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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40년 먹거리를 만든 오원철 전 경제제2수석비서관 타계

박정희 대통령 도와 방위산업-중화학공업 건설...상상력-기획력-추진력-애국심 두루 갖춘 탁월한 테크노크라트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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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을 일으킨 오원철 전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5월30일 타계했다. 향년 91세. 젊은 시절 공무원이 되기 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드럼통을 두드려 만든 시발자동차 회사 공장장을 지냈던 고인은 대한민국을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한 세계 11위의 경제 강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오원철 전 수석은 황해도 출신으로 경성공업전문학교 화학공업과(서울대 화공과 전신)를 졸업했다. 공군 소령으로 예편한 후 국내 최초의 자동차 회사인 시발자동차 공장장으로 일하다가 1961년 5·16 혁명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조사과장이 되면서 관계(官界)에 몸담게 됐다. 이후 상공부 화학과장, 공업1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보 등을 역임했다.

오 전 수석은 문제에 부딪치면 반드시 한국적 현실에 맞는 실용적 해결책을 찾아내는 탁월한 테크노크라트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11월 방위산업 건설에 착수했을 때였다. 주한미7사단이 철수하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의 닦달을 받은 경제기획원이 나서서 방안을 마련하려 했지만 차관 도입부터가 쉽지 않았다. 무기생산만 전문으로 하는 군(軍)공장은 경제성이 없었고, 민영군수공장도 병기수요가 따라주지 않으면 낭비가 심했다. 그때 오원철 상공부 광공전(鑛工電)차관보가 나섰다. 그는 “모든 무기는 분해하면 부품이다”라면서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되, 무기의 부품별-뭉치별로 유관공장에 분담시켜 제작케 함으로써 무기수요의 변동에 따른 낭비를 극소화시킨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김정렴 비서실장을 통해 오원철 차관보의 아이디어를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김 실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제2수석비서관 자리를 신설, 그 자리에 오원철 차관보를 앉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에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은 현재 초비상상태”라면서 “우선 예비군 20개 사단을 경장비사단으로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라. 처음 나오는 병기는 총구가 갈라져도 좋으니 우선 시제품부터 만들라”고 주문했다.

공군 장교 출신인 오원철 수석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몸과 마음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분위기와 결심에 완전히 휩싸이게 되었다. 군복은 안 입었지만 다시 입대한 것이다. 총사령관은 박 대통령, 전략참모본부장 김정렴 실장, 나는 방위산업담당 참모가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은 철물상과 청계천 고물상을 뒤져 특수강을 구했다. 오원철 수석이 청와대로 들어간 지 한 달 여 만 인 1971년 12월 17일 국산 60밀리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소총 시제품이 청와대 대접견실에 전시됐다.

‘가용 자원을 총동원 하라’는 지시에 따라 안성에서 유기(鍮器)를 만들던 회사에게는 탄약을 만들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는데, 이 회사가 오늘날 풍산그룹으로 성장했다. 공기총을 만들던 공장에서는 소총을 만들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오원철 수석은 공업화 과정에서 한 단계의 성취를 이루면, 다음에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를 늘 고민했다. 1972년 5월 30일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한 후,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을 불러 “100억 불 수출을 하려면 무슨 산업을 육성하지?”라고 물었다. 오원철 수석은 “중화학공업을 일으킬 때가 됐다”면서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이행한 일본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이듬해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했다. 오원철 수석은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 겸임, 중화학공업 건설의 실무 총책을 맡았다.

오늘날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중화학공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중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국보(國寶)’라고 극찬했던 오원철 수석이 있었다. 특히 창원은 입지 설정에서부터 건설, 운영까지 그의 손길이 닿아 ‘오원철의 자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오원철 수석은 임시행정수도 건설과 국토개조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가로림만 일대를 싱가포르 두 배 크기의 공업-항만단지로 개발하는 구상도 추진하고 있었다. 오원철 수석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산업화 과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충남-호남의 소외감까지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후 오원철 수석의 운명은 급전직하했다. 방위산업 건설 과정에서 자주국방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원대한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들과 자주 부딪혔던 그는 1980년 5‧17조치 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보안사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그가 기획, 건설했던 중화학공업 가운데 상당 부분은 '과잉 중복투자'라는 이유로 정리되어야 했다. 

1992년이 되어서야 활동을 재개한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경제발전 과정을 정리하는 일에 나섰다. 《한국형 경제건설》(전7권)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등의 책이 그 소산이다.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오원철 수석의 증언을 바탕으로 10월유신과 중화학공업의 상관관계를 밝힌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을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자유주의 성향의 옛 경제기획원 관료 출신들이나 국가재정 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던 구 재무부 출신들은 오원철 전 수석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었다.

오원철 전 수석은 기자로서는 접근하기가 다소 어려운 인물이었다. 경제의 기본 원리, 한국 경제발전 과정 등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그를 만났다가는 망신을 당하고 쫓겨나기 쉬웠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核)개발과 관련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 비밀은 끝내 무덤으로 가져가고 말았다.

지난 40여년 간 대한민국이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은 ‘오원철’이라는 상상력과 기획력, 추진력, 애국심을 겸비한 탁월한 테크노크라트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를 얻지 못했으면 박정희 대통령의 꿈 가운데 상당 부분은 글자 그대로 ‘꿈’으로 그치고 말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대한민국에 오원철 전 수석과 같은 부류의 테크노크라트는 멸종했다. 그 자리는 시위소찬(尸位素餐)하는 벼슬아치들이나 아전형 관료들이 차지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원철 전 수석은 그가 창원, 울산, 거제 등지에 건설한 중화학공업의 영광이 저물어가고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아마 그의 작품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살아서 보지 않게 하려는 하늘의 마지막 배려가 아닌가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입력 : 201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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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lt;박정희 바로보기gt;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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