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교보문고
스마트폰을 껐다
바람 소리까지
귀 기울이지 않기로 한다
거울을 쳐다보다가
하루를 굶기로 하고
물 한 모금도 먹지 않기로 한다
8월의 태양은
그리 괴롭지도 않고
네모진 방안에는
오직 무색의 시간만 가득하다
방도 시간도 마음대로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조금씩 무게를 줄이며 둥둥 떠다니는
내가 만든 세상은 이름을 바꾸고
나는 팔월의 태양을 바뀐 이름 너머로 던진다
《내 가난한 문장은 자주 길을 잃는다》 中 ‘여름 보내기’ 발췌
배태건 시인이 첫 시집 《내 가난한 문장은 자주 길을 잃는다》를 발간했다. 법학박사이자 비케이 엔지니어링 대표이사직을 역임 중인 그는 2024년 계간 시 전문지 《사이펀》 가을호에 ‘사이펀이 찾은 시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내 가난한 문장은 자주 길을 잃는다》는 배 시인의 자화상과 같다. 1, 2, 3, 4부로 구성된 이 시집에는 제 1부 ‘낭만 노숙’ 등 17편, 2부 ‘파랑새의 언어’ 등 16편, 3부 ‘로또는 로또를 모른다’ 등 16편, 4부 ‘묘비명’ 등 16편, 총 65편의 시가 실려있다.
시집 전체를 형용할 수 있는 단어는 ‘그리움’이다. 그는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는 존재를 시를 통해 끊임없이 울부짖는다. 그 존재는 때로는 허상이었다가, 돈이 되었다가, 사랑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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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시는 ‘분수대’다. 이 시는 사랑과 이별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분수대라는 독특한 은유로 풀어내고 있다. 시인은 소낙비, 솜사탕, 분수대와 같은 이미지를 통해 감정의 흐름과 상호작용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묘사한다.
분수대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에서
소낙비 쏟아질 때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물구나무를 서서 보나
소낙비는 소낙비
하지만 넌 구름에서 솟아오르는 솜사탕 분수대라 하는구나
그래, 우리 서로 젖거나 달달하거나
흩어질 때도 분수처럼
사랑도 이별도 분수대처럼
- 《내 가난한 문장은 자주 길을 잃는다》 中 ‘분수대’ 발췌
‘소낙비는 소낙비’라는 단정적인 구절은 자연의 본질적인 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솜사탕 분수대’라는 독창적인 시각으로 소낙비를 재해석한다. 이는 대상에 대한 시각이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나타내며, 사랑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 우리 서로 젖거나 달달하거나’라는 표현은 사랑의 두 가지 측면을 함축한다. 젖는 것은 고통스럽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사랑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반면, 달달함은 사랑의 기쁨과 희열을 상징한다. 이 구절은 사랑이 항상 상반된 감정을 동반한다는 진리를 우아하게 전달하는 완벽한 문장이다.
‘사랑도 이별도 분수대처럼’이라는 마지막 구절은 사랑과 이별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 과정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삶처럼, 사랑과 이별도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분수대가 물을 반복적으로 솟구치고 흩어지듯, 사랑과 이별 역시 삶 속에서 순환하는 경험임을 강조하는 하나의 장치다.
이 시는 사랑과 이별을 단순히 감정의 고저로 표현하지 않고, 분수대라는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재해석하는 것과 동시에 분수대가 지닌 일시적이고 반복적인 특성을 통해 사랑과 이별이 삶의 필연적이고 아름다운 일부임을 깨닫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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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시인의 문체로 풀어낸 시도 있다. 2부에 실린 ‘혼술’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는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혼자 술을 마시는 상황을 시적 언어로 섬세하게 표현한다. 시인이 그려낸 장면은 단순히 혼술이라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고독한 내면의 심리를 투영한다.
혼술
갑자기 사람이 그리운 날
아, 미치도록 허한 날
따라온 그림자마저 돌아갔는가
외로움을 안주로 파먹으며 홀짝거린다
미운 사람도 좋은 사람도 하나 없는
나 홀로 세상에 갇힌 채 나는
술독이 되어 간다
시큼한 안주가 되어 간다
- 《내 가난한 문장은 자주 길을 잃는다》 中 ‘혼술’ 발췌
‘갑자기 사람이 그리운 날’로 시작하는 첫 구절은 고독이 어떻게 불현 듯 찾아오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따라온 그림자마저 돌아갔는가’라는 표현은 외로움이 극단적인 상태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그림자는 늘 따라다니는 존재로 여겨지는데, 그것마저 떠난 상황은 얼마나 깊은 고독인지 짐작하게 한다.
‘외로움을 안주로 파먹으며 홀짝거린다’는 구절도 인상깊다. 외로움을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섭취하며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시적 화자의 내면 상태를 강조한다. 혼술은 더 이상 단순한 음주 행위가 아니라, 고독을 마주하고 내면화하는 의식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부분의 ‘술독이 되어 간다, 시큼한 안주가 되어 간다’는 비유는 고독에 압도되어 자신의 존재가 타락하거나 변질되어 간다고 느끼는 화자의 심리를 나타낸다. 이는 고독이 단순히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의 본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시적으로 전달한다. 혼술을 단순히 외로움의 표현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 내면의 본질적 고독과 연결되어 있음을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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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벌초
아무리 보고프다 한들
만나 볼 수가 없지 않소
목메어 불러 보아도
목소리 한번 들을 길이 없지 않소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머니 무덤 벌초하는 일밖엔
달리 방법이 없소이다
당신께서 씨 뿌려 거둬들인
주름살 속에 박혀진 지혜
가족 모두 둘러앉아
가난을 나눠 먹으며
행복했던 그 시절
이생의 삶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
통곡밖에 할 수 없었던 무능함
어머니 그리울 때
아무도 몰래 돌아서서
가슴으로 우는 울음 풀처럼 무성해져도
혼내지 마소서
- 《내 가난한 문장은 자주 길을 잃는다》 中 ‘첫 벌초’ 발췌
4부에 실린 ‘첫 벌초’ 시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애도의 마음을 담담하면서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벌초라는 행위로 형상화하며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무력감을 동시에 그려낸다.
시의 첫 부분은 만날 수 없는 그리움의 무게로 시작한다. ‘아무리 보고프다 한들’로 시작하며, 화자의 간절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하지만 ‘만나 볼 수가 없지 않소’라는 단언은 죽음이 가져다주는 단절감을 차갑게 느끼게 한다. 목메어 불러도 닿을 수 없는 마음은,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공허함과 애틋함을 극명히 보여준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머니 무덤 벌초하는 일밖엔’이라는 구절은 화자의 효심과 무력감을 동시에 나타낸다. 어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과거와 현재를 비춰 보며, 벌초라는 행위가 화자에게 남은 유일한 헌신의 방식임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행위는 단순한 물리적 노동이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기억을 지키려는 화자의 마음이 담긴 상징적 행위로 해석 가능하다.
‘이생의 삶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 통곡밖에 할 수 없었던 무능함’은 화자의 내면에 자리한 죄책감을 드러낸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자책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또한 ‘가슴으로 우는 울음 풀처럼 무성해져도 혼내지 마소서’라는 구절은 그리움의 내밀한 고백으로 해석할 수 있다. 화자는 어머니를 향한 울음을 억누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이는 애도의 또 다른 형태로 느껴진다.
이 시는 죽음 이후에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유지되고 표현될 수 있는지를 진솔하게 보여준다. 특히 벌초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후 남은 이들의 애틋함과 책임감을 잘 드러낸다. 또한 소박한 일상 속에서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부분은,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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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뜻이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경험한 사건이나 정보 등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잊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니체는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지만,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인간을 ‘약속할 수 있는 동물’로 기른다”고 말했다. 인간이 가장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음’이다. 시집에 담겨 있듯,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감각은 우리가 살아갈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한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 때, 이 책을 펼쳐보자. 집중해서 시를 읽는 동안에는 괴로운 기억은 잊혀지고, 마음 속 한 구석에 ‘그리움’이라는 하나의 표제만 남게 될 것이다.
글=고기정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