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0쪽이 넘는 분량에 압도되는 책입니다. 글자도 작고, 行間도 좁아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그림 많이 넣고, 시원하게 편집했더라면 족히 500쪽 짜리 3권은 넘을 분량입니다. 여기에 하단에 촘촘하게 들어차 있는 각주만 따로 모아도 책 한권 분량은 추가 될 것같습니다. 그래도 최근 밤잠 줄여가며 읽은 보람이 있습니다.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는 김영수 박사가 박사학위 논문을 발전시키고, 여기에 상당한 내용을 추가로 집필한 후 내놓은 역작입니다.
저자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 조선이 건국되기까지 약 40년 간의 정치변혁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고려 후반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문제를 심도 있게 파헤치면서, 결국은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대변혁기를 방대한 자료를 인용해 생동감 있게 펼쳐 놓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논문이기 때문에 수많은 각주가 달려 있고, 좀 딱딱할 것같지만 아주 이해하기 쉽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고려라는 나라의 정치제도, 의식,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이 그려집니다.
고려 사회가 자체적으로는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안고 있던 총제적인 문제점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당대 지식인들의 고뇌가 눈앞에 전해져 옵니다. 결국 고려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온갖 문제는 조선건국을 통해서 해결됩니다.
무신정권을 거치면서 고려는 나라가 아니라 거의 귀족연합체로 전락했습니다. 권력은 사유화 되었고, 백성들은 의지할 곳을 몰랐습니다. 몽골 지배와 겹쳐지면서 백성들은 국가, 권문세족, 지방관, 몽골이라는 거대한 권력집단에 마지막 남은 것까지 수탈당해야 했고, 노비가 되지 않으면 목숨조차 부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국가가 기능을 하지 못하자 왜구가 창궐해 제 앞집 드나들듯이 고려를 수탈했습니다.
국가는 그저 굴러가는데로 굴러갈 뿐 고려는 자체적으로 무엇하나 해결할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갈길을 몰라 희망을 잃었습니다. 문제 의식을 가진 당대의 몇몇 지식인은 해결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은둔하거나, 현실을 도피적인 불교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왕들조차 국가 권력을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데 이용했습니다. 권문세족들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들 지배층에게 백성들의 고통은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공민왕은 고려를 개혁할 마지막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결국 정신적 육체적 폐인이 되어갔고 결국 암살이 되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우왕은 나라를 권신에게 맡긴 채 폭정으로 날을 세다가 고려를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처럼 봉건제로 갈 것인가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성리학에서 새 세상 건설의 가능성을 간파한 정도전이 나타났고, 그가 이성계를 찾아가면서 드디어 머나멀고,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던 혼란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상 한 번도 혁명 이념으로 등장한 적이 없던 성리학이 정도전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이념적 무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건국자들은 무신정권 때처럼 또 하나의 권력세력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이들의 꿈이 너무나 원대했고 백성의 고통을 바로 볼 줄 알았기에 드디어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려사회가 가진 거의 모든 문제점을 심도 있게 파악했고,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 문제가 제발하지 않도록 해결해 나갔습니다.
드디어 조선이 건국됨으로써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모든 정치 행위에 중심이 되는 '이성이 지배하는 역사 시대'를 열 수 있었습니다. 몇몇 시대를 앞서 간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지 생각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아래는 참고 목차--------
제1장 고려의 가을
1. 역사로의 귀환
2. 고려의 가을
1) 원의 고려 통치: 지배와 보호의 역설
2) 원 지배하의 고려 정치: 권문세족과 탐욕의 시대
3) 코스모폴리타니즘과 고려의 개명: 성리학의 유입과 혁신 운동의 대두
제2장 개혁과 전쟁: 공민왕 대 전반기의 정치
I. 개혁
1. 공민왕 원년의 개혁과 반동: 권문세족과의 전쟁
1) 공민왕의 즉위 과정: 2전 3기
2) 개혁의 목표: 태조 왕건으로의 복귀와 ‘무일’의 정치
3) 민생 개혁: 권문세족과의 투쟁
4) 정치 운영의 개혁: 인사, 사정, 소통
5) 개혁의 장애: 개혁이냐 측근이냐
2. 개혁의 위기와 반원 정책: 조종의 법을 회복하라
1) 개혁의 중단과 친원 세력의 집권: 군주를 떨게 하는 기철 일족
2) 공민왕의 반원 정책과 독립: 너의 부모는 고려 사람이다
II. 전쟁
1. 새로운 시작: 지루한 개혁
2. 전쟁: 개혁의 실패와 신뢰의 파괴
1) 전쟁의 서막: 국가가 장차 망하겠구나
2) 제1, 2차 홍건적의 침입: 개경의 함락과 정세운의 대첩
3) 전쟁 영웅들의 처형: 정치의 슬픔과 정몽주의 비탄
4) 왕과 신하의 불신: 김용의 반란―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5) 원의 침입: 덕흥군의 난과 민심 이반―누가 전하를 따르겠습니까
3. 방황: 고려의 정신적 방황―하늘의 길, 인간의 길
제3장 좌절과 실정: 공민왕 대 후반기의 정치
I. 좌절
1. 신돈의 대리 정치: ‘세상을 떠나 독립한 사람’의 정치
1) 공민왕의 정치적 좌절과 신돈의 집권 배경: 노국공주의 죽음
2) 신돈의 정치 세력 재편과 권력 강화: 유자는 나라에 가득 찬 도둑이다
3) 신돈의 개혁 정치: 노예가 말하기를, 성인이 나왔다
4) 신돈 정치의 악화
2. 공민왕의 슬픔과 타락
1) 공민왕의 유희와 토목공사: 백성은 왕의 하늘이요,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다
2) 공민왕의 불교 신앙: 왕도냐 불도냐
3. 신돈의 처형
II. 실정_ 316
1. 마지막 개혁 시도
2. 타락과 암살
3. 명의 건국과 요동 정벌
4. 암흑 속의 빛: 새로운 대안 성리학
제4장 우왕 대의 폭정과 절망
1. 어둠과 빛: 권문세족 정치의 부활과 성리학의 도전
1) 제1차 권력투쟁: 우왕의 정통성에 대한 의혹
2) 제2차 권력투쟁: 성리학의 정치적 등장과 신진 유신들의 저항
3) 개혁을 위한 최후의 노력
4) 제3∼5차 권력투쟁: 친왕파의 제거와 이인임의 승리
2. 폭정: 폭군과 권신의 정치
1) 우왕의 폭정: 생존을 위한 자기 파괴와 풍자
2) 권신들의 전횡: 최영의 딜레마와 이색의 침묵
3. 위기: 외교와 국방의 실패
1) 대외 정책의 위기: 대명 관계의 악화
2) 왜구와 해적의 시대: 백성들의 절망과 메시아에의 열망
4. 대안의 발아: 칼과 성리학의 만남
1) 이성계의 정치적 부상: 전쟁, 입신, 역성혁명의 꿈
2) 유배와 혁명의 성리학: 정도전의 시련과 이성계와의 만남
제5장 혁명: 이성계의 집권과 조선 건국
I. 권신 정치의 붕괴: 최영·이성계의 연합과 무술정변
II. 요동 정벌과 위화도회군: 망국의 서막
III. 조선의 건국
1. 개혁: 특권의 전면적 해체와 재분배
1) 전제 개혁: 인정은 밭둑에서 비롯된다
2) 지방정치의 개혁: 수령이 합당하면 백성이 복을 받는다
3) 관제 개혁: 『주례』의 제도적 상상력
4) 군정 개혁: 왜구 문제 해결의 실마리
2. 폭풍의 계절: 권력투쟁과 조선의 건국
제6장 영혼의 전쟁: 유교-불교 논쟁과 ‘이단’의 발견
I. 불교의 정치사상: 법Dharma의 통치와 국가의 보호
1. 석가모니의 정치적 이상: 진실한 법의 통치와 공화주의
2. 동아시아의 불교와 정치: 왕권과 묘법의 보물
II. 이단의 탄생: 여말선초의 척불론과 이理의 에스프리―천하에는 두 도가 없다
1. 여말선초의 불교 비판: 불승은 세상의 큰 좀벌레이다
2. 불교의 정치적 지위에 관한 논쟁: 양검兩劍의 대립
3. 정치가의 불교 신앙과 정치 행위에 관한 논쟁: 불도는 왕도와 공존할 수 있는가?1
4. 기복 불교 비판: ‘기복’의 정치에서 ‘위민’의 정치로
5. 불교를 위한 변명: 오랑캐의 도도 도이다
1) 유불동도론: 유자나 불도가 다같이 조금도 다름이 없다
2) 호불론: 불교를 위한 변명
제7장 조선의 국가 원리와 조선인
1. 조선의 헌정과 제도: ‘정치적인 것’의 성찰
1) 내적 정치제도론: 정신의 제도화와 예치―백성은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2) 외적 정치제도론: 욕망의 제도화와 정치―임금에게는 음란과 방탕이 쉽게 온다
2. 조선인: 춘추적 인간과 이理의 모험―군자는 몸을 희생하여 인을 이룬다_ 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