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인의 ‘진달래 꽃’ 시에는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서서’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를 영어로 변역하면 ‘To spread on your way to leave’이다.

영한(英韓) 시는 원문과 번역의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오묘한 기분에 빠져들게 만든다. 한국어와 영어 그 중간의 지점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어떨 때는 다르게 해석되는 것을 보며 마치 두 가지 시를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이희국 시인이 최근 펴낸 영한 시선집 《간이역에서》(글나무)에 실린 시들도 그렇다. 시집에는 이 시인이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알바니아, 영국 등 20여 개국의 언론·잡지에 다양한 언어로 실은 시들을 하나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간이역

몇 겹의 고요가 침목처럼 깔려 있다

이곳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시간과

오래도록 바라보는 사라진 방향만 있다

철길이 모퉁이로 휘어지던 그때

하늘의 귀퉁이가 우두둑 뜯어지고

허공이 다 젖었다

난청의 계절

시간은 귀가 어두워

먼 길 한 바퀴 돌아온 봄의 표정이

철길에 노랗다

접힌 마음은 어느 지점에서 환승했을까

떠난 이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뒷산 진달래가 붉은 손을 흔들고

시간의 간이역으로 또 누군가 스쳐간다

펴지지 않는 주름진 시간도 있다.

-이희국 시인의 ‘간이역에서’ 전문.

간이역은 이제는 점차 사라져가는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자 누군가에게는 빛바랜 추억을 상징하는 곳이다. 시인은 ‘기억의 간이역’이라는 표현으로 조망하고자 하는 공간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곳임을 밝힌다.

과거는 누군가에게는 근현대사의 상징으로 여겨질 것이고, 또 다른 이에게는 역사적으로 일본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이자 수탈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접힌 마음은 어느 지점에서 환승했을까’ ‘펴지지 않는 주름진 시간도 있다’라는 구절을 통해 잊히지 않는 과거도 있을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흙내를 맡으면

흙은 따스한 자궁이다

어둠의 젖줄을 물고

봄기운에 머리를 내미는 새싹들

틈을 비집고 흙을 이고 나온다

세상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흙은 그들의 여린 다리를 잡아 준다

생애 첫 문을 열어 주는 땅

봄 햇살에 좁은 산도가 열리고 있다

나는 숲의 진통을 알지 못하는데

산과 들이 연둣빛으로 꿈틀거린다

보이지 않는 허공의 계단을 딛고

우뚝 일어서는 소나무, 잣나무, 메타세쿼이어

사계절 맥박이 뜨거운 저것들도 모두

산통을 겪으며 키가 자랐다

소리 없는 실금이 번져 가는 10월이 오면

한해살이 키 작은 잡초들은

잘 여문 씨를 슬며시 땅의 자궁에 묻어 두고

돌아갈 채비를 서두른다

흙의 살을 먹고 자라 다시 흙으로 회귀하는

흙의 부스러기들

숲의 이별식이 시작될 것이다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내 몸에도

흙내가 난다.

-이희국 시인의 ‘흙내를 맡으면’ 전문.

시인은 특이하게 ‘흙’을 여성의 ‘자궁(子宮)’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시인의 문장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흙은 생명 탄생의 공간이자 소멸의 공간이며, 만물을 어우르는 창구다.

숲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떠올리려 하면 단순하게 ‘초록’ ‘메타세쿼이어’, ‘흙’ ‘나무’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시인은 단순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멋들어진 문장을 창조해 냈다. ‘흙’과 동일한 역할을 한 셈이다.

바위

무성한 잡초들이

찬바람에 스러져 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한 아름 푸르게 살다가

구새먹어 텅 비어 버린 고목들이

흙으로 돌아간 쓸쓸한 발자취를 보고 있었다

시든 들판이

새봄의 노래로 뭉클하게 피어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먼 길을 걸어온 시간이

또 다른 시간에 밀려 어디론가 쫓겨 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늘 그 자리에서

바위라는 이름으로.

-이희국 시인의 ‘바위’ 전문.

무지개다리를 찾다

꿈을 꾸다가

꿈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활시위처럼 휘어진 저 무지개는

하늘을 향해 바라보는 꿈의 약속

일곱 가지 색채가 어우러져

하나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반짝이는 별들을

움켜쥐려 했던 많은 시간들

함께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었습니다

비움과 용서 그리고 사랑이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만든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이희국 시인의 ‘무지개다리를 찾다’ 전문.

추천사를 쓴 대만 출신 시인 리쿠이셴(Li Kuixian)씨는 이희국 시인의 시를 ‘부드러움과 강직함의 조화’라고 설명했다. ‘바위’와 ‘무지개다리를 찾다’가 대표적인 예시다. 시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편하게 관찰할 수 있는 물건이나 물체를 가지고 시를 이어 나간다. ‘바위’에서처럼 때로는 강직하면서도 ‘무지개다리를 찾다’에서는 부드러움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인의 특성은 시를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 외에도 ‘간이역에서’ 시집에는 ‘아버지’, ‘어머니의 황혼’ 등 시인 자신의 이야기를 시의 언어로 진솔하게 풀어 쓴 문장들이 가득 실려있다. 시의 마지막에는 ‘온점(.)’을 찍어 비로소 시가 끝이 났다는 표시를 해 둔 시인의 배려도 ‘간이역에서’ 시집에 가득 담겨 있다.

한편 시인이자 약사인 이희국 씨는 《파랑새는 떠났다》, 《세월 속의 무지개》, 《자작나무 풍경》 등의 시집을 펴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