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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물들다 〈19〉 막다른 길에서 나를 기다리는 眞理의 얼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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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이 진정 왕과 같거늘 구태여 곤룡포를 입기 바라겠느뇨?”
⊙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단종이 잠든 강원도 영월의 장릉. 사진=조선DB
  
《월간조선》이 7월호 별책부록으로 《영월애(愛)》를 펴냈다. 기존 《영월통신》의 확장된 판형이다.
《월간조선》이 7월호 별책부록으로 《영월애(愛)》를 펴냈다. 기존 《영월통신》의 확장된 판형이다.
 
  동강과 서강, 남한강 물줄기가 흐르는 산 깊고 물 맑은 영월.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귀가 맑아지는 곳이 영월이다.
 
  청령포를 거쳐 단종(端宗·1441~1457년)이 묻혀 있는 장릉에서 영월읍으로 향하는 길목에 노루조각공원이 있다.
 
  단종이 죽었음에도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3족(族)을 멸한다는 세조(世祖·1417~1468년)의 엄명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동강에 버려진 시신을 수습한 이는 영월군(郡)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였다.
 
  그가 단종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산에 올랐지만 눈이 높이 쌓여 묻을 데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노루 한 마리가 놀라 달아났고 그곳을 살펴보니 눈이 녹아 있었다. 잠시 쉬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지게 목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바로 그 자리에 단종을 모셨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때 무덤 자리에서 놀라 달아났던 노루가 노루조각공원 곳곳에서 역사의 한 장(場)을 형상화하고 있다.
 
 
  ‘하찮은’ 종놈이 종년과 함께 쓴 일기
 

  미리 《영월애》를 읽다 보니 이강백(李康白·77) 선생의 희곡 〈영월행 일기〉(1995)가 떠오른다.
 
  1995년 극단 세실이 제19회 서울연극제에서 공연해 희곡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그해 10월 3일부터 15일까지 채윤일 연출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당시 김학철이 조당전 역을, 이화영이 김시향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이듬해 제4회 대산문학상 희곡상을 수상했다.
 
  극 중 《영월행 일기》는 세조 3년, 서기로 환산하면 1457년,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쓰인 일기다. 단종을 왕좌에서 쫓아낸 수양대군(세조)의 1급 참모 신숙주의 하인이 한명회의 여종과 동행해 영월을 오가며 경험한 일을 기록한 일기다. 물론 허구다.
 
  둘은 영월에 유폐된 단종인 노산군(魯山君)의 안색(顔色)을 살피고 오라는 세조의 명령을 받는다. 임금과 대신들이 직접 가서 단종의 표정을 살피기는 어렵고, 양반을 보내자니 이해관계에 따라 본 것을 왜곡할 염려가 있어 ‘하찮은’ 종놈과 종년을 보낸 것이다.
 
  이 하인과 여종의 인물을, 고서점에서 《영월행 일기》를 구입한 조당전과 일기를 판매한 김시향이 함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일기 내용을 극화(劇化)한 것이 연극의 뼈대를 이룬다. 이에 조당전과 김시향이 단종의 유배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둘 사이에 마음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서정적인 장면이 중간중간 삽입되어 이 작품은 ‘영월애’라는 소제목으로도 읽힌다.
 

  〈조당전: 여기, 숲속에 조그만 기와집이 있군.
 
  김시향: 기와집요…?
 
  조: 아무도 안 계시느냐고 여쭈어라!
 
  김: 이상해요…. 인기척이 없어요….
 
  조: 봇짐장수 왔노라고 여쭈어라!
 
  김: 아무 응답이 없군요.
 
  조: 우리 함께 저 대문을 열어보자구.
 
  (조당전과 김시향, 긴장하면서 조심스럽게 여닫이문을 양쪽으로 밀어젖힌다. 그러자 그 뒤의 공간이 보인다. 하얀 석고 덩어리처럼 무표정한 얼굴의 소년 형상이 의자 위에 앉아 있다.)
 
  김: 누군가 있어요….
 
  조: 그래… 쫓겨난 어린 임금이야….
 
  김: 전혀 움직이질 않는데요….
 
  조: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어… 아무 표정도….
 
  (조당전과 김시향은 뒷걸음으로 물러선다. 무대 조명, 서서히 암전한다.)〉

 
  다음 장면은 무표정한 단종의 얼굴을 두고 신숙주와 한명회가 세조 앞에서 핏대를 올리는 모습이 전개된다. 신숙주는 이렇게 말한다.
 
  “전하, 영월에 다녀온 자들이 말하기를, 노산군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나이다. 무릇 인간의 얼굴이란 감정이 있어야만 표정이 있는 법, 노산군의 무표정은 아무 감정도 없음이니, 전하께선 괘념하지 마옵소서.”
 
  그러자 한명회는 이렇게 반박한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인간이란 요사스러운 것, 마음속 가득히 원한을 품고서도 능히 얼굴로는 무표정하게 감출 수가 있사옵니다. 전하께선 노산군의 무표정에 속지 마옵시고, 반드시 그를 죽여 화근이 되지 않게 방비하소서.”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기 위해 세조는 또다시 조당전과 김시향에게 단종의 얼굴을 살피고 오라고 명한다. 영월은 까마득히 멀고도 먼 길이다. 한양서 가는 데만 400리, 오는 데도 400리다. 봇짐장수로 분장한 두 사람이 걸어 마침내 도착한 단종의 집 앞에서 조당전이 외친다.
 
  “지난번에 황망하여 저희 물건을 보여드리지 못하고 되돌아갔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득 풀어놓았사오니 구경하여주십시오.”
 
  그러나 소년 단종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김시향이 여닫이문에 다가가 문을 열어젖히니 의자에 앉은 어린 얼굴이 보였다. 지극히 슬픈 표정이다. 야윈 뺨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역력했다. 입술은 통곡을 삼키듯 일그러져 있었다. 둘이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 외로운 마음마저 용납 못 하시고 죽여버리시면…”
 
  〈김시향: 슬픈 표정이에요, 이번에는….
 
  조당전: 울고 계셔…. 피눈물을 흘리고 계셔….
 
  김: 어떻게 하죠? 문을 닫을까요?
 
  조: 너무나 슬픈 표정이신데….
 
  김: 봇짐을 싸겠어요.
 
  조: 아냐, 그냥 둬. (소년 형상을 향해 말한다.) 이왕 가져온 물건이니 놓고 갑니다. 부디 사양 말고 받아주십시오.
 
  (조당전, 여닫이문 앞에 진열했던 물건들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김시향도 거든다.)
 
  김: 남자한테 저런 물건들이 무슨 소용 있어요?
 
  조: 아무 소용없을까…?
 
  김: 옷감과 가위, 실과 바늘, 여자라면 쓸모 있겠죠.
 
  조: 그래도 우리 물건이 뭔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세상에 태어나 저런 슬픈 얼굴은 처음 봤어.
 
  김: 저 역시 처음 봐요.
 
  (조당전과 김시향, 슬픈 얼굴로부터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이며, 무대 조명, 암전한다.)〉

 
  두 번째 영월행을 두고 다시 어전회의가 열리고 신숙주와 한명회가 재차 충돌한다. 한명회가 주장한다.
 
  “신, 한명회 아룁니다. 노산군의 표정이 달라졌다 하옵니다. 자고로 간악한 자는 표정을 바꾸는 법, 무표정도 믿지 못하였거늘, 어찌 슬픈 표정을 믿을 수 있으리이까? 노산군의 슬픈 표정은 세상 사람들의 동정을 사서 역모를 꾀하려는 술수임이 분명하옵니다.”
 
  그러자 신숙주가 이렇게 논박한다.
 
  “노산군의 슬픈 표정은 다만 그의 외로운 심사를 나타낸 것일 뿐 결코 역모지사(逆謀之思)는 아니옵니다. 하온대 전하께서 이 외로운 마음마저 용납 못 하시고 죽여버리시면, 이는 제왕의 위엄을 지나쳐 제왕의 포악이 되옵니다.”
 
  어느 시대건 강경파와 온건파는 대립하는 법이다. 한명회가 신숙주를 보기엔 말만 할 뿐 결정하는 알맹이는 전혀 없고, 신숙주가 한명회를 보기엔 생각 없이 그저 무턱대고 행동만 하는 존재다.
 
  세조는 논란이 이어지자 “다시 영월로 사람을 보내 노산군의 표정을 살펴 오도록 하라”고 명한다.
 
  신하들 간의 격론이 이어질수록 밀사의 역할을 하는 조당전과 김시향의 고민도 깊어진다. 조당전의 고백이다.
 
  “얼굴을 바라본 나는 섬뜩 놀라 되돌아오지…. 길의 이쪽 끝, 막다른 곳에는 나를 기다리는 자들이 있는데…. 어떤 표정을 봤느냐 다그쳐 묻고…. 나는 내가 본 표정을 말하면서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 두려워지고…. 너무나 무서운 꿈이어서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면… 또 다른 무서운 꿈….”
 
 
  “난 죽어도 종노릇은 안 할 거야!”
 
  김시향은 이런 조당전을 위로하며 달래듯 말한다.
 
  “무서운 꿈 꾸지 말아요. 우린 그 얼굴과 상관없어요. 그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든지, 우리에겐 아무 책임이 없다구요.”
 
  다음은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다.
 
  〈조당전: 아무 책임이 없다….
 
  김시향: 우린 종이에요. 가서 보라면 보고, 와서 말하라면 말하고, 단순한 도구일 뿐이죠.
 
  조: 난 그렇게 생각 못 해. 남들이 우리를 종처럼 도구처럼 대우하는 것도 억울하고 분한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렇게 인정하란 말인가…. 아냐, 난 죽어도 종노릇은 안 할 거야!
 
  김: 당신은 너무 잘난 척해서 탈이에요!〉

 
  이 연극을 보며 관객은 자신이 누군가의 종노릇을 하며 살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조당전은 영월행을 통해 내면의 자유를 얻게 되고 종노릇에 회의를 느낀다. 그리고 부당한 권력에 분노를 느낀다.
 
  마지막 세 번째 영월행에서 둘의 눈에 비친 단종은 기쁜 얼굴이다. 처음엔 무표정, 다음엔 슬픈 표정이었다.
 
  소년 단종은 봇짐장수인 조당전과 김시향을 반기며 만면에 가득한 웃음을 짓는다. (단종은) 둘이 주고 간 옷감을 자르고, 바늘과 실로 사람 형상으로 꿰매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死六臣) 인형을 만든다. 그러고 이렇게 외친다.
 
  〈“보아라, 그대여! 내 몸은 비록 왕관 빼앗기고 곤룡포 벗김 당하였으나, 내 마음은 헝겊으로 만든 만조 백관들을 바라보며 흡족하도다! 들어라, 봇짐장수여! 그대는 돌아가서 그대를 보낸 자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내 마음이 진정 왕과 같거늘, 어찌 구차한 왕관을 쓰기 바라고, 구태여 곤룡포를 입기 바라겠느뇨? 나는 나를 왕좌에 복위시키려는 그 어떤 짓도 관심이 없고 그 어떤 사람과도 관련이 없으니, 그대는 돌아가 이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전할지어다!” (중략)
 
  조당전: 뭘 해, 가질 않고…?
 
  김시향: 아….
 
  조: 우린 돌아가야지. 돌아가서 본 대로 들은 대로 전해 주자구.
 
  김: 네…. 가요….〉

 
  세 번째 영월행에서 단종이 기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세조는 결국 사약을 보낼 것을 명한다. “하늘에는 오직 한 태양만이 빛을 내고, 땅에는 오직 짐만이 웃는 얼굴임을 보여주라”며 이렇게 소리친다.
 
  “경들은 들어라! 노산군의 무표정을 견뎠던 내가, 슬픈 표정도 견뎠던 내가, 기쁜 표정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도다! 만약 노산군의 기쁜 표정을 그대로 두면 온갖 시정잡배마저 제왕과 다름없다 뽐낼 터인즉, 대체 짐이 무엇으로 그들을 다스릴 수 있겠느냐?”
 
  신숙주가 “노산군의 기쁨이 무욕에서 우러나오는 것, 그의 웃는 얼굴은 욕망을 버린 증거이온데 어찌 죄가 되오리까”라고 완강히 말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작품 〈영월행 일기〉의 묘미는 권력의 억압과 자유 사이의 갈등을 극중극을 통해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 역사와 허구의 간극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연극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과거의 단종, 남녀 종이 추구하는 자유가 현재의 조당전과 김시향이 추구하는 자유와 겹치게 해 자유에 대한 갈망을 보편적인 것으로 형상화했다.
 
  영월을 찾아가는 세 차례 여정에서 단종의 표정이 두려움에 질린 무표정에서 통제와 억압의 상태를 인식한 슬픈 표정으로, 다시 정신적 자유를 획득한 웃는 표정으로 변하는 과정은 부당한 권력에 맞선 강한 인간 의지를 드러낸다. 그 의지는 억압에 맞선 자유의 의지와 맞물려 있다.
 
 
  ‘아프리카의 끝’과 분실된 책의 비밀
 

  희곡 〈영월행 일기〉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1932~2016년)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1980년, 국내 번역 1986년)과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소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은 1327년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 그곳에서 요한의 묵시록에 예언된 그대로 끔찍한 연쇄살인이 일어난다. 첫날은 폭설 속에 시체가 등장했고 둘째 날은 피항아리 속에 처박힌 시체가 발견되었다. 죽음의 자물쇠를 풀어가는 과정에 비밀의 열쇠를 쥔 책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밤마다 유령이 나타난다는 장서관은 출입이 봉쇄된다.
 
  소설은 영국의 수도사 윌리엄과 조수 아드소와 함께 수도원에서 7일간 머무르면서 의문의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윌리엄은 장서관에 대한 원장의 말을 의심한다. “거짓을 기록한 서책까지 고루 실은 방주”라면 바로 그곳에 살인의 비밀이 있다고 직감한다.
 
  또 서책의 제목 옆에 적힌 암호문 가운데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또 암호문 가운데 ‘finis Africae(아프리카의 끝)’라는 문장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목록에 ‘아프리카의 끝’이라고 표시된 책은 분실된 책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윌리엄은 탐문 끝에 책이 분실된 것이 아니라 감춰둔 것이며 일련의 살인사건과 ‘아프리카의 끝’이란 밀실이 관련돼 있음을 확인한다.
 
  〈“진리라고 해서 모든 것에 다 유익한 것은 아니고 허위라고 해서 모든 눈에 다 거슬리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사란 무엇을 쓰고 무엇을 읽든 하나도 틀림이 없이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자면 꼭 필요한 서책을 읽게 해주어야 합니다. 지적인 약점이나 자만심이나 악마의 꾐에 의한 바람직하지 못한 호기심에서 지켜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서관에는 허위를 기록한 책도 있다는 것입니까?”
 
  “악마는 신성한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존재하며 그 같은 악마의 추악한 모습 속에서도 창조주의 힘이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마법사가 쓴 책, 유대의 신비주의, 이교도 시인의 우화, 불신자들의 허언 역시 하느님 뜻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중략)
 
  장서관은 정신의 미궁이며 지상의 미궁입니다. 혹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오는 것은 뜻 같지 않습니다.”〉

 
영화 〈장미의 이름으로〉의 한 장면. 숀 코너리가 윌리엄 수사 역을 맡았다. 1986년 미국에서 처음 개봉했고 한국은 1989년 개봉했다.
  윌리엄 수사는 죽은 인물들이 모두 혀와 손가락 끝이 변색된 채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두 책과 관련된 죽음이며 《시학(詩學)》 제2권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몰래 훔쳐서 읽다 중독사 한 것이다.
 
  윌리엄은 장서관의 밀실인 ‘아프리카의 끝’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노인 호르헤가 《시학》 제2권을 건넨다. 사정을 파악한 윌리엄이 장갑을 끼고 책장을 넘기자 호르헤가 등잔을 꺼버린다.
 
  〈“어디 할 수 있겠거든 나를 찾아보아라! 이제 이 안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중략) 분명히 움직이고 있을 텐데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씩 엉뚱한 방향에서 종이 찢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이었다.
 
  (중략) 어둠 속을 더듬고 있는데 우리 뒤에서 종이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이미 문을 나서고 있는 모양이었다. 종이 찢는 소리에 이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략)
 
  “서둘러라! 서두르지 않으면 저 영감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다 먹어 치우겠다!”
 
  사부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다 먹어 치우고는 죽을 테지요.”
 
  사부님과 합류하면서 나는 심술을 부렸다.
 
  “저 영감탱이를 걱정하는 게 아니다. 거기에 붙어 있는 독약을 먹고 있으니 지금 먹은 양으로도 영감은 명재경각(命在頃刻)이다. 문제는 서책이야. 서책을 찾아야 해!”〉

 
 
  《영월행 일기》에 《장미의 이름》을 포개보기
 
  《시학》 제2권을 찾는 과정에서 호롱불이 넘어져 아름답던 수도원이 잿더미로 변하게 된다. 타오르던 불길이 맹렬한 기세로 번져 가축들이 빗장을 부수고 쏟아져 나왔다. 울부짖으며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수도원 경내에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수도원이 불바다로 변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희곡 중 고서인 《영월행 일기》는 신숙주 하인이 쓴 기록이고, 소설 속 기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 제2권이다.
 
  소설은 《시학》을 함부로 비웃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담고 있고 희곡은 《영월행 일기》를 통해 부조리한 권력의 억압을 드러낸다.
 
  소설은 또 윌리엄이 조수 아드소를 데리고 범인을 찾아 떠나는 구조이고 희곡은 남녀 종이 단종을 찾아 떠나는 구조이다.
 

  이강백은 세조가 단종을 죽인 시대를, 웃어서는 안 된다는 절대적인 진리와 상대적인 기호가 충돌하는 시대로 읽는다. 극 중에서 세조는 단종이 무표정, 슬픈 표정이라고 들었을 때는 그를 살려주고, 기쁜 표정에는 사약을 보내 죽인다. 《장미의 이름》에서 호르헤는 《시학》의 제2권 희극론에 독을 묻혀 그 책을 읽는 사람을 기꺼이 죽여버린다. 책 속 영월과 수도원은 극단적인 진리가 낳은 폭력의 산물이며 거대한 권력을 상징한다.
 
  다음은 소설 속 마지막 대목인 윌리엄 수사의 말이다.
 
  〈“호르헤 영감의 얼굴 말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가짜 그리스도는 그 사자(使者)가 그랬듯이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먼 이방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잘 들어두어라.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단자 중에서 성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호르헤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허위로 여겨지는 것과 몸을 바쳐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그 악마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영월행 일기》가 권력의 정당성과 자유의 가치를 비교하며 자유에 방점을 찍었듯이, 그리하여 어린 단종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사약을 받은 후 정확히 567년이 지난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단종과 영월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단종의 무덤인 장릉과 청량포를 보러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들고, 영월을 ‘충절의 고장’으로 연결 짓는다. 역사적 진리는 당대를 살아가는 자의 산유물이 아닌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미궁의 봉인을 떼고 기존 진리를 위협할 준비를 한다.
 
  《장미의 이름》은 진리에 대한 지나친 교조(敎條)주의와 광적인 호교(護敎)주의를 모두 비난한다. 진리를 절대시하며 새로운 시각과 세상의 변화를 악마화시킨다. 소설 속 윌리엄 수사는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라고 힘주어 말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1883~1957년)는 “경직된 교조주의와 흑백논리가 섬기는 도그마를 악마화시킬 수 있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300명의 수도자가 구도하던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은 악마의 틈입을 막아보려고 아침에는 흰 말, 낮에는 붉은 말, 저녁에는 검은 말을 타고 번을 돌았더니, 그 악마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들어오더라.〉
 
  ‘풀’의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년)의 작품을 읽으면 굳어진 진리와 권위, 익숙한 질서에 저항하는 억센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 자신을 못 견디게 만드는 주위 상황에 격렬히 몸부림친다. 이런 자기 고백의 음조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유의 갈구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을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김수영의 ‘눈’ 전문

 
  작품 ‘눈’은 1956년에 썼다. 밤새 눈은 장독대와 마당도 덮지만 더러운 위선과 부정까지도 말끔히 덮는다. 그래서 눈은 고결해 보인다. 보이는 모든 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감출 뿐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녹으면 추악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젊은 시인’이나마 일부러 ‘기침’이라도 해서 가래를 뱉어내야 한다. ‘살아 있는’ 눈을 향해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를 뱉자는 시인의 의지가 놀랍기만 하다. 마치 샤르트르의 소설 《구토(嘔吐)》(1938)에서 로캉탱이 자기 존재의 이유를 표현하기 위해 허무한 내면의 무언가를 게워내는 것과 닮아 있다.
 
  김수영은 시 ‘푸른 하늘을’을 1960년 4·19 혁명 직후 썼다. 노고지리의 비상(飛翔)만을 보고 낭만적인 자유를 노래해선 안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자유를 향한 비상은 실천적 피의 냄새와 실존적 성찰이 바탕이 돼야 함을 강조한다.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이라는 물음에 진리를 향한 자유정신을 느낄 수 있다.
 
민음사에서 펴낸 《김수영 전집》.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
  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詩人)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飛翔)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 전문

 
  《영월행 일기》의 마지막 장에도 피가 묻어 있다. 극 중 조당전이 그 일기가 진짜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흘린 피다. 이 혈흔은 자유와 진리를 찾기 위해 흘린 몸부림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김수영 시인의 ‘피의 냄새’와 닮아 있다. 진리는 피를 흘리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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