞서 군사사학과 김민식(육군 소령) 교수가 설명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중부 지역인 춘천에서는 국군 6사단, 동부인 강릉 일대에서는 국군 8사단이 치열하게 싸웠다. 지도를 보면 제천~단양을 거쳐 오른쪽 아래에 풍기가 있는데, 이곳이 단양에서 풍기로 가는 길목인 죽령이다.”


강릉에서 철수한 국군 8사단은 육군본부로부터 충주를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이때만 해도 이동을 위한 철로(鐵路)가 없었다. 8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단양~풍기~안동~대구를 거쳐 충주로 북상할 계획이었다. 상부 지시가 잘못됐다고 판단한 이성가 대령은 안동을 지날 시점에서 제천을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했고 8사단은 단양에서 교전을 시작했다. 8사단은 소백산맥 지형을 이용해 죽령 일대에서 싸웠으나 적의 화력에 밀려 풍기 방면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지연전은 시간과 공간을 맞바꾸는 전투

 

육군 병장 출신인 김영석(2학년, 85기) 생도가 죽령루에서 8사단의 지연전인 풍기·영주 전투를 발표했다. 지연전은 시간과 공간을 맞바꾸는 전투인데, 아군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죽령을 통과하는 5번 국도가 풍기에서 영주로 이어집니다. 아군 8사단은 북한군 12사단을 유인하기 위해 기만 작전을 했습니다. 야간에 차량을 동원해 풍기에서 영주로 갈 때는 전조등을 켜고, 다시 돌아올 때는 전조등을 끄는 방식으로 마치 8사단이 영주로 철수하는 것처럼 적이 오인하게 했습니다. 


북한군은 국군이 풍기에 없으리라 판단했습니다. 7월 14일 오전 7시경부터 풍기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군 8사단은 풍기를 지나 영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망전산 일대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적을 일제 공격해 제대(부대)를 분산 격멸했습니다.”


군사사학과 교수진은 생도들에게 지형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 발발 후 약 한 달 뒤인 7월 20일 대전이 함락됐다. 미군이 담당했던 서부 전선이 급격히 무너졌다. 국군이 미군보다 전투력이 열세임에도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군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한 배경에는 지형이 있다. 생도들은 산악 지역에서 어떻게 작전을 수행할지 고민해 봐야 한다.”

 

공세적 방어의 중요성

 

심호섭(육군 중령)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상부에서 전선이 무너지며 후퇴하는 상황에서 여러분 부대에 ‘시간을 벌라’고 명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는 단순히 방어만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적에게 피해를 줘야 한다. 이를 위해 주도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주도권은 공격자가 갖는다. 이 때문에 8사단도 풍기 전투에서 역습을 포함한 공세적 방어를 했다.”


다음 답사지는 경북 안동이었다. 풍기에서 차로 30분 거리였지만 76년 전에는 적의 남진을 지연하며 후퇴하느라 2주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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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4대 누각 중 하나인 영호루(경북 안동시 정하동)에서 안동 내성천 전투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낙동강 북안(北岸)에서 치른 내성천 전투는 당시 국군의 마지막 지연작전이었다. 미 제8군 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이 낙동강 전선의 병력 밀도를 높이기 위해 낙동강 남안(南岸)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낙동강을 방어선으로 쓰려면 강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안동 북쪽에서 방어선을 펼 경우, 퇴로가 차단돼 아군 부대가 전멸할 위험도 있었다. 안동은 낙동강 방어선(워커 라인)의 최북단 요충지였으나, 전체 전선의 연결성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지점이었다.

 

내성천 전투

 

내성천 전투는 철수 과정에서 국군이 큰 피해를 보았다. 1950년 7월 31일 오후 육군본부는 안동 일대에서 전투하던 국군 8사단에 ‘8월 1일 오전 6시까지 남안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문제는 어느 제대(부대)가 먼저 철수할지, 엄호는 어떤 부대가 할지에 대한 대책도 명확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군이 퇴로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8월 1일 오전 공병 부대가 인도교를 폭파했다. 철수 과정에서 국군은 북한군에 그대로 노출됐다. 이에 따라 강북(江北)에 잔류했던 국군 병력이 큰 피해를 보았다. 8사단 소속 장병 2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장비 손실도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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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조휘석 생도가 안동 영호루에서 내성천 전투를 발표하고 있다.


안동 내성천 전투를 발표한 2학년 조휘석(85기) 생도는 이렇게 말했다.

 

“국군이 북한군 관측소를 선제 타격해 감제고지를 점령한 점은 잘했지만, 너무 넓은 전선을 운영하고 기동 예비대를 운용하지 못해 적군의 기습을 막지 못했습니다. 장차 지휘관이 될 우리는 전투 사례를 참고해 어떻게 철수 작전을 해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조 생도는 “지도로만 전투를 접했을 땐 적의 매복 지점이나 접근 방향이 너무 뻔해 보였다”면서도 “현장에서 확인하니 주변 고지가 시야를 가로막아 전장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았다. 지휘관은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했다.


영호루에서 답사를 마친 생도들은 인근 안동 충혼탑으로 이동해 참배한 뒤 풍산 안강사업장으로 이동했다.

 


풍산 안강사업장 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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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안강사업장 현용운 대리가 풍산에서 생산하는 각종 포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풍산 안강사업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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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사업장은 소구경부터 대구경까지 한국군이 사용하는 총포탄 대부분을 만든다. 부지 면적은 153만 평이다. 풍산의 현용운 대리의 안내로 전시관에서 설명을 듣고는 생산 시설을 둘러봤다. 방대한 시설 때문에 버스에 탑승한 채 공정을 견학했다. 대구경 포탄을 만드는 시설은 면적만 1만평이었다.

 

포탄을 단조로 만드는 이유


포탄 제조 공정은 여러 단계를 거친다. 열처리만 최소 4번을 한다. 원재료(강철)를 깍둑썰기 모양으로 잘라 1000도로 가열한 후 오목한 빈 컵 모양으로 만든다. 이후 프레스로 찍어 눌러 단조(금속을 두드리거나 눌러 형태를 잡는 방식)한다. 주조가 아닌 단조로 탄체(외피)를 만드는 이유는 내구성을 높이고 폭발 시 금속이 균일하게 파편화돼 살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1만 평 넓이의 공장이 통째로 하나의 건물이다. 그 안에서 로봇팔이 벌겋게 달아올라 김이 피어오르는 보온병 모양의 금속 물체를 들어 올렸다. K-9 자주포 등이 쏘는 155mm 포탄의 탄체(껍데기)였다. 이후 열처리와 도색을 거쳐 임무에 맞는 폭약을 장착하고 조립한다.


생도들은 견인형 대공포인 M167(분당 최고 3000발 발사) 발칸 실사격도 지켜봤다. 20mm 탄약 50발이 장전돼 있었다. 발칸 맞은 편 50m 거리에는 모래언덕이 있는데, 가운데 부분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더니 발칸이 사격했다. 1초 만에 50발이 모두 발사됐다. 맞은 편에선 먼지가 피어올랐다. 생도들은 소리와 위력에 놀란 ‘짜릿한 1초’였다.


생도들은 궁금한 내용을 현 대리에게 물어봤다.


―권총탄은 탄두가 왜 뭉툭합니까.

“대인 저지력 때문입니다. 탄두가 뾰족하면 탄 속(速)이 빨라져 신체를 관통하기 쉽습니다. 탄이 관통하면 체내 에너지 전달량이 줄어 상대를 즉각 제압할 수 없습니다.”


―저격용 탄과 일반 소총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저격용 탄이 더 무겁습니다. 공기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형상도 다릅니다.” 

 

감제고지 곤제봉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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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단이 곤제봉에 올라 당시 전투에 대해 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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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김석원 생도가 곤제봉 전투를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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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사학과 김민식(육군 소령) 교수가 지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둘째 날은 경주 안강읍에 있는 곤제봉(곤계봉, 해발 293m)에서 답사를 시작했다. 이 지역은 기계~445고지~안강~곤제봉~경주를 축선으로 하는 진출로였다. 안강은 행정구역상 경주시에 속하지만, 지리상 영천과 포항 사이에 껴있다.

 

답사단은 초등학교 뒤편으로 난 샛길을 따라 30분가량 등산해 곤제봉에 도착했다. 이곳은 감제고지(瞰制高地)다. 울산 울주군에서 발원해 포항 영일만(동해)으로 빠져나가는 형산강이 내려다보인다.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포항시 기계면과 안강읍 일원에서 벌어진 기계-안강 전투를 김석원(84기, 3학년) 생도가 발표했다. 이 전투를 맡았던 수도사단의 사단장이 김석원(1893~1978, 예비역 육군 소장)이다. 기계-안강 전투는 북한군 9월 공세에서 영천 전투와 함께 낙동강 방어전의 양대 격전으로 평가받는다. 

 

북한군 9월 공세 저지한 기계-안강 전투

 

1950년 8월 초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에 불리했다. 워커 중장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한 뒤 기동과 역습에 기반한 기동방어 전략을 채택했다. 이를 위해 예비대도 운용했다. 


방어선은 낙동강선을 기준으로 개활지인 서측(왜관~달성~마산)은 화력이 우세한 미군(유엔군)이, 산악 지형인 중동부(왜관~영천~포항) 전선은 국군이 맡았다.


김석원 생도의 설명이다.


“곤제봉 일대는 동쪽으로 포항(국군 3사단 담당), 서쪽으로 영천(국군 2군단)과 대구(국군 1사단), 남쪽으로 경주를 둔 요충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고지에서 바라보고 있는 방면은 동쪽입니다. 이곳이 적에게 장악되면 안강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이 뚫려 국군 방어선은 동서(東西)로 양분(兩分)되고 대구와 포항이 동시에 위험해집니다. 이는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북한군도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북한군 2군단 예하 12사단, 766유격대를 독촉해 이 지역을 장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학도병이 참전한 대표 사례로 알려진 포항 전투. 이를 다룬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차승원이 지휘하는 부대가 766유격대다. 이 지역이 북한군에 무너지면 포항(국군 3사단)에서도 국군이 철수할 수밖에 없다. 이는 낙동강 방어선 동부 축선의 붕괴를 의미한다.


당시 국군의 방어 여건은 불리했다. 북한군 12사단은 병력 1만 5000명에 화력까지 갖췄지만,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국군 수도사단은 병력이 약 5780명이었다. 이 때문에 8월 9일 북한군이 수도사단과 국군 3사단 사이의 방어선 공백을 이용해 기계 지역을 점령했다. 육군본부는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개편해 수도사단을 안강으로 배치한 뒤 역포위 작전으로 반격했다.


요충지를 찾기 위해 국군은 분전했다. 곤제봉에서 11시 방향으로 15km 떨어진 안강 북방의 어래산(572m) 능선 445고지 탈환을 시도했다. 일일 최다 300명이 희생됐다. 국군이 8월 18일 제1차로 기계를 탈환하지만 비학산 일대에서 전열을 정비한 북한군 12사단은 9월 2일 전차를 앞세워 국군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기계를 다시 장악했다.


고지 탈환 7차례 끝에 곤제봉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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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제봉에서 내려다 본 포항 방면 전경. 고지 아래는 형산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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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선이 무너지고 국군 수도사단이 붕괴 직전까지 몰린 상황에서 동부 전선을 구한 전투가 곤제봉 전투와 호명리(호명동) 전투다. 국군 17연대는 곤제봉을 놓고 일주일 동안 15차례 교전을 벌였다. 이 가운데 7차례 고지를 탈환했고, 결국 곤제봉을 확보했다.


호명리 전투는 국군 1연대(연대장 중령 한신)가 사수했다. 덕분에 국군은 시간을 벌었고 호주 공군과 미군의 포격으로 방어 작전에도 성공했다. 북한군의 공세가 한계에 도달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6일 반격을 시작해 일주일 뒤인 22일 기계를 점령해 45일 간의 전투가 승리로 마무리됐다.


김석원 생도는 “기계-안강 전투에서 국군이 승리한 덕분에 ‘경주를 점령해 대구와 포항을 포위하겠다’는 적의 계획을 저지하고 낙동강 방어선 동부 축선을 지킬 수 있었다. 이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했다.

 

군사사학과 교수진은 예비대의 중요성과 작전에 대한 넓은 이해를 강조했다.


“당시 워커 중장은 기동력 있는 예비대를 운용하는 작전 개념을 세웠다. 방어선 중 일부가 무너지면 이를 보완하는 목적이었다. 지휘관이 돼야 할 여러분은 작전에 대한 큰 그림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의 개별 전투로만 접근하지 말고 안목을 갖고 싸워야 한다.” 


한 생도가 질문했다.

 

‘북한군 입장에선 이 고지 일대를 무시하고 부산 방향으로 진출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심호섭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개별 부대의 침투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군은 전과(戰果)를 확대하고 후속 부대가 연속해서 진출해야 하므로 이 지역을 반드시 차지해야만 했다.”


답사단은 마지막 장소인 영천으로 이동했다. 영천 전투(1950년 9월 3~13일)는 한국군이 치른 최초의 군단급 전투다. 영천 대회전(大會戰)이라고도 한다. 대회전은 대규모 주력 부대가 맞붙는 전투를 말한다. 

 

영천 전투는 앞서 답사한 기계-안강 전투가 한창일 때 왼편에서 같은 시간대에 벌어진 전투다. 영천은 교통과 물류의 요충지로 함락되면 낙동강 방어선이 곧 무너지는 결과를 낳는 곳이다.

 

영천 전투와 망치와 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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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이주영 생도가 영천 전투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4학년 과대표 이주영(83기) 생도가 영천 전투에 대해 발표했다. 이 생도는 영천 전투와 인천상륙작전을 연계해 ‘망치와 모루(hammer and anvil)’의 원리로 설명했다.


“영천은 산악 지대와 분지가 조화를 이룬 곳입니다. 북쪽으로는 보현산(1124m)과 팔공산 등 산맥이 방벽이 돼 북한군 기갑 전력의 기동을 차단했습니다. 여기에 금호강은 적의 도하를 저지하는 천연 장애물이었습니다. 북한군의 공격이 계속돼 영천을 여러 번 빼앗기면서도 국군이 유연하게 병력과 부대를 운용해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국군의 유연한 부대 운용과 불굴의 사수 정신 두 가지가 영천 전투 승리를 만들었습니다. 영천 전투는 9월 15일 실시한 인천상륙작전에서 모루의 역할을 했습니다. 김일성은 1950년 12월 영천을 점령했을 때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영천을 상실함으로써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했습니다.”


‘망치’는 인천상륙작전, ‘모루’는 낙동강 방어선에 해당한다. 대장장이가 쇠질을 하기 위해선 망치와 모루가 모두 튼튼해야 한다. 8사단은 영천 전투에서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고 ‘공세 종말점’에 이른 북한군의 전투력과 의지를 말살했다. 

 

영천 전투 주역인 8사단(현 제8기동사단). 사단가 1절에는 “열풍(熱風)을 식혀버린 영천대회전”이라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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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 방어선의 역할을 망치와 모루 전술 원리로 표현한 생성형 이미지. 사진=제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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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 변화 과정. 검은색 선은 1950년 8월 1일 방어선, 초록색은 8월 5일, 주황색은 8월 12일, 보라색은 8월 26일, 빨간색은 인천상륙작전 당시 국군의 방어선을 의미한다.

 

28일 오전 11시경 영천 답사를 마친 군사사학과는 학교로 복귀하는 길에 올랐다. 생도들은 “선배 전우들의 투혼이 서린 현장을 찾아 당시 전투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전승(戰勝)을 보장하는 군인이 되기 위해 전쟁사 공부에 더 힘쓰겠다”고 밝혔다.


군사사학과 심호섭 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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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군사사학과 심호섭(육군 중령) 교수.

 

“전적지 답사, 워게임 하듯 해야”


생도 생활에서 1박 2일을 할애해 전적지를 답사하는 전공은 육사에서 군사사학과 전쟁연구 전공이 유일하다. 전적지 답사 때문에 전쟁연구 전공을 택하는 생도까지 있다. 전적지 답사는 생도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심호섭 교수에게 물었다.


―매년 전적지 답사를 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전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지형입니다. 강의실에서 지도나 사진만으로 전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전투는 지도가 아닌 실제 공간에서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전적지 답사는 교과서와 수업의 한계를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교육입니다.”


심 교수는 “기계·안강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핵심 전투 중 하나지만, 영천 전투보다는 덜 알려졌다”며 “생도들에게 기계·안강 전투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생도들은 답사를 어떤 자세로 준비해야 합니까.

“답사는 역사 탐방이 아닙니다. 장차 지휘관과 참모가 되는 데 필요한 훈련(참모여행, staff ride) 과정입니다. 실제 지형을 마주하며 고지와 능선, 하천, 도로, 사각(死角)지대를 확인하며 현장을 실습하는 시간입니다. 단순히 과거를 배우는 것을 넘어 ‘내가 당시 지휘관이었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했나’ ‘참모라면 어떤 계획을 제안해야 했나’ ‘적의 행동에 어떻게 대응해야 했나’처럼 ‘워게임(war game)’식 사고를 해야 합니다.” 


―왜 여전히 6·25전쟁사가 중요한 겁니까.

“전쟁 양상은 변화했지만, 우리가 싸워야 할 전장이 한반도라는 점은 변치 않습니다. 6·25전쟁사 공부는 과거를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전쟁사는 지휘관의 판단, 선택, 작전 수행, 병력 운용 등 군사 전문성의 핵심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쟁사 공부는 전문성을 강화하는 기본 과정입니다. 전쟁사 없이는 전술과 전략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실전 경험이 제한된 군대에서 전쟁사 공부는 전쟁을 대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심호섭 교수는 “답사를 통해 ▲전투에 대한 실제 이해 ▲군인으로서의 자세 습득 ▲지휘관의 책임과 결단의 중요성 ▲선배 전우들의 군인정신 등을 배워야 한다”며 “국가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을 내면화하고 비판적 사고를 통해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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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연구 전공에 적합한 생도는?

 

군사사학과 전쟁연구 전공은 어떤 생도에게 적합할까. 심호섭 교수의 설명이다.


“전쟁은 인간이 벌이는 가장 폭력적인 행위지만,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와 문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전쟁연구 전공은 육군사관학교의 대표적인 전공 중 하나입니다. 국내 대학 중 유일하게 전쟁과 전략, 전쟁사, 군사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합니다. 


전쟁을 잘 연구할 수 있는 생도는 이렇습니다. 

21세기의 이순신이 되고 싶은 생도, 군인으로서 사명감이 강한 생도, 역사와 군사 문제에 흥미가 있는 생도, 끈기 있게 연구하고 분석하는 자세를 가진 생도, 군인으로서 성공하고 싶은 생도입니다.”


―전쟁연구 전공과는 맞지 않는 생도는요.

“역사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생도, 단편적 지식을 선호하는 생도, 전공을 편하게 공부하고 싶은 생도입니다.


군사사학과 전쟁연구 전공 생도 인터뷰


‘쉽지 않은 전공이니 다시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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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석원, 조휘석, 김영석, 이주영, 이호민 생도.

 

군사사학과 전쟁연구 전공 생도(2학년 김영석·조휘석, 3학년 김석원·이호민, 4학년 이주영 생도)를 육사 생도회관에서 만났다. 이들은 저마다 뚜렷한 목표를 갖고 육사에 진학했다. 특히 전쟁연구 전공은 학습량이 많다고 한다. 통사에 그치지 않고 전쟁사와 함께 전략과 국제정치도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배 생도들은 후배가 군사사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면 ‘쉽지 않은 전공이니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왜 육사에 진학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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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김영석 생도.

 

김영석 생도: 2023년 8월 육군 병사로 입대해 9사단 임진강 대대에서 2025년 2월까지 복무했습니다. 병사로 제대하기 두 달 전 육사에 입학했습니다. 군 복무를 하며 ‘육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정예 장교가 돼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육사에 지원했습니다.

 

조휘석 생도: 어릴 적부터 군사 분야와 전쟁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장래 희망은 종군기자였습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을 접하고는 ‘장교가 돼 국가에 보탬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호민 생도: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군인이 제겐 천명(天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수를 하며 다른 학교는 지원하지 않고 오직 육사만 바라봤습니다. 굉장히 만족하며 생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김석원 생도: 고등학교 3학년 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를 보고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느꼈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휴전 국가입니다. 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병으로 복무하는 것보다는 장교가 돼 국가에 기여하고 싶어 육사에 지원했습니다.

 

이주영 생도: 아버지가 5살쯤 된 제게 무기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후 무기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관련 자료를 찾으며 흥미를 갖게 됐고 육사에 지원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KCTC(Korea Combat Training Center·과학화전투훈련단) 전투경연대회에 민간인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꼭 육사에 가 군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잘 싸우는 군인이 되기 위해 전쟁연구 전공 지원 

 

―군사사학과 전쟁연구 전공을 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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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조휘석 생도.

 

조휘석 생도: 육사에 수많은 학과와 전공이 있습니다. 군인이라면 마땅히 전쟁에 정통해야 한다는 생각에 군사사학과를 택했습니다.

 

김영석 생도: 군인은 전투가 본업인 전투 전문직 종사자들입니다. 전투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할 분야가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결국 군인으로서 더 잘 싸우기 위해 군사사학과 전쟁연구 전공에 지원했습니다.

 

이호민 생도: 육사에 지원할 때부터 군사사학과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역사가 재밌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대학에서도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1학년 생도 시절 만났던 심호섭 교수님과 군사사학 전공 선배 생도들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닮고 싶어 군사사학과를 지망했습니다.

 

이주영 생도: 사람과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걸 좋아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여진 것이라 할 수 있는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육사에 지원할 때부터 군사사학과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육사 면접 때에도 ‘군사사학과에 가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또 제가 생도 1학년 시절 속했던 분대(分隊)의 장(長)이 최부건 4학년 생도였습니다. 분대장 생도 또한 군사사학을 전공했는데, 이 점이 제가 군사사학과를 지원하는데 영향을 줬습니다.

 

앞서 기자는 2023년 군사사학과 전적지 답사에도 동행했다. 당시 4학년이었던 최부건(현 육군 중위) 생도를 인터뷰했다. 최 중위는 당시 답사에서 중공군 마지막 대규모 공세인 금성지구 전투를 발표했다. 그는 “군사·국가 전략을 열심히 공부해 대한민국 번영에 기여하는 전략가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김석원 생도: 지휘관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전투와 전쟁에 대해 아는 내용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인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이 전쟁사라고 생각했고, 전쟁과 전투에 특화된 군사사학과를 지망했습니다. 


“군사사학과의 자랑은 최고의 전문성

 

―군사사학과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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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김석원 생도.

 

 

김석원 생도: 전적지 답사입니다. 다른 전공과는 달리 군사사학과는 전공 수업을 아직 수강하지 않는 2학년 생도도 함께 답사에 나섭니다. 이 때문에 동기, 선후배, 교수님들과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주영 생도: 우수한 교수진입니다. 군사사, 전쟁사에 특화된 전공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부터 손자병법에 이르기까지 전쟁사와 작전·전략을 두루 배울 수 있습니다.

 

김영석 생도: 전문성이 최고의 자랑입니다.

 

김석원 생도: 군사(軍事), 말 그대로 전쟁을 연구한다는 점입니다. 단순한 역사를 공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전략, 국제정치 등과 연계해 군사와 전쟁의 본질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이호민 생도는 “군사사학과 교수님을 닮기 위해 개인 정비 시간 중 많은 부분을 전쟁사 공부에 쏟고 있다”고 했다. 


지형지물 파악의 중요성 다시금 깨달아

 

―이번 답사를 통해 배운 점이 있습니까?

 

김영석 생도: 풍기·영주 지역 전투를 발표했습니다. 지연전의 개념이 궁금해 교범도 찾아봤습니다. ‘방어 전투에서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강요하면서 물러나는 방법’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장차 지휘관이 된다면 병력을 최대한 보존하며 적과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기회였습니다. 또 지도나 글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은 온몸으로 현장을 체험하는 방식으로 체득해야 한다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김석원 생도: 지형지물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탁 트인 고지에서 발표하니 더욱 생생했습니다. 앞으로 전쟁사를 공부할 때도 지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윤덕희 교수님이 ‘무기 체계는 변해도 지형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제가 오늘 발표할 때 밟은 땅이 누군가의 피가 서린 장소라는 점을 알고는 현장 답사의 중요성을 체감했습니다.

 

이주영 생도: 전적지 답사(스태프 라이드, staff ride)는 프로이센 시절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the Elder, 대(大) 몰트케]의 주도로 시작한 활동입니다. 참모들과 말을 타고 전장(戰場) 예상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형을 탐사하고 시뮬레이션을 하며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프로이센이 뛰어난 참모 제도를 운용하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합니다. 프로이센은 이 방식을 제도화했고, 보불전쟁(1870~71년) 승리 후 유럽 각국 군대가 프로이센 참모 제도를 모방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영천 전투 답사지에 가니 지도와는 달리 아파트, 교량, 도로 등 새로운 지형지물이 생겨 있었습니다. 댐도 건설돼 영천호라는 호수까지 생겼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지형지물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실감했고, 만약 이러한 지형지물의 변화가 생긴 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해당 지역에서 실시한 과거의 전투와 비교했을 때 그 양상이 달라질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이호민 생도: 첫 번째 답사지였던 죽령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죽령루에서 지형을 내려 보니 높고 험한 산세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 능선을 따라 국군이 처절하게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평소 산을 오를 때와는 다른 감정을 느꼈습니다.

 

세계 3대 동계 전투를 아느냐는 선배 생도의 질문

 

―가장 인상 깊은 전투, 전사(戰史)를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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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이호민 생도.

 

조휘석 생도: 2차 세계대전의 마켓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입니다. 흔히 연합군과 몽고메리 장군의 실수를 먼저 떠올리지만, 저는 당시 독일군 지휘관 발터 모델(Walter Model)의 뛰어난 지휘력에 더 주목합니다. 오합지졸 신병으로 연합군의 정예 공수부대를 격파한 사례는 지휘관 역량이 상대방의 질적 우세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김영석 생도: 영국 특수부대 SAS의 북아프리카 작전(1941년)입니다. 전투보다 이에 앞서 부대를 어떻게 조직하고 편성해 운용했는지에 대한 용병술에 관한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호민 생도: 이번 답사지였던 곤제봉 전투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오르기 쉽지 않는 고지임에도 국군은 이곳에서 북한군과 15차례 전투를 치르고 7번을 탈환했습니다. 당시 전투가 치러진 9월은 굉장히 더운 날이었을 겁니다. 고지를 오르내리며 처절하게 싸운 국군의 역사를 접하며, 장차 지휘관으로서 지형과 기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병사들을 어떻게 독려해 전투에 나갈 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김석원 생도: 장진호 전투입니다. 육사 입학식을 갓 마치고 2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샤워하고 있는데 군사사학과 소속이었던 분대장 생도가 제게 ‘세계 3대 동계 전투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른다’고 했더니 ‘장진호 전투라는 게 있다’며 갑자기 찬물을 틀고는 ‘춥냐? 장진호 전투는 더 추웠다’라고 했습니다. 이때부터 장진호 전투가 머릿속에 깊이 남았습니다.


이주영 생도: 부하를 살려서 무사히 집에 보내는 지휘관이 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작전술, 전술, 전략을 연구하며 싸우는 방법을 생각하는, 싸우면 이기는 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김석원 생도: 최근 생도대장(박권영 육군 준장)님의 생도 대상 특강에서 ‘지휘관은 영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더 많이 생각하는 군인, 영리한 군인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호민 생도: 저도 특강에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생도대장님은 눈이 닿는 곳에 지도와 군사 서적을 두고 항상 전쟁을 연구한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의 생도 생활은 물론 야전에서도 끊임없이 전쟁을 연구하고 싶습니다. 보병 장교로 임관해 최전방, 특수전 등 여러 경험을 쌓고, 싸워 이기는 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김영석 생도: 군인의 본질은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이 본질을 잃지 않는 군인이 되겠습니다.

 

조휘석 생도: 부하가 자기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지휘관이 되고 싶습니다. ‘이 지휘관이면 내 목숨을 바쳐 싸울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군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답사에 힘쓰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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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이주영 생도.

 

기갑 장교가 돼 K2 흑표 전차를 몰고 싶다는 이주영 생도는 이렇게 말했다.


“사전 답사까지 다녀오시고 모든 과정에 있어 생도들을 지도해주신 군사사학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기까지 2~4학년 생도 모두가 노력했습니다. 


답사를 잘 다녀올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신 학교장(육군 중장 박후성)님, 교수부장(육군 대령 이민수)님, 생도대장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답사집을 총괄 편집한 4학년 홍지상 생도에게도 고마운데, 답사집을 만드느라 일주일 중 3일은 밤을 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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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이주영 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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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군사사학과 전쟁연구 전공 생도와 교수진이 벚꽃 아래서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글·사진=이경훈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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