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길 시인이 새 시집 《허공만리》(브리콜리숲 펴냄)를 펴냈다.

시집 첫 쪽 자서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다시 마지막 시집을 낸다. 시 같은 게 없어 미안하고 부끄럽다."

이 시집은 목차도 해설도 없이, 장식을 최대한 배제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 스스로 자서에서 "시 같은 게 없어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절제가 시집의 본질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문길 시인의 시는 짧지만 단숨에 읽히지 않는다. 행과 행 사이에 침묵의 심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들은 화려한 수사 없이, 적막 속에서 건져 올린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삶은 잠시 머물다 가는 길이라는 깨달음을, 오래 숙성된 언어로 전한다.

86세 노시인이 건네는 이 적막한 언어들은, 역설적으로 삶의 가장 진실한 울림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시집 뒷장 표사에는 시 ‘허공만리’가 적혀 있다.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노시인의 새 시집 《허공만리》(브로콜리숲 간)

한 걸음에 천리

아마 개미가 보면

내 한 걸음이

천리를 가는 것 같을 것이다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매일 허공만리 길을

간 것이다

-시 ‘허공만리’ 전문

1939년생인 그는 몇 해 전 아내를 잃고 홀로 살아가고 있다.

남겨진 생에 대한 관조가 깊디 깊다. 그래서 시들이 쓸쓸하다. 표제시 '허공만리'는 개미의 눈으로 본 인간의 한 걸음이 천리가 된다는 통찰로, 일상의 사소한 걸음들이 쌓여 인생이라는 먼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한 달 흐리고 비 내리다

소나기 오는 날

들길 걸으며 개울에

지난해 떠난 물고기들 돌아와 있는지

들여다본다

시든 풀속에 흘러가는 황톳물

혹시 산에서 더내려 온 것 있는가

찾아도 없다

소나기 오는 날 들길 걷다가

집에 오니

아파트 모두가 빈집 같다

실회기에 빗소리만 투닥거린다

우중에 낮 불 켜고

빈병에 꺾어온 들풀꽃을

꽂는다

날이 살던 집

언젠가는 두고 갈 집에

나 혼자 남은 것이 쓸쓸하다

-시 ‘장마’ 전문

장마철에 무심히 개울을 보다 지난해 장마 때 떠내려간 물고기들이 물살을 거슬러 돌어와 있는지 궁금하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시인의 삶도 과거 아내와 자식들과 단란했던 시절을 그려 보며 돌아갈 수 있기를, 돌아갈 수 없다해도 그 시절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우중에 빈 병에 꺾어온 들풀꽃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런 꽃을 빈 병에 담은 노년의 쓸쓸한 마음이 너무 아름다워 시를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두고 가도

안 남는 것

혹시 거기 있는가 돌아가 보아도

없는 것

어느 날 문득 보이다가

다가가면 없는 것 안 보이는 것

도망가다 보면

먼저 와 있는 것

언젠가는 가도 없고

와도 없는 것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없는 것

-시 ‘하루’ 전문

하루라는 시간은 잡을 수 없다. 에누리가 없다. 시간을 저축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하루가 바쁘게 느껴지다가도 하루가 100년처럼 느리게 다가온다.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면 시간이란 게, 하루라는 게 존재할까. ‘가도 없고, 와도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니 시간이란 것도 無이거나 空 사이에서 흔들린다. 시인은 그 진실을 조용히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 미리 말해둔다.

이문길 시인이 스스로의 문학관을 규정하는 문장은 명징하다.

“시의 본질은 적막(寂寞)입니다. 시는 그 적막을 넘어가는 적막입니다.”

그에게 시는 관념의 장식이 아니다. "시의 본질은 적막"이며, "시는 그 적막을 넘어가는 적막"이라고 규정한다. 그에게 시는 화려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침묵과 고독의 무게를 견디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유 중심의 화려한 문장과 허구의 상징을 거부하며, "사람이면 사람이고 아이면 아이지, 애초에 왕자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작 《고도를 기다리며》와 《어린왕자》도 1/3쯤 읽고 덮었다고 했다.

그 유명한 책들이 현실을 비유로 포장하는 방식이 싫어서였다.

“죄 없이는 생명도 없다.”

그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종교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의 귀는 설교와 찬송, 불교의 백팔대참회문을 ‘좋은 시’로 듣는다. 낙관도 비관도 아닌 절제된 무심. 그것이 그의 인생철학이다. 젊은 시절 원예사로 일하며 나무와 함께 보낸 시간은 그의 시적 사유의 뿌리다.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질소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

고통, 바람, 햇빛, 결핍 등이 어우러져야 한다. 사람도 부모의 허물까지 품어 안을 때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 단단한 노동의 체험이 만든 시학(詩學)이다.

적막한 세계에서 건져 올린 언어

이문길 시인의 시는 길지 않다. 그러나 단숨에 읽히지 않는다. 짧은 행과 행 사이를 건너는 동안 독자는 침묵의 심연을 지나야 한다. 그의 시를 읽는 동안, 독자는 깨닫는다.

삶은 울며 사는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가는 허공만리의 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의 시들은 오래 숙성된 적막의 결정이다.

어쩌다 섬이 되었는가

하루 종일 우는 섬

어쩌다 가는 길 잊었는가

하루 종일 우는 섬

-시 ‘섬’ 전문

이문길 시인은 1959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수료했다. 1981년 첫 시집 《허생의 오막살이》를 쓴 이래 모두 18권의 시집과 자선 시선집 《그리운 집이여》, 시산문집 《석남사 도토리》, 동시 선집 《눈물 많은 동화》 등을 펴냈다. 1983년 대구문학상을 수상했고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