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년여 옥고 치러
⊙ 김규식 박사 도움으로 1920~30년대 渡美… 로어노크대, 유펜 대학원 졸업
⊙ 홍난파와 흥사단 활동… 협성실업학교 교사, 중앙상업학원 이사장 역임
⊙ “조선 독립 향한 ‘좁고도 굽은 길’ 걸어…”
⊙ 김규식 박사 도움으로 1920~30년대 渡美… 로어노크대, 유펜 대학원 졸업
⊙ 홍난파와 흥사단 활동… 협성실업학교 교사, 중앙상업학원 이사장 역임
⊙ “조선 독립 향한 ‘좁고도 굽은 길’ 걸어…”
- 미국 로어노크대 졸업 당시의 허연. 후손들이 허연의 시고(詩稿)를 묶어 시집 《박꽃》(2010)을 펴냈다.
추담(秋潭) 허연(許然·1896~1949년)이라는 선각자가 있다.
일제 식민지사를 연구하는 소수의 학자에게 회자되는 이름일지라도, 비록 ‘비공식 애국지사’일망정, 누군가의 일생이 홱 돌아서서 도망치는 법은 없다. 반드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기자는 ‘복원하는 신화(神話)’로 선생을 기억하려 한다.
허연. 1896년 8월 11일에 평안남도 순안(順安)에서 태어나 1949년 8월 12일 쉰셋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알 수 없다. 유족 말로는 1년 2개월간의 혹독한 영어(囹圄)의 고초 때문이란다. “도산(島山 安昌浩·1878~1983년)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에 묻혔다.
순안 의명(義明)학교와 서울 연희전문 중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단이 운영하는 중국 상하이 삼육대학 졸업(1922년), 미국 버지니아주 세일럼(Salem)의 로어노크대(Roanoke College) 졸업(1929년),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경제학 석사)을 졸업(1932년)했다.
로어노크대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1881~1950년) 선생이 다닌 대학으로 허연의 학적부에 적힌 보증인(Guardian)은 다름 아닌 김규식이었다.
허연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미결수로 1년 2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시고(詩稿)와 빛바랜 육필 일기 〈1925년의 기록〉은 아직도 남아 있다. 다행스럽게도 시고는 지난 2010년 시집 《박꽃》(다솜출판사)으로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허연은 거칠 것 없는 무장 투사, 실패한 식민지 폐허에서 새로운 현실을 주조하던 혁명가는 아닐지라도 그의 내면은 조선 독립의 열정으로 불타올랐으리라.
허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내 김귀애(金貴愛·1906~1993년)는 마흔넷이었다. 곱절만큼 살아 여든여덟에 남편 곁으로 갔다. 한때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날린 장남 허진(許進·1936~1995년)도 어머니가 떠난 2년 후 따라갔다.
남은 딸 허경숙(許慶淑·87), 두 아들 허일(許逸·한국해양대 명예교수·81)·허달(許達·전 SK 부사장·79)과 그 후손이 아버지, 할아버지의 일생을 기억하며 흔적을 더듬고 있다.
‘철쭉 피는 때를 두견은 왜 우는고’
기자는 지난 5월 30일 경기도 분당에서 허경숙·허달씨와 허일씨의 장남 허용(許鎔·54)씨를 만났다. 한국 근현대사 연구가인 정종배 선생이 동행했다. 기자는 이후 허연 후손들과 소셜미디어로 소통하며 취재를 보충했다.
허연의 유작 시집 《박꽃》에 ‘두견’이라는 시가 있다.
철쭉 피는 때를 두견은 왜 우는고
철철이 타는 가슴 꽃 피는 때 더 하더냐
재오쳐 우는 소리는 목 메인듯 하여라
-1928년 뉴욕주 캐츠킬 산중에서
왜 허연은 세계의 열강과 겨루던 미국에서 새소리를 듣고 목이 메였을까. 왜 ‘노래하는’ 두견이 아닌 ‘우는’ 두견으로 인식했을까. 아들 허달(이하 ‘씨’ 생략)의 말이다.
“우국(憂國)과 망향(望鄕)의 마음을 표현하셨는데 뉴욕 북부의 ‘캐츠킬(Cat's Kill)’은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해요. 풍광(風光)이 우리나라 산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그곳에서 고국의 산천을 그리워하셨나 봐요.”
아들 허달은 1943년생. 아버지 허연이 1949년 세상을 떠났으니 그에게 아버지는 조각난 기억으로 존재한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기억이 안타깝지만 별로 없어요. 아버지가 북을 쿵쿵 치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 북을 치다니요?
이번에는 장녀 허경숙의 말이다.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한 그녀는 허연이 숨졌을 때 15세였다. 이화여고를 다닐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2층에, 우리는 아래층에 살았어요. 요즘으로 치면 호출벨 대신 북을 치셨어요. 북소리를 듣고 2층으로 올라가곤 했죠.”
손자 허용의 말이다.
“할아버지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신 뒤 병을 얻으셔서 2층에서만 지내셨대요.”
가족들에 따르면 허연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다가 석방된 후 서울 누하동과 혜화동, 돈암동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광복 후 필동에 일본인들이 퇴거한 적산가옥 2층집을 구했다고 한다. 허경숙·허달의 회고다.
“친지인 백인제(白麟濟·1989~?·백병원 설립자) 박사가 아버지를 돌보기는 했으나 십수 년 타향살이와 옥살이, 몹쓸 고문으로 피폐된 몸이 차츰 악화되셨어요.”
‘내가 걸어온 좁고도 굽은 길’
손자 허용은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이 문장이 떠오른다고 했다.
‘단로(單路) 40리, 이것이 내가 걸어온 좁고도 굽은 길이다.’
이 문장은 허연이 남긴 시고에 적혀 있다. 허용의 말이다.
“‘단로 40리’ 길은 할아버지께서 걸어가셨던, 어떨 때는 꼬불꼬불하고, 어떨 때는 가시덤불이며, 때로 노방한숙(路傍寒宿), 때로 그리운 이들과 이별하던 그런 길이 아니었을까요?
1920~30년대 식민지 조국에서 중국 상하이, 그리고 미국 서부와 동부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독립을 위해 자신을 단련시키셨던 할아버지의 길 말입니다.”
허달은 미국 출장길에 아버지가 다녔던 로어노크대를 찾아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허연이 1929년에 다닌 대학을 72년이 지난 2001년 찾아갔다. 미국 대학은 졸업 후 70년이 지나지 않으면 학적부를 가족에게조차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운이 좋았다. 허달의 말이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허씨 성(姓)을 영문으로 ‘Hugh’라고 쓰셨어요. 흔히 남들이 쓰던 ‘Huh’ 혹은 ‘Hur’로 썼다면 대학 측이 까다로운 가계 확인을 요구했을 텐데, 일찌감치 유학하신 아버지가 ‘Hugh’라는 영문 성을 남겨 자식들 또한 독특한 ‘Hugh’를 쓰고 있었죠.”
손자 허용도 비슷한 말을 했다. 미국에서 반도체 생산설비 업체 GSMT사를 운영하는 그는 공교롭게도 할아버지가 살던 버지니아주 매클린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께선 굳이 ‘Hugh’라는 성을 100년 전에 쓰셨는데 어떤 연유로 선택하셨는지 직접 여쭤보고 싶어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미국인에게 왜 ‘Hugh’란 영문 성을 쓰는지 셀 수 없이 많은 질문을 받았거든요.”
― 이런 우연이 다 있나요? 지금 사는 곳이 버지니아고, 100년 전 허연이 다니던 대학이 버지니아에 있고….
“그렇다니까요. 제가 미국 동부 버지니아에서 30년 동안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그 옛날 할아버지가 다닌 대학 근처에서 살고 있어요.”
‘흥사단의 근본적 主義가 무엇이뇨?’
허달은 아버지의 학적부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학적부에 기재된 아버지의 공식 ‘가디언(보증인)’은 김규식 선생이었어요.”
‘Dr. Kiusic Kimm’이란 영문 이름으로 적혀 있다. 당시 상하이 독립운동 관련 한국인 커뮤니티가 매우 좁았을 것을 떠올린다면 김규식과 허연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하고많은 미국 대학 중에 로어노크대를 김규식이 추천한 까닭은 무얼까?
허달은 해답을 대학 연혁이 기록된 《로어노크 히스토리 북》에서 찾았다고 한다. 그 책에 조선인 3명의 사진이 있었다.
먼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귀인(貴人) 장(張)씨의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1877~1955년)이 등장한다. 그는 1899년(광무 3) 미국에 유학,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와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에서 공부했다. 미국 유학생 시절에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귀국하여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항일투쟁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규식의 얼굴도 나온다. 그는 1898년 로어노크대에 입학해 1903년 졸업했다. 허달의 말이다.
“로어노크대에 유학 온 왕자의 공부 친구로 신학문과 인연을 맺었던 김규식이 훗날 상하이에서 만난 청년 허연을 자신의 모교에 추천했던 것이 아닐까요?”
허연은 1932년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후 뉴욕 흥사단에 입단했다. 흥사단 단우 번호는 265번. 그의 흥사단 입단을 권유한 이는 1923년 순안 의명학교 동창인 한승인(韓昇寅·1903~1990년·흥사단 단우 번호 260번)으로 알려져 있다. 손자 허용의 말이다.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 정보 시스템’에서 우연히 할아버지의 친필 흥사단 입단서를 찾았습니다. ‘흥사단의 근본적 주의(主義)가 무엇이뇨?’로 시작하여 5장에 달하는 18개의 자필 문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입단서 작성 당시 미국 피츠버그에 머물던 학생 ‘벤자민 허연’은 이렇게 답합니다.
‘민족주의, 우리 민족과 국가 독립을 떠나서는 흥사단이 나에게는 하등의 다른 필요를 주지 않음.
흥사단이 우리 민족 혁명운동에 무슨 관계가 있느뇨? 직접으로 당면한 일부가 될 것. 다시 말하면 민족(우리)혁명을 목적하는 일(一)단체.’”
이기붕, 박마리아와 허연
이번에는 허경숙의 말이다.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아버지가 미국에 계실 때 이기붕(李起鵬·1896~1960년), 박마리아(朴瑪利亞·1906~1960년) 두 분도 계셨다고 합니다. 교포 중 어느 분이 아버지와 박마리아의 만남을 주선했대요. 그런데 아버지는 빈털터리야. 이기붕은 맥주 도매상인가를 했고. 그래서 (박마리아가) 이기붕과 결혼한 거야.”
허달은 상상력을 좀 더 보태어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서 이화여전 나오고 유학 온 박마리아는 당시 마운트 홀리오크대학(Mount Holyork College)에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서른다섯 허연에 비해 열 살이나 어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만남에서 ‘공부는 언제 마치시나요?’ ‘그 후 계획은요?’ ‘귀국은요?’ ‘귀국하시면 어떤 계획이 있으세요?’ 등의 질문을 쏟아냈고 ‘민족과 국가의 독립’을 염원하던 허연은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인연이 계속 이어질 리 없었겠죠.
만약 박마리아와 허연이 결혼했다면 우리나라 현대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이기붕 가족의 비극적 종말 역시 없었을 테고….”
허경숙은 어린 시절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동생들이 누나를 질투할 정도. 그도 그럴 것이 허연이 서른아홉에 본 첫 자식이었다.
“아버지가 마흔이 다 되어 낳은 자식이었으니 당연하지요. 당신은 이광수 선생과 술친구셨는데 부인 허영숙(許英肅·1897~1975년)이 효자동에서 조산원을 했어요. 엄마가 (조카 허용을 가리키며) 이 사람 아버지(허일)를 그 조산원에서 낳았어요.
유치원 다닐 때였는데 아버지 손을 잡고 이광수 선생 댁에 가면 허 여사가 겁을 냈어요. 그이(이광수)의 폐(肺)가 나쁘셨는데도 두 분이 만나면 자꾸 술을 잡수시니까….
아버지는 저를 어디든 데리고 다니셨어요. 청진동에 있던 유치원에 다녔는데 유치원 마칠 때쯤 아버지가 데리러 오세요. 그러곤 아버지 술친구들과 만났어요. ‘동해루’라는 식당이 떠오르네요.”
기억에 남은 것은 蓮못과 피무덤…
허연은 허봉국(許奉國)과 김씨 사이 3대 독자로 1896년 8월 11일 평남 순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호적에는 평남 안주군 용현리.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다섯 살에 아버지,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서 외가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자랐다고 한다.
아들 허달의 말이다.
“조부모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어요. 다만 조실부모하고 아버지가 외조부모 손에 컸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아버지가 남기신 수필 중에 〈고향에 가는 길, 고향에 돌아와〉라는 글이 있어요.
‘어머니 돌아가신 뒤에 외할머니는 이모의 집으로, 나는 안주(安州)로 헤어져 못 뵈온 지 몇 해런가. 오직 살아남아 동(東)으로 서(西)로 떠돌아다니는 것은 이 한 몸뿐. 눈물지어 이 땅을 지나 또 어데로 가는가? 어머니 살아계실 제, 업혀 다니며 보던 순안(順安)은 이제 어디로 갔는가. 오직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연(蓮)못과 피무덤.’
또 이런 문장도 나옵니다.
‘고향 안주에 돌아와 오래 못 뵈온 삼촌께서는 나를 붙들고 운다. 나도 울었다. 열세 살 먹은 누이동생은 나를 보지도 못하였건만 붙들고 운다. 여기가 내 본향(本鄕)이다. 나를 붙들고 우는 사람이 있는 내 본향이다.’”
부모의 사망으로 식솔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비극적 가족사가 있었던 것이다.
허연은 1908년 러셀 박사가 의료선교사로 봉사하던 평남 순안병원(현 삼육서울병원)에 침식을 제공받는 급사로 들어가면서 재림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다.
러셀 박사 곁에서 조수로 일하며 영어와 병원 업무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러셀 박사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 이름을 너에게 준다. 너도 그처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근면 노력하여 위대한 인물이 돼라는 뜻”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러셀 박사의 주선으로 1913년 평남 순안 의명학교에 입학해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계속된 허달의 이야기다.
“동급생보다 적어도 세 살 이상 연상, 심지어는 일곱 살 아래인 막내 동급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배우는 데 열심이셨고, 어린 동급생들과도 잘 어울렸대요. 방과 후에는 병원 일로 러셀 박사를 도우는 일에 진력하셨고 눈코 뜰 새 없이 3년간을 의명학교에서 보냈어요.”
美 로어노크대 2학년에 입학
허연은 1919년 3월 6일 의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순안 만세운동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시위에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일경(日警)의 수사망을 피해 스승 김창세의 추천장을 손에 들고 걸어서 중국 상하이로 갔다.
의명학교 출신인 김창세(金昌世· 1893~1934년·흥사단 단우 121번) 박사는 1925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보건대학원에서 한국인 최초로 공중보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우리나라 보건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계속된 허달의 이야기다.
“고향 순안을 떠나 6개월 동안 걷고 또 걸어서 상하이에 1919년 겨울 도착합니다. 도대체 상상이나 되는 거리인가요?
그렇게 삼육대학 졸업장을 손에 쥔 것이 1922년 5월이었죠.”
이번에는 손자 허용의 말이다.
“삼육재단 쪽에서 ‘상하이 삼육대학과 의명학교 쪽 인연이 이어지니까, 대학재단 쪽에서 허연의 독립유공자 추서(追敍)를 도와주겠다’고 나섰어요.”
허연은 삼육대학을 졸업한 뒤 김규식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떠난다. 그러고 1926년 로어노크대에 입학한다. 허달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자필 ‘흥사단 이력서’에 연희전문에 다니셨다고 쓰셨어요. 그런데 그게 언제인지 분명치 않아요. 아버지가 3·1운동에 참여했다고 밝히셨는데 그게 연희전문 시절인지, 의명학교 시절인지 모르겠어요. 짐작할 뿐입니다.
아버지가 남기신 일기장을 보면 서울에 있다가 도미했다고 하셨으니 삼육대학 졸업 후 다시 연희전문에 다니며 유학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허연은 로어노크대에 2학년(Sophomore)으로 입학한다. 삼육대학 혹은 연희전문에서 땄던 학점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흥사단 團友 265번 허연, 266번 홍난파
1932년 귀국한 뒤 허연은 협성실업학교(지금의 서울 광신고) 교사가 되었다. 39세의 노총각은 과년한 29세 신여성 김귀애와 1934년 봄 결혼했다. 서울 북아현동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허달의 말이다.
“당시 학교 서무주임을 맡고 있던 허연의 장인 김기선(金基善)에게는 피아노와 성악에 관심이 있던 과년한 딸이 있었어요.
개성 호수돈여고를 졸업한 김귀애는 음악을 좋아하고 유난히도 꽃을 좋아하는 여인이었다고 해요.”
이미 혼기가 차고도 넘친 두 젊고 아름다운 남녀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신뢰가 자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인 허연은 당시 이런 시를 남겼다.
그도 내 맘을 짐작하련만
나도 그의 맘을 알듯 하건만
만나면, 만나면
딴 말만 하다가
웃을 제도 외려
외면을 하다가
그래도 어쩌다 눈 마주치면
비둘기와 같이도 그의 눈동자는
그의 맑은 눈동자는
-허연의 ‘눈동자’ 전문
허연과 김귀애의 결혼사진을 보면 ‘울 밑에 선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洪蘭坡·1897~1941년) 선생이 있다. 그것도 바로 허연 옆에. 둘은 ‘베스트 프렌드’였던 것이다. 사진에는 훗날 미군정 문교부장, 제3공화국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오천석(吳天錫·1901~1987년) 박사도 있다. 허용의 말이다.
“흥사단 단우 명부에는 허연이 265번, 홍영후(홍난파)가 266번으로 기재돼 있어요. 그만큼 두 분이 가까운 사이셨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미군정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허연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獄苦)를 겪은 뒤, 협성실업학교에 돌아가는 대신, 독지가의 도움을 얻어 초급 실업대학인 중앙상업학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원장에는 이종수(李鍾洙·1906~ 1989년·서울사범대학장 역임), 교무주임 겸 영어 담당 교수는 피천득(皮千得·1910~2007년) 선생이 맡았다고 한다.
― 당시 미국 유학파 출신이면 미군정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군정에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허달) 아버지가 미군정에 반감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경제학만 배우셔서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나 정치에 대한 균형감각이 부족하셨을 수도 있어요.”
“(허경숙) 아버지가 영어에 능통하셨으면서 미군정 관계자와 대화할 때 일부러 통역관을 쓰셨다고 해요. 군정에 들어가기보다 이종수·피천득 같은 당대 지식인들과 더불어 대학(중앙상업학원)을 더 발전시키는 게 더 큰 행복이라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허연은 병석에 누워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향년 쉰셋의 나이였다.
“(허달) 서른여섯에 미국에서 학위 마치고 귀국하셔서 쉰셋에 돌아가셨으니…, 무언가 이루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요. 오래 사셨으면 미국에서 배운 신학문을 국가 발전에 쏟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직도 아버지가 누워계시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간혹 손님이 오시면 어머니가 저를 안고 병석으로 안내하시던 일이 편린처럼 떠올라요.”
‘이 몸도 한때 젊었었노라’
― 허연과 관련해 최근에 새롭게 확인된 사실이 있나요?
“(허용) 할아버지가 1심에서 무죄, 2심에서 1년 6개월 받으시고 집행유예로 출소를 하셨다는 기록을 찾았어요. 선고 없이 미결수로 1년 2개월간 투옥돼 있었어요.”
“(허달) 말이 미결수였지, 전향하지 않은 이는 일제가 물고를 내고 마는 고문의 연속이었다고 당시의 여러 기록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허연은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시를 남겼다. 아마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시로 추정될 만큼 죽음을 예감한 듯하다. 허달은 “아버지 시 중 가장 마음 아픈 시”라고 말했다.
오월 하늘에 비둘기처럼
내 맘도 한때는 즐거웠나니
오월 하늘 밑 냇물과 같이
나도 한때는 춤추었나니
피어나 타는 장미꽃처럼
내 맘도 한때는 붉었었노라
저 푸른 잎 푸르듯이
이 몸도 한때 젊었었노라
하늘도 그 하늘 때도 그때
나는 지금 병들어 누웠노라
지치고 힘없는 몸이
땀에 젖어서 자리에 누웠노라
머리에는 벌써 찬서리 맞고
맘 동산에도 단풍 들어
하늘도 그 하늘 때도 그때
나는 지금 병들어 누웠노라.
-허연의 ‘오월’ 전문
생명이 꽃을 피우는 5월, ‘내 마음은 한때 붉었고 젊었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병들어 누웠고, 땀에 젖어 자리에 누웠다’는 탄식을 했던 허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나서야 애국하던 삶이, 그의 문학이 재조명되고 있다. 오랜 시간 아버지, 할아버지를 그리던 후손들은 그리고 삼육대학 측은 이제야 국가보훈처를 찾아갈 계획을 세웠다.⊙
일제 식민지사를 연구하는 소수의 학자에게 회자되는 이름일지라도, 비록 ‘비공식 애국지사’일망정, 누군가의 일생이 홱 돌아서서 도망치는 법은 없다. 반드시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기자는 ‘복원하는 신화(神話)’로 선생을 기억하려 한다.
허연. 1896년 8월 11일에 평안남도 순안(順安)에서 태어나 1949년 8월 12일 쉰셋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알 수 없다. 유족 말로는 1년 2개월간의 혹독한 영어(囹圄)의 고초 때문이란다. “도산(島山 安昌浩·1878~1983년)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에 묻혔다.
순안 의명(義明)학교와 서울 연희전문 중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단이 운영하는 중국 상하이 삼육대학 졸업(1922년), 미국 버지니아주 세일럼(Salem)의 로어노크대(Roanoke College) 졸업(1929년),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경제학 석사)을 졸업(1932년)했다.
로어노크대는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1881~1950년) 선생이 다닌 대학으로 허연의 학적부에 적힌 보증인(Guardian)은 다름 아닌 김규식이었다.
허연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미결수로 1년 2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의 시고(詩稿)와 빛바랜 육필 일기 〈1925년의 기록〉은 아직도 남아 있다. 다행스럽게도 시고는 지난 2010년 시집 《박꽃》(다솜출판사)으로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허연은 거칠 것 없는 무장 투사, 실패한 식민지 폐허에서 새로운 현실을 주조하던 혁명가는 아닐지라도 그의 내면은 조선 독립의 열정으로 불타올랐으리라.
허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내 김귀애(金貴愛·1906~1993년)는 마흔넷이었다. 곱절만큼 살아 여든여덟에 남편 곁으로 갔다. 한때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날린 장남 허진(許進·1936~1995년)도 어머니가 떠난 2년 후 따라갔다.
남은 딸 허경숙(許慶淑·87), 두 아들 허일(許逸·한국해양대 명예교수·81)·허달(許達·전 SK 부사장·79)과 그 후손이 아버지, 할아버지의 일생을 기억하며 흔적을 더듬고 있다.
‘철쭉 피는 때를 두견은 왜 우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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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후손들. 장녀 허경숙(앞줄)과 아들 허달(뒷줄 왼쪽), 손자 허용. |
허연의 유작 시집 《박꽃》에 ‘두견’이라는 시가 있다.
철쭉 피는 때를 두견은 왜 우는고
철철이 타는 가슴 꽃 피는 때 더 하더냐
재오쳐 우는 소리는 목 메인듯 하여라
-1928년 뉴욕주 캐츠킬 산중에서
왜 허연은 세계의 열강과 겨루던 미국에서 새소리를 듣고 목이 메였을까. 왜 ‘노래하는’ 두견이 아닌 ‘우는’ 두견으로 인식했을까. 아들 허달(이하 ‘씨’ 생략)의 말이다.
“우국(憂國)과 망향(望鄕)의 마음을 표현하셨는데 뉴욕 북부의 ‘캐츠킬(Cat's Kill)’은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해요. 풍광(風光)이 우리나라 산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그곳에서 고국의 산천을 그리워하셨나 봐요.”
아들 허달은 1943년생. 아버지 허연이 1949년 세상을 떠났으니 그에게 아버지는 조각난 기억으로 존재한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기억이 안타깝지만 별로 없어요. 아버지가 북을 쿵쿵 치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 북을 치다니요?
이번에는 장녀 허경숙의 말이다.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한 그녀는 허연이 숨졌을 때 15세였다. 이화여고를 다닐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2층에, 우리는 아래층에 살았어요. 요즘으로 치면 호출벨 대신 북을 치셨어요. 북소리를 듣고 2층으로 올라가곤 했죠.”
손자 허용의 말이다.
“할아버지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신 뒤 병을 얻으셔서 2층에서만 지내셨대요.”
가족들에 따르면 허연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다가 석방된 후 서울 누하동과 혜화동, 돈암동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광복 후 필동에 일본인들이 퇴거한 적산가옥 2층집을 구했다고 한다. 허경숙·허달의 회고다.
“친지인 백인제(白麟濟·1989~?·백병원 설립자) 박사가 아버지를 돌보기는 했으나 십수 년 타향살이와 옥살이, 몹쓸 고문으로 피폐된 몸이 차츰 악화되셨어요.”
수양동우회란…
일제는 1937년 조선의 독립을 모의하였다는 죄목을 씌워 일제 검거에 들어갔다.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이 터진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준비하기에 앞서 조선 내 불령선인을 검속(檢束)하여 내부 치안을 다지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1938년 대규모로 체포, 구속되어 해체되었으며, 그해 6월 6일부터 이듬해 3월까지 총 183명이 체포되었다. 이 중 41명이 기소되고 나머지는 불기소 상태로 재판을 받다가 1941년 11월 전원 무죄로 석방되었다. |
‘내가 걸어온 좁고도 굽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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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로어노크대의 현재 모습이다.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 의친왕과 김규식 박사가 다녔다. |
‘단로(單路) 40리, 이것이 내가 걸어온 좁고도 굽은 길이다.’
이 문장은 허연이 남긴 시고에 적혀 있다. 허용의 말이다.
“‘단로 40리’ 길은 할아버지께서 걸어가셨던, 어떨 때는 꼬불꼬불하고, 어떨 때는 가시덤불이며, 때로 노방한숙(路傍寒宿), 때로 그리운 이들과 이별하던 그런 길이 아니었을까요?
1920~30년대 식민지 조국에서 중국 상하이, 그리고 미국 서부와 동부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독립을 위해 자신을 단련시키셨던 할아버지의 길 말입니다.”
허달은 미국 출장길에 아버지가 다녔던 로어노크대를 찾아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허연이 1929년에 다닌 대학을 72년이 지난 2001년 찾아갔다. 미국 대학은 졸업 후 70년이 지나지 않으면 학적부를 가족에게조차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운이 좋았다. 허달의 말이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허씨 성(姓)을 영문으로 ‘Hugh’라고 쓰셨어요. 흔히 남들이 쓰던 ‘Huh’ 혹은 ‘Hur’로 썼다면 대학 측이 까다로운 가계 확인을 요구했을 텐데, 일찌감치 유학하신 아버지가 ‘Hugh’라는 영문 성을 남겨 자식들 또한 독특한 ‘Hugh’를 쓰고 있었죠.”
손자 허용도 비슷한 말을 했다. 미국에서 반도체 생산설비 업체 GSMT사를 운영하는 그는 공교롭게도 할아버지가 살던 버지니아주 매클린에 살고 있다.
“할아버지께선 굳이 ‘Hugh’라는 성을 100년 전에 쓰셨는데 어떤 연유로 선택하셨는지 직접 여쭤보고 싶어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미국인에게 왜 ‘Hugh’란 영문 성을 쓰는지 셀 수 없이 많은 질문을 받았거든요.”
― 이런 우연이 다 있나요? 지금 사는 곳이 버지니아고, 100년 전 허연이 다니던 대학이 버지니아에 있고….
“그렇다니까요. 제가 미국 동부 버지니아에서 30년 동안 살고 있는데, 우연히도 그 옛날 할아버지가 다닌 대학 근처에서 살고 있어요.”
‘흥사단의 근본적 主義가 무엇이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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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어노크대 허연의 학적부. 허연의 보증인(Guardian)은 애국지사 김규식이다. |
“학적부에 기재된 아버지의 공식 ‘가디언(보증인)’은 김규식 선생이었어요.”
‘Dr. Kiusic Kimm’이란 영문 이름으로 적혀 있다. 당시 상하이 독립운동 관련 한국인 커뮤니티가 매우 좁았을 것을 떠올린다면 김규식과 허연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하고많은 미국 대학 중에 로어노크대를 김규식이 추천한 까닭은 무얼까?
허달은 해답을 대학 연혁이 기록된 《로어노크 히스토리 북》에서 찾았다고 한다. 그 책에 조선인 3명의 사진이 있었다.
먼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귀인(貴人) 장(張)씨의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1877~1955년)이 등장한다. 그는 1899년(광무 3) 미국에 유학,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와 버지니아주 로어노크대에서 공부했다. 미국 유학생 시절에 의친왕에 봉해졌으며 귀국하여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조선 황족 중에서 유일하게 항일투쟁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규식의 얼굴도 나온다. 그는 1898년 로어노크대에 입학해 1903년 졸업했다. 허달의 말이다.
“로어노크대에 유학 온 왕자의 공부 친구로 신학문과 인연을 맺었던 김규식이 훗날 상하이에서 만난 청년 허연을 자신의 모교에 추천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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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어노크 히스토리 북》에 실린 한 장의 사진. 왼쪽이 의친왕 이강. 가운데는 당시 대한제국의 주미공사, 오른쪽 앳된 얼굴의 소년이 김규식이다. |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 정보 시스템’에서 우연히 할아버지의 친필 흥사단 입단서를 찾았습니다. ‘흥사단의 근본적 주의(主義)가 무엇이뇨?’로 시작하여 5장에 달하는 18개의 자필 문답을 찾을 수 있었어요.
입단서 작성 당시 미국 피츠버그에 머물던 학생 ‘벤자민 허연’은 이렇게 답합니다.
‘민족주의, 우리 민족과 국가 독립을 떠나서는 흥사단이 나에게는 하등의 다른 필요를 주지 않음.
흥사단이 우리 민족 혁명운동에 무슨 관계가 있느뇨? 직접으로 당면한 일부가 될 것. 다시 말하면 민족(우리)혁명을 목적하는 일(一)단체.’”
이번에는 허경숙의 말이다.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아버지가 미국에 계실 때 이기붕(李起鵬·1896~1960년), 박마리아(朴瑪利亞·1906~1960년) 두 분도 계셨다고 합니다. 교포 중 어느 분이 아버지와 박마리아의 만남을 주선했대요. 그런데 아버지는 빈털터리야. 이기붕은 맥주 도매상인가를 했고. 그래서 (박마리아가) 이기붕과 결혼한 거야.”
허달은 상상력을 좀 더 보태어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서 이화여전 나오고 유학 온 박마리아는 당시 마운트 홀리오크대학(Mount Holyork College)에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서른다섯 허연에 비해 열 살이나 어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만남에서 ‘공부는 언제 마치시나요?’ ‘그 후 계획은요?’ ‘귀국은요?’ ‘귀국하시면 어떤 계획이 있으세요?’ 등의 질문을 쏟아냈고 ‘민족과 국가의 독립’을 염원하던 허연은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인연이 계속 이어질 리 없었겠죠.
만약 박마리아와 허연이 결혼했다면 우리나라 현대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이기붕 가족의 비극적 종말 역시 없었을 테고….”
허경숙은 어린 시절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동생들이 누나를 질투할 정도. 그도 그럴 것이 허연이 서른아홉에 본 첫 자식이었다.
“아버지가 마흔이 다 되어 낳은 자식이었으니 당연하지요. 당신은 이광수 선생과 술친구셨는데 부인 허영숙(許英肅·1897~1975년)이 효자동에서 조산원을 했어요. 엄마가 (조카 허용을 가리키며) 이 사람 아버지(허일)를 그 조산원에서 낳았어요.
유치원 다닐 때였는데 아버지 손을 잡고 이광수 선생 댁에 가면 허 여사가 겁을 냈어요. 그이(이광수)의 폐(肺)가 나쁘셨는데도 두 분이 만나면 자꾸 술을 잡수시니까….
아버지는 저를 어디든 데리고 다니셨어요. 청진동에 있던 유치원에 다녔는데 유치원 마칠 때쯤 아버지가 데리러 오세요. 그러곤 아버지 술친구들과 만났어요. ‘동해루’라는 식당이 떠오르네요.”
기억에 남은 것은 蓮못과 피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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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이 다닌 평남 순안에 있던 의명학교 교사(1913년). |
연유는 알 수 없으나 다섯 살에 아버지,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서 외가에서 한문 공부를 하며 자랐다고 한다.
아들 허달의 말이다.
“조부모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어요. 다만 조실부모하고 아버지가 외조부모 손에 컸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아버지가 남기신 수필 중에 〈고향에 가는 길, 고향에 돌아와〉라는 글이 있어요.
‘어머니 돌아가신 뒤에 외할머니는 이모의 집으로, 나는 안주(安州)로 헤어져 못 뵈온 지 몇 해런가. 오직 살아남아 동(東)으로 서(西)로 떠돌아다니는 것은 이 한 몸뿐. 눈물지어 이 땅을 지나 또 어데로 가는가? 어머니 살아계실 제, 업혀 다니며 보던 순안(順安)은 이제 어디로 갔는가. 오직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연(蓮)못과 피무덤.’
또 이런 문장도 나옵니다.
‘고향 안주에 돌아와 오래 못 뵈온 삼촌께서는 나를 붙들고 운다. 나도 울었다. 열세 살 먹은 누이동생은 나를 보지도 못하였건만 붙들고 운다. 여기가 내 본향(本鄕)이다. 나를 붙들고 우는 사람이 있는 내 본향이다.’”
부모의 사망으로 식솔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비극적 가족사가 있었던 것이다.
허연은 1908년 러셀 박사가 의료선교사로 봉사하던 평남 순안병원(현 삼육서울병원)에 침식을 제공받는 급사로 들어가면서 재림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다.
러셀 박사 곁에서 조수로 일하며 영어와 병원 업무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러셀 박사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 이름을 너에게 준다. 너도 그처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근면 노력하여 위대한 인물이 돼라는 뜻”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러셀 박사의 주선으로 1913년 평남 순안 의명학교에 입학해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계속된 허달의 이야기다.
“동급생보다 적어도 세 살 이상 연상, 심지어는 일곱 살 아래인 막내 동급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배우는 데 열심이셨고, 어린 동급생들과도 잘 어울렸대요. 방과 후에는 병원 일로 러셀 박사를 도우는 일에 진력하셨고 눈코 뜰 새 없이 3년간을 의명학교에서 보냈어요.”
허연은 1919년 3월 6일 의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순안 만세운동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시위에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일경(日警)의 수사망을 피해 스승 김창세의 추천장을 손에 들고 걸어서 중국 상하이로 갔다.
의명학교 출신인 김창세(金昌世· 1893~1934년·흥사단 단우 121번) 박사는 1925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보건대학원에서 한국인 최초로 공중보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우리나라 보건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계속된 허달의 이야기다.
“고향 순안을 떠나 6개월 동안 걷고 또 걸어서 상하이에 1919년 겨울 도착합니다. 도대체 상상이나 되는 거리인가요?
그렇게 삼육대학 졸업장을 손에 쥔 것이 1922년 5월이었죠.”
이번에는 손자 허용의 말이다.
“삼육재단 쪽에서 ‘상하이 삼육대학과 의명학교 쪽 인연이 이어지니까, 대학재단 쪽에서 허연의 독립유공자 추서(追敍)를 도와주겠다’고 나섰어요.”
허연은 삼육대학을 졸업한 뒤 김규식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떠난다. 그러고 1926년 로어노크대에 입학한다. 허달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자필 ‘흥사단 이력서’에 연희전문에 다니셨다고 쓰셨어요. 그런데 그게 언제인지 분명치 않아요. 아버지가 3·1운동에 참여했다고 밝히셨는데 그게 연희전문 시절인지, 의명학교 시절인지 모르겠어요. 짐작할 뿐입니다.
아버지가 남기신 일기장을 보면 서울에 있다가 도미했다고 하셨으니 삼육대학 졸업 후 다시 연희전문에 다니며 유학 준비를 하지 않았을까요?”
허연은 로어노크대에 2학년(Sophomore)으로 입학한다. 삼육대학 혹은 연희전문에서 땄던 학점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흥사단 團友 265번 허연, 266번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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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과 김귀애 결혼사진(1934년). 허연의 오른쪽이 홍난파다. |
“당시 학교 서무주임을 맡고 있던 허연의 장인 김기선(金基善)에게는 피아노와 성악에 관심이 있던 과년한 딸이 있었어요.
개성 호수돈여고를 졸업한 김귀애는 음악을 좋아하고 유난히도 꽃을 좋아하는 여인이었다고 해요.”
이미 혼기가 차고도 넘친 두 젊고 아름다운 남녀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신뢰가 자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인 허연은 당시 이런 시를 남겼다.
그도 내 맘을 짐작하련만
나도 그의 맘을 알듯 하건만
만나면, 만나면
딴 말만 하다가
웃을 제도 외려
외면을 하다가
그래도 어쩌다 눈 마주치면
비둘기와 같이도 그의 눈동자는
그의 맑은 눈동자는
-허연의 ‘눈동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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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단우 명부. 265번이 허연, 266번이 홍영후(홍난파)다. |
“흥사단 단우 명부에는 허연이 265번, 홍영후(홍난파)가 266번으로 기재돼 있어요. 그만큼 두 분이 가까운 사이셨음을 짐작할 수 있어요.”
미군정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허연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獄苦)를 겪은 뒤, 협성실업학교에 돌아가는 대신, 독지가의 도움을 얻어 초급 실업대학인 중앙상업학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원장에는 이종수(李鍾洙·1906~ 1989년·서울사범대학장 역임), 교무주임 겸 영어 담당 교수는 피천득(皮千得·1910~2007년) 선생이 맡았다고 한다.
― 당시 미국 유학파 출신이면 미군정에 쉽게 취직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군정에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허달) 아버지가 미군정에 반감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경제학만 배우셔서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나 정치에 대한 균형감각이 부족하셨을 수도 있어요.”
“(허경숙) 아버지가 영어에 능통하셨으면서 미군정 관계자와 대화할 때 일부러 통역관을 쓰셨다고 해요. 군정에 들어가기보다 이종수·피천득 같은 당대 지식인들과 더불어 대학(중앙상업학원)을 더 발전시키는 게 더 큰 행복이라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허연은 병석에 누워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향년 쉰셋의 나이였다.
“(허달) 서른여섯에 미국에서 학위 마치고 귀국하셔서 쉰셋에 돌아가셨으니…, 무언가 이루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요. 오래 사셨으면 미국에서 배운 신학문을 국가 발전에 쏟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아직도 아버지가 누워계시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간혹 손님이 오시면 어머니가 저를 안고 병석으로 안내하시던 일이 편린처럼 떠올라요.”
‘이 몸도 한때 젊었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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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이 자필로 쓴 흥사단 입단서. 1932년에 흥사단에 들어갔다. |
“(허용) 할아버지가 1심에서 무죄, 2심에서 1년 6개월 받으시고 집행유예로 출소를 하셨다는 기록을 찾았어요. 선고 없이 미결수로 1년 2개월간 투옥돼 있었어요.”
“(허달) 말이 미결수였지, 전향하지 않은 이는 일제가 물고를 내고 마는 고문의 연속이었다고 당시의 여러 기록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허연은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시를 남겼다. 아마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시로 추정될 만큼 죽음을 예감한 듯하다. 허달은 “아버지 시 중 가장 마음 아픈 시”라고 말했다.
오월 하늘에 비둘기처럼
내 맘도 한때는 즐거웠나니
오월 하늘 밑 냇물과 같이
나도 한때는 춤추었나니
피어나 타는 장미꽃처럼
내 맘도 한때는 붉었었노라
저 푸른 잎 푸르듯이
이 몸도 한때 젊었었노라
하늘도 그 하늘 때도 그때
나는 지금 병들어 누웠노라
지치고 힘없는 몸이
땀에 젖어서 자리에 누웠노라
머리에는 벌써 찬서리 맞고
맘 동산에도 단풍 들어
하늘도 그 하늘 때도 그때
나는 지금 병들어 누웠노라.
-허연의 ‘오월’ 전문
생명이 꽃을 피우는 5월, ‘내 마음은 한때 붉었고 젊었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병들어 누웠고, 땀에 젖어 자리에 누웠다’는 탄식을 했던 허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나서야 애국하던 삶이, 그의 문학이 재조명되고 있다. 오랜 시간 아버지, 할아버지를 그리던 후손들은 그리고 삼육대학 측은 이제야 국가보훈처를 찾아갈 계획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