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간송(澗松) 전형필(全瑩弼, 1906-1962)이 세운 간송 미술관이 있고 일본에는 재일 조선인 정조문(鄭詔文, 1918-1989)이 세운 고려미술관이 있다.
 두 분 다 일제 강점기에 흩어진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사재를 털어 열심히 문화재들을 사들여 후대에 보여주기 위해 우리의 문화유산을 한자리에 모은 선각자들이다.

무관석들이 지키고 있는 고려미술관.

정원의 고려시대 5층 석탑과 불이문.

 “내가 일본 교토에 온지 벌써 64년이 됩니다. 오랜 세월 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고 우연히 우리나라 古미술품을 만나게 되여 그것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재일 동포 3- 4세들이 조국의 역사를 알고 문화에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려(高麗) 미술관 성립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1988년에 설립된 고려미술관 개관식 때 재일 상공인 정조문이 들려준 말이다.

교토시(京都市) 기타구(北區) 호리카와(堀川通)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카모가와(加茂川)중학교 근처 시치쿠카미노키시조(紫竹上岸町) 15에 고려미술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설립자 정조문씨가 살던 집을 개조해서 꾸민 지하 1층, 지상 3층의 고려박물관에는 1955년부터 수집한 한국 문화재 1700점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이름을 ‘高麗’로  삼은 것은 설립자 정조문씨가 통일의 염원을 담아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한반도가 하나가 되었을 때 부를 국명으로 일본 사람들이 ‘코우라이’라고 발음하는 고려가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립자 정조문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백자대호(달항아리)-조선시대 17세기.

 창립 21년을 맞이한 고려미술관(관장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에서는 지난 해 10월부터 ‘정조문의 눈빛-조선 문화에의 생각’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을 열었다. 10월 26일에는 교토신문 문화 홀에서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패널리스트로 우에다 마사아키 관장을 비롯하여 이회성(李恢成, 芥川작가賞), 정희두(鄭喜斗, 고려미술관 상무이사)씨가 참가했다.
 
 금년 2009년 1월부터 3월까지 고려 미술관 컬렉션 명품전으로 ‘한국의 미술공예-복수(福壽)과 길상(吉祥)의 문양(文樣)’展을 열고 있다. 고려박물관에서는 연구 강좌도 수시로 개최한다. 지난 해 11월 22일에는 108번째 강좌로 우에다 마사아키 관장의 ‘다카마스즈카(高松塚)와 일본속의 한국문화‘라는 강좌를 가졌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6살까지 낙동강에서 미역 감으면서 뛰놀던 정조문 소년은 1923년에 부모의 손에 이끌려 일본 땅에 발을 디뎠다. 정조문은 초등학교 4학년에서 6학년까지 3년간 학교생활을 했을 뿐 특별한 학력이 없다.

 빠칭코 사업으로 형인 정귀문(鄭貴文)과 함께 큰 돈을 번 정조문은 한국 古미술품을 수집하는 한편 ‘조선문화사’를 발족하고 1969년 3월 계간지 ‘일본속의 조선문화’를 창간한다.
 친구인 작가 김달수(金達壽)가 실질적인 편집책임자가 되고 작가인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와 고고학자인 현재 고려미술관 관장으로 있는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를 잡지사의 고문으로 영입을 한다.

 매호마다 잡지의 머리에는 ‘조선미술관’이라는 컬럼을 만들어 정씨가 수집한 古미술품을 소개했다. 1981년 지령 50호로 휴간 할 때까지 일본 전국에 잠들어 있는 한국문화의 숨결을 밝혀내는 유적 순례 행사도 펼쳤다.

2층에 전시된 조선시대 양반집 생활 가구들.

허준의 동의보감 등 목판 인쇄본들.

마제석검과 청동기 유물들. 그 속에 평양 출토 뇌광문 동경도 있다.

 고려미술관을 세운 정조문씨는 몸은 비록 일본에 있지만 한민족의 뿌리와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몸소 실천을 했다.
 그가 시바 료타로와 함께 오카야마겐(岡山縣) 즈야마(津山)를 여행 중에 있었던 일로 즈야마市 부근의 전화수첩을 빌려와 백제姓을 가진 씨족을 넷이나 찾아냈고, 이들 도래인(渡來人)들을 만나서 그들의 뿌리를 일깨워 주기도 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찍이 교도조선중고등학교와 교도제삼초등학교를 건립하는데도 거액을 지원하고 건설위원장으로 앞장서 이를 추진했다.

 고려미술관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이조 백자 달항아리를 처다 보는 정조문씨의 눈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미술관 내부에는 화려한 병풍과 서화, 청자, 백자와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들이 사용하던 가구류와 청동기시대의 마제석검(磨製石劍)과 고려시대 유물이 즐비했다.
 평양에서 출토된 銅鏡 등 한반도의 고고학 유물 들은 1층과 2층에 전시되었다. 정문에서부터 거대한 무관석과 고려시대 5층 석탑과 불이문이 방문객들을 맞는 고려미술관은 누가 뭐래도 한국문화의 보고였다.

 고려미술관에는 국내에서 볼 수 없는 문화재級 古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14세기 청자 상감운학문완(象嵌雲鶴文碗)이나 17세기 철사 용문호(鐵砂 龍文壺) 같은 명품을 비롯하여 불화와 불상에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末 권돈인과 김정희가 함께 그리고 쓴 3단 족자.

조선시대 평양성 병풍과 도자기들.

조선시대 선조 2년(1569)에 제작된 천문도의 하나인 ‘치성광불여래제성왕림도’.

 그 중에 미술사 내지 불교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를 받을 만 하지만, 무엇보다도 천문도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조선 선조2년(1569)년의 작품인 ‘치성광불여래제성왕림도(熾盛光佛如來諸星往臨圖)’는 백미로 꼽힌다.

 그밖에 전라도의 조각僧 색난(色難)이 1689년에 제작한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佛龕)’과  소를 찾아 떠나는 동자의 모험과 수도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린 심우도(尋牛圖)는 귀중한 불교 미술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에도(江戶)시대 중기 조선통신사 행렬회권(朝鮮通信使 行列繪卷)을 비롯한 마상재도(馬上才圖) 등 관련 古미술품 40점은 역사적으로 미술적으로 아주 귀중한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조선시대 십장생병풍(十長生屛風)과 평양성 병풍(平壤城 屛風)을 비롯하여 조선 말 권돈인(權敦仁, 1783-1859)과 완당 김정희(阮堂 金正喜, 1786-1856)가 함께 그려서 3단 족자를 꾸민 뒤 추사가 ‘땀을 흘리면서 섰다’고  적은 ‘시문산수도(詩文山水圖) 역시 명품이다.
  그리고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망명을 했던 김옥균(金玉均)의 七言 율시(律詩)를 자필한 산수화도 고려미술관의 귀중한 유물로 전시되고 있다.

 평소 정조문씨가 좋아했다던 국보급 조선 청화백자와 고려청자를 비롯 상감분청, 귀알분청 등이 있는가 하면, 한국의 民畵展에 빠짐없이 초대되는 문방사우(文房四友)와 호랑이가 등장하는 民畵들도 시선을 끈다.

파도 선박 8면 동경-고려시대.

고려시대 제작된 크고 작은 탈들.

2층 베란다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리의 옹기들과 민속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밖에 교토 기온 마쓰리(祇園祭)에 쓰는 모직물을 보관하고 있는 호코초오(鉾町) 사람들이 오바케(귀신)라고 부르는 문양과 똑같은 조선시대 자수쌍학문흉배(刺繡雙鶴文胸背)와 자수백수배복자도(刺繡白壽百福字圖) 등 예술성이 돋보이는 섬유미술품들도 거두어 전시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민족의 때가 묻은 민속 공예품들과 석물, 옹기 등도 이 미술관의 중요 컬렉션이다. 여기에서는 일본에 사는 동포들만 아니라 우연히 이 고려미술관을 찾아오는 일본인들에게 도 멀지 않은 이웃나라 한국의 숨결을 흠뼉 느끼게 한다. 

 “나의 스승은 일본의 골동품 점”이라고 스스로가 말할  정도로 대부분의 古미술품들은 골동품 점에서 구입을 한 정조문씨는 조선시대와 관련된 것이라면 종이 부스러기 하나라도 수집을 할 정도로 열성적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때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다른 수집가에게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어서 눈물을 삼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고려미술관 맞은편에 자리 잡은 부설 연구소. 연구와 교육뿐만 아니라 특별 기획전을 준비한다.

 ‘보여주는 미술관’에서 ‘연구하는 미술관’으로 고려미술관은 부설 연구소도 갖추었다. 한국고고학의 산 증인인 교도대학 명예교수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101) 선생이 1989년 11월부터 현재까지 연구소를 맡아오고 있다.

 일본에 와서 조선인 노동자의 아들로 자라면서 ‘조센징’이라 놀림을 받고 자라난 정조문씨가  어느 날 운명처럼 조선 백자 하나를 만나면서 오늘 날의 고려미술관을 세웠다.
 그러나 이 전설 같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항상 조국을 그리워했으나, 한번도 마음 놓고 조국 땅을 밟을 수 없었고 한다. 

 이런 저런 애절한 사연을 생각하니, 고려미술관을 떠나오는 우리들을 아련한 슬픔에 젖게 한다.

 일본인들에게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인 관계를 이해시키면서, 조국을 떠나 일본에 사는 동포들에게 조국의 얼을 심어주는 가운데  위안을 안겨주고 있는 고려미술관(http//www.koryomuseum.or.jp/)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교토에 들르면 한번 쯤 찾아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