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5일 오전,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 임명이 ‘친일 뉴라이트 인사’라면서 정부 주최 경축식 불참을 선언한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대표 직무대행과 의원들이 서울 효창공원 내 임정요인·삼의사·백범 김구 선생 묘역을 참배한 뒤 백범김구기념관 앞에서 친일반민족 윤석열 정권 규탄대회를 갖고 있다. 사진=조선DB
이종찬 광복회장은 지난해 6월 22일 취임사에서부터 ‘대한민국의 원년(元年)은 1919년’이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 회장이 어제 광복절 기념식에 불참한 일도 이러한 주장에 근거한 행동이지요. 원년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세운 해’입니다. 이 회장의 말대로 1919년은 3‧1 운동이 일어난 시점이자, 상해(上海) 임시정부가 선포된 해입니다. 그런데 이를 ‘대한민국의 원년’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수많은 임시정부, 그리고 ‘국가의 요건’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시작된 시기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입니다. 미국에 대한인국민회가 생겼고, 연해주에 권업회가 결성됐지요. 대한광복군정부, 대동단결선언 등도 존재했습니다. 3‧1 운동을 전후로, 연해주에선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 신한민국정부, 상해 임시정부 등 많은 임시정부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여러 임시정부를 통합했습니다. 일제(日帝)의 주권 강탈에 항거한 임시정부도 여럿이었던 만큼, 각 단체들의 발족 시기와 장소도 제각각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상해 임시정부가 여타 임시정부들을 통합하여 대표성의 외견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이것이 곧 임시정부의 시작이라고 보는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더구나 정부가 있으려면 ‘국가’가 있어야겠지요. 실질적으로 국가의 성립 요건을 갖추었을 때 정부 또한 존재하는 것 아닐까요.
국가의 성립 요건에 대해 가장 공신력 있다고 평가받는 기준은 1933년 12월 26일 체결된 ‘몬테비데오 협약’ 제1조입니다. 이에 따르면 “국제법의 인격체로서의 국가는 다음의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며 ▲상주하는 인구 ▲명확한 영토 ▲정부 ▲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1919년 수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중 어느 요소도 갖추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저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위 요건들을 근접하게나마 갖출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어떤 나라들로부터도 국가의 정부로 승인받지 못했고, 임시정부 요인(要人)들은 해방 이후 귀국할 때도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였다는 게 비통하지만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는 있지만, 임시정부의 수립을 건국으로 인정하기 곤란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헌법 전문 속 ‘임시정부의 법통’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우리나라의 헌법전문에 기재된 문구입니다. 이에 대한 헌법학 교수들의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김영수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가 2000년 저술한 《한국헌법사》 237페이지의 내용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에 성립되어 그 오랜 역사 과정 중 비록 수십 년의 투쟁을 하였지만 하나의 합법정부로서 승인을 받은 예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의 역사적 산물이었고…정신적으로는 이 조직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대표한 유일한 임시정부임이 자명한 사실이다.”
작고(作故)하신 헌법학계 권위자, 권영성 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1934~2009년)는 1996년 저서 <헌법학원론> 125페이지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헌주의적·자주독립적·민족자결주의적 성격과 이념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헌법학자인 성낙인 前 서울대학교 총장도 2019년 판 <헌법학> 123페이지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적법성’이 구분돼야 함을 설명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은 어디까지나 정통성의 계승으로 이해되어야지 실정 헌법 질서상의 적법성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 전문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바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 법통의 계승은 어디까지나 ‘정통성’의 계승을 의미하며 실정 헌법 질서에서 ‘적법성’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2019년 국회입법조사처와 한국헌법학회는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과 헌법의 과제” 세미나를 공동 개최하였습니다. 이때 장영수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1919년 건국 주장은 옳지 않다고 본다”고 밝혔습니다. 장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최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다만, 그로 인하여 불필요한 갈등이 확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특히 새로운 시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사실(fact)을 외면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할 경우에는 그 의도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중국의 동북공정 등과 유사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김구 “지금은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단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이동해 1940년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1941년 임시정부가 향후 독립운동과 건국 과정에서 실천해야 할 정책 대강을 천명하기 위해 ‘건국강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때 “임시정부의 활동은 건국기(建國期) 이전의 나라를 되찾는 복국기(復國期) 활동”이라고 규정했지요. 1945년 9월 3일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단계이다. 다시 말하면 복국(復國)의 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단계이다.”
임시정부의 요인 어느 누구도 ‘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늘날로 돌아오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제외한 역대 정부와 대통령들은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보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후 10년째인 1958년 8월 15일을 건국 10주년으로 기념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8월 15일 건국 20주년 행사를 치렀습니다.
김대중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3·1절 기념식에서 1948년 8월 15일을 ‘제1의 건국’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때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 각종 행사를 열었고 제2의 건국을 하겠다고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해방 후 4대 성취 업적’에 대해 “건국, 6·25전쟁 극복, 고도성장, 평화적 정권교체”라고 하였습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인정한 셈이지요. 문제는 문재인 정부 때 불거졌습니다. 2015년 11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주장은 우리 헌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반(反)헌법적이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反)국가적 주장이며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이다.”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소모적인 논쟁의 불씨를 던진 무책임한 언사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말은 이념이나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입니다.
‘뉴라이트’ 몰이
이종찬 광복회장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이 회장은 지난 8일 임명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에 대해 ‘뉴라이트 인물’이고 ‘임명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김 관장의 과거 강연과 인터뷰 발언을 문제 삼아 임명을 철회하지 않으면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김형석 관장은 독립기념관장 임명 추천위원회에서 진행된 심사에서 후보자 10명 중 서류 전형을 1등으로 통과했습니다. 면접 전형에서도 후보자 5명 가운데 1등이었습니다. 정해진 절차에 의해, 최고 득점 후보자를 뽑아 관장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물론 인사(人事)에 대해서야 개개인의 평가가 다를 수 있고, 이에 대한 의견을 내는 것도 좋습니다. 또 임명 절차에 문제가 있다면, 임명된 후보자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추천위원회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툴 일입니다. 이것이 광복절 기념식에 불참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종찬 회장은 김형석 관장이 1948년 8월 15일 건국을 주장하는, 소위 ‘뉴라이트’ 인물이어서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이 ‘뉴라이트’라는 개념은 법적 의미도 아니고, 각자의 해석에 따라 범주가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를 일률적으로 해석하여 프레임을 만들고, 특정 인물에게 그 올가미를 씌운다면 부당한 처사일 것입니다. 1948년 건국을 주장했다고 ‘뉴라이트’로 몰아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난번, 이승만 대통령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개봉했을 때도 비슷한 ‘뉴라이트 몰이’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 영화에 호응하며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기부금을 납부한 저명 배우를 뉴라이트로 매도한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무엇보다 ‘뉴라이트’ 단체에서 김형석 관장을 자기네 사람이 아니라고 밝혔고, 김 관장 스스로도 그들과 결을 같이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또 김 관장은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일제시대 우리나라 국민의 국적은 어디냐’는 질문에 “일제시대 국적은 일본이지요. 그래서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 우리가 독립운동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답한 적이 있습니다. 김 관장의 이러한 답변에 대해서도 누군가 ‘일본 신민이라고 주장했다’고 왜곡해 거짓 사실이 유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정도의 곡해를 넘어 ‘일제의 부당한 국권 침탈에 의해 국적까지도 빼앗겼다’는 김 관장의 말뜻을 정반대로 뒤집은, 선동입니다.
광복회장님께
이종찬 회장님, 선생께선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 선생의 종손자입니다. 조부의 6형제는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라는 국치를 당하고 나서 같은 해 12월, 기약 없는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다 팔고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당시 우당 이회영 선생의 형제들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조선 팔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부호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제공하는 기득권, 작위(爵位) 등의 회유를 모두 뿌리치고 수천억 재산을 은밀히 처분하셨습니다.
그리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는다’는 처절한 독립운동을 위해 야밤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향하셨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설치를 비롯해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빛나는 이 형제분들의 위업은 온 겨레가 존숭(尊崇)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회영 지사는 독립운동 중 대련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옥중에서 나흘 만에, 고문 끝에 순국하셨습니다. 나라를 위해 음지에서 일했던 이들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하고 애통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일이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결코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게 아닙니다. 나라를 잃고 만주, 상해, 미국, 유럽 등으로 흩어져 분골쇄신 독립운동을 전개한 결과 전 세계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 함석헌(咸錫憲·1901~1989년) 선생의 말처럼, 해방은 도둑같이 찾아왔습니다.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헛된 꿈을 품고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역을 침탈하고 마침내 미국을 공격했다가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했습니다. 해방을 맞고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이 건국된 밑바탕에는, 독립운동을 통해 보여준 우리 민족의 굳건한 독립 의지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찬란히 빛나는 선열들의 독립운동이 밑거름이 되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에 반발하여 뜻 깊은 광복절 기념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처사는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자랑스러운 애국 선열의 직손이자, 국가 원로로서 재고(再顧)해주시기를 삼가 바라옵습니다.
글=김석규 한반도안보전략연구원 고문·행정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