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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韓 최초 기상캐스터' 김동완 전 기상통보관 별세…향년 89세

2010년 <월간조선>이 소개한 김동완의 인생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sj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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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기상캐스터로 알려진 김동완 전 기상청 기상통보관이 15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15일 기상청에 따르면 1935년생인 김 전 통보관은 이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난 1959년 기상청 전신인 국립중앙관상대에서 예보관으로 일하다 1970년대 동양방송 등에서 날씨를 전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는 기상청 예보과장을 거친 뒤 1982년부터 1997년까지 MBC에서 일기예보를 전달했다. 퇴직 후에도 1997년까지 프리랜서로 뉴스데스크에 출연했고, 지난 2010년 제60회 세계기상의날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빈소는 서울 강서구 이대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17일 오전 7시 30분이며 장지는 함백산추모공원이다.
<월간조선>은 지난 2010년 6월호에서 김동완 전 통보관과 심층인터뷰를 갖고 그의 인생을 소개했다. 아래는 당시 기사다.
지난 2010년 제60주년 세계기상의 날 기념식이 열린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김동완 전 통보관이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06 2010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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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십니까?] 국민훈장 받은 金東完 前 기상통보관

“사나이로 살려다 보니 외롭다”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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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대소변을 내 손으로 받아내고 하다 보니까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어요.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내가 방송활동을 하는 동안 아내는 아이들 5남매를 혼자 키우다시피 했어요. 그런 아내의 병시중을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요.”

⊙ 정치 참여했다가 재산 30억원 날리고 10억원 빚져
⊙ 일기예보는 뉴스가 아니라 정보가 돼야 한다
⊙ 3분 예정 생방송을 13분으로 늘려 방송하기도
⊙ KBS와 TBC의 김동완 모시기 전쟁 와중 백지수표 제안받기도
⊙ 기후는 사람의 외모, 성격, 말씨도 바꾼다

김동완
⊙ 1935년 출생. 국제대학 법학과 졸업.
⊙ 중앙기상대 예보분석관·통보관·예보과장. MBC 보도국 보도위원. 한국일기예보 회장.
    한국인터넷TV방송국 회장.
 
  우리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있는 전원다방에서 만났다. 원래의 약속장소는 그 부근에 있는 약속다방이었는데 약속다방은 폐업을 한 상태였다. 봄 날씨답지 않게 싸늘했고 비가 내렸던 4월 말의 오후, 작은 건물 지하 이발관 옆에 있는 전원다방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1970, 80년대 흔히 만날 수 있는 다방 풍경 그대로였다.
 
  10분쯤 기다렸을까. 모자를 쓴 점퍼 차림의 사나이가 익숙한 동작으로 다방 문을 들어섰다. 오래된 단골처럼 보였다. 다방 여주인이 “오랜만이네요”하면서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김동완(金東完) 전(前) 중앙기상대 통보관이었다.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한 과학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날씨는 하루에도 서른여섯 번씩 변한다고 합니다. 봄 날씨는 최소한 하루에 세 번 변합니다. 아침은 썰렁하고 점심은 덥고 저녁에는 바람이 붑니다. 돌아오는 길에 여벌의 옷차림에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지금까지 기상대에서 김동완 통보관이었습니다.”
 
  40대를 넘겼다면 이처럼 구수한 속담과 비유까지 곁들인 김동완 통보관의 정감 어린 목소리를 최소 하루에 한 번은 들었을 것이다.
 
  김 통보관은 1958년 국립중앙관상대(현 기상청)에 입사한 후 1970년대부터 방송에서 일기예보와 해설을 했다. 1982년에 MBC로 옮겨 1992년까지 기상 캐스터로 일했다. MBC를 퇴직한 후에도 1997년까지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로 일했다.
 
  그의 이름 뒤에 항상 따라다니는 ‘통보관’이라는 말은 원래 기상청 공식 직책이 아니었다. 방송국에서 임의로 붙인 것이 나중에는 공식 직제로 생겼다고 한다. 통보관의 원조격인 셈이다.
 
  정부는 50년 이상을 날씨만 알고 살아온 그에게 지난 3월 제60회 세계 기상의 날을 맞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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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소리는 예전 그대로
 
  우리는 다방 안에서 비교적 밝은 자리를 골라 앉았다. 사진 촬영을 위해 모자를 벗어달라고 하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흐르는 세월(75세)은 ‘매일 하늘을 우러르는’ 그라고 해서 비켜서지 않았다. 지나간 세월을 셈하듯 그의 머리는 많이 빠져 있었다. 세월도 어쩌지 못한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비음이 섞인 듯한 목소리. 1970년대에서 90년대 후반기까지 방송에서 예의 익히 듣던 목소리를 그날도 날것으로 들을 수 있었다.
 
  70, 80년대를 풍미했던 기상 캐스터는 그 시절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지하다방에서 간혹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근황부터 물었다.
 
  “부정기적이지만 가끔 케이블 TV 같은 곳에 출연도 하고 있고요. 기업체에서 날씨와 관련된 강의 요청이 많이 들어와요. 또 주례 요청도 많이 들어와서 나름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묻기도 전에 그는 자연스럽게 일기예보 등 날씨와 관련된 이야기로 화제를 끌어갔다. 그는 “TV에서 하는 일기예보는 채널을 돌리다가 어쩌다 보게 되는 경우는 있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서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현재의 일기예보 방송에 부정적인 듯했다. 역시 그랬다.
 
  “요즘의 일기예보는 너무 단조로워요. 날씨 방송은 뉴스가 아닌 정보가 돼야 해요. 시청자들이 날씨를 활용할 수 있게 안내를 해 주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나라는 미모의 여성 캐스터들이 일기예보를 담당하고 있지만 선진국은 그렇지 않아요. 날씨 전문가들이 나와서 내일 날씨는 이러저러하니까, 이런 준비도 하고, 이렇게 활용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정보를 줍니다. 우리는 일기예보를 뉴스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부속물로 다루고 있어요.”
 
  김 전 통보관은 예부터 우리 민족은 날씨는 하늘이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숙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날씨에 무관심했다고 했다. 계절풍 지대라 날씨의 변화가 심했고 그런 환경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변화무쌍한 날씨는 우리의 언어를 풍부하게 만드는 역할도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날씨의 변화가 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에는 형용사가 많습니다. 날씨의 변화가 많으면 주위 환경의 변화도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에 장마철이라는 계절이 하나 더 있습니다. 1년이 5계절인 셈이죠. 봄도 이른 봄, 한봄, 늦은 봄이라고 부릅니다. 석 달에 불과한 봄을 세 개로 나누는 것이죠. 매일매일 변하니까 자고 일어나면 주변의 느낌이 어제와 다릅니다. 느낌이 달라지니까 표현도 달라집니다. 노란 것을 ‘노랗다’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노리끼리하다로 표현하고, 빨간색은 빨갛다, 벌겋다, 불그스름하다, 새빨갛다로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그의 설명은 기후와 두뇌의 관계로 이어졌다.
 
  “기후 변화가 심하면 머리를 많이 쓰게 됩니다. 생각을 많이 함으로써 사고력이 풍부해지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머리가 좋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데 그게 다 변화무쌍한 기후 덕인 겁니다. 1년 내내 똑같은 기후에서 사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죠.”
 
 
  경상도에 공장이 많이 지어진 까닭은?
 
  이야기는 다시 언어와 기후의 관계로 돌아왔다.
 
  “기후는 사람의 외모, 성격, 말씨도 바꿉니다. 프랑스어는 말이 나긋나긋하잖아요? 기후가 온화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조금만 올라가서 독일, 소련만 가면 추운 지방이니까 말이 무뚝뚝하게 나오잖아요. 우리가 겨울에 입이 얼잖아요. 그러면 말이 나긋나긋하게 될 수 없어요. 강한 발음이 나오죠.”
 
  그는 날씨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라면 서로 다른 주제로 몇 박 며칠은 할 수 있다고 했다. 천식환자들의 경우 건조한 곳이 좋기 때문에 미국에는 천식환자 요양소를 사막에 짓고 있다는 등 질병과 기후의 관계를 길게 설명한 데 이어 이번에는 산업과 기후의 관계로 화제를 이어갔다.
 
  “각종 기기를 제작할 때 건조한 곳에서 만들어야 불량품이 덜 나온다고 해서 미국의 경우는 기기 제작소를 사막에 설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구에 섬유공업이 발달했던 이유가 대구의 기후가 그 산업에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철강이나 전자 회사가 경상도 지역에 많잖아요?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기 고향을 위해 지어준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기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겁니다. 광복 전에 일본 사람들이 공장 지은 걸 보세요. 전라도에는 짓지 않았습니다. 전라도는 비가 자주 오고, 눈이 많이 와서 습합니다. 공장은 습한 곳에 있으면 안 돼요. 그 나라의 공업단지가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만 봐도 그 나라의 기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기후 측면에서 입지를 잘못 선택한 예로 광양제철소를 들었다.
 
  “전라도 지역만을 놓고 볼 때 광양은 제철소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지만 전 국토를 놓고 볼 때는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기후 조건이 맞는 곳과 덜 맞는 지역에서는 같은 물건이라도 생산단가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날씨와 관련된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화제를 요즘 그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로 돌렸다. 부인(강종남)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우울해 보였다. 그의 부인은 오래전부터 당뇨를 앓아왔다. 2003년에는 합병증으로 실명까지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실명상태에서 부인은 욕실에 들어갔다가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인조뼈를 넣는 수술을 했지만 실명 상태였기 때문에 재활 훈련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부인은 침대에서 누운 채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년여가 흘렀다.
 
 
  아내
 
  “대소변을 내 손으로 받아내고 하다 보니까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어요. 제일 힘든 게 아내를 목욕시키는 일이었죠.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내가 방송활동 등으로 가정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생활하는 동안 아내는 아이들 5남매를 대학까지 다 보내고 혼자 키우다시피 했어요. 그런 아내의 병시중을 남편인 내가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요.”
 
  김 통보관은 직장생활 33년 동안 매일 새벽 4시30분에 출근하고, 밤 12시가 넘어서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한다. 새벽마다 일어나기가 힘들어서 자명종을 세 개 뒀는데, 하나는 머리맡에, 하나는 일어나 앉아야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마지막 하나는 일어서야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 생활 속에서 자녀의 얼굴을 자주 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김 통보관의 부인은 자녀를 위해 아버지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병시중을 하는 김 통보관의 건강도 덩달아 악화됐다. 부인이 병석에 누운 지 3년여가 돼 갈 무렵, 자녀들이 “이러다가는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겠다”면서,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자”고 했다. 남편 된 도리로서 자녀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두 분 다를 위해서라도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셔야 한다”는 자식들의 성화도 거듭됐다. 2008년 7월, 김 통보관은 결국 손을 들었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죠. 나도 사회활동을 계속해야 했고요. 요양원에 아내를 보내면서 거짓말을 했어요. ‘나도 병원에 입원해야 하니까, 당신도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요. 아내는 자신이 병원에 입원하면 내가 집에 혼자 남아 있게 되는 걸 걱정했어요. 그래서 거짓말을 했던 거죠.”
 
  김 통보관은 매주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아내를 찾아간다고 한다.
 
  “가서 보면 사람이 숨을 쉬니까 살아 있는 거지, 외형은 죽은 사람이에요. 그런 아내를 보고 올 때마다 눈물이 나요. 내가 사실은 눈물이 많아요. 영화 보면서 울고 드라마 보면서 울고…. 그걸 감추려고 밖에 나가서는 ‘사나이답게 살자’며 자기 최면을 걸죠. 그런데 사나이답게 산다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기상청 사표수리에 30일 걸려

 
김동완 전 통보관은 한때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2000년 3월 14일 자민련 김천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한 김종필 당시 총재와 함께한 김 전 통보관.
  그의 우울을 떨어내기 위해서라도 화제를 돌려야 했다. 즉효 약은 역시 날씨와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뒤늦게 그에게 국민훈장을 받은 소감을 물어봤다.
 
  “대개 전성기에 훈장을 받는데, 나는 전성기가 지났잖아요. 현업에서 떠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잊지 않고 훈장을 준다는 것이 고맙죠. 또 내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만 해도 내 개인적으로는 대중적 인기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기상청은 중요한 기관으로 인정을 못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 일은 양지에서 하는 것이 아닌 음지에서 하는 것처럼 느꼈어요. 이번에 훈장을 주는 걸 보니 기상청이 양지로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어요.”
 
  ―기상예보가 틀린다고 기상청이 욕먹는 걸 보면 지금도 속상합니까.
 
  “그럼요. 그런데 그게 이렇습니다. 우리 기상청의 예보적중 확률이 92%입니다. 그럼 10번 발표에 1번 틀리는 겁니다. 사회 통념상 100점 만점에 80점이면 우수한 겁니다. 기상청은 90점이 넘습니다. 그런데도 틀리면 틀렸다고 야단을 치고 그러는 겁니다. 맞으면 으레 맞는 것이고요. 그렇지만 성질상 예보는 100%가 없습니다. 확실하다면 확보라고 하지, 왜 예보라고 해요.”
 
  김 전 통보관은 1982년에 기상청을 떠나 MBC 기상 캐스터로 자리를 옮겼다.
 
  ―기상청에서 쉽게 놔주던가요?
 
  “내가 기상청에 있을 때 사면초가였어요. 너무 두각을 나타냈잖아요. 내가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니까 전부 시기를 하지. 내 동료는 물론이고 내 윗사람조차 시기를 하는 겁니다. 동료가 시기를 하면 견딜 수 있는데, 윗분이 시기를 하면 어렵습니다. 나는 윗분이 그렇게 시기를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밀고 나갔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윗분하고 싸움도 했고. 대신 내 후배들에게는 내가 선망의 대상이었죠. 내가 기상청에서 23년 근무했어요. 어느 직장이든지 그 직장에서 23년간 근무를 했다면 적어도 1~2명 정도는 내 아픔을 자기 아픔 정도로 생각할 친구가 있기 마련입니다. 나는 없어요. 23년을 근무하고 나와도 속까지 친한 친구가 없어요. 왜냐하면 시기의 대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사표를 던진 겁니까.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게 싫었어요. 그때 서기관이었는데 MBC에서 서기관 월급의 3배를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표를 냈죠.”
 
  사표를 제출했지만 쉽게 수리가 되지 않았다. 당시 기상청은 과학기술처 산하에 있었는데 김 통보관이 사표를 제출하자 과학기술처 장관이 그를 불렀다. 장관 집무실로 갔더니 장관은 “금년 내로 국장 진급시켜 줄 테니까 그리 아시고 돌아가십시오” 하고는 나가버렸다고 한다. 결국 MBC 관계자에게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잘 해결됐지만 이번에는 총무처 장관이 그를 불렀다. 총무처 장관은 “공무원 중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니 더 있으라”고 했다. 장관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김 통보관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사표가 수리되는 데 30일이 걸렸다고 한다.
 
 
  방송사들의 김동완 쟁탈전
 
김 전 통보관은 1999년 12월 어린이 인터넷TV 방송인 한국인터넷TV방송국 회장에 취임해 일하기도 했다.
  MBC로 옮기기 전에 방송사 간에도 ‘김동완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1970년대 후반 김 통보관은 당시 민영방송인 TBC(동양방송)에서 날씨예보를 맡고 있었다. 일기도를 직접 그려가며 일기예보를 하는 김 통보관의 모습은 장안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큼 인기를 끌었다. 독일대사관에 근무하는 한 외교관은 김 통보관이 일기도를 그리면서 일기예보를 하는 모습이 너무 놀랍고 신기하다며 김 통보관의 방송분을 녹화해 고국으로 보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TBC에서는 일기예보를 뉴스 말미에 붙이지 않고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편성해 방송했다. 그의 주가가 치솟자 KBS에서 손길을 뻗쳐왔다. 하루는 TBC에서 일기예보를 마치고 나오다가 당시 KBS 이사로 있던 사람을 만났다. “차나 한 잔 하자”는 말에 그를 따라나섰는데, 도착하고 보니 여의도에 있는 KBS 방송국이었다. KBS 사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통보관을 보자마자 KBS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이고, 우리 각하보다 더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모셨네요. 여러 말할 것 없고 여기 공수표에 5억원을 적든지 10억원을 적든지 하십시오. 적은 대로 그 돈을 드릴 테니까 내일부터는 우리 방송국으로 나오십시오.”
 
  김 통보관은 난감했다고 한다. TBC와의 의리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하고 있는데 다음 날 오전 TBC 보도국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사장실로 와줄 수 있느냐는 전화였다. TBC 사장실로 찾아갔는데 그곳에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앉아 있었다. 이 회장은 김 통보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 선생님. 약속 하나만 해 주시죠. 어느 방송국이든 대우를 이렇게 해 줄 테니 우리에게 와서 방송을 해 달라고 하면 바로 ‘예’라고 하지 말고 하루만 더 생각을 해 주십시오. 그 내용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면 우리가 그만큼 해 드릴 수 있으면 우리하고 일하고, 그만큼 해 드릴 수 없으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전날 밤 KBS에서 김 통보관을 접촉했던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 통보관은 결국 TBC를 선택했지만 이후에도 김 통보관을 스카우트하려는 방송사들의 움직임은 계속됐다고 한다.
 
 
 
3분 방송을 13분으로 늘리다

 
  김 통보관은 수십 년 방송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원고를 작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고가 없어도 NG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방송 시작 전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임기응변에도 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들려준 에피소드 한 토막이다.
 
  “한번은 그런 적이 있었어요. 원래 일기예보는 생방송을 합니다. 하루는 생방송 중 기침이 나는 거예요. 기침을 안 하려고 참다 보면 방송을 더 못합니다. 그런데 나는 방송 중에도 기침을 해 버려요. 기침을 딱 하고 나서 ‘요즘 공기가 매우 건조합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오’라고 하면 ‘아 저 사람이 저 말을 하려고 일부러 기침을 했구나’하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시간을 정확히 맞춰주고 하니까 PD들이 좋아했어요. 생방송 중에 PD가 1분을 하라고 하면 1분에 정확히 맞추고, 갑자기 2분으로 늘리라고 하면 정확히 거기에 맞춰서 끝냈죠.”
 
  방송 시간을 자유자재로 늘리고 줄이고 하는 능력 덕분에 그는 일기예보 방송을 13분 동안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김종필 총리 시절이었어요. 총리가 무슨 이슈 때문인지 뉴스시간에 생방송으로 10분 동안 출연하기로 예정돼 있었어요. 방송이 이미 절반 정도 진행됐는데 총리가 못 온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뉴스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1~2분이면 괜찮은데, 10분을 어떻게 하느냐. 난리가 났죠. 그때 이미 생방송 중인 나한테 날씨 방송을 10분 더 늘려서 13분 동안 하라는 사인이 떨어진 거예요. 그렇다고 앞에 했던 얘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면 안 되고, 그날 날씨에 맞게 해야 하잖아요. 말을 늘리는 수밖에 없죠.”
 
  ―어떻게 늘립니까.
 
  “예를 들어 ‘바람이 강하게 불겠습니다’라고 한마디로 할 것을 ‘바람은 공기의 수평이동을 말하는데, 공기의 이동은 일정한 거리의 기압차에 의해서 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기압의 기울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부근에서 내일 기압의 기울기가 가파르기 때문에 공기의 이동이 빨라, 즉 바람이 강하게 불겠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늘겠습니까. 10분도 늘리고 20분도 늘릴 수 있죠. 물론 평소 기상에 대한 상식을 충분히 쌓아놔야 되는 일이죠.”
 
 
  정치 입문 실패
 
  김동완 통보관은 한때 정치에도 참여했다. 그는 지난 2000년 4·13총선에 자민련 소속으로 고향 김천에서 출마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힐난조로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였다.
 
  ―왜 정치를 하려고 했습니까.
 
  “나 같은 기상전문가도 국회에 가서 목소리를 좀 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때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자꾸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김 선생, 벌써 국회의원 몇 번 했어야 하는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하셔야 한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니까 ‘돈 걱정은 왜 하느냐? 다 알아서 한다’고 해요. 그래서 ‘연구를 해보겠다’고 하니까 이틀이 멀다 하고 연락이 와요. 그러니까 ‘한번 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향에 내려가면 나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래서 해 보자고 했죠.”
 
  오히려 서울이 더 나았던 것 아닌가요?
 
  “그때 당 사무총장이 ‘어디로 출마하시겠습니까?’라고 해서 ‘고향으로 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서울에서 하면 당선 가능성이 높습니다’라고 해요. 그때 경상도에 갔더니 한나라당이 아니면 안 되는 거예요. 보기 좋게 떨어져 버렸죠. 사무총장이 그러는 거예요. ‘제 말씀을 들었어야죠’라고요.”
 
  ―그때 돈 많이 날렸죠?
 
  “많이는 안 날리고, 그때까지 모은 재산 몽땅 날아가고, 빚도 졌죠.”
 
  ―당시 재산이 얼마나 됐는데요.
 
  “집까지 합쳐서 30억원 정도 됐죠. 그거 다 날아가고, 거기에 10억원 정도 빚이 추가됐죠.”
 
  ―빚은 다 갚았습니까.
 
  “거의 갚았어요. 여기 서울 화곡동에 있던 3층 집도 팔고 부천으로 이사를 갔죠. 그래서 내가 집사람하고 애들 보기가 미안해요. 내가 벌어서 내가 썼지만.”
 
  ―후회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나는 천성이 되돌아보면서 걱정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어 했으면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그것으로 끝이죠. 나는 그때 내가 쓴 40억원을 인생공부를 위한 월사금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공부가 아니고, 사람을 보는 눈이 떠져요. 딱 보면 몇 초 이내로 ‘이 사람은 나에게 득이 될 사람이다. 이 사람은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이다’라는 걸 금방 알아차려요. 그 정도 배우려면 돈을 그만큼 줘야 배우겠지요?”
 
 
  선거비용으로 하루 5억 쓰기도
 
EBS ‘세상보기’에 출연해 강의하고 있는 김 전 통보관. 그는 사전 원고 없이 방송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40억원씩을 선거에 씁니까.
 
  “내가 하루에도 5억원을 쓴 적이 있어요. 내가 출마한 곳이 예전에 군이었다가 시로 흡수된 곳이에요. 지금은 김천시지만, 김천시 금릉군이에요. 군에 마을이 505개입니다. 김천시가 500개쯤 돼요. 그러면 1000개가 넘잖아요. 선거를 할 때 조직을 우선 크게 나누면 면책, 동책까지 둬야 해요. 그런데 한 군데에 100만원씩만 내려가도 얼마입니까?”
 
  이어지는 그의 처절한 선거 경험담이다.
 
  “그런데 그것도 그래요. 가물 때 위에서 물을 대면 바로 내려옵니까. 땅이 젖어가면서 내려오죠. 면책에게 돈을 주면 또 동책에게 나눠 주잖아요? 후보인 나한테 1000만원을 가져가면 양심이 있는 사람 같으면 300만원 정도만 떼고 나머지 700만원을 나눠주는데 양심 없는 사람은 500만원밖에 안 나눠 줍니다. 그런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돼요. 그걸 아는 척했다가는 선거운동원들이 다 없어져 버려요. 그 사람들에게는 그 시기가 대목이거든요.”
 
  ―김종필 총재가 지원해 줄 테니 돈 걱정 말라고 했다면서요?
 
  “많이 도와줬어요. 그때 한 2억원 정도 도와주었는데 다른 지구당에 비하면 많이 도와준 셈이에요.”
 
  ―정말 당선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나도 선거운동 중간에 안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남자가 중간에 안 된다고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돈이라도 그만 쓰셨어야죠.
 
  “내가 우스개로 하는 소리가 ‘나는 남자가 아니라 사나이다’입니다. 남자라면 돈을 아끼려 중간에 정지를 하지만 사나이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늘 손해를 봐요. 자동차를 몰다가 남의 차를 받잖아요? 요즘 보면 누구의 잘못이 큰가를 따지는데 저는 제가 100% 책임을 진다고 해 버려요. 쩨쩨하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죠. 그런데 사실은 사나이로 산다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많이 해요. 얼굴이 대중에 알려진 숙명인 거죠.”
 
  정치 얘기가 나온 김에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물었다. 전 전 대통령은 김 통보관의 대구공고 2년 선배다.
 
  “백담사에 계실 때 후배로서 찾아갔어요. 전 대통령은 내가 후배라는 걸 전혀 몰랐어요. 나를 처음 보고서 ‘이렇게 유명하신 분이 어쩐 일로 절까지 찾아오셨느냐?’고 했으니까요. 사실 그분이 대통령 재임 중에 주위에서 몇몇 사람이 같이 만나러 가자고 했어요. 그런데 나는 안 갔어요. 그때는 내가 문화방송에서 일하고 있을 때인데, ‘내가 뭐하러 가느냐?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사회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했고, 더 바랄 것도 없다. 괜히 그러면 다른 사람 혜택받을 걸 내가 받는 것이 되니까 다른 사람이 받도록 해라. 난 안 간다’고 했죠.”
 
 
  날씨 틀릴까 봐 항상 가방에 우산 넣고 다녔다
 
  김동완 통보관은 자신이 예보한 날씨가 혹시라도 틀릴까 봐 항상 가방에 우산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기상청 통보관이 비 오는 날씨도 모르고 비 맞고 다닌다는 소리를 듣게 될까 봐서였다고 한다.
 
  ―요즘도 우산을 가방에 넣고 다니십니까.
 
  “안 가지고 다닙니다. 오늘 같은 날 내리는 이 정도 비는 우산을 쓰고 다니는 일이 거추장스러워서 맞고 다니죠. 예전에는 나 자신보다 주위 사람들 때문에 쓰고 다녔던 거죠. 내가 비를 맞고 다니면 전부 이상하게 생각하니까요.”
 
  인터뷰를 마치고 지하다방에서 나왔을때 빗방울은 여전했다. 그는 기자 일행이 건네주는 우산을 한사코 뿌리치며 자신의 자동차를 주차해 놓은 곳으로 걸어갔다. 비를 맞으며 걷는 전직 기상 통보관의 뒷모습 위로 방금 전 우리가 커피를 마시고 나온 전원다방의 간판이 오버랩됐다.⊙

입력 : 2024.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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