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뉴시스
국가 지도자가 꼭 해야 할 말이 있는 반면, 해서는 안 될 말도 있다. 더욱이 국제 정치판의 정점에 서 있는 미국 대통령이라면 말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의 말은 다른 국가 지도자의 말의 무게와는 다르다. 잘못된 말 한 마디가 다른 국가의 정책 방향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잠적 상태로 일관하고 있는 북한 김정은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준 언동(言動)을 살펴보면 정확한 정보에 근거했는지 의문이다. ‘거짓말일 수 있다’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7일(이하 현지 기준) “그(김정은)가 어떻게 지내는지 비교적 알고 있다”며 “아마 머지않은 미래에 그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발언의 맥락상 김정은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에 기반해 말을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정은 소식’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근거는 없었다.
불과 이틀 만에 이와는 상반된 이야기가 미국 정가(政街)에서 흘러 나왔다. 그것도 트럼프 대통령 핵심 참모의 입에서였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29일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신변이상설에 휩싸인 북한 김정은과 관련해 “미국은 (4월 11일 이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오늘 보고할 어떤 정보도 없다”고 했다.
폼페이오는 대북 관계까지 다루는 주무(主務) 장관이다. 주무 장관이 ‘김정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의 소식을 알고 있다? 대통령과 장관의 단순한 ‘엇박자’로 보기엔 그 간극이 커도 너무 크다. 차라리 김정은과 관련해 대통령이 ‘모른다’고 하고 장관이 ‘안다’고 하는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다. 실무자의 착오라고 변명이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트럼프 대통령의 김정은 친서 소동도 비슷한 맥락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서 ‘좋은 내용이 담긴 친서(nice note)’를 받았다고 밝히자, 북한은 즉각 기관 매체를 통해 ‘친서를 보낸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때도 트럼프 대통령은 친서의 내용에 대해선 공개하지 않았다.
김정은의 신변이상설을 포함한 북한 관련 이슈는 적당히 둘러댈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미국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 사안이기 때문이다. 북한 급변사태는 중국, 러시아와도 맞물려 있다.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 역시 김정은의 행방과 현 상태에 대해 안개 속에 머물러 있긴 마찬가지다. 김정은에 대한 이들 정부의 공식 입장은 ‘유보’에 가깝다.
이러한 사례들에 비춰보아 트럼프 대통령의 김정은 관련 발언은 식언(食言)이라는 게 설득력을 얻는다. 그간 능수능란한 쇼맨십을 선보여 왔다는 점도 이런 판단에 힘을 실어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방위비 협상과 관련해서도 ‘한국이 많은 돈을 내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협상 진행 중”이라고 일축했다. 기선을 제압하려는 속셈으로 보이지만, 협상이 끝나기도 전에 마치 합의에 이른 것처럼 선수를 치는 건 명백한 룰 위반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왜 이렇게 ‘과시욕’을 앞세우는 걸까. 대통령 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의 초조감 때문일까. 현재 그는 코로나19 사태와 민주당 바이든 후보의 약진(躍進)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 재선(再選) 가도에 빨간불이 켜진 트럼프 입장에서 꺼낼 수 있는 카드는 사실상 한반도 관련 이슈밖에 없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동이 자국(自國) 내에서만이 아닌 한반도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그 경솔한 언행이 정책 판단의 실패로 이어진다면 그 피해는 자국민뿐 아니라 그와 연계된 모든 국가가 입는다.
그간 한반도 정세는 북한 김정은이 갖고 놀았었다. 이제는 트럼프 대통령도 그에 못지않은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북(美北) 지도자가 번갈아가며 우리의 장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으니, 이래저래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