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NewsRoom Exclusive

보컬 ‘파워’, 일렉트릭 기타 ‘비트’, 재즈 ‘리듬’이 대중을 사로잡다

[阿Q의 ‘비밥바 룰라’] 월간팝송에 실린 ‘흑인 음악의 변천사’ ③리듬 앤 블루스의 파워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하기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본문이미지
로큰롤의 전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빌 헤일리

재즈와 가스펠 그리고 부기우기로 가지를 뻗은 흑인음악은 블루스에서 리듬 앤 블루스로 기둥을 이어나갔다. 1930년대 경제공황으로 인한 (혹은 혹인들 자신의 무관심) 블루스의 소멸과 함께 흑인음악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물론 다른 한편에서는 재즈나 가스펠이 꾸준한 명맥을 잇기도 했지만 순수혈통의 블루시한 검은 선율은 다음 세대의 폭발을 위해 동면에 들어갔다. (그동안 도시(Urban) 블루스는 몇몇 주도적인 블루스맨에 의해서 명맥을 잇긴 했지만) 동면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후반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직후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블루스맨들에게 전기적인 Amplifier, 즉 일렉트릭 기타를 비롯한 증폭장치의 개발로 그들의 사운드는 파워와 비트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이미지
머디 워터스
리듬 앤 블루스는 외치는 듯한 보컬과 강렬한 비트, 그리고 재즈의 리듬을 흡수해 흑인들에게 정착화된 것인데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고 넘어 갈 것은 2차 세계대전 직전, 그러니까 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흑인들의 대도시로의 이동은 자연히 토속적인 컨트리 블루스맨들의 대도시로의 이동을 가져왔고, 미시시피의 델타지역으로부터 북부 공업도시인 디트로이트나 시카고 같은 곳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 블루스맨들은 1920년대의 클래식(Classic) 시티 블루스와는 다른 도시 블루스를 낳게 되는데 이것은 오히려 남부의 컨트리 블루스의 감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강렬한 남부의 체취를 담고 있었으며 그 주인공들은 바로 50년대를 거쳐 60년대에 들어오면서 블루스 리바이벌의 주역이 되었던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하울링 울프(Howlin' Wolf), 엘모어 제임스(Elmore James), 리틀 월터(Little Walter) 등이었다.
 
당시 이들에게 부여된 선물이 바로 일렉트릭의 증폭된 파워였다. 그것은 20년대 중반부터 40년대 초반에 걸쳐 캔자스시티를 근거로 한 흑인밴드(엄밀히 말하면 블루스 그룹은 아니었다)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텍사스, 오클라호마, 미주리, 아칸소 등의 흑인사회로 침투되었던 이들의 음악은 8인 이상으로 구성된 밴드로서 스윙 댄스밴드에 가까운 그룹들이었다.
 
더구나 캔자스시티에서의 재즈밴드는 흑인들의 밴드까지 백인사회에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는데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루이스 조던(Louis Jordan), 핫 립스 페이지(Hot Lips Page) 등이 그러했다.
 
본문이미지
루이스 조던
40년대로 들어서면서 스윙시대를 장식했던 밴드들은 소멸해가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일렉트릭 기타가 등장, 볼륨이 커지면서 밴드의 규모는 축소되고 대신 사운드, 특히 리듬이 강렬하게 강조되면서 블루스로 돌아서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악기편성의 새로운 방식이 시도되는데 그때까지 필수였던 트럼펫과 트럼본 등의 악기들이 빠지고 일렉트릭 기타와 마이크 PA시스템 등이 사용되면서 색소폰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우리도 알 수 있다시피 흑인들의 거칠고 비탄에 잠긴 듯한 음색은 색소폰과 너무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러한 리듬 앤 블루스의 확립은 곧바로 로큰롤의 토대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특히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백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리듬 앤 블루스는 빌 헤일리(Bill Haley) & 히즈 커미츠(His Comets)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출현을 예고했다. 그러면서도 확인음악의 근간은 여전히 그리고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블루스 이야기에서도 언급했던 B.B.킹(B.B.King)의 이야기인데 5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의 활약은 블루스를 재현시키면서 그 순수성을 지켜나가는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거기에 티 본 워커(T-Bone Walker)는 일렉트릭 블루스 기타의 연주법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했고 머디 워터스(Muddy Waters),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 등이 블루스를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컨트리 블루스의 재현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백인들에 의해 그 보존가치가 더욱 명백해졌다.
 
본문이미지
자니 오티스
한편 리듬 앤 블루스의 대중적인 명맥은 나름대로 50년대에 들어오면서 백인이면서도 흑인 못지않은 리듬 앤 블루스를 구사했던 자니 오티스(Johnny Otis)를 비롯해 로이 브라운(Roy Brown), 루이스 조던(Louis Jordan), 펄시 메이필드(Percy Mayfield), 루스 브라운(Ruth Brown), 찰스 브라운(Charles Brown), 도미노스(Dominoes), 팻츠 도미노(Fats Domino), 로이드 프라이스(Lloyd Price) 등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넘버 ‘Hound Dog’을 최초로 불렀던 빅 마마 손튼(Willie Mae Thornton), ‘Money Honey’의 주인공 클라이드 맥패터와 드리프터스(Clyde Mcphatter And The Drifters) 등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이들은 당시 《빌보드》지의 리듬 앤 블루스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드디어 1955년에 접어들면서 우리 귀에도 익은 척 베리(Chuck Berry)와 플래터스(Platters)가 등장했는데 특히 척 베리는 지금까지도 로큰롤 기타리스트로 추앙받는 아티스트로서 당시 ‘Maybellene’ 이런 곡으로 차트를 석권했는데 이 곡은 원래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의 꼭 ‘Ida Red’를 빌려 쓴 곡으로도 유명하다.
 
 
더구나 같은 해에 빌 헤일리 엔 히즈 커미츠의 ‘Rock Around The Clock’이 터지면서 로큰롤의 장을 열었으며 '56년에는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의 ‘Long Tall Sally’, ‘Rip It Up’이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팝과 리듬 앤 블루스 차트에서 ‘Don't Be Cruel’로 정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으면서 대중의 스타가 되기 시작하는데 이 모든 차트의 주인공들은 정통파 블루스가 아니었기에 리듬 앤 블루스를 기반으로 대중적인 요소를 (예를 들면 로커빌리를 믹스시킨다든가) 가미해 흑백의 구분 없이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50년대 후반을 향해 치닫는 리듬 앤 블루스는 50년대말 국내 올디스 팬들에게는 명곡으로 인정받고 있는 ‘Think Twice’, ‘Rainy Night In Georgia’의 주인공 Brook Benton과 Jackie Wilson, Dinah Washington, Sam Cooke 등의 시대를 거치면서 60년대의 소울로 접어든다.
 
 
본문이미지
리틀 리처드
* ‘로큰롤의 제왕’인 리틀 리처드(88·본명 Richard Penniman, 1932년 12월 5일~2020년 5월 9일)는 아마도 무대 위에서 광적이고 격렬한 몸짓으로 광범위한 인기를 얻는데 성공한 첫 번째 아티스트일 것이다.
 
제리 리 루이스, 제임스 브라운을 거쳐 믹 재거, 지미 헨드릭스(한때 리틀 리처드의 기타 반주자였다.)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와일드하고 폭발적인 무대 공연의 영적 존재였다. 울부짖는 듯한 가스펠 스타일의 창법 또한 후에 오티스 레딩, 조 텍스 같은 인물들에 의해 모창되었다.
 
1955년 말부터 1958년 초 사이에 최소 7개의 주요 히트 싱글을 기록한 리틀 리처드는 연예생활을 종료를 고하면서 1957년 종교계에 투신하기까지 록 뮤직 영역에서 제일가는 변덕스러운 성격과 엉뚱한 행위로 명성을 떨쳤다.

본문이미지
월간팝송에 게재된 기사인 '리듬 앤 블루스 파워' 캡쳐 모습이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로큰롤 리바이벌’로 재기했다가 1977년 다시 한 번 세속과 인연을 끊었다. 198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음악평론가 강헌은 조선일보에 그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리틀 리처드는 인종차별이 여전했던 시대의 '검둥이'였고, '게이'였으며 '약물중독자'였다. 그는 10대 초반에 집에서 쫓겨나 의약품 홍보 순회 쇼단,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약장사' 딴따라로 전국을 돌아다니다 10대 중반에 가수로 데뷔했다. 그의 노래들을 관통하는 마이너리티의 감수성은 이와 같은 성장 과정의 정체성을 담았다.

노래들은 구조적으로 간결하다 못해 단순하다. 12마디 블루스 체 제의 3코드 화성과 오로지 성적 쾌락밖에 없는 듯한 반복적 노랫말. 이 노래들은 당시의(아니 지금도!) 백인 중산층 개신교도로 이루어진 미국 주류 사회의 눈에 불결하고 타락한 악마의 시그널처럼 들렸다.
 
'백인' 엘비스와 비틀스는 부와 명예를 움켜쥐었지만 리틀 리처드에겐 조소만이 남았을 뿐이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던 무관의 황제는 이렇게 지구에서 사라졌다.’
 

입력 : 2020.05.25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사진

김태완 ‘Stand Up Daddy’

kimchi@chosun.com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