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독재, 혁명과 반혁명, 기독교 민족주의, 폭력과 사랑, 갈라져 버린 친부와 양부 그리고 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는 이 모든 주제를 한데 끓이며 현대 미국의 영혼을 가장 불안하게, 그리고 가장 인간적으로 비춘다.

폴 토머스 앤더슨(PTA)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이 세 시간짜리 대작은 파시스트 경찰국가로 기울어가는 미국을 무대로 한다. 이민자 수용소, 폭탄 테러, 무장 시위, 그리고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비밀 집회가 하나의 ‘근미래적 일상’으로 엮인다.

영화는 다가올 디스토피아를 예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막 시작된 현실”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피로에 절은 혁명가와 냉철한 군인, 그리고 그 사이에 낀 한 소녀의 눈을 따라가며 권력과 신념이 어떻게 인간을 갉아먹는지를 그린다. 하지만 PTA의 영화는 단순한 정치 풍자가 아니다. 그는 거대한 이념의 파노라마 속에서도 사람의 표정, 떨림, 숨결을 놓치지 않는다.

영화의 첫 장면, 그러니까 ICE(이민세관단속국) 수용소 습격은 혁명의 깃발이 아니라 무력한 인간의 분노로 시작된다. 혁명 리더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는 폭탄을 던지며 자유를 외치지만, 그 폭음 뒤엔 죄책감과 허무가 남는다.

그녀와 동지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이념으로 연결된 연인이자, 절망으로 묶인 가족이다. 그들의 행동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프렌치 75’라 불리는 조직의 테러는 체제를 흔들기보다 그들의 내면을 파괴한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가 믿는 신념은 과연 누구를 구원하는가.”

PTA는 좌파의 이상주의와 우파의 광신이 결국 같은 뿌리인 자기부정과 두려움에서 자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두 극단의 중간 지점에, 미군 장교 스티븐 J. 록조(숀 펜)가 서 있다.

그는 냉혹하고 계산적이지만, 동시에 깊은 콤플렉스의 인물이다. 출세하지 못한 좌절감, 노안으로 인한 외모 불안, 백인 사회 내부에서조차 주변인으로 밀려난 고립감이 그를 괴롭힌다.

그는 철저히 권위적인 군인이지만, 동시에 불안한 인간이다.

그의 욕망은 그가 증오하는 세계를 닮아 있다. 혁명가 퍼피디아를 욕망하고, 그녀를 통해 자신이 부정하던 ‘타자’와 엮인다.

그 불안한 관계에서 태어난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는 폭력의 피(록조)를 물려받았지만, 사랑의 가능성(퍼거슨)으로 자란다.  백인과 흑인의 경계, 좌파와 우파의 경계, 증오와 연민의 경계를 동시에 지닌 존재! 

PTA는 윌라를 통해 “미국의 혼혈적 운명”을 말한다. 피로는 갈라졌지만, 감정으로는 다시 이어져야 하는 나라 말이다. 퍼거슨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다시 총을 든다. 그의 싸움은 이념의 전장이 아니라, 사랑의 전장이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이 심장의 맥박처럼 흐르는 고속도로 추격 장면에서, 영화는 인간이 가진 마지막 신념, 다시 말해 가족을 향한 헌신을 폭발시킨다. PTA는 윌라의 여정을 통해 “혈연이 아니라 관계가 인간을 규정한다”는 오래된 진리를 다시 불러낸다.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는 폭력의 피(록조)를 물려받았지만, 사랑의 가능성(퍼거슨)으로 자란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단순한 감정의 서사로 머물지 않는다.

〈원 배틀〉은 철저히 정치적인 영화다. 이민자 억압, 인종적 갈등, 권위주의, 폭력의 정당화가 미국이라는 이름 아래 어떻게 제도화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원 배틀〉은 이미 정치적 전쟁터 한가운데 놓였다. 진보 진영은 “현대 미국의 도덕적 붕괴를 통찰한 걸작”이라 극찬했고, 보수 진영은 “좌파 테러리즘을 낭만화한 위험한 영화”라며 공격했다. 앤더슨은 그 논쟁을 예견이라도 한 듯 영화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말한다.

“당신이 분노하는 이유는 내가 틀려서가 아니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비췄기 때문이다.”

세 시간 동안 단 한 장면도 낭비되지 않는다. PTA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랑’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며, 냉소의 시대에 인간의 가능성을 다시 꺼내 든다.

하지만 그 용기만큼이나, 이 작품이 당면한 현실의 반발 또한 뜨겁다.

‘좌파의 폭력 미화’, ‘반트럼프적 선전물’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한편에서는 ‘올해의 영화’라는 찬사가 맞부딪힌다. 앤더슨은 이미 그 논쟁을 예견한 듯 보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지금 세계가 앓는 증상을 가장 고통스럽게 진단한 영화다.

폭력과 구원, 분노와 사랑, 국가와 가족 등 모든 대립의 선이 이 영화 안에서 하나로 교차한다. 앤더슨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질문은 단 하나다.

“혁명은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