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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궤멸시킨 '파로호' 개명 움직임... 배후에 중국 압력 있나?

노영민, 주중대사 시절 "중국 외교부에서 요구"고민... 정부, 강원도에 개명 요청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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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는 '오랑캐를 깨뜨린 호수'라는 의미로, 국군이 중공군에게 대승한 것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붙인 이름이다.사진=조선DB
'DMZ 대붕호 평화문화제'라는 행사가 지난 5월 24일~26일 열렸다. ‘남북강원도협력협회’와 화천군 간동면 주민공동체인 ‘대붕호(大鵬湖) 사람들’이라는 단체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이헌수 ㈔남북강원도협력협회 이사장은 “평화는 우리와 다른 이방인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호혜·친선의 관계를 확장하는 실천을 통해 열린다”며 “참혹한 전장이었던 바로 이곳 대붕호에서 평화의 문명을 열어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름도 생소한 ‘대붕호(大鵬湖)’라는 것은  ‘파로호(破虜湖)’를 말한다. 1944년 일제(日帝)가 건설한 화천댐을 마을 사람들은 대붕제(大鵬堤), 저수지를 ‘대붕호’라고 불렀다고 일부 인사들은 주장한다. 일제는 공식적으로 사용한 명칭은 대명제(大䳟堤), 대명호였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은 ‘화천저수지’였다. 그러던 것이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해 ‘파로호(破虜湖)’라는 휘호를 내리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70년 가까이 사용되던 이 ‘파로호’라는 이름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하나는 이번에 'DMZ 대붕호 평화문화제'를 주최한 ‘남북강원도협력협회’ ‘대붕제사람들’ 같은 일부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움직임이다. 'DMZ 대붕호 평화문화제'를 준비한 최진수 문화제 집행위원장은 "파로호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는 것은 한·중 친선은 물론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만들어 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며 "우선 파로호부터 본래 이름인 대붕호로 바꾸는 일에서 그 단초를 찾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오마이뉴스》 2019.3.19.)

‘파로호’ 이름 변경을 요구하는 또 다른 세력은 중국이다. 파로호를 관광한 중국인들이 그 이름의 유래에 불쾌감을 느끼고 중국 정부에 시정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KBS 강민수 특파원이 지난 5월 24일자 KBS'특파원 리포트‘에서 자세히 밝힌 바 있다.
“지난해 겨울 중국 베이징의 한정식집에서 당시 노영민 주중대사가 기자에게 "'파로호' 문제를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중국 외교부에서 요구를 하는데, 당장 판단이 잘 서지 않는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보고 가서 중국 정부에 민원을 하는 모양이라고 했다. 사드 배치로 멀어진 중국과 관계를 좀 개선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국민감정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교차하고 있었다. 상호주의 측면에서 중국에 뭘 요구할 것이 있는지 확인도 해봐야 하고 좀 판단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보도 자제를 요구했다.”
 
강 기자는 “최근 우리 정부가 강원도와 화천군에 파로호(破虜湖) 이름을 대붕호(大鵬湖)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면서 “당시 노영민 대사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일이 빠르게 진행됐던 것 같다. 하지만 명칭 변경을 놓고 지역 사회에서는 이미 찬반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강 기자는 “냉전 시대를 극복하고 한중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일견 타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상호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라면서 “중국은 오히려 무역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6·25 전쟁을 소재로 반미, 민족주의 감정을 조장하고 있다. 중국은 6·25 전쟁을 항미원조, 미국에 대항해 조선 즉 북한을 도운 전쟁이라고 표현하는데 관영 CCTV에서 이와 관련 7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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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수 KBS기자는 노영민 비서실장이 주중대사 시절 파로호의 이름을 바꾸어 달라는 중국 외교부의 요구에 고민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사진=인터넷 캡처
 
 
지난 3월 6일는 《연합뉴스》는 “강원도가 화천에 있는 파로호 명칭을 변경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할지 검토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는 “적대적인 의미의 파로호라는 명칭이 어색한 데다 최근 급물살을 타고 있는 남북 평화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강원도는 아직 검토 단계지만, 한때 본래 지명으로 알려진 '대붕호(大鵬湖)‘를 포함해 지역에 적합한 명칭으로 변경하는 방안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보도했다.
 
《한겨레》도 같은 날 ‘평화시대에 오랑캐라니...파로호 이름 바뀔까’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정부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강원도민일보》(4월12일)은 “도(道)와 도정치권에 따르면 최근 조성된 평화 분위기와 올해 3·1절 100돌을 맞아 정부가 도에 냉전의 상징인 파로호 명칭을 기존의 대붕(大鵬)호로 변경하는 방안을 검토해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파로호’ 명칭변경에 대한 반발도 나오고 있다. 화천문화원 등 화천지역 사회단체들은 5월 21일 성명서를 발표, “지역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파로호'를 `대붕호'로 바꾸려는 시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 성명서는 “대붕호는 일제가 1944년 댐을 만들면서 명명했고 화천저수지는 광복 후 북한이 이름을 붙였으며, 현재 파로호는 6·25전쟁 후 이승만 대통령이 명명했다”면서 “역사적으로 보면 대붕호는 10개월, 화천저수지는 6년 남짓 불렸으며 파로호는 67년을 사용한 지명으로 주민들은 물론 국민에게 친숙하게 불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파로호는 일제 시대인 1944년 댐 건설로 생겨난 저수량 약 10억t에 이르는 인공 호수다. ‘대붕호’라는 이름은 댐 건설 당시 호수 모양이 하루에 구만리를 날아간다는 상상의 새 대붕(大鵬)을 닮았다고 해서 붙었다고 한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얘기에서 따온 것이니, 중국 냄새가 물씬 나는 이름이라 하겠다.해방 이후 북한 치하에서는 ‘화천저수지’로 불렸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라는 이름을 내리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대붕호’로 이름을 바꾸려는 시민단체들이나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오마이뉴스》 《한겨레》 등은 당시 중공군의 희생에 방점을 두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파로호. 입에 감기는 이름. 하지만 이름에 담긴 역사는 비극적이다. 깰 파(破), 오랑캐 로(虜)...'파로'. 한국전쟁 때 여기서 중국군을 궤멸한 전승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작명하고 휘호를 썼다. 이때 사살된 중국군이 2만4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하늘에서 불비가 내렸고, 호수는 핏물로 붉었다. 강산에 널린 시신을 묻을 여력이 없어서 불도저로 호수에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금년 3월 19일 《오마이뉴스》 “'파로호'를 원래 이름인 '대붕호'로 불러야 할 이유”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기사의 부제(副題)는 “파로호는 '중국군 궤멸'을 기념해 지은 '원혼 서린' 이름”이다. 이런 류의 기사들은 또 전투의 원인을 북한이 차지하고 있던 화천댐을 탈취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욕심에서 찾고 있다. 또 이런 기사들에서는 남의 나라 땅에서 죽어간 중공군에 대한 애도(哀悼)는 있지만,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과 중공군과 맞서 싸웠던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추도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당시 중공군의 시신을 파로호에 수장(水葬)한 것을 비난하는 보도도 있었다. 《한겨레》 2018년 6월 26일자는 파로호 관련 보도에서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이 중국군의 주검을 일부러 파로호에 수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면서 “제네바협약 17조는 ‘사망한 적을 그의 종교 관례에 따라 매장하고 유해의 송환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파로호전투는 화천댐 하나 얻자고 벌인 전투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생사존망이 걸린 전투였다. 그 당시 전투를 벌인 국군에게 중공군을 위해 흘려줄 눈물 따위는 없었다.
 
흔히 파로호 전투라고 하면 1951년 5월 26일~29일 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 2만 4000여명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둔 전투를 말한다. 1950년 10월 말 중공군 개입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일패도지(一敗塗地), 북위 37도선까지 밀렸다. 특히 훈련과 장비가 부족한 한국군은 중공군의 집중 타격 대상이 됐다. 전선(戰線)의 약한 고리인 한국군을 쳐서 붕괴시키면 전(全)전선을 무너뜨리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5월 16일~22일 현리 전투가 대표적인 예다. 한국군 3군단 예하 3사단과 9사단 병력 1만 9000명이 희생됐다. 병력의 40%만이 생환했다. 한국군의 지휘- 전투능력이 수준 이하인데 격분한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3군단을 해체시켜 버렸다.
 
화천전투는 그 직후에 벌어진 전투였다. 장도영 준장이 이끄는 6사단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현리 전투 참패 이후 추락한 한국군의 명예, 아니 한국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두 번째 파로호전투는 휴전협정을 앞둔 1953년 5월~7월에 있었다.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은 춘천까지 점령한 후 전쟁을 끝낼 요량으로 마지막 공세를 가해왔다. 박태준 전 국무총리(포철회장)는 5사단 36연대장으로 화천 949고지를 사수, 화천댐 확보에 공을 세웠다.
 
만일 이때 전투에서 패했다면 휴전선은 춘천까지 내려왔을 것이고, 수도 서울의 안전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화천댐 확보가 당시 전력(電力) 생산과 전후 경제재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는 했지만, 단순히 화천댐을 확보하기 위해 국군이 두 차례에 걸쳐 피를 흘린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 11월 18일 이곳에 있는 육군 6사단을 방문, 화천저수지를 ‘파로호’라고 명명(命名)하고 명명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이 대통령이 ‘파로호’라는 휘호를 내린 것은 바로 파로호전투가 갖는 의미가 이처럼 무겁기 때문이었다. 결코 한때 승전의 기분에 들떠 붙인 이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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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1955년 11월 18일 6사단을 방문, 파로호 명명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사진=국가기록원

‘파로호’는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비극의 호수’가 아니다. ’호국의 호수‘이고 ’자유의 호수‘이다. 전후 복구의 동력이 됐던 ’재건의 호수‘요 ’부국(富國)의 호수‘다. ‘파로호’라는 이름을 지워버리는 것은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해 피를 흘린 국군 장병들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그들의 공로를 기렸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침략했던 북한과 중공의 전쟁범죄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6.25개입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요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강변하는 중공의 후안무치한 태도에 굴종하는 것이기도 하다.
 
 
 
글=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입력 : 2019.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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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어제 오늘 내일’

ironheel@chosun.com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2000년부터 〈월간조선〉기자로 일하면서 주로 한국현대사나 우리 사회의 이념갈등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써 왔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2012년 조국과 자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45권의 책을 소개하는 〈책으로 세상읽기〉를 펴냈습니다. 공저한 책으로 〈억지와 위선〉 〈이승만깨기; 이승만에 씌워진 7가지 누명〉 〈시간을 달리는 남자〉lt;박정희 바로보기gt; 등이 있습니다.
댓글달기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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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당방 (2019-05-31)

    우리역사를 바꿀려는 놈 누구냐

  • whatcha (2019-05-27)

    빨간 쥐를 뽑은 덕이지.

  • 애국자 (2019-05-27)

    왜 북한 중국에게 저리 절절매는지 모르겠네.
    혹시 뇌물 먹었니?

  • ergw (2019-05-27)

    건들기만해라. 빨간놈들아.

  • cello3 (2019-05-27)

    스위치 눌려졌으니 수석 대변인이 행동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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