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제례에 참석하고 나서 : 월간조선

지난 5월1일(일요일) 종묘제례에 참석했습니다. 작년 종묘제례가 엉망진창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어떤지 저는 종묘 입구에서부터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제례는 그런대로 주최측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입구에서 안내원들이 종묘에 들어가는 사람들 가슴에 ‘종묘대제’라는 리본을 달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종묘에 들어 선 사람들이 정전으로 들어가는 복판 돌길인 '神路'에 함부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통제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제례가 열리는 종묘 정전 마당에서도 안내원들이 완장을 차고 질서를 잡고 있었습니다. 작년 종묘제례가 10점을 주기도 아까웠다면, 이번에는 주최측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성의를 봐서 70점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례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햇볕을 피해 많이 자리를 비웠습니다. 제례는 대체로 조용한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작년처럼 도깨비 시장에 온 것 같지도 않았고, 아이들이 여기저기 뛰어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이날 질서 유지에는 더위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이날 제례에는 황실 자손들도 여러 명 참석했습니다. 의친왕의 둘째 딸 이해원 여사, 작년에 언론에 ‘의친왕 둘째 딸이 경기도 하남에 있는 빈민촌에서 월세 20만원짜리 쪽방에 산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알려진 분입니다. 1919년 생인데 정신이 또렷하고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래하는 황손’으로 알려진 이석씨가 이 분의 동생입니다.

줄리아 여사도 참석했습니다. 줄리아 여사는 황태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 태어난 황세손 이구씨와 결혼했던 분입니다. 지금은 이혼을 했지만 한 때 황세손 비였습니다. 2003년 MBC에서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그 때 한국을 방문한 이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도 무슨 다큐멘터리와 영화 제작 건 때문에 왔다고 합니다. 영화사 측에서 초청한 것 같습니다. 줄리아 여사는 보행보조기구가 없으면 걸음을 걷지 못하고, 오른 손은 마비증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종묘제례를 보기 위해 저는 일행 몇 명과 정전 쪽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 그늘에 한 서양 여자가 의자(걸을 때는 보행보조기로 쓰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줄리아 여사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줄리아 여사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습니다. 이때 정전으로 들어가고 있던 의친왕 따님인 이해원 여사도 줄리아 여사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 두분은 몇 십년 만에 만난 것이라고 합니다.

줄리아 여사는 "종묘제례에 직접 참석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행중 한 명이 줄리아 여사를 부축하여 정전을 향해 걸었습니다. 줄리아 여사는 "이구씨가 틀림없이 한국에 와 있을 것"이라면서 혹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이날 황손 이구씨는 제례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정전 입구에 도착한 줄리아 여사는 우리 일행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힘겹게 올랐습니다. 저는 줄리아 여사의 보행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줄리아 여사를 정전 마당 오른쪽에 마련된 텐트 쪽으로 안내했습니다. 이 텐트는 제례에 참석한 일부 귀빈들이 앉아서 관람할 수 있도록 마련된 장소입니다.

줄리아 여사가 계단을 오르는 사이 우리 일행 중 다른 한 명은 줄리아 여사와 이해원 여사가 앉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텐트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도 줄리아 여사의 보행기를 들고 텐트 쪽으로 갔습니다.

의자를 좀 마련해 달라는 우리의 요청에 행사 진행요원은 "지금 와서 의자를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자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요원과 실랑이를 하던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지금 오시고 있는 분들은 황실의 최고 어른들이다. 고령의 노인들이 왔는데 앉을 수 있게 의자라도 좀 가져다 줘야 할 것 아니냐"고 거듭 부탁을 했습니다. 진행요원은 "안 된다. 자리가 없다"는 말만 계속 했습니다.

진행요원으로서도 미리 앉아 있는 사람을 일어서라고 할 수가 없으니 그의 태도가 이해는 되었지만 참 난감하고 민망했습니다. 작년에 주최측이 「일본 황실」이라는 표시를 붙인 텐트를 두 개나 마련해서 자리 50여 개를 비워두었던 것이 생각나서 은근히 화가 났지만, 우선 두 노인을 앉게 하는 것이 급했습니다.

우리가 진행요원과 자리 확보 때문에 줄 다리기 하고 있는 사이 줄리아 여사와 이해원 여사가 텐트 쪽으로 다가 왔습니다. 우리는 줄리아 여사의 보행보조기를 의자와 의자 사이에 펴서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해원 여사는 마침 줄리아 여사 뒤쪽에 의자 하나가 비는 통에 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미 의자에 앉아 있던 많은 사람들 중 누구하나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자리를 양보하거나, 이들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앉은 자리는 정전 마당 끝에서 두번 째 위치에 있는 텐트였습니다. 정전 안쪽의 텐트에는 유홍준 문화재 청장을 비롯 기타 「귀빈」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의친왕의 또 다른 따님과 친척 한 분은 마당 뒷편에서 사람들 사이를 서성거리다가, 더위도 피할 겸해서 아예 뒷쪽 마당 아래 처마 밑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례가 끝나고 저는 직접 줄리아 여사의 팔을 잡고 정전 입구까지 부축해 드렸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종묘제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