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을 다룬 영화 ‘JFK(1991년작)’에 나오는 피격 당시 모습.
소문으로 떠돌던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배후의 일부가 드러났다. 케네디 암살범 '리 하비 오즈월드'가 1963년 11월 22일 범행 당일로부터 2개월 전 구(舊)소련 정보기관 KGB와 접촉한 것이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은 11월 26일(현지시각)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된 기밀문서 2891건을 공개했다.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 중앙정보국(CIA)은 1963년 9월 28일 암살범 오즈월드가 멕시코 주재 소련 대사관 소속 KGB 요원 발레리 블라디미로비치 코스티코프 영사(領事)와 러시아어(語)로 전화통화한 내용을 도청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은 11월 26일(현지시각) 케네디 전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된 기밀문서 2891건을 공개했다.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 중앙정보국(CIA)은 1963년 9월 28일 암살범 오즈월드가 멕시코 주재 소련 대사관 소속 KGB 요원 발레리 블라디미로비치 코스티코프 영사(領事)와 러시아어(語)로 전화통화한 내용을 도청했다.
CIA가 대통령 암살 가능성을 사전 인지(認知)했는지 이번 문서 공개를 통해서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케네디는 불행히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건 당일 케네디 대통령은 영부인 재클린 여사와 함께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중이었고 암살범은 권총으로 케네디를 저격했다.
과연 당시 CIA는 사건을 막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막지 않았던 것일까. 일각에서 제기된 음모론처럼 CIA가 KGB와 연계해 반역에 가담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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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1963년 11월 22일 리 하비 오즈월드에 의해 권총으로 암살당한 지점이 텍사스주 달라스 시내 도로에 표시돼 있다. |
케네디 암살 사건과 KGB·CIA의 역학관계
CIA는 사건 발생 후 암살범 오즈월드를 죽이려는 살해계획 첩보도 입수했다. 기밀문서에 따르면 에드거 후버 당시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은 오즈월드가 살해되기 전날 밤 '저격범 흔적 없애기' 작전이 진행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경호 강화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암살범은 케네디 저격 사건 이틀 뒤인 1963년 11월 24일 호송 도중 나이트클럽 주인에 의해 살해됐다.
문서 공개와 관련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27일(현지시각) "거의 모든 것이 국민에게 공개되는 게 내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국가안보를 고려해 300여 건에 달하는 문건은 공개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부처와 연방기관들은 특정 정보가 국가안보, 법 집행, 외교적 우려 때문에 수정·편집돼야 한다"며 "미국의 안보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정보 공개를 허용하는 것보다는 그런 수정·편집 작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과 관련해 KGB와 CIA는 과연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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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공산당의 칼과 방패 역할을 했던 비밀첩보기관 슈타지. 이 건물은 지금도 동베를린 지역에 남아 있다. 오른쪽은 슈타지 마크. |
서독 정부기관과 정당 내 동독 비호 세력 확보에 들어간 동독(東獨) 슈타지
이와 관련해 구(舊)동독 비밀첩보기관 슈타지(MfS·국가안전부·Ministerium fur Staatssicherheit)의 대(對)서독 활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서독이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강조하는 동방(東方)정책을 펴자 동독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첩보기관 슈타지를 적극 가동했다. 슈타지는 서독 사회에 마수(魔手)를 최대로 뻗친 것이다. 서독 하원의원을 매수해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지지하는 총리의 불신임안(案)을 부결시킬 정도로 슈타지의 공작은 치밀했다. 그 무렵 서독 사회에서는 동독을 서방의 시각이 아닌 사회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봐야 한다는 '내재적 접근론'이 확산됐었다. 이로 인해 당시 서독 사회에는 동독 정권의 공산독재·인권 유린에 침묵하고 화해와 포용을 주장하는 친(親)동독 세력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당연히 서독 사회에서는 안보불감증이 만연됐다.
비밀첩보기관 슈타지 창설
동독은 1950년 2월 국가안전부를 창설했다. 일명 '슈타지'로 불린 이 첩보기관은 1989년 당시 베를린 본부와 15개 지부 산하에 9만여 명의 공식 요원과 17만여 명의 비공식 요원을 둔 방대한 조직이었다.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의 '창과 방패'로서, 동독의 체제 보전과 서독 내 정보수집, 친(親)동독 여론 조성 등을 위해 다방면의 공작을 폈다.
대외 정보수집·공작활동은 슈타지 산하 해외공작총국(HVA)이 총괄했다. 총책임자는 서독에서 출생하고 소련에서 교육받은 공산주의자 마르쿠스 볼프였다. 그는 1986년 퇴임 시까지 34년간 해외공작총국을 이끌며 대 서독 공작활동을 지휘했다. 해외공작총국은 서독의 정당, 군부, 언론, 노조 심지어 정보기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 간첩을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했다. 서독 좌파단체의 활동을 배후 조종하고 보수 성향 정치인이나 기관에 대해 나치 연루 의혹 등 흑색선전을 벌였으며, 심지어는 총리의 측근 보좌관 자리까지 간첩을 침투시키는 데 성공했다.
통일 전후로 많은 슈타지 공작문서가 폐기되면서 구체적 활동 파악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총 2만~3만 명의 서독인이 슈타지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브란트 사민당 정부의 대 동구권 관계 개선 조치 이후 서독 주민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호기심, 같은 민족으로서 동독인에 대한 친근감 등으로 대 동독 안보의식이 크게 이완됐다. 1976년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장 마르쿠스 볼프는 "지금까지 접근할 수 없었던 서독 내 인사들이 우리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됐음을 체험하고 있다"며 슈타지의 공작이 성공했음을 밝힌 적이 있다.
방첩기능을 수행했던 서독 헌법보호청(BfV)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부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1989년까지 슈타지의 대 서독 공작 사례는 무려 4만여 건에 달하며 이 중 정치 공작은 1만여 건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슈타지의 활동 영역은 광범위했으며 침투할 수 없는 곳이 사실상 없었다.
서독 정부기관·정당, 슈타지의 제1 공작 목표
슈타지의 주요 첩보수집 대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서독 중앙정부·주(州)정부·정당 및 사회단체 등을 대상으로 한 정치첩보활동이다.
둘째는 서독 국방부 및 NATO에 대한 군사첩보활동이다.
셋째는 핵(核)연구시설 및 전자·항공·군수 분야 등에 대한 산업첩보활동이다.
넷째는 대학·연구소 등에 대한 학원첩보활동이다.
다섯째는 동독 출신 이주민에 대한 첩보활동 등이다.
이 중에서도 서독 내 주요 정치권 인사들의 동향과 정책결정 과정을 파악하기 위한 정부기관·정당의 핵심 인사 포섭은 슈타지의 제1 공작 목표였다. 슈타지는 도처에 심어놓은 정보원들을 통해 정치·경제·안보 분야에서 정책 수립 동향과 정권교체·연정(聯政)구성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했다. 서독 총리실을 담당한 해외공작총국 1과에만 32명의 정보원이 있었으며, 브란트 총리 측근으로 동방정책을 입안했던 에곤 바의 경우에는 자택에 도청장치까지 설치할 정도였다.
슈타지는 기민·기사당 정치인들과 다양한 접촉을 통해 우파 정치인들의 활동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해 왔다. 여기에는 오래전에 심어놓았던 슈타지 간첩들의 활약이 크게 작용했다.
1969년 사민당 집권 계기로 슈타지 활동기반 확대
1969년 서독 사민당의 정권 장악은 동독 정보기관으로서는 활동기반 구축의 호기(好機)였다. 슈타지는 브란트 정부 집권 이후 동서독 간 기본조약 체결, 관계개선 및 교류활성화 움직임에 편승해 서독 사회 전반에 침투를 확대했다. 엄청난 양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요인들을 매수하고 여론조작·흑색선전 등 심리전 활동도 적극 전개했다.
대(對)동독 긴장 완화 분위기 속에 서독 내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이나 동독 인사 접촉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당시 서독 헌법보호청은 1976년 연례보고서에서 "동독은 서독의 긴장완화 정책에 따라 증가하는 인적·물적 왕래에 편승해 간첩활동을 강화하고 있다"며 위기상황을 경고했다.
이 무렵 동독 첩보기관 슈타지는 서독 좌파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협조 세력을 구축하려 했다. 서독 사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사무총장까지 역임했던 비난트 의원도 슈타지의 협조자로 일했다. 그는 동독 장관 자문위원으로 신분을 위장한 슈타지 요원과 정기적으로 접촉하며 정보를 제공했다. 또 당시 브란트 총리 등 사민당 지휘부와 관련해 자신의 예리한 분석력을 바탕으로 유용한 첩보를 슈타지에 제공했다. 독일 통일 이후 이 같은 간첩행위가 드러나면서 1996년 징역 2년6월, 벌금 100만 마르크의 처벌을 받았다.
1979년에는 바이에른주 출신의 사민당 의원 크레머가 체포됐다. 그는 슈타지 고위간부와 10여 차례 이상 만나 정부 및 당내(黨內) 비밀을 누설한 혐의를 받았다.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장 볼프와 1978년 7월 스웨덴에서 접선한 사실도 발각됐다. 볼프는 자서전에서 크레머에 대해 "정치적으로 서로 터놓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서독 측 대화 상대자"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는 1980년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민당 청년당원들은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통일당에서 파견한 인사들과 개별 접촉을 갖기도 했다. 청년당원 중에는 라퐁텐 전(前) 자알란트 주지사, 아이헬 전 재무장관 등 향후 사민당의 중량급 정치인으로 성장한 인사들이 다수 있었다.
슈타지는 1966년부터 3년간 서독 기민-사민당 대(大)연정 당시부터 사민당 대표이자 외무장관이던 브란트를 주목했다. 그가 총리로 부임하자 외무부 내 정보원을 가동해 신(新)정부의 정책기조를 예의주시했다. 브란트 총리가 군비축소, 핵확산 반대, 동서 간 긴장해소 쪽으로 가닥을 잡자 이런 상황을 동독 정권에 유리하게 이용하려 했다. 대(對)동독 대결 정책으로 흡수통일을 지향했던 기민당 정권에 비해 교류협력을 내세운 사민당의 집권을 동독 정보당국은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돈 받은 기민당 의원, 브란트 총리 불신임 반대
1972년 들어 브란트 총리의 정치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대한 연정 정부 내 반발이 높아지며 일부 여당의원들(사민당 4명·자민당 6명)이 야당 기민당으로 이적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의회 내 반수 이상을 차지했던 사민-자민당 연정은 과반 지위를 상실했다. 기민당은 이를 정권탈환의 기회로 보고 브란트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案)을 의회에 제출했다. 표결을 통해 불신임안이 가결되면 브란트 총리는 물러나야 했고 동방정책은 무위(無爲)가 되는 것이었다. 동독으로서는 동독을 국가로 인정한 동서독기본조약이 아직 서명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약체결을 반대하는 기민당으로의 정권교체는 반드시 저지시켜야 했다.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마저 동독 서기장 호네커를 모스크바로 불러 브란트를 지지할 수밖에 없음을 전달했다.
기민·기사당이 근소한 차이지만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란트 총리의 실각(失脚)이 예상됐다. 그러나 1972년 4월 27일 실제 투표 결과는 찬성 247표, 반대 249표였다. 2표 차이로 불신임안이 부결됐다. 기민당 측에서 반란표가 나왔던 것이다. 브란트의 조기 퇴임을 우려한 슈타지가 기민당 내 일부 의원을 매수해 불신임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공작한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기민당의 슈타이너 의원은 슈타지 측으로부터 5만 마르크의 공작금을 받고 불신임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다른 한 명의 반란표는 '사자'라는 공작명으로 활동한 기사당의 바그너 의원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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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트 서독 총리(오른쪽)와 그의 보좌관이었던 동독 간첩 귄터 기욤. |
귄터 기욤, 권력 가장 깊숙이 침투한 동독 간첩
귄터 기욤(공작명 한센)은 동독의 한 출판사에서 사진 편집인으로 일하다 슈타지에 발탁, 간첩교육을 받고 1956년 5월 아내 크리스텔과 함께 서독 프랑크푸르트로 위장 이주했다. 아내도 공작명(하인체)을 부여받은 부부 간첩이었다. 슈타지의 지령은 서독 사민당 내부에 침투해 협조자를 발굴·육성하라는 지시였다.
부부는 1957년 사민당에 입당한 이후 사민당 내 열성당원으로 활약했다. 기욤은 타고난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1968년 프랑크푸르트 시의회 사민당 대표직까지 맡으며 당내 고위 정치인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연방교통장관 게오르크 레버의 선거를 돕는 지역책임자로도 일했다. 또한 부인 크리스텔도 1957년부터 1964년까지 사민당의 헤센 남부지부와 주지사실에서 근무하며 서독군 관련 정보를 동독에 제공했다.
기욤은 1969년 브란트가 총리로 당선된 후 주변 인사의 추천으로 총리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1972년 선거전에서 사민당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연방총리실의 정당·노조 담당 보좌관으로 승진했다. 총리에게 보고되는 각종 문서를 직접 열람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그는 브란트를 지근(至近)거리에서 보좌하며 여당 내부의 정치상황을 파악하고 총리 주도의 소그룹 토론모임에도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기욤은 총리실로 보고되는 기밀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저장, 담뱃갑에 담아 슈타지 측에 인편(人便)으로 전달하는 역적(逆賊)행위도 저질렀다. 슈타지 간첩 기욤은 권력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 최고권력자의 정치적 비밀과 개인 동향을 살폈다. 그는 미소(美蘇) 간 군축회담에 대한 서독의 입장, 서독과 동맹국 간 정상회담, 미국과 유럽 정상 간 협의내용, 미국과 프랑스 간 나토 내부의 불협화음 등을 세세히 동독에 보고했다. 한편 총리 부인 루트 브란트와 기욤의 부인 크리스텔 기욤도 서로 친하게 지내며 소풍도 같이 다녔다.
1974년 4월 기욤의 간첩행위가 발각되자 동독 간첩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어 브란트 총리는 결국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기욤이 꼬리가 잡힌 것은 그와 협조관계에 있던 '그로나우'라는 거물간첩이 발각되면서였다. 그로나우는 서독의 노동조합 조직에 침투해 각종 정보수집, 공작활동을 벌였다.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기욤'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자 당시 헌법보호청 내 담당직원이 1950년대 동독 암호문 해독에서 동일 이름이 등장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1950년대 말까지 동독은 소련식 암호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서독 정보부가 이를 해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7년 무렵 방첩당국은 기욤의 아들 피에르가 태어났을 때 "두 번째 기욤의 출생을 축하한다"는 무선(無線) 교신과 이후 기욤 부부에게 전달된 생일축전 메시지 등을 감청했다. 체포된 기욤은 1975년 고등법원에서 국가반역죄로 13년형을, 그의 부인은 8년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이던 기욤은 1981년 10월 동독에 수감돼 있던 서독 스파이들과 맞교환돼 동독으로 건너갔다.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장 볼프는 자서전에서 기욤의 발각에 대해 "쓰라린 패배"라고 적고 있다. 그는 브란트 총리의 퇴진에 대해 "절대 바라지 않았던 결과이며 동독의 명백한 자살골"이라고 탄식했다. 기욤 사례는 브란트 총리 주도의 사민당 정부가 동독의 정치적 입지 강화와 동독 정보기관의 활동기반 확대에 얼마나 유리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例)이다.
로미오 작전, 슈타지에 포섭된 여비서들
로미오 작전이란 슈타지가 젊고 매력적인 남성 간첩을 활용, 서독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 독신 여성들을 포섭해 정보를 수집한 작전 일체를 말한다.
동독 작센 지역의 유명 극장에서 일하던 롤란트(Roland)는 상당한 지성과 외모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NATO 본부에서 통역원으로 일하는 여성을 포섭하라는 슈타지의 지령을 받고 1961년 서독으로 떠났다. 그는 '카이 페터센'이라는 이름의 덴마크 언론인으로 가장했고 덴마크 억양이 있는 독일어로 말을 했다.
슈타지가 목표로 정한 마가레테라는 이름의 여성은 예쁘고 부지런하며 수줍음 많은 기독교신자였다. 이전에 로미오 타입의 간첩들이 몇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롤란트는 다방면의 지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마침내 결혼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 무렵 롤란트는 마가레테에게 "나는 덴마크 군(軍) 비밀보안대 간부"라며 또다시 신분을 위장했다. 마가레테는 연인을 위해 나토의 비밀정보들을 빼냈으며 롤란트는 이를 슈타지에 제공했다. 한동안 성공적으로 간첩활동을 하다 방첩기관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롤란트는 동독으로 넘어갔다. 마가레테는 서독에 남아 다른 간첩을 통해 정보를 제공했으나 연인이 없어지면서 점차 흥미를 잃고 협조활동을 중단했다.
또 다른 젊은 서독 여성 게르다(Gerda)는 1960년대 초 열아홉의 나이에 파리의 한 어학원에서 동독 간첩 허버트 슈뢰터를 알게 됐다. 슈뢰터는 자신의 정체를 게르다에게 털어놓았고 그녀는 동독에까지 가 슈타지와 접촉하고 슈타지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1966년부터 게르다는 외무부 정보센터에서 근무하면서 서독의 모든 대사관에서 들어오는 암호전문을 해독해 슈타지에 넘겨줬다. 외무부 정보센터의 업무 분위기는 자유분방한 편이었는데 이 점을 이용, 게르다는 1m가 넘는 전보문 용지를 자신의 핸드백 속에 챙겨 청사에서 퇴근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녀가 가져온 서류를 남편 슈뢰터는 사진으로 찍어 동독 측에 넘겼다. 그녀가 3개월간 워싱턴의 서독대사관 암호해독원으로 파견됐을 때 슈타지는 미독(美獨) 관계의 내부사정에 대한 고급첩보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게르다는 폴란드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파견됐다. 남편과 떨어져 지내면서 그녀는 서독 언론인이라는 남자를 우연히 알게 돼 사귀게 됐다. 실상 이 남성은 서독 연방정보부의 요원이었다. 게르다는 이 남자에게 스파이 사실을 털어놨고 결국 그녀의 남편 슈뢰터는 동독으로 탈출, 그녀 또한 서독으로 소환돼 처벌받았다.
서독 內 흑색선전 유포하고 이간질 공작 자행
슈타지는 유력 정치인에 대해서는 허위정보를 흘리는 흑색선전을 감행했고, 정당 간 상호 이간질시키는 공작도 벌였다.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은 1974년 10월 기민당 정치인인 쿠어트 비덴코프와 당시 기민당 대표였던 콜 간의 전화내용을 도청했다. 콜의 약한 지도력 문제가 통화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을 미국의 정보요원이 도청한 것처럼 허위로 조작, 《슈테른》지(誌)에 흘렸고 이 잡지는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야당의 총리 후보가 지도력이 약하다는 내용을 퍼뜨려 보수 야당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동맹국의 비밀요원이 서독 정치인을 도청한다는 인식을 심어 미국-서독 간 관계 악화를 노린 이간질이었다.
또한 1980년 10월 연방의회 선거를 앞두고는 자매정당인 기민-기사당 간 불화를 조장하기도 했다. 기사당은 기민당의 자매정당으로 남부 바이에른주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동독은 사민-자민당 연립정권이 계속 정권을 잡아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슈타지는 기사당이 바이에른주에만 국한된 정당활동을 버리고 다른 주에서도 정치활동을 할 것이란 허위사실을 만들어 언론에 흘렸다. 당시 기사당 사무총장인 슈토이버가 이를 공식적으로 재가(裁可)했다는 내용을 《슈피겔》지에 전달해 기민-기사당 간 큰 분란을 야기하고 전통적 협력관계에도 타격을 입혔다. 슈타지의 의도대로 그해 선거에서 사민-자민당 연합정권은 재(再)집권에 성공했다.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은 1980년대 초반 기민당 성향의 잡지인 듯한 《Die Mitte(중도)》와 《SPD-Intern》이라는 소책자를 수차례 발행했다. 동독정책에 우호적인 내용을 실으면서 각각 기민·사민당 내부에서만 알 수 있는 정보도 적당히 섞어 당원들이 발간한 책자처럼 보이게 했다. 정당과 지지층 내부의 혼란과 이간질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이처럼 슈타지는 대 동독 긴장완화 정책 이후 서독에서 광범위한 공작활동을 벌였으며, 서독 인사들도 슈타지 첩자들에게서 얻은 비밀을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다녔다. 비단 정치권과 정부 인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 같은 현상은 서독의 사회 주요인사들에게 유행처럼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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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8월 13일 동독은 돌연 베를린 장벽을 구축했다. 그 후 슈타지의 대 서독 정치공작의 주안점은 ‘통일’에서 ‘평화’로 바뀌게 된다. |
서독 정보기관 포섭에 나선 슈타지
서독의 정보기관은 크게 국내 방첩 및 체제 수호를 담당하는 헌법보호청과 해외정보 수집을 맡는 연방정보부(BND)로 나눠져 있었다. 슈타지로서는 서독 정보기관에 침투해 내부 기밀정보를 빼내고 방첩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핵심 목표였다. 정보수집을 위해 서독 정보기관원에게 신분을 위장해 접근하거나 통신망 도청 등의 방법을 활용했다. 또한 서독 정보요원들의 신원정보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다음 사례는 슈타지에 포섭돼 암약했던 서독 정보기관 내 대표적인 간첩 사례들이다.
알프레드 슈풀러는 1971년 뮌헨에서 독일공산당원과 비밀리에 접선한 후 이를 통해 슈타지와 접촉을 시작했다. 자신의 형 루트비히도 중간역할을 하도록 설득해 간첩활동에 끌어들였다. 형제간첩은 각각 ‘페터’와 ‘플로리안’이라는 공작명으로 활동했다. 슈풀러는 매주 최대 400여 쪽 분량의 연방정보부 내부 기밀자료를 유출했으며, 당시 슈타지 측은 이 정보를 소련 정보기관 KGB에도 제공했다.
슈풀러가 빼돌린 정보의 주요내용은 서방에서 바라본 바르샤바 조약기구 분석, NATO가 파악한 동구권의 핵무기 위치, 소련의 우주계획 등이었다. 1급비밀로 분류된 NATO의 동구권 타격 예상지점 리스트도 포함돼 있었다. 슈풀러는 자신이 근무하던 서독 연방정보부 직원들에 대한 정보도 정기적으로 누설(漏泄)했다. 슈타지는 이를 통해 서독 연방정보부의 세부 조직, 요원들의 주요 임무뿐만 아니라 가명(假名)으로 활동하는 현직 정보요원들의 본명·거주지 주소까지 상세히 파악했다.
슈풀러는 기밀을 슈타지에 넘길 때 이동식 무인(無人) 수수소(授受所)를 활용했다. 빈-동베를린 간 열차의 화장실 세면대 아래에 빼낸 자료를 놓아두면, 검표원으로 가장한 슈타지 해외공작총국 직원이 이를 수거해 가는 방식이었다.
동독 정부는 이들 형제간첩에게 공로를 인정해 훈장을 수여하고, 16년간 총 25만 마르크를 지급했으며, 심지어 이들의 이혼소송 및 이사 비용까지 부담했다. 형제간첩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주 뒤인 1989년 11월에 체포돼 각각 징역 10년, 5년6월 형을 선고받았다. 슈풀러는 후에 《포커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당시 사회주의에 심취, 스스로 혁명가라고 생각했으며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돈과 업무 욕심이 컸던 헌법보호청 요원 클라우스 쿠론
정보기관 내의 배반자는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해 왔다. 서독의 방첩기관 헌법보호청이 클라우스 쿠론의 배반으로 입은 타격은 재앙(災殃)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쿠론은 1962년 헌법보호청에 입사, 주로 방첩 파트에서 근무하며 이중간첩 색출작전을 지휘해 왔다. 뛰어난 정보수집력과 작전수행으로 헌법보호청 내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승진 기회가 제한된 데 따른 불만과 경제적 이유 등으로 자신의 정보지식을 적대국 정보기관에 팔아넘겼다.
그는 1981년 슈타지 해외공작총국 9과(방첩담당) 앞으로 직접 편지를 작성해 본에 있는 동독상주대표부의 우편함에 갖다놨다. 자신의 이름과 직무 부서를 언급하지 않은 채 헌법보호청 직원이라고만 적었고, 정보를 제공할 의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대가로 15만 마르크와 매월 자신의 월급 2배를 달라고 제시했다. 해외공작총국장 볼프에 따르면, 슈타지는 필적(筆跡) 비교를 통해 편지 작성자가 헌법보호청 방첩과에 근무하는 직원임을 파악했다.
쿠론은 오스트리아에서 슈타지와 접선, 자신이 더 이상 진급이 되지 않는 것과 현재의 월급으로는 자녀들 대학공부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경제적 불만을 털어놓았다. 쿠론은 이후 드레스덴에서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장인 볼프를 직접 만났다. 볼프는 착수금으로 15만 마르크를 청구한 쿠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매달 4000마르크를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쿠론은 통일 전까지 슈타지에 서독의 간첩 색출작전, 역(逆)공작 계획, 서방에 여행 중인 동독인 감시 실태 등 방첩작전 진행 상황을 상세히 알려줬다.
통독 직후 자신의 배반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형(刑)을 면제받는 조건으로 자신이 KGB에 대항해 이중간첩으로 일하겠다고 헌법보호청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간첩행위로 체포돼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8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서독軍·NATO에 대한 군사정보 수집에도 혈안
동독의 군사 스파이 활동은 서독군과 NATO의 군사력 현황·군비충원계획·국방정책 등의 정보수집에도 집중됐다. 이 업무는 슈타지 해외공작총국과 동독군 첩보국이 주로 담당했는데 두 조직은 서독에 다수(多數)의 정보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독의 고급정보원들은 대부분 평범한 직원들이었지만 직장에서 광범위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고 유사시 정보유출을 통해 서독 방위체계에 치명적 손실을 입힐 수도 있었다. 수집한 정보는 소련을 중심으로 바르샤바 조약국들에도 전달·공유됐다.
라이너 룹(공작명 토파스)은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껴 ‘68학생운동’ 폭력시위에도 참가했던 좌파 성향의 인물이었다. 68학생운동은 1968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운동으로 독일에서는 사회주의독일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연좌농성·파업·폭동이 일어났다.
룹은 미국·NATO를 담당하던 슈타지 공작요원에게 포섭돼 동베를린 슈타지 본부에서 서류 사진 찍기, 암호 작성, 무선송신 등 간첩교육을 받았다. 슈타지의 도움으로 브뤼셀에서 학업을 지속하다 브뤼셀 영국 군사고문단에 근무하던 영국 여성을 사귄 후 1972년 결혼식까지 올렸다. 그의 아내도 간첩행위에 가담했는데 NATO 내 여러 곳의 부서를 옮겨가며 기밀을 빼돌렸다. 룹도 1977년부터 NATO에 근무하며 NATO의 군사계획·지휘부 구조·바르샤바 조약국들의 군비증강에 대한 평가 등을 슈타지에 보고했다. 그의 간첩활동은 통일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그는 통일 후 슈타지 비밀문서를 입수한 CIA에 의해 적발돼 1993년 체포,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내의 배반자는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해 왔다. 서독의 방첩기관 헌법보호청이 클라우스 쿠론의 배반으로 입은 타격은 재앙(災殃)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쿠론은 1962년 헌법보호청에 입사, 주로 방첩 파트에서 근무하며 이중간첩 색출작전을 지휘해 왔다. 뛰어난 정보수집력과 작전수행으로 헌법보호청 내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승진 기회가 제한된 데 따른 불만과 경제적 이유 등으로 자신의 정보지식을 적대국 정보기관에 팔아넘겼다.
그는 1981년 슈타지 해외공작총국 9과(방첩담당) 앞으로 직접 편지를 작성해 본에 있는 동독상주대표부의 우편함에 갖다놨다. 자신의 이름과 직무 부서를 언급하지 않은 채 헌법보호청 직원이라고만 적었고, 정보를 제공할 의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대가로 15만 마르크와 매월 자신의 월급 2배를 달라고 제시했다. 해외공작총국장 볼프에 따르면, 슈타지는 필적(筆跡) 비교를 통해 편지 작성자가 헌법보호청 방첩과에 근무하는 직원임을 파악했다.
쿠론은 오스트리아에서 슈타지와 접선, 자신이 더 이상 진급이 되지 않는 것과 현재의 월급으로는 자녀들 대학공부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경제적 불만을 털어놓았다. 쿠론은 이후 드레스덴에서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장인 볼프를 직접 만났다. 볼프는 착수금으로 15만 마르크를 청구한 쿠론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매달 4000마르크를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쿠론은 통일 전까지 슈타지에 서독의 간첩 색출작전, 역(逆)공작 계획, 서방에 여행 중인 동독인 감시 실태 등 방첩작전 진행 상황을 상세히 알려줬다.
통독 직후 자신의 배반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형(刑)을 면제받는 조건으로 자신이 KGB에 대항해 이중간첩으로 일하겠다고 헌법보호청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간첩행위로 체포돼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8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서독軍·NATO에 대한 군사정보 수집에도 혈안
동독의 군사 스파이 활동은 서독군과 NATO의 군사력 현황·군비충원계획·국방정책 등의 정보수집에도 집중됐다. 이 업무는 슈타지 해외공작총국과 동독군 첩보국이 주로 담당했는데 두 조직은 서독에 다수(多數)의 정보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독의 고급정보원들은 대부분 평범한 직원들이었지만 직장에서 광범위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고 유사시 정보유출을 통해 서독 방위체계에 치명적 손실을 입힐 수도 있었다. 수집한 정보는 소련을 중심으로 바르샤바 조약국들에도 전달·공유됐다.
라이너 룹(공작명 토파스)은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껴 ‘68학생운동’ 폭력시위에도 참가했던 좌파 성향의 인물이었다. 68학생운동은 1968년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사회변혁운동으로 독일에서는 사회주의독일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연좌농성·파업·폭동이 일어났다.
룹은 미국·NATO를 담당하던 슈타지 공작요원에게 포섭돼 동베를린 슈타지 본부에서 서류 사진 찍기, 암호 작성, 무선송신 등 간첩교육을 받았다. 슈타지의 도움으로 브뤼셀에서 학업을 지속하다 브뤼셀 영국 군사고문단에 근무하던 영국 여성을 사귄 후 1972년 결혼식까지 올렸다. 그의 아내도 간첩행위에 가담했는데 NATO 내 여러 곳의 부서를 옮겨가며 기밀을 빼돌렸다. 룹도 1977년부터 NATO에 근무하며 NATO의 군사계획·지휘부 구조·바르샤바 조약국들의 군비증강에 대한 평가 등을 슈타지에 보고했다. 그의 간첩활동은 통일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그는 통일 후 슈타지 비밀문서를 입수한 CIA에 의해 적발돼 1993년 체포,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슈타지가 침투할 수 없는 곳은 없다”
동서독(東西獨) 냉전시대 당시 동독 비밀첩보기관 슈타지는 서독 사회 깊숙이 침투해 정보를 빼내고 흑색선전을 벌여왔다. 통일 후 공개된 슈타지의 공작(工作) 사례와 서독 인사의 간첩행위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혼란에 빠진 동독은 슈타지의 비밀문서를 대거 폐기했다.
현재 독일 슈타지문서관리청이 보관·복원 중인 문서들은 직접적인 피해자를 제외하고는 일반인의 열람이 제한되고 있다. 공작활동이 광범위하고 문서 분량이 많다 보니 슈타지 활동의 전모를 파악하기에 아직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통일 전 서독 사회가 스파이 활동에 제약이 없을 정도로 개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신념이 이유가 됐든, 금전적 동기나 남녀 간 애정이 계기가 됐든 슈타지는 손쉽게 간첩을 서독에 침투시켜 협조자를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서독 사회의 안보의식이 매우 느슨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슈타지 고위 관계자들의 입에서 “슈타지가 침투할 수 없는 곳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84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지도부는 “서독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보다 우리가 서독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크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슈타지의 선전·기만전술에 이용된 언론
통일 전 서독 언론은 여론조작에 이용할 수 있는 유용성 때문에 동독 슈타지의 주요 공작대상이었다. 언론인은 특유의 직업의식으로 인해 동독 정부기관 및 연구소 관계자, 학자 등으로 위장한 슈타지 요원들의 접근이 매우 쉬웠다.
슈타지는 서독 언론을 이용, 서독 사회를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이익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동독에 비판적인 인물들의 권위와 명예를 실추시켜 나갔다. 또 서독의 국제적인 지위를 손상시키기는 한편, 동독을 ‘극우 나치즘과 절연한 사회주의 모범국’으로 정당화시키려 했다. 슈타지는 이를 위해 좌파에서 우파 언론매체에 이르기까지 협조자를 골고루 확보해 활용했다. 조작된 보고나 정보를 서독 언론에 흘리거나 서독의 신문·출판사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인들은 슈타지와의 접촉을 정보교환의 수단으로 삼았으며, 어떤 이들은 슈타지 정보를 자신의 경력을 쌓는 데 이용했다. 슈타지의 거짓정보에 속은 언론인도 상당수에 달했다.
보수 성향의 시사잡지 《퀵(QUICK)》은 1970년대 초반 서독 사민당의 동방(東方)정책이나 동독 공산체제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지속적으로 게재했다. 발행부수가 140만~170만 부에 달할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높아 동독 정권으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슈타지 해외공작총국은 이 잡지의 평판에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사장 겸 편집장인 하인츠 판 노우휘스(Heinz van Nouhuys)의 슈타지 접촉 경력을 폭로하기로 결정했다. 노우휘스는 1954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난테(Nante)’라는 가명(假名)으로 슈타지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 슈타지는 《퀵》의 경쟁지였던 《슈테른》에 노우휘스 관련 비밀자료를 제공했다. 자료에는 과거 노우휘스가 슈타지로부터 받은 공작금 액수와 증거물까지 들어 있었다. 《슈테른》은 슈타지가 자신들의 공작에 이용한, 영향력 있는 대중 언론매체 중 하나였다. 《슈테른》은 1973년 10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서독 정부가 동유럽국가들과 협상할 때마다 《퀵》은 비열한 저널리즘으로 이를 방해해 왔다. 그러나 최근 《퀵》의 편집장인 노우휘스가 ‘난테’라는 가명으로 슈타지를 위해 6년간 20만 마르크를 받고 일한 것이 밝혀졌다.”
서독의 모든 언론이 이 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뤘고 결국 《퀵》은 언론매체로서의 신뢰성에 큰 손상을 입었다.
슈타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설립한 신문사도 있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戰) 반대와 반미(反美)를 주장하는 학생운동이 확산되는 와중에 1967년 5월, 서(西)베를린 독자들을 대상으로 좌파 성향의 《베를린 엑스트라-딘스트》가 창간됐다. 이 신문은 슈타지가 추진해 왔던 ‘서독 내(內) 좌파신문 설립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창간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구고모스는 오랫동안 슈타지 요원과 접촉해 왔다. 이 신문은 슈타지로부터 운영자금은 물론 신문발행 노하우와 취재 자료까지 지원받았다. 언론이라는 보호막 아래 학생들에게 좌경사상을 고취시키고 반(反)정부주의 사상을 옹호했다. 슈타지는 《베를린 엑스트라-딘스트》를 배후에서 조종하며 서독 여론을 장악하려 했다.
독일 제2 공영방송 ZDF는 2004년 7월부터 2년간 35만 페이지 분량의 슈타지 문서를 분석, 슈타지 협조자로 활동한 직원을 적발해 냈다. 통일 직전 동독특파원을 포함, 유명 방송인 2명과 카메라맨 1명이 슈타지 협조자로 활동했음이 드러났다. 슈타지가 관여한 방송보도가 최소 230여 건에 달한 사실도 확인됐다. 방송편집과 직접 관련이 없는 카메라맨은 ZDF 건물 설계도, 방송사 조직과 예산 규모 등을 슈타지에 넘겼다.
종교·학계·노조 등 좌파단체를 적극 활용한 슈타지
동독 정보기관의 입장에서 볼 때 서독 교회는 정부·정당·언론에 비해 비중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독 개신교와 가톨릭은 동독 정권에 골칫거리였다. 서독 종교계는 인도적 지원과 동독 교회와의 협력 등을 이유로 끊임없이 동서독 간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동독 주민들과의 접촉을 시도하면서 서독의 영향력이 동독으로 유입되는 관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슈타지는 서독 종교계의 이런 의도를 차단하고 내부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첩자를 적극 활용했다.
서독 수도 본(Bonn)에서 활동했던 고트프리트 부쉬(Gottfried Busch)는 ‘나무(Baum)’라는 가명으로 40년간 간첩으로 암약하면서 교회 내부정보를 지속적으로 제공했다. 그는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신학공부를 하던 시절 슈타지에 포섭돼 1961년 서독으로 밀파(密派)됐다. 목사라는 신분을 이용, 정치적 저명인사들과 다방면에 걸쳐 접촉, 정보를 수집했다. 그가 슈타지에 보고한 내용은 광범위했다. 중동지역에 파견된 서독 연방정보부 요원들에 대한 내부정보와 군(軍)장성 스캔들에 대한 서독 방첩기관의 조사내용도 들어 있었다. 부쉬는 1994년 간첩활동으로 구속됐다.
올덴부르크 소재 교회에서 청소년 교육전문가로 일하던 젠젠슈미트 목사도 슈타지의 첩자였다. 그는 1964년 동독 튀링겐주(州)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슈타지에 포섭됐다. 1966년 동서독 국경철책을 부수고 서독으로 탈출했는데, 이는 슈타지의 조작극이었다. 그는 튀빙겐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대학 내 분위기와 개신교 학생회 관련 정보 등을 슈타지에 넘겼다. 동독 출신 귀순자들의 동향보고 임무도 맡았다. 통일 전까지 그가 작성한 정보보고서의 분량은 1800페이지에 달했다. 1993년 간첩행위가 적발돼 처벌받았다.
개신교 목사 프랑크 루돌프도 1992년 슈타지 문서가 열람 되는 과정에서 슈타지의 협조자라는 정체가 드러났다. 그는 1963년부터 슈타지 내 교회 담당 부서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겉으로 동독 내 재야인사로 알려졌던 그였지만 실상은 반정부 세미나 계획을 밀고하거나 몰래 서방세계로 도주하려는 사람들을 슈타지에 고발해 왔던 것이다. 1985년 서독으로 넘어와 서독 인권단체들의 내부정보를 입수, 슈타지에 넘겨주고 그 대가로 매월 일정액의 돈을 받아왔다. 그는 1994년 9월 간첩죄로 처벌받았다.
서독 대학가는 예비 간첩 양성하는 최적지, 노동조합은 슈타지의 목표물
서독의 대학들은 슈타지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대학이 슈타지의 중요 침투대상이었던 이유는 예비 간첩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권력의 핵심부와 달리 대학생들은 비교적 쉽게 협조자로 포섭할 수 있었다. 특히 1960년대 후반 좌경 학생운동의 확산은 포섭 대상자들을 다수 확보할 수 있는 호기였다. 당시 작성된 다량의 슈타지 보고서에는 ‘현재 대학 내 자원을 개발하는 데 아주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는 대목이 자주 등장했다.
대학생활 중 포섭된 간첩들은 상당수가 사회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원을 지낸 빌헬름 박사는 대학 재학 중 사회주의대학동맹(SHB) 회원으로 동독 라이프치히로 여행을 갔다가 슈타지에 포섭됐다. 그는 사민당과 산하 청년조직에 관한 정보를 슈타지에 제공했다.
동독에 대한 정치적 호감으로 슈타지에 협력한 경우도 있었다. 사민당 전문위원을 지낸 폴러트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 1975년 슈타지 정보원이 됐다. 그녀는 사회주의대학동맹 간부 자격으로 동독 자유독일청소년단의 초청을 받고 동독을 방문하던 중 포섭됐다.
68세대의 전형으로 정치학 전공자였던 라인하르트 오트 박사도 유사한 경우다. 그는 1973년 슈타지에 포섭돼 총 25만 마르크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활동을 했다. 그는 당시 기민당 간부 비덴코프가 이끌던 경제사회정책연구소 연구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회 전문위원으로 일하면서 슈타지에 고급정보를 팔아넘겼다.
정부·재계·군부 등이 연구비를 지급하며 대학에 위임한 연구 과제들도 슈타지의 관심 대상이었다. 베를린 자유대학·킬대학의 동독 및 동유럽 문제 연구, 괴팅겐대학·브라운슈바이크대학의 자연과학·공학 부문 등이 정탐 대상이었다. 이공계 분야 명문대학으로 유명한 아헨공과대학의 서독 군수기술 개발 연구 동향도 주요 관심거리였다.
노동조합은 슈타지가 협력대상자로 적극 개척했던 ‘목표물’이었다. 서독 노조 내 친(親)동독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과제였다. 여론층에 영향력이 강한 언론노조도 공략대상이었다.
서독 노조에서 암약한 대표 간첩으로는 빌헬름 그로나우(Wilhelm Gronau)를 들 수 있다. 그는 서독 최대 노동조합인 독일노동조합연맹(DGB·회원 수 600만명)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인물이다. 1956년 슈타지의 지령을 받고 1957년 서독으로 건너가 DGB의 직원이 됐다. 이후 DGB 의장인 빌리 리히터(Willy Richter)의 비서이자 통일담당부서 책임자로서 DGB의 동구권 노조 접촉동향, 주의회 선거결과에 대한 사민당 평가 등을 슈타지에 전달했다. 1972년 서독 방첩기관에 적발돼 1년 후 동서독 첩보원 교환 시 동독으로 추방됐다.
DGB의 집행부 부장이었던 귄터 쉐어도 ‘가스톤’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슈타지의 협조자였다. 그는 DGB 내부동향과 제2 공영방송인 ZDF 관련 정보 320건을 제공했다.
대학생활 중 포섭된 간첩들은 상당수가 사회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원을 지낸 빌헬름 박사는 대학 재학 중 사회주의대학동맹(SHB) 회원으로 동독 라이프치히로 여행을 갔다가 슈타지에 포섭됐다. 그는 사민당과 산하 청년조직에 관한 정보를 슈타지에 제공했다.
동독에 대한 정치적 호감으로 슈타지에 협력한 경우도 있었다. 사민당 전문위원을 지낸 폴러트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 1975년 슈타지 정보원이 됐다. 그녀는 사회주의대학동맹 간부 자격으로 동독 자유독일청소년단의 초청을 받고 동독을 방문하던 중 포섭됐다.
68세대의 전형으로 정치학 전공자였던 라인하르트 오트 박사도 유사한 경우다. 그는 1973년 슈타지에 포섭돼 총 25만 마르크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활동을 했다. 그는 당시 기민당 간부 비덴코프가 이끌던 경제사회정책연구소 연구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회 전문위원으로 일하면서 슈타지에 고급정보를 팔아넘겼다.
정부·재계·군부 등이 연구비를 지급하며 대학에 위임한 연구 과제들도 슈타지의 관심 대상이었다. 베를린 자유대학·킬대학의 동독 및 동유럽 문제 연구, 괴팅겐대학·브라운슈바이크대학의 자연과학·공학 부문 등이 정탐 대상이었다. 이공계 분야 명문대학으로 유명한 아헨공과대학의 서독 군수기술 개발 연구 동향도 주요 관심거리였다.
노동조합은 슈타지가 협력대상자로 적극 개척했던 ‘목표물’이었다. 서독 노조 내 친(親)동독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과제였다. 여론층에 영향력이 강한 언론노조도 공략대상이었다.
서독 노조에서 암약한 대표 간첩으로는 빌헬름 그로나우(Wilhelm Gronau)를 들 수 있다. 그는 서독 최대 노동조합인 독일노동조합연맹(DGB·회원 수 600만명)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인물이다. 1956년 슈타지의 지령을 받고 1957년 서독으로 건너가 DGB의 직원이 됐다. 이후 DGB 의장인 빌리 리히터(Willy Richter)의 비서이자 통일담당부서 책임자로서 DGB의 동구권 노조 접촉동향, 주의회 선거결과에 대한 사민당 평가 등을 슈타지에 전달했다. 1972년 서독 방첩기관에 적발돼 1년 후 동서독 첩보원 교환 시 동독으로 추방됐다.
DGB의 집행부 부장이었던 귄터 쉐어도 ‘가스톤’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한 슈타지의 협조자였다. 그는 DGB 내부동향과 제2 공영방송인 ZDF 관련 정보 320건을 제공했다.
슈타지의 최종 목표는 서독의 대공(對共)태세 약화
1960년대 후반 독일 대학생들은 ‘관료적 학제 운영 타파’를 내걸며 학생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세계적으로 확산된 베트남 전쟁 반대 요구, 제3세계 반식민 해방운동 등과 맞물려 학생운동은 정치운동으로 변질됐다. 많은 대학생이 탈권위를 내세우며 사회주의·무정부주의에 탐닉했고, 기존의 정치질서를 수구(守舊)적이라 비판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기성세대를 나치 전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낡은 세대로 인식했다.
1967년 4월 미국 험프리 부통령의 서독 방문과 그해 6월 팔레비 이란 국왕의 서베를린 방문 때 격렬한 항의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팔레비 왕의 서베를린 방문 기간 때 시위에 참가했던 ‘벤노 오네조르크’라는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사망하자 서독대학가에서 대규모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독일 좌파운동이 조직화, 무장투쟁으로 격화됐다. 이른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세계를 뒤흔든 ‘68혁명’이 독일에서 본격화한 것이다.
놀랍게도 2009년 공개된 슈타지 문건에 따르면, 시위 당시 오네조르크에게 총격을 가한 ‘쿠라스’라는 경찰관은 슈타지의 첩자였다. 정확한 사건의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서독의 68혁명이 동독 슈타지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1968년 4월 베트남전 반대시위 도중 좌익 계열인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SDS)의 대표인 두치케가 우익청년의 총탄에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치케는 “제국주의 첨병 나토(NATO)가 서유럽에서 민중해방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한 급진 좌경주의자였다. 그가 중상을 당하면서 서독 내 소요사태는 과격 양상을 보였다. 노동조합은 동맹파업을 선포하고 대학과 공장은 학생·노동자들에 의해 점령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비상사태 발생 시 군병력의 투입을 허용한 비상조치법 제정(1968년 5월)도 좌익세력들의 시위를 촉발한 명분이 됐다.
슈타지는 서독 내 좌경학생들의 소요 확산을 좌파세력의 지지층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1960년대 서독의 학생운동을 이끌던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은 동독의 공산당 청년조직인 자유독일청소년단(FDJ)과 일찍부터 교류·협력해 왔다. 슈타지는 첩자를 독일학생동맹에 침투시켜 내부동향을 보고받고 활동방향을 배후 조종했다. 또한 슈타지는 서독 대학생들의 베트남전 반대 움직임을 미국-서독 관계 이간질에 적극 활용했다. 동독 자유독일청소년단을 통해 베트남전 관련 자료를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에 제공, 반전여론과 반미시위를 조장했다. 슈타지는 1967년 자금지원을 통해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과 유사한 ‘공화국클럽’을 결성, 학생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했다.
슈타지는 미국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고 서독 정부의 도덕성 실추를 노린 공작도 벌였다. 소련 첩보기관 KGB와 공동으로, 미국과 서독이 베트남전에서 대량 학살 등 폭력을 자행한다는 거짓 문건을 작성했다. 슈타지는 이 문건을 러셀위원회(영국 철학자 러셀이 발족한 베트남 反戰위원회)를 통해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이는 서베를린 학생운동이 또다시 과격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60~70년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슈타지의 첩자 포섭작업은 활발히 진행됐다.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슈타지는 “정치적·이념적으로 볼 때 포섭대상자가 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매우 많다”면서 “많은 서독 학생이 정치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며 이념적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평화 내세워 자위적 차원의 군비확충에도 반대
1970년대 말 독일은 핵(核)무기 배치문제로 큰 논란에 휩싸였다. 소련은 1970년대 중반부터 중거리 핵미사일(SS-20)을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배치하며 군비를 증강했다. 나토는 서유럽 안보에 중대한 위협요소로 판단, 동유럽의 핵무기 우위에 대항하기 위해 1979년 12월 이른바 ‘이중결의’를 채택했다. 이중결의란 나토가 소련과 군비축소를 논의하되, 소련이 동유럽에 배치한 핵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으면 서독 등 서유럽 4개국에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계획이다. 미국과 소련은 1981년 11월 제네바에서 중거리 핵무기(INF) 감축 협상을 시작했다. 미국은 소련이 동유럽에 배치한 SS-20 미사일을 철수하면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제의했으나, 소련의 입장이 완강해 진전은 없었다.
이중결의 내용이 알려지자 독일에서는 좌파를 중심으로 핵무기 배치를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983년 4월 전국적으로 70만명이 참가한 시위가 열렸고, 그해 10월에는 울름과 슈투트가르트 간 도로에서 20만명이 인간띠를 만들어 시위를 벌였다. 나치 군국주의의 뼈아픈 경험으로 군비확장에 국민들의 거부감이 컸던 상황이라 ‘평화’를 내세운 좌파의 반핵반전(反核反戰) 주장이 큰 호응을 얻었다.
당시 서독 사회는 자국(自國) 안보를 위한 실질적 조치를 외면한 채 표면상의 평화에만 집착했다. 특히 사민당은 “미국이 군축보다 새 미사일 배치에만 관심을 가져 소련과의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핵무기 배치 거부를 당론(黨論)으로 채택했다. 한편, 바르샤바 조약기구 외무장관들은 1983년 10월 서유럽에 핵무기가 배치되면 군비를 증강하겠다고 결정, 동서진영 간 긴장을 더욱 조장했다. 공산진영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서독 국민은 평화주의에 휩쓸려 전쟁을 우려한 심리적 불안감이 깊어 갔다.
슈타지는 서독에서 일어난 소위 평화운동을 반정부 여론 조성과 군비확충 저지에 역이용했다. 슈타지는 반전을 주장하는 민간단체를 배후 조종했다.
1981년 나토 회원국의 전직 장성 9명이 모여 ‘평화를 지지하는 장군들’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서방진영의 핵군비 강화가 동서진영 간 긴장을 고조시켜 결국 핵전쟁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단체가 직면한 최대 문제점은 활동자금 부족이었다. 회의참석이나 강연·토론 비용, 출판 경비 등을 모두 자비(自費)로 처리해야 했다.
슈타지는 이런 약점을 파고들었다. 슈타지는 이 단체의 주요 회원이었던 카데 함부르크대학 교수에게 접근했다. 카데 교수가 연간 10만 마르크의 금액이면 홍보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요청하자 슈타지는 위장 연구소 명의로 자금을 전달했다. 슈타지는 동독의 입장이 담긴 자료를 제공하며 이 단체의 활동방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단체의 핵심인사이자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녹색당 의원으로 활동했던 바스티안 장군은 당초 동서 양(兩) 진영의 군비확산 책임론을 얘기하다 나중에는 바르샤바 동맹국 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한편, 카데 교수는 슈타지의 협조자로 단체동향을 수시로 보고하고 운영지침을 하달받았다.
서독 내 좌파정당을 활용해 보수정당 공격 유도
동독 호네커 서기장은 나토가 추진하는 이중결의를 무산시키기 위해 1983년 포겔 서독 사민당 원내대표와 슈트라우스 서독 기사당 대표를 만나 핵무기 배치 포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1982년 집권한 서독 기민당의 헬무트 콜(Helmut Kohl·재임기간 1982~1998) 총리는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는 유럽에서 핵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라 주장하며 단호히 대응했다. 콜 총리는 서방진영이 소련에 여러 차례 군비축소를 제의했으나 소련이 동유럽 배치 핵무기를 철수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핵무기 배치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1983년 11월 하원 표결에서 찬성 286표, 반대 255표로 핵무기 배치가 결정됐다. 이 결정에 따라 서독에 퍼싱-Ⅱ(사정거리 1800㎞) 108기와 크루즈미사일(사정거리 2500㎞) 96기, 네덜란드·벨기에·이탈리아에는 크루즈미사일 368기가 각각 배치됐다.
안보를 앞세운 콜 정부의 단호한 결정으로 위기는 극복됐다. 그러나 전쟁 재발에 불안감이 컸던 서독 국민들에게 좌파세력의 ‘전쟁보다는 평화’라는 주장은 쉽게 먹혀들었다. 감상적 평화주의 운동은 서독 국민들의 심리적 무장해제를 유도함으로써 안보의식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서독의 좌파정당들은 동독 공산정권을 대등한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협상에 나섰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사민당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과 공식적으로 관계를 맺고 공동정책 추진을 모색했다. 사회주의통일당과 1985년 비(非)화학무기 지대에 관한 합의, 1986년 중부유럽에서 비핵회랑 지대 구축 합의 등을 도출해 냈다.
1980년대 초 반전·반핵운동 흐름 속에 부상(浮上)한 녹색당도 주요 관심사안인 환경·평화 등의 주제로 동독과 대화를 시작했다. 1983년 10월 녹색당 대표단이 동독 의회를 방문해 환경과 평화, 인권, 안보정책 등을 논의했으며 1985년에는 소속 여성의원단이 동독의회를 방문했다.
슈타지는 새로이 등장한 좌파정당 녹색당을 정치적 목적에 적극 이용하려 했다. 녹색당 부상에 따른 정치권 판도변화를 주시하며 보수정당인 기민당·기사당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당내(黨內) 중진의원들을 포섭,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통일정책을 전파하고 환경·평화운동 관련 지침을 하달하는 공작도 펴나갔다.
친동독 분위기 확산으로 간첩 적발 건수 급감
1967년 4월 미국 험프리 부통령의 서독 방문과 그해 6월 팔레비 이란 국왕의 서베를린 방문 때 격렬한 항의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팔레비 왕의 서베를린 방문 기간 때 시위에 참가했던 ‘벤노 오네조르크’라는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사망하자 서독대학가에서 대규모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독일 좌파운동이 조직화, 무장투쟁으로 격화됐다. 이른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세계를 뒤흔든 ‘68혁명’이 독일에서 본격화한 것이다.
놀랍게도 2009년 공개된 슈타지 문건에 따르면, 시위 당시 오네조르크에게 총격을 가한 ‘쿠라스’라는 경찰관은 슈타지의 첩자였다. 정확한 사건의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서독의 68혁명이 동독 슈타지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1968년 4월 베트남전 반대시위 도중 좌익 계열인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SDS)의 대표인 두치케가 우익청년의 총탄에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치케는 “제국주의 첨병 나토(NATO)가 서유럽에서 민중해방을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한 급진 좌경주의자였다. 그가 중상을 당하면서 서독 내 소요사태는 과격 양상을 보였다. 노동조합은 동맹파업을 선포하고 대학과 공장은 학생·노동자들에 의해 점령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비상사태 발생 시 군병력의 투입을 허용한 비상조치법 제정(1968년 5월)도 좌익세력들의 시위를 촉발한 명분이 됐다.
슈타지는 서독 내 좌경학생들의 소요 확산을 좌파세력의 지지층을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1960년대 서독의 학생운동을 이끌던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은 동독의 공산당 청년조직인 자유독일청소년단(FDJ)과 일찍부터 교류·협력해 왔다. 슈타지는 첩자를 독일학생동맹에 침투시켜 내부동향을 보고받고 활동방향을 배후 조종했다. 또한 슈타지는 서독 대학생들의 베트남전 반대 움직임을 미국-서독 관계 이간질에 적극 활용했다. 동독 자유독일청소년단을 통해 베트남전 관련 자료를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에 제공, 반전여론과 반미시위를 조장했다. 슈타지는 1967년 자금지원을 통해 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과 유사한 ‘공화국클럽’을 결성, 학생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했다.
슈타지는 미국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고 서독 정부의 도덕성 실추를 노린 공작도 벌였다. 소련 첩보기관 KGB와 공동으로, 미국과 서독이 베트남전에서 대량 학살 등 폭력을 자행한다는 거짓 문건을 작성했다. 슈타지는 이 문건을 러셀위원회(영국 철학자 러셀이 발족한 베트남 反戰위원회)를 통해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이는 서베를린 학생운동이 또다시 과격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60~70년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슈타지의 첩자 포섭작업은 활발히 진행됐다.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슈타지는 “정치적·이념적으로 볼 때 포섭대상자가 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매우 많다”면서 “많은 서독 학생이 정치적으로 마음이 열려 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며 이념적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평화 내세워 자위적 차원의 군비확충에도 반대
1970년대 말 독일은 핵(核)무기 배치문제로 큰 논란에 휩싸였다. 소련은 1970년대 중반부터 중거리 핵미사일(SS-20)을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배치하며 군비를 증강했다. 나토는 서유럽 안보에 중대한 위협요소로 판단, 동유럽의 핵무기 우위에 대항하기 위해 1979년 12월 이른바 ‘이중결의’를 채택했다. 이중결의란 나토가 소련과 군비축소를 논의하되, 소련이 동유럽에 배치한 핵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으면 서독 등 서유럽 4개국에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계획이다. 미국과 소련은 1981년 11월 제네바에서 중거리 핵무기(INF) 감축 협상을 시작했다. 미국은 소련이 동유럽에 배치한 SS-20 미사일을 철수하면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제의했으나, 소련의 입장이 완강해 진전은 없었다.
이중결의 내용이 알려지자 독일에서는 좌파를 중심으로 핵무기 배치를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983년 4월 전국적으로 70만명이 참가한 시위가 열렸고, 그해 10월에는 울름과 슈투트가르트 간 도로에서 20만명이 인간띠를 만들어 시위를 벌였다. 나치 군국주의의 뼈아픈 경험으로 군비확장에 국민들의 거부감이 컸던 상황이라 ‘평화’를 내세운 좌파의 반핵반전(反核反戰) 주장이 큰 호응을 얻었다.
당시 서독 사회는 자국(自國) 안보를 위한 실질적 조치를 외면한 채 표면상의 평화에만 집착했다. 특히 사민당은 “미국이 군축보다 새 미사일 배치에만 관심을 가져 소련과의 협상이 진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핵무기 배치 거부를 당론(黨論)으로 채택했다. 한편, 바르샤바 조약기구 외무장관들은 1983년 10월 서유럽에 핵무기가 배치되면 군비를 증강하겠다고 결정, 동서진영 간 긴장을 더욱 조장했다. 공산진영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서독 국민은 평화주의에 휩쓸려 전쟁을 우려한 심리적 불안감이 깊어 갔다.
슈타지는 서독에서 일어난 소위 평화운동을 반정부 여론 조성과 군비확충 저지에 역이용했다. 슈타지는 반전을 주장하는 민간단체를 배후 조종했다.
1981년 나토 회원국의 전직 장성 9명이 모여 ‘평화를 지지하는 장군들’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서방진영의 핵군비 강화가 동서진영 간 긴장을 고조시켜 결국 핵전쟁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단체가 직면한 최대 문제점은 활동자금 부족이었다. 회의참석이나 강연·토론 비용, 출판 경비 등을 모두 자비(自費)로 처리해야 했다.
슈타지는 이런 약점을 파고들었다. 슈타지는 이 단체의 주요 회원이었던 카데 함부르크대학 교수에게 접근했다. 카데 교수가 연간 10만 마르크의 금액이면 홍보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요청하자 슈타지는 위장 연구소 명의로 자금을 전달했다. 슈타지는 동독의 입장이 담긴 자료를 제공하며 이 단체의 활동방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단체의 핵심인사이자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녹색당 의원으로 활동했던 바스티안 장군은 당초 동서 양(兩) 진영의 군비확산 책임론을 얘기하다 나중에는 바르샤바 동맹국 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한편, 카데 교수는 슈타지의 협조자로 단체동향을 수시로 보고하고 운영지침을 하달받았다.
서독 내 좌파정당을 활용해 보수정당 공격 유도
동독 호네커 서기장은 나토가 추진하는 이중결의를 무산시키기 위해 1983년 포겔 서독 사민당 원내대표와 슈트라우스 서독 기사당 대표를 만나 핵무기 배치 포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1982년 집권한 서독 기민당의 헬무트 콜(Helmut Kohl·재임기간 1982~1998) 총리는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는 유럽에서 핵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라 주장하며 단호히 대응했다. 콜 총리는 서방진영이 소련에 여러 차례 군비축소를 제의했으나 소련이 동유럽 배치 핵무기를 철수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핵무기 배치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1983년 11월 하원 표결에서 찬성 286표, 반대 255표로 핵무기 배치가 결정됐다. 이 결정에 따라 서독에 퍼싱-Ⅱ(사정거리 1800㎞) 108기와 크루즈미사일(사정거리 2500㎞) 96기, 네덜란드·벨기에·이탈리아에는 크루즈미사일 368기가 각각 배치됐다.
안보를 앞세운 콜 정부의 단호한 결정으로 위기는 극복됐다. 그러나 전쟁 재발에 불안감이 컸던 서독 국민들에게 좌파세력의 ‘전쟁보다는 평화’라는 주장은 쉽게 먹혀들었다. 감상적 평화주의 운동은 서독 국민들의 심리적 무장해제를 유도함으로써 안보의식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서독의 좌파정당들은 동독 공산정권을 대등한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고 협상에 나섰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사민당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과 공식적으로 관계를 맺고 공동정책 추진을 모색했다. 사회주의통일당과 1985년 비(非)화학무기 지대에 관한 합의, 1986년 중부유럽에서 비핵회랑 지대 구축 합의 등을 도출해 냈다.
1980년대 초 반전·반핵운동 흐름 속에 부상(浮上)한 녹색당도 주요 관심사안인 환경·평화 등의 주제로 동독과 대화를 시작했다. 1983년 10월 녹색당 대표단이 동독 의회를 방문해 환경과 평화, 인권, 안보정책 등을 논의했으며 1985년에는 소속 여성의원단이 동독의회를 방문했다.
슈타지는 새로이 등장한 좌파정당 녹색당을 정치적 목적에 적극 이용하려 했다. 녹색당 부상에 따른 정치권 판도변화를 주시하며 보수정당인 기민당·기사당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당내(黨內) 중진의원들을 포섭,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통일정책을 전파하고 환경·평화운동 관련 지침을 하달하는 공작도 펴나갔다.
친동독 분위기 확산으로 간첩 적발 건수 급감
1970년대 사민당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 사회 전반에 대(對)동독 유화 분위기가 확산됐다. 동독을 적대시하지 않고 국가로 인정하면서 분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방향으로 정부의 정책방침이 변경됐다. 여기에 사회학자였던 페터 루츠(Peter Ludz)의 내재적 동독 접근법도 한몫했다. 루츠 교수는 “사회주의 틀 안에서 동독 체제를 봐야 한다”면서 동독 체제의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풍조는 동독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세력이 확산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 루츠 교수는 내재적 접근법을 학술적으로 교묘히 위장해 비판의 시선을 따돌렸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듯, 그가 슈타지의 끄나풀이었다는 사실이 1990년대 공개된 슈타지 문서에 의해 드러났다.
한편, 동독 친화적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서독 법원의 간첩 사건 판결 건수는 1964년 200건에서 1970년 27건으로 급감했다. 물론 서독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공고화됐다는 믿음과 극단주의 조직이 체제 존립에 당장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극좌세력들이 제도권 전반에 침투, 이데올로기 거점을 확보하고 반정부 여론을 조장하는 것을 방조하는 꼴이었다.
그 결과 서독의 대공(對共)능력이 크게 약화됐다. 1968년 8차 형법 개정으로 대공수사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간첩활동에 대한 처벌 또한 최소한으로 제한됐다. 정치인들도 철저한 반공(反共)을 주장할 경우 긴장완화를 거스르는 반(反)통일세력으로 몰려 가급적 이를 삼갔다.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슈타지의 활동에 대해 일부 언론이 간헐적으로 보도했지만 주목을 끌지 못했다. 간첩사건이 적발되면 긴장완화에 걸림돌이 되고 동독과의 관계를 복잡하게 할 것이라는 시각마저 존재했다. 동독을 현존하는 위험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방범죄수사청(BKA)은 1984년 2월 동독 첩자들의 위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정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동독 첩자들의 공작 활동은 서독 전역에 만연된 안보불감 현상으로 인해 수월하게 된 측면이 있다. 동독의 간첩활동과 이로 인한 국가안보의 위협에 대해 일반 국민들을 비롯해 재계·정부·정당 등 서독 사회 전반에서 심각한 수준의 무지(無知)와 안일한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당시 헌법보호청을 위시한 서독의 안보기관들은 과거 히틀러 치하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민주주의 수호에 필요한 기관이라기보다 자유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는 불신과 거부감을 국민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이를 틈타 동독 정보기관의 대서독 공작활동은 더욱 확대됐다. 동독 공산정권은 사민당 내 좌파세력, 노동조합, 대학생 등을 끈질기게 협력상대로 포섭·활용했다. 거액의 공작금과 인력을 투입해 서독 내 친동독 좌파세력 기반을 늘려나갔던 것이다.
한편, 동독 친화적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서독 법원의 간첩 사건 판결 건수는 1964년 200건에서 1970년 27건으로 급감했다. 물론 서독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공고화됐다는 믿음과 극단주의 조직이 체제 존립에 당장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극좌세력들이 제도권 전반에 침투, 이데올로기 거점을 확보하고 반정부 여론을 조장하는 것을 방조하는 꼴이었다.
그 결과 서독의 대공(對共)능력이 크게 약화됐다. 1968년 8차 형법 개정으로 대공수사가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간첩활동에 대한 처벌 또한 최소한으로 제한됐다. 정치인들도 철저한 반공(反共)을 주장할 경우 긴장완화를 거스르는 반(反)통일세력으로 몰려 가급적 이를 삼갔다.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선 슈타지의 활동에 대해 일부 언론이 간헐적으로 보도했지만 주목을 끌지 못했다. 간첩사건이 적발되면 긴장완화에 걸림돌이 되고 동독과의 관계를 복잡하게 할 것이라는 시각마저 존재했다. 동독을 현존하는 위험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방범죄수사청(BKA)은 1984년 2월 동독 첩자들의 위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정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동독 첩자들의 공작 활동은 서독 전역에 만연된 안보불감 현상으로 인해 수월하게 된 측면이 있다. 동독의 간첩활동과 이로 인한 국가안보의 위협에 대해 일반 국민들을 비롯해 재계·정부·정당 등 서독 사회 전반에서 심각한 수준의 무지(無知)와 안일한 태도가 나타나고 있다.”
당시 헌법보호청을 위시한 서독의 안보기관들은 과거 히틀러 치하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민주주의 수호에 필요한 기관이라기보다 자유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는 불신과 거부감을 국민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이를 틈타 동독 정보기관의 대서독 공작활동은 더욱 확대됐다. 동독 공산정권은 사민당 내 좌파세력, 노동조합, 대학생 등을 끈질기게 협력상대로 포섭·활용했다. 거액의 공작금과 인력을 투입해 서독 내 친동독 좌파세력 기반을 늘려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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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헌법재판소. 방어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핵심기구인 헌법재판소는 좌파정당을 합법적으로 감청, 감시한다. |
걱정되는 대한민국 사회
이처럼 서독은 동독 슈타지와 동독 추종세력들에 의해 한동안 농락당했다. 다행히 자유민주체제 수호에 대한 서독인들의 굳은 의지, 그리고 국내외의 체제 도전을 견뎌낸 튼튼한 안보시스템으로 동독의 공작(工作)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동독 비밀첩보기관 슈타지의 공작 사례와 서독의 안보 부침사(浮沈史)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반미(反美)·종북세력들에 대한 대처방안, 실효성 있는 대북정책, 실현 가능한 한반도 통일방안 등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도록 한다.
동독 비밀첩보기관 슈타지의 공작 사례와 서독의 안보 부침사(浮沈史)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반미(反美)·종북세력들에 대한 대처방안, 실효성 있는 대북정책, 실현 가능한 한반도 통일방안 등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도록 한다.
북한 김정은이 핵(核)·미사일로 계속 도발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는 "대화만이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전쟁은 절대 안 된다" "북한이 미사일 쏘기 전에 외국으로 이민하겠다" "전쟁광 트럼프의 하수 주한미군은 철수하라"는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종북'을 언급하면 냉전적 사고에 사로잡힌 '반동보수 꼴통'으로 손가락질 당한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이념적 전황(戰況)은 놀랍게도 과거 동서독 분단 당시 슈타지가 맹활약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된다. 안보의 보루(堡壘) 국가정보원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글=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참고 기사 : 월간조선 2012년 8·9월호, 독일판 종북(從北)주의 심층연구(上·下), 취재 백승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