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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재상 열전 19 | 최명길(崔鳴吉)전

백성을 전란의 도탄에서 구해낸 ‘실사구시 재상’

글 :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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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실록》)
⊙ 병자호란 앞두고 강화 주장… 전쟁 끝난 후 속환된 여성들 보호
⊙ 광해군 시절 유배생활 하면서 양명학 공부
⊙ 거사 날짜 정하는 등 인조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
⊙ “강화의 문서를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 되고 찢어진 문서를 맞추는 사람 또한 있어야”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 前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최명길
  1623년 3월 13일 서인(西人) 세력이 주축이 된 일군의 무리가 훗날의 인조를 내세워 반정(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강화도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1560~1623년) 등을 처형했다.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대북파를 이끈 이이첨은 광해군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살해했으며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을 주도했다. 사실상 서인과 남인들이 거사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인조와 서인은 남인 이원익(李元翼·1547~1634년)을 모셔와 영의정으로 삼았지만 실권을 갖는 재상인 좌의정은 자기 사람으로 임명했다. 거사 당시 좌의정 박홍구(朴弘耈·1552~1624년)는 곧바로 윤방(尹昉·1563~1640년)으로 교체되었다. 박홍구는 이이첨·정인홍을 따르던 대북파로 반정 당시에는 목숨을 건졌지만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돼 사형당했다.
 
  거사 후 열흘이 지난 3월 24일 정창연(鄭昌衍·1552~1636년)이 좌의정에 오른다. 좌의정 정유길(鄭惟吉·1515~1588년)의 아들로 이미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냈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직에서 사퇴하고 두문불출했다. 이때 이미 70세를 넘겨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광해군 비 유씨(柳氏)가 조카였음에도 폐모론에 참여치 않아 서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반정공신 김류
 
  그러나 정창연은 4개월여 만에 물러나고 우의정 윤방이 좌의정에 오른다. 선조 때 서인 영수였던 영의정 윤두수(尹斗壽·1533~1601년)의 아들로 이이(李珥)의 제자였으니 정통 서인이었다. 그는 4년 정도 좌의정으로 있으며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의 졸기(卒記) 한 대목이다.
 
  〈상이 반정하고 나서 그를 재상으로 발탁하였는데 국가 대사에 대해 특별히 의견을 진달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갑자년(1624년)에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맨 먼저 도성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이 책자 한 권을 바쳤는데 곧 역적 이괄에게 붙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것이었으므로 그는 자세히 보지도 않고 불태워 버렸다. 그래서 의논하는 사람들이 ‘이분의 큰 역량이 아니었으면 이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정묘호란이 있기 전에 조용히 은퇴했거나 병자호란 때 죽기로 결심했더라면 이름난 재상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다고 하겠다.〉
 
  그는 병자호란 때 40여 신주를 모시고 봉림대군 등과 함께 강화로 피란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잘못을 저질러 2개월 동안 유배에 처하기도 했다.
 
  윤방의 뒤를 이어 잠시 신흠(申欽·1566~1628년)이 좌의정에 올랐지만 곧바로 오윤겸(吳允謙·1559~1636년)으로 교체된다. 인조 5년(1627년) 9월 4일이었다. 반정공신 김류(金瑬·1571~1648년)는 우의정이었다.
 
  오윤겸은 성혼(成渾·1535~1598년)의 문인으로 서인이며 예학(禮學)에 밝았다고 한다. 그러나 재상으로 업적은 그다지 없었다. 그에 대한 졸기의 한 대목이다.
 
  〈청백하고 근신함으로써 몸을 지켰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들을 예우하였으므로 현상(賢相)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재능과 곧은 말을 하는 기풍이 없어 명성이 정승이 되기 전보다 떨어졌다.〉
 

  1년 후 드디어 반정 1등 공신 김류가 좌의정이 되어 정국을 주도한다. 김류는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 추숭(追崇·왕위에 못 오르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던 일)과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고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졸기는 그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품이 자기의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남의 선을 따르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병자년과 정축년의 난리 때에는 패자(敗子)에게 중임을 제수하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통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아들에게 강화도 수비를 담당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가 실패한 일을 말한다. 이후 이정귀(李廷龜· 1564~1635년)도 잠깐 좌의정을 맡았다. 마침내 인조 15년(1637년) 7월 최명길이 좌의정에 오른다. 52세 때였다.
 
 
  “오늘은 증자, 내일은 안자, 다음 날은 공자 되리라”
 
  최명길은 1586년 8월 15일에 태어났다. 선조 19년이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이다. 아버지 최기남(崔起南·1559~1619년)은 우계(牛溪) 성혼에게 수학했고, 문과에 급제했으나 “당시의 소인배들에게 배척을 당해 관직으로 현달하지 못하고 영흥부사(永興府使)에 그쳤다”. 할아버지 최수준(崔秀俊)은 아예 벼슬을 멀리 했다.
 
  아버지의 학통이 서인 중에서 훗날 소론(少論)으로 발전하게 되는 학파의 종주(宗主)인 성혼과 닿아 있다는 것은 어린 시절 최명길의 배움에도 깊은 영향을 남기게 된다. 아마도 아버지가 서인 중에서도 이이나 송익필(宋翼弼)의 학통이었다면 주희(朱熹)의 《소학(小學)》부터 읽으라고 했을 텐데 아버지 최기남은 달랐다. 행장(行狀)을 비롯한 각종 기록을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둘째 아들이었던 최명길은 키가 작고 몸도 좋지 않았다. 남들보다 늦은 8세에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공부를 시작하고부터 최명길이 자주 입에 올린 말이 있다.
 
  “오늘은 증자(曾子)가 되고 내일은 안자(顔子)가 되고 또 그다음 날에는 공자(孔子)가 되리라.”
 
  증자와 안자[안회(顔回)]는 모두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덕행(德行)이 최고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최기남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논어(論語)》를 가르쳤다. 10세 때 문장을 짓기 시작했고 14세 때에는 집에서 주자(朱子)의 책들을 익혔다. 이를 바탕으로 시골을 떠나 한양으로 올라가 성균관(成均館)을 드나들며 선비들과 교유했다.
 
  사실 이때는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였다. 최명길의 나이 7세 되던 1592년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은 지금의 경기도 송탄으로 피란을 떠났다. 다행히 이듬해 한양이 수복됐고, 그제야 최명길의 가족들도 인천(仁川)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최명길의 공부가 늦어진 또 하나의 이유다.
 
  다행히 최명길의 증손자이자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1646~ 1715년)의 아들인 최창대(崔昌大)가 남긴 글에 이 무렵 일에 대해 최명길 자신이 회고한 대목이 실려 있다. 자제들을 타이르며 한 말이다.
 
  “난리 뒤에 인천 장사(莊舍)로 돌아가 살면서 부지런하게 과독(課讀·책읽기)하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간혹 닭이 울게 되면 매번 배 속이 주림을 깨달았지만 이제 막 상란(喪亂)을 겪은 터에 집 안 또한 텅 비고 곤궁하여 집 안을 빙 둘러보아도 실로 주림을 구제하고 먹을 만한 것이 없어 늘 주림을 참으며 글 읽기를 면하지 못하였느니라. 이제 너희는 날로 기름진 기장밥을 배부르게 먹어 항상 배불러 넉넉함이 있거늘 부지런히 글을 읽지 아니한다면 되겠느냐?”
 
 
  신흠, “장래 세상 위해 큰일 할 인물”
 
이항복
  최명길은 1605년(선조 38년) 2월 14일 문과에 급제했다. 20세 때였다. 훗날 그의 스승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되는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승정원에 재직 중이었는데 평소 눈여겨보던 최명길에 대해 이런 촌평을 남겼다.
 
  “최 아무개는 체질은 비록 잔약하나 정신은 정련돼 있어 금이나 옥과 같은 사람이다. 장래에 세상을 위해 큰일을 할 인물이다.”
 
  최명길은 과거 급제자들의 길을 따라서 승문원(承文院)에서 관리의 업무를 익히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승문원이란 외교에 관한 문서를 맡는 관청으로 흔히 중국의 관례를 따라 괴원(槐院)이라고 불렸다. 이 무렵 최명길은 이시백(李時白·1581~1660년), 장유(張維·1587~1638년)와 함께 어울리며 당시 정승으로 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을 스승처럼 섬겼다. 이들은 넓은 의미의 서인(西人)이라 할 수 있다. 이시백은 이이를 스승으로 섬긴 이귀(李貴)의 아들이고 장유는 서인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김장생(金長生·1548~1631년)의 문인이다. 이항복은 대체로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본다.
 
  최명길의 실제 관리로서의 길은 평탄치 못했다. 최명길은 병약했다. 24세 때인 1609년 광해 원년에 사초(史草)를 정리하던 사국(史局)에 천거됐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이듬해 사헌부 감찰과 예조좌랑에 천거됐을 때도 마찬가지 이유로 취임하지 못했다. 1611년 공조좌랑에 임명됐고 이듬해에는 병조좌랑에 제수됐다. 그런데 병조좌랑으로 있던 최명길은 1614년(광해군 6년) 1월 14일에 감옥에 수감된다. 그날의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다.
 
  “병조좌랑 최명길(崔鳴吉), 선전관 윤우(尹佑)가 잡혀와 하옥되었다.”
 
  배경은 이러했다. 당시에 명나라 차관(差官)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왕이 명하여 병조 낭청과 선전관 각 한 사람으로 하여금 차관의 관소를 수직하게 하여 외부 사람과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막도록 했다. 마침 원일(元日·정월 초하루)이어서 차관의 가정(家丁) 몇 사람이 길을 나다녔는데 포도청 군사들이 그 뒤를 수행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했다. 그런데 서학(西學) 유생 이홍임(李弘任)이란 자가 술에 취하여 접근해 “당신네는 중국 사람인데 어디서 왔는가?”라고 했다. 이에 포도청 군사들이 즉시 체포, 이홍임이 중국인과 밀담을 주고받았다고 무고하여 상을 타고자 하였다.
 
 
  양명학을 배우다
 
  하지만 최명길이 사실을 조사하니 이런 실상이 없어 즉시 석방했다. 그런데 당시의 실력자 이이첨이 이 소식을 듣고는 사실을 알고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고 하여 이홍임과 더불어 함께 수감되게 된 것이다. 왕이 친국(親鞫)하여 공초를 받고, 이어 하옥하라고 명했다. 결국 최명길은 관작을 모두 빼앗기고 도성 밖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이러다 5년 후인 1619년(광해군 11년) 5월 14일, 최명길은 유배에서 풀려난다. 연보(年譜)에 따르면 이 무렵 아버지의 외가 쪽 친척인 남언경(南彦經·1528~1594년)의 아들 남격(南格)으로부터 장유와 함께 양명학(陽明學)을 배웠다. 남언경은 선조 때 사람으로 서경덕(徐敬德·1489~1546년)의 문인이며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다.
 
  유배에서 풀려나고 한 달 만인 6월 16일 최명길은 부친상을 당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1619년부터 1621년까지는 시묘살이를 하느라 공부를 배우지는 못했을 것이고 이후로부터 본다면 인조반정을 일으키던 1623년까지 대략 1~2년 정도 양명학을 공부한 것으로 추산할 수 있다. 시장(諡狀·위인이 살았을 때 한 일들을 적은 글발)에 따르면 이 무렵 최명길은 “복제(服制)가 끝났어도 성시(城市)로 가까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즐기지 않았고 교외에 살면서 소요했다”고 한다.
 
  이미 인목대비는 폐위돼 서궁(西宮)에 유폐돼 있었다. 시중에는 광해군이 유폐된 인목대비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이 무렵 신경진(申景禛·1575~1643년)이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섰다. 당시 신립(申砬·1546~1592년)의 아들 신경진은 안주목사(安州牧使)에 제배되자 최명길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의 뜻은 서궁(인목대비)을 붙들어 보호하는 데 있소. 멀리 변방 요새로 부임하는 것을 원하지 않소.”
 
  거사(擧事)의 암시였다. 신경진은 당시 이미 김류 등과 거사를 준비해오고 있었다.
 
 
  반정 다음 날 이조좌랑 발탁
 
  이시백과 가까웠던 최명길은 이시백의 아버지 이귀를 찾아갔다. 이귀도 동의했다. 당시 최명길의 역할과 관련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거사의 날을 최명길이 점을 쳐서 정했다는 것이다. 후손 최석정이 쓴 행장을 보자.
 
  〈그때 같이 일할 여러 사람이 중앙과 지방에 흩어져 있어서 시간을 자꾸 오래 끌어 거의 무산될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큰 계획을 너무 질질 끄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해 바로 시골에서 서울로 옮겨 와서는 반정의 거사일을 스스로 점쳐 결정했다.〉
 
  이는 최명길이 《주역(周易)》과 《춘추(春秋)》에 밝았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일의 대체(大體)를 살필 줄 알았다.
 
  또 한 가지 그의 행장이나 신도비 등이 반드시 기록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한창 거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능양군(綾陽君·훗날의 인조)을 사저로 찾아봬라고 권했다. 그러나 공은 “훗날 신하가 돼 섬겨야 할 분이다. 의리로 볼 때 사사로이 뵙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다”라며 끝내 가지 않았다. 식자들이 옳은 일이라고 했다.〉
 
  훗날 최명길이 보여주는 공(公)과 사(私)의 분별은 이미 이때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공로를 얻기 위해 거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나라의 도의가 땅에 떨어진 데 대한 공분(公憤)에서 참여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인조반정 거사 바로 다음 날 최명길은 조익(趙翼·1566~1628년)과 더불어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됐다. 이날의 《인조실록》이다.
 
  〈명길은 영민하고 재주가 있으며 성품 또한 재치가 있었다. 젊었을 때부터 세상 일을 담당할 뜻을 두었다. 광해조 때 벼슬에서 쫓겨나 집에 있다가 드디어 신경진 등과 의거를 꾀했는데 기묘하고 은밀한 계책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아울러 정사원공(靖社元功)에 녹훈됐다.〉
 
  이조좌랑은 높지는 않아도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요직이다. 그만큼 인조나 반정 세력 사이에서 최명길에 대한 신망이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공정함에 대한 인정이 없었다면 인사를 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은 이후에 그가 맡은 직위를 통해 확인된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주선”
 
김류
  3월 25일 새 임금은 김류·이귀·이괄을 불러 만나보고서 거사에서 주요 인사들의 활동상을 보고받았다. 차후에 있게 될 공신 책봉의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김류는 최명길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언급을 한다.
 
  “무오년(1618년)부터 서로 약속한 자는 신경진·구인후(具仁垕)·이서(李曙)·박난영(朴蘭英)이었는데 이흥립과 이서는 박승종(朴承宗)과 절친한 사이지만 끝내 대의(大義)를 일으켰으니 더욱 충의를 분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최명길은 처음부터 치밀하게 주선하였으니 그 공로가 김자점(金自點·1588~1651년)에 밑돌지 않습니다.”
 
  김류가 비교 대상으로 삼은 김자점은 어떤 사람인가? 최명길보다 두 살 아래인 김자점은 성혼에게 학문을 배웠고 음보(蔭補)로 출사해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의 폐비 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 대북 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했다. 처음에 최명길·심기원(沈器遠)과 함께,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년) 김류·신경진 등과 연결됐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 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켰다. 반정 직후에는 이귀의 입장을 지지하다가 김류와 이귀가 갈등을 빚자 김류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김류의 칭찬 덕분인지 같은 해 10월 18일 반정 공로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최명길은 1등공신에 녹훈돼 완성군(完城君)의 봉작을 받았다. 이미 이에 앞서 8월 11일 최명길은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됐다. 그러고 11월 2일 다시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승진했다. 새 임금과 조정의 신망이 그만큼 두터웠다는 방증이다.
 
 
  ‘진회보다 못한 자’
 
진회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아무도 해결책을 내지 못할 때 그는 당당히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다. 병자호란이 임박한 인조 14년(1636년) 11월 8일 최명길은 일관되게 청나라의 침략을 당해낼 능력이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화친을 추진했는데 부교리 윤집(尹集)이 소를 올려 최명길을 성토했다.
 
  “옛날 화의를 주장한 자들 중에 진회(秦檜·1090~1155년)보다 더한 사람이 없는데 당시에 그가 한 언어와 사적(事迹)이 사관(史官)의 필주(筆誅·글로써 공격함)를 피할 수 없었으니, 비록 크게 간악한 진회로서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명확합니다. 대체로 진회로서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최명길이 차마 하였으니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진회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진회만도 못한 자라는 뜻이다.
 
  진회는 남송(南宋) 초 정치가로 송나라를 침략한 금나라와 송나라를 남북으로 나누기로 합의한 장본인이다. 유능한 관리였지만 정권 유지를 위해 ‘문자옥(文字獄)’을 일으켜 반대파를 억압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와 이상주의를 내세운 후세의 주자학파(朱子學派)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그의 손에 옥사(獄死)한 악비(岳飛)가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받는 데 반해 그에게는 간신(奸臣)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서인이 누구인가? 주자학파 중에서도 가장 골수들 아닌가?
 
  최명길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전쟁 발발을 앞두고 최명길은 온몸을 던져 적진으로 들어가 전쟁을 막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청나라 장수는 전쟁과 강화(講和) 중 택일할 것을 통보했다. 최명길이 이를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에게 보고하자 조정 신하들은 격론을 벌였다. 최명길의 비명이 전하는 당시 상황이다.
 
  〈공이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결과를 보고하니 주상이 공의 손을 붙잡고 울먹였고 공도 눈물을 흘리며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성 아래에 이르러 여전히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공격과 강화의 의논이 더욱더 거세졌기 때문에 조정에서 섣불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공이 분발하여 말했다.
 
  “오늘날의 계책은 오직 강화냐 전쟁이냐 이 두 가지 일뿐인데 전쟁을 하려고 하면 힘이 미치지 않고 강화를 하려고 하면 두려워서 감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상하가 어육(魚肉)이 되어버린다면 장차 종사(宗社)는 어느 곳에다 둔단 말입니까?”
 
  오랑캐가 성을 더욱더 급하게 포위하여 여러 번 함락되려고 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상실되어 대부분 강화의 의논을 따랐다. 김상헌(金尙憲) 공이 강화의 문서를 찢으며 통곡하니, 공이 주어서 맞추면서 말했다.
 
  “강화의 문서를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 되고 찢어진 문서를 맞추는 사람 또한 있어야 합니다.”
 
  강도(江都·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자 드디어 남한산성 아래에서 강화의 맹약을 하였다.〉

 
  이로써 종묘사직은 보존될 수 있었다.
 
  1637년 4월 최명길은 우의정이 되었다가 석 달 만에 좌의정에 올랐다. 이 시기 그는 병자호란으로 망가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우고 청나라와 교섭해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과 척화신들을 송환하고, 청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절하느라 고생했다.
 
 
  속환된 여성들을 보호
 
  인조 16년(1638년) 3월 11일 자 《인조실록》에는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사족(士族) 여성들에 대한 이혼 문제가 실려 있다. 이때 좌의정 최명길은 속환 여성들의 강제 이혼에 대해 반대론을 펼친다. 정(正)보다는 중(中), 낡은 관습보다는 변통(變通)을 중시했던 그의 면모가 한껏 드러나는 장면이다.
 
  “신이 심양으로 갈 때에 들은 이야기인데, 청나라 병사들이 돌아갈 때 자색이 자못 아름다운 한 처녀가 있어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방법으로 달래고 협박하였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자 음식을 주지 않았고 결국 사하보(沙河堡)에 이르러 굶어 죽었는데, 이에 청나라 사람들도 감탄하여 묻어주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또 신이 심양의 관사에 있을 때, 한 처녀를 값을 정하고 속(贖)하려고 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이 뒤에 약속을 위배하고 값을 더 요구하자 그 처녀는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을 하였습니다. 이에 끝내는 그녀의 시체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가령 이 두 처녀가 다행히 기한 전에 속환되었더라면 반드시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정결한 지조가 있더라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몸이 더럽혀졌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서도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로잡혀 간 부녀들 모두 몸이 더럽혀졌다고 논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인조는 최명길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했다. 하지만 《실록》은 덧붙여 “그러나 이 뒤로는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들고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날 사관의 평은 더 가혹하다.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先朝·선조(宣祖)를 말함]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의 전교가 사책(史冊)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미 증거 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본받을 만한 규례는 아니니,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는가. 선정(先正)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진회보다 못한 자”에 이어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라는 비난이 사책에 더해진 것이다. 여기서 선조 때의 일이란 임진왜란 때 일어난 일로 최명길이 인용한 대목이다.
 

  “신이 고로(故老)들에게 들으니, 선조 조에 임진년 왜변이 있은 뒤에 전교가 있었는데, 지난해 성상의 전교와 서로 부합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항(閭巷)에서 전하는 바로 말한다면, 그때 어떤 종실이 상소하여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어떤 문관이 이미 다시 장가를 들었다가 아내가 쇄환(刷還·외국에서 돌아옴)되자 선조께서 후취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셨으며, 그 처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정실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재상이나 조관(朝官)으로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식을 낳고 손자를 낳아 명문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 이 어찌 예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때에 따라 마땅함을 달리 하는 것으로서 한 가지 예에 구애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시중(時中)의 논리가 먹혀들 조선 사대부 사회가 아니었다.
 
 
  최명길의 8대 공로
 
최석정
  최명길은 1638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기득권 세력화한 반정공신들과의 갈등으로 물러난다. 1640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지만 임경업(林慶業·1594~1646년)과 함께 명(明)나라와 내통하였다 하여 청나라로 압송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645년 귀국, 귀국 후에는 원로로 목소리를 내다가 1647년 세상을 떠난다.
 
  최명길이 세상을 떠날 때 두 살이었던 손자 최석정은 숙종 때인 1699년 좌의정에 오르고 1701년 영의정으로 옮긴다. 할아버지와 같은 서인 내 소론의 입장으로 남인을 포용할 것을 주장했고 백성의 어려움을 정치의 첫머리에 두었으며 당쟁의 폐단을 최대한 줄이려 했던 재상이다. 당시 노론 세력이 대보단(大報壇)을 세우면서 조부 최명길을 맹공하자 그 원통함을 해명하는 소를 올렸다. 그 소 중에 이시백이 최명길의 삶을 평가한 대목이 나온다.
 
  “신의 조부(祖父)가 별세한 뒤에 고(故) 상신(相臣) 이시백(李時白)이 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천(遲川·최명길의 호)의 사업(事業)이 매우 많은데도, 그중에 큰 것이 여덟 가지가 있다.
 
  계해년 반정(反正)할 때에 광복(匡復)하는 사업을 협찬(協贊)한 것이 첫째이고,
 
  병인년에 예(禮)를 의논할 때에 능히 부자(父子)의 윤리(倫理)를 밝힌 것이 둘째이며,
 
  병자년의 호란(胡亂) 때 혼자 말을 타고 적진(敵陣)에 나아가 적(賊)의 기세(氣勢)를 늦추게 한 것이 셋째이고,
 
  남한산성의 포위 때에 비방을 무릅쓰고 화친(和親)을 주장하여 종사(宗社)를 보존(保存)시킨 것이 넷째이며,
 
  무인년의 징병(徵兵)할 때에 의리로써 거절하여 죽는 것을 자기 집에 돌아가듯이 여긴 것이 다섯째이고,
 
  명나라에서 서신을 보내어 마침내 위기(危機)를 밟으면서 자신이 스스로 담당한 것이 여섯째이며,
 
  마음을 가지고 일을 행하는 데 확실하게 자신(自信)하여 붕당(朋黨)에 물들지 않은 것이 일곱째이고,
 
  골육(骨肉)을 잘 처리하여 촉오(觸忤)를 피하지 않고 남이 어렵게 여기는 바를 말한 것이 여덟째이다.’
 
  ‘지천’은 곧 신의 조부의 자호(自號)입니다.”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
 
이시백
  이시백의 말에서 병인년에 부자의 윤리를 밝힌 것이란 인조의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할 때 찬성한 것을 말한다. 무인년의 징병이란 청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줄 것을 청한 것이고 최명길은 명분에 입각해 이를 거절했다. 촉오란 웃어른의 마음을 거슬러서 성을 벌컥 내게 함이니 왕실 문제도 원칙에 입각해 곧은 간언을 했음을 말한다.
 
  《실록》의 최명길 졸기는 반대파에서 쓴 것임을 감안하면서 읽어야 한다.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이 졸하였다.
 
  명길은 사람됨이 기민하고 권모술수가 많았는데 자기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일찍부터 세상일을 담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광해 때에 배척을 받아 쓰이지 않다가 반정할 때에 대계(大計)를 협찬하였는데 명길의 공이 많아 드디어 정사원훈에 녹훈되었고, 몇 년이 안 되어 차서를 뛰어넘어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추숭(追崇)과 화의론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에는 척화(斥和)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하여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고 환도한 뒤에는 그른 사람들을 등용하여 사류와 알력이 생겼는데 모두들 소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실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救時之相]이라 하겠다.〉

 
  구시지상(救時之相), 이시백의 평과 정확히 합치되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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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철    (2024-07-05)     수정   삭제 찬성 : 1   반대 : 0
최명길은 1647에 졸했는데, 그 때 무슨 소론이 있었다는 것인지.....노소론의 분화는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의 죽음(1699년)이 도화선이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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