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명박정부 시절(2008~2011)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냈고 예술의전당 이사장을 역임했다. 지난 7월에는 대통령 문화체육특별보좌관에 임명됐다. 월간조선 2014년 2월호에 실린 '배우 유인촌' 인터뷰 중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 유인촌 대통령 문화체육특별보좌관이 7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위촉장 수여식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유인촌
⊙ 중앙대 연극영화과 학사·석사.
⊙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 극단 유 대표, 서울문화재단 대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대통령실 문화특별보좌관, 예술의전당 이사장 역임.
⊙ TV드라마 <전원일기> <장녹수> <3김시대> <야망의 세월> 등, 영화 <연산일기>
<김의 전쟁> <불새> <가능한 변화들>, 연극 <오셀로> <햄릿> <문제적 인간 연산>
<홀스또메르> <택시드리벌> 등 출연.
대한민국(大韓民國) 근현대사(近現代史)는 인류문명사(人類文明史)의 압축(壓縮)이다. 불과 100년 남짓한 기간에 중세적(中世的) 사회가 근대를 거쳐 첨단 현대사회로 탈바꿈한 아찔한 변화. 남들은 1000년 이상 걸리는 세월을 우리는 롤러코스터 위를 달리듯 숨가쁘게 뛰어넘었다. 그래서 한 생애(生涯) 안에 다양한 문명 축이 복수(複數)로 존재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인 경우가 많다. 농촌공동체의 생활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데, 일상주변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득 찬 혼돈.
그래서 사람들은 이 혼돈을 조금이나마 정리해 줄 수 있는 이미지를 갈구한다. 농촌에 세워 놓아도 어울리고, 도시 한복판 고층건물 사이에서도 멋지게 보이고, 그러면서도 당당하고 번듯하며 미래지향적으로 보이는 사람. 언제 어디에 갖다 놔도 정체성(正體性)을 잃지 않고 자기 일을 할 것처럼 보이는 인물. 지난 40여 년간, 대중이 유인촌(柳仁村·63)에게 보내준 갈채의 이면에 이러한 심리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인터뷰 약속을 잡은 뒤 그의 주변에 경사(慶事)가 났다. 작년 12월 30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의 동생인 유경촌 테모테오 신부를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한 것이다. 1992년 사제서품을 받은 유 신부는 서울대교구 목5동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가톨릭대 교수, 통합사목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동생은 보좌주교, 형은 PD
-축하할 일이 생겼네요.
“감사합니다. 고위 성직자의 형제가 되었으니 매사에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가톨릭 연극을 제작해야겠다는 사명감도 생기고….”
어쩌면, 이제는 누구의 동생 누구 신부가 아니라, 누구 주교의 형 누구로 소개 비중의 선후(先後)관계가 달라질 수도 있으리라. 유인촌은 그 점도 유쾌하다고 했다. 그의 형제 가운데는 유명인이 또 있다. MBC 드라마 PD로 널리 알려진 유길촌(柳吉村·74)이다.
—집안에서 예술인이 둘이나 나왔네요.
“제가 4남2녀 중 넷째입니다. 위로 형님 두 분, 누님 한 분이 계시죠. 지금은 뉴욕에 사는 둘째 형님(유영촌)도 젊었을 때 음악을 하셨어요. 미8군 무대에서 트럼본을 연주했으니까 취미 수준은 아니었죠. 예술취향은 친탁입니다. 아버님이 그 옛날에 영화제작도 하시고, 사진·그림·서예에까지 두루 능하셨거든요.”
—부친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함자는 외자로 탁(倬) 자를 쓰셨습니다. 전주에서 알아주는 집안이었답니다. 유산을 물려받아 생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술가적 기질은 타고났는데, 그걸 직업으로 가질 수는 없었던 거죠.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시대적 배경도 그렇고. 제가 태어나자마자 솔가(率家)해서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이 무렵부터 가세(家勢)가 기울었던 건 아닌가, 그런 짐작이 들더군요.”
그에게 부친은, 예술의 다방면에 두루두루 능했던 분, 배낭 메고 훌쩍 집을 나서면 두어 달 지나서야 유랑을 마치고 현관문을 들어서던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인생을 바꾼 추수감사절 연극
유인촌이 유년을 보낸 건 그래서 서울 한복판이다. 충정로, 서대문, 아현동을 전전했고 미동초등학교를 다녔다. 4·19 데모도 현장에서 구경했다. 사진작가 고명진, 한국일보 사장을 지낸 장재국(張在國)이 동기동창이다. 그렇다면, 연극과 만난 ‘운명적 순간’은 언제였을까?
“연극을 처음 접한 건 큰형을 통해서죠. 형님이 활동하던 고려대 극회(劇會) 공연을 다 보러 다녔으니까. 그때만 해도, 배우가 되겠다거나 이 길이 내 적성과 맞는다,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직접적 계기는 한성고등학교 2학년 때 찾아왔습니다. 친구 중에 하나가 당시 퇴계로 서울침례교회 신자였는데, 추수감사절 연극을 한다는 겁니다. 아무도 연극을 모른다, 그래도 넌 형이 연극을 했고 방송국 PD이고 하니 뭘 알지 않겠냐, 그러면서 연출과 연기를 맡기더라고요.”
유인촌은 그때의 레퍼토리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제목은 <돌아온 탕아>. 맡았던 배역은 ‘탕아(蕩兒)의 아버지’였다. 흰 물감을 머리에 발라 백발(白髮)을 만들었고, 교회 전등에 마분지로 갓등을 만들어 씌우고 조명효과를 냈다.
“공연 끝나고 관객들의 반응이 열렬했습니다. 의례적인 박수가 아니었어요. 그때 무대 위에서 인사를 하면서 딱 느낌이 온 거죠. ‘바로 이거다. 평생 연극을 해야겠다.’ 그 다음부터는 아예 공부를 접어두고 연극을 한다며 친구들과 배낭을 메고 무전(無錢)여행을 다녔습니다. 명동 국립극장 프로그램이 바뀔 때마다 찾아가서 관극(觀劇)하고.”
명동 국립극장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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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맡았던 연산군에게서도 유인촌은 햄릿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
유인촌은 지금도 명동 국립극장 무대를 수놓던 함현진, 추송웅, 나옥주의 연기를 잊지 못한다. 명동 국립극장. 일제(日帝)시절 명치좌(明治座)로 불리다 광복 후 국립극장으로 쓰였고, 장충동 국립극장 건립비용 마련을 위해 한 금융회사에 팔려 30년간 공연과는 관계없는 용도로 쓰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명동 예술극장으로 환원된 공간. 1970년대 초반까지, 숱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이른바 ‘명동시대’의 중심점 노릇을 하던 극장.
그래서 2009년 재(再)개관 행사장에서 당시 유인촌 장관은 “이곳은 제가 고등학생 때 관객으로 드나들었고, 성인극단 데뷔도 했던 추억의 극장입니다. 1971년 실험극단이 공연한 <오셀로>, 제 배역은 ‘병사3’이었습니다”라고 축사를 하며 관객들과 소통했다.
고3을 그렇게 보냈으니 대학은 낙방. 재수를 해서 원서를 낸 곳이 중앙대 연극영화과다.
“어머니의 첫 반응이 ‘넌 안 돼’였습니다. 큰형은 연극하고 작은 형은 충정로 한옥집 사랑방을 밴드 연습실로 쓰던 차에 셋째 아들마저 이쪽 길로 간다니 기가 막히셨겠죠. 그래도 큰형이 ‘입학금은 내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하라고 하자’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일단 진학에는 성공했습니다. 형님은 제가 연기를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던 거죠.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아니까. 빨리 포기하고 다른 길 찾아가라는 것이 속마음 아니었을지….”
연극 <오셀로>로 데뷔
가족들이 지원하는 등록금은 정말로 ‘단 1회’로 끊어졌고, 결국은 ‘스스로 벌어서’ 학교를 다녔다. 1973년부터 방송을 시작한 것도 ‘자립(自立)’의 방편이었다. 방송활동 이후에는 스케줄이 밀려 복학·휴학을 거듭하다 1980년 2월, 만 9년 만에 학사모를 쓴다.
—기성극단 데뷔가 1971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오셀로>네요.
“1학년 2학기 때였습니다. 오셀로에 이낙훈, 이아고엔 오현경. 그때 실험극장 대표던 김의경(金義卿) 선생 권유로 출연했습니다. 권오일 선생이 주관하시던 극단 성좌의 작품 <돈 환>에도 스태프로 참여했죠. 실험극장은 명문대학 인문학과 출신들이 만든 극단이었고 극단 성좌는 성우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제가 맡은 역할은 전전후(全天候)입니다. 그때만 해도 다들 배우만 하려고 했지 스태프 일에 대한 인식이 크지 않았습니다. 소품도 담당자들이 무대 나가기 직전에 바로 배우들한테 건네줘야 하던 시절입니다. 조명 보조, 무대감독 보조, 매표소 체크, 시키는 일은 좋아서 다 했어요. 비오는 날 이대 앞에서 전단지 뿌리다 우산이 망가져서 비 흠뻑 맞고 몸살도 나고….”
방송 일을 하기 전까지, 유인촌은 그야말로 연극만 하고 살았다. 방송 운(運)이 트인 것은, 그러니까 자립을 실현한 것은 1973년 작 <강남가족> 이후다.
“그땐 방송국마다 전속(專屬)배우를 뽑았잖아요. 입대 직전인데, 제대 후를 생각해 ‘적(籍)’이라도 두자는 심정으로 MBC 신인(新人)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응시자가 많아 여러 반으로 나눠서 면접을 보는데, 하필이면 당시 MBC 드라마 PD로 근무하던 큰형이 제가 들어간 면접실에 앉아 있라고요.”
그때 심사위원은 세 명이었다. 유길촌은 “저 아이는 내 동생인데, 없던 걸로 하겠다”며 유인촌에게 “나가라”고 했다. 다른 두 위원이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왔는데 해 보게라도 해야지”라고 만류했다. 유길촌은 “그러면 나는 심사 못하겠다”라며 자리를 떴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형제는 10년이 흐른 후에야 작품을 함께 했다. 이미숙·이혜숙씨가 출연하고 유인촌이 숙종(肅宗)으로 분했던 <장희빈(張禧嬪)>이다.
“처음 6개월간은 엑스트라였죠. <수사반장>의 웨이터, 사극(史劇)의 포졸(捕卒). 1974년 1월 1일부터 방영한 김수현 작(作) 표재순 연출의 <강남가족>에서 집안의 막내인 고등학교 야구선수로 출연한 후에 갑자기 얼굴과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어렵지만 따뜻하게 살아가는’ 은퇴한 경찰관 가족의 이야기인 <강남가족>의 주요 출연자는 최불암, 김혜자, 홍세미, 송재호 등이었다. 선배들은 첫 촬영에서 열 번 이상 NG를 내는 유인촌을 격려해 줬다.
<강남가족> 때문에 입대를 연기했는데 더 큰 기회가 왔다. 1974년 5월 27일부터 방송한 곽일로 작 박철 연출의 <복녀>. 자식을 낳지 못한 후궁(後宮)들이 유폐되어 있던 정업원(淨業院) 이야기를 다룬 사극으로, 이대 성악과 출신인 신인 지자혜가 주연, 최불암, 김무생 등이 함께 출연했다.
5년간 현대무용 수련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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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유인촌은 배우에게 필요한 몸을 만들기 위해 현대무용을 열심히 하기도 했다. |
“제 첫 주연작이지만 아쉬움이 많은 작품입니다. 시청률이 영 아니었습니다. 남녀 주인공을 다 신인에게 준 건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이었는데…. 작품 끝나고 바로 입대했습니다. ‘난 배우로 끝났다. 깨끗이 포기하자.’ 저 때문에 작품이 망해 가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어쨌거나 끝까지 방송은 해야 하고….
그때 얻은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역할도 본인이 소화할 수 없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신나고 제 가슴을 설레게 하던 촬영장이, 무대가, 한순간에 지옥으로 돌변하던 경험.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더라니까요.”
군(軍) 생활은 논산에서만 3년을 채웠다. 자충(自充) 케이스로 훈련소에 남아 연무대 FM 방송국에서 정훈(政訓)병사로 일했다. 새벽 기상나팔 울릴 때부터 점호 후 ‘취침 전 20분’에 이르기까지, 엔지니어 병사와 둘이서 하루 다섯 차례 모든 프로그램을 다 쓰고 연출하는 ‘현장학습’. 제대는 1977년 12월이었다. 방송 일로 바쁜 가운데서도 그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배우들의 ‘표현수단’인 신체를 단련하는 데 매진한다.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에도 새벽 5시면 일어나 명인(名人)들을 찾아다녔다. 언젠가 연기에 필요할지 모르기에 승마, 스킨스쿠버, 현대무용 등을 익히는 구도자(求道者) 같은 생활. 현대무용은 5년간 수련하며 김복희·김화숙 무용단 단원 자격으로, 대한민국 무용제(舞踊祭)와 해외공연에 참가할 정도로 열성을 쏟기도 했다. 혹시 이러한 ‘워커홀릭(workaholic)’ 같은 성향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성향과 서로 맞아떨어진 건 아닐까?
매년 1편 이상 연극 하기로 결심
둘째, 적어도 매년 한 편 이상은 반드시 연극을 한다. 실제로 1980년부터 지금까지, 공직에 나가 있던 8년을 제외하고 유인촌은 매년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유인촌의 무대 이력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에비타> <사운드 오브 뮤직> <빠담빠담빠담>부터 <말괄량이 길들이기> <햄릿> <한여름밤의 꿈> 같은 셰익스피어, <노틀담의 꼽추> <느릅나무 밑의 욕망> <파우스트> <홀스또메르> 같은 고전에 이르기까지 장르와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극단 현대극장과 서울예술단, 자유 등에서 작업하다 좀 더 본격적으로 연극을 하기 위해 아예 1995년 극단 ‘유’를 창단하고 청담동 자택을 소극장으로 개축한 결단. TV 드라마로 한창 인기를 얻던 시절의 이야기다.
2004년에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의 폐교를 개조, 야외극장인 달빛극장을 만들기도 했다. 연극판에서 활동하다가도 영화와 TV 드라마에 캐스팅돼 인정을 받으면 미련 없이 연극을 접는 풍토를 거슬러, 그는 보란 듯이 연극무대로 회귀(回歸)했다. 그리고 방송으로 번 돈을 아낌없이 연극에 쏟아부었다.
—연극을 계속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저한텐 연극무대가 가장 잘 맞아요. 카메라 앞에서보단 무대 위에서 더 자유롭고 공간도 넓어 보이고. 연극은 하루 공연으로 모든 이야기가 완결되어야 하잖아요.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그것들을 강조하는 고도의 압축(壓縮)이 필요한 작업. 또 배우와 연출자 사이의, 그리고 배우들 사이의 철저한 사전 약속, 이 두 요소가 교차하는 가운데서 느끼는 해방감, 성취감. 그건 연극무대 위가 아니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정입니다. 이거, 뭐라고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되네. 하여튼, 이 모든 걸 넘어서는 어떤 무언가가 무대 위에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배역은 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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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호암아트홀 개관 기념 공연 ‘햄릿’ 역을 맡아 열연하는 유인촌. 허리에 차고 있는 벨트는 연극배우 김동원 선생이 물려준 것이다. |
—<불새> <전원일기> <아베의 가족> <상처> <야망의 세월> 등 얼핏 떠오르는 드라마만 해도 하나둘이 아닌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연극을 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저뿐만 아니고 모든 분이 ‘연극이라는 첫 정(情)’을 못 잊은 거지요. 드라마 PD들이 엄청나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분들도 출발점은 다 연극이었으니까, 제 공연시간 맞춰서 제 출연장면 녹화를 제일 먼저 촬영하고, 대본작업 할 때도 알아서 조치해 주고…. 다른 출연자들도 제가 ‘연극’하는 걸 확실하게 밀어 주셨어요. 그런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매해 연극무대에 선다는 건 아예 불가능했을 겁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배역은 어떤 겁니까.
“햄릿이죠. 전 <햄릿>만 다섯 번을 했습니다. 1981년에, 지금은 없어진 이대 앞 ‘백인소극장’에서 표재순 연출로. 객석이 100석뿐이라 극장 이름도 그렇게 지었는데, 오필리아 역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막달라마리아 언더스터디였던 김은희. 극장이 워낙 작으니까 세트도 없애고 의상도 일상복 입고 나가고, 그야말로 맨몸으로 관객들과 마주했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1985년엔 호암아트홀 개관기념 공연으로 이해랑 연출의 <햄릿>을 공연했고 1993년엔 극단 자유 김정옥 연출의 <햄릿>. 1995년에 동숭아트센터에서 이윤택 작/연출의 <문제적 인간 연산>에서 연산군 역을 맡았는데, 저는 ‘연산군이 바로 햄릿’이라고 느꼈습니다. 1999년에 제가 창단한 극단 유시어터에서 <햄릿 1999>를 또 했으니까, 저랑 햄릿은 참 여러 번 만났죠.”
햄릿을 공연할 때마다 유인촌은 해석을 달리해서 인물을 창조했다. 지식인의 고뇌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치밀하게 사전모의를 하는 행동파로 그려 보기도 하고, 어머니를 연모하는 한편으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숙부’와 연적(戀敵)으로 맞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화신(化身)으로 그리기도 했다. 극단 자유에서 공연할 때는 한복 입고 나가서 전통가락에 맞춰 춤도 추었다. 그에게는 아직도 <햄릿>을 통해 해 보고 싶은 일들이 많다.
“2005년 <햄릿> 기획을 하고 이메일 주소도 햄릿으로 바꾸었는데, 결국 공연은 하지 못했습니다. 왕비와 오필리아를 1인2역으로 놓고 첫 장면에 나오는 ‘아버지의 유령’이 햄릿 몸 안으로 접신(接神)하는 구도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역할을 연령대를 넘어서 캐스팅하는 것이 가능하겠다 싶었는데….”
<햄릿>은 그의 개인사와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 1993년, <햄릿>을 공연하느라 아버지의 임종(臨終)은커녕 빈소(殯所)도 지키지 못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공연할 때 한 신부가 그를 수소문해 전해 준 아버지의 임종 소식. 하지만 일정에 따라 다음 공연 장소인 독일로 향해야 했다. ‘햄릿’ 없이 <햄릿>을 공연하기란 불가능한 일 아닌가. 일단 무대에 선 이상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대를 떠날 수 없는 것이 배우의 숙명이다.
<햄릿> 공연하느라 아버지 臨終도 못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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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은 1993년 ‘극단 자유’와 함께 공연할 때는 한복을 입고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햄릿’을 연기하기도 했다. |
“집에서는 임종소식을 알리지 말라고 그랬답니다. 공연에 지장을 주면 안된다고…. 그런데 이번에 보좌주교가 된 제 동생 유경촌 신부(神父)가 독일 유학 중이었고 누님도 독일에 거주하고 계셨어요. 다들 독일 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이 둘이 이미 서울로 귀국한 겁니다. ‘공항에 아무도 안 나오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알려주는 것이 맞다’, 그래서 동생이 아는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다더군요.
잘 아시다시피 <햄릿> 첫 장면이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과 만나는 것이잖아요. 그때 그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현실과 연극이 막 뒤섞이고,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침착하게 저는 연기를 하고, 옆에서 동료 배우들은 막 흐느끼고…. 귀국한 건 장례도 삼우제(三虞祭)도 다 끝난 뒤였습니다. 바로 묘소로 찾아뵙고 귀국인사를 드렸지요.”
—셰익스피어가 미웠겠네요.
“자식 노릇도 못하고…. 잠깐 연극에 회의가 들었던 건 사실이죠. 그래도 저는 셰익스피어를 존경합니다. 배우들의 훈련을 위해서는 셰익스피어만한 교과서가 없어요. 미디어와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으면 연기력이 부족해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셰익스피어는 다릅니다. 훈련 없이 셰익스피어를 연기할 수가 없습니다.”
<파우스트> 준비하다 他界한 최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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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파우스트〉. 무대연출가 최연호 선생이 공연 준비 중 세상을 떠났다. |
—가슴 아픈 기억이 하나 더 있다고 들었습니다.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한 <파우스트>(1996)입니다. 2월 비수기에 대작(大作)을 공연한다니까 처음에는 다들 정신 나갔다고 그러더라고요. 공연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스태프 사이에 이견(異見)이 생겨서 기존의 제작진을 교체해야 했습니다. 무대미술을 최연호 선생님께 맡겼지요.
상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해서 그야말로 촌음(寸陰)을 다투며 일했습니다. 그런데 공연 전날 세트를 세우고 보니 무대 마룻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더군요. 제작비 더 달라는 말을 못하고 기존 예산만 가지고 최 선생님이 최선을 다하셨던 겁니다. 제가 ‘그래도 완벽한 상태로 관객과 만나고 싶다. 추가경비를 부담하겠다’고 제안했지요. 그래서 다 만들어 놓은 세트를 헐고 마루 덧판 새로 사다가 그림 그려서 쭉 깔고. 말하자면 기초공사부터 다시 해서 밤새 세트를 거의 새로 세웠습니다. 그 작업 마치고 최 선생님이 공연 전날 귀가하셨는데, 그 길로 영면(永眠)하셨습니다. <파우스트>를 유작(遺作)으로 남기고….
여의도 성모병원에 빈소가 차려졌는데 대학로 연극인장(演劇人葬) 조사(弔辭)를 제가 읽었습니다. 여기에서 괴테가 쓴 <파우스트> 서문을 인용했는데, 공연 때 자주 삭제되는 부분이죠. 극단장, 작가, 배우들이 모여서 ‘너 재미있는 것 하나 써 봐’, ‘이젠 사람 모으는 작품 말고 철학, 문학이 깃든 명작을 쓸래요’, ‘전 감동을 주는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러고 티격태격하다가 단장이 하는 말. ‘이젠 극장의 모든 걸 이용해서 연극을 하자. 조명이 모자라면 달도 별도 해도 가져다 쓰고….’
그 이후로는 <파우스트>를 할 때마다 이 장면을 프롤로그처럼 맨 앞에 집어넣습니다. 1996년 공연이 전회전석(全回全席) 매진이었는데, 최연호 선생님의 영령(英靈)이 도와주신 결과라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봉평 달빛극장과 유시어터
—봉평 달빛극장은 그래서 만든 건가요.
“도시 극장이 아닌 다른 환경에서 공연을 해 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요. 야외 공연장, 실내 공연장을 꾸며 놓았는데 강원도는 겨울 날씨가 추워서 겨울공연은 좀…. 5월부터 10월 말까지가 피크죠. 인공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한, 그러니까 조명도 거의 쓰지 않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지 않고, 연극의 원형(原型), 초심(初心)으로 돌아간 연극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대낮에 노천(露天)에서도 공연을 해 보고, 듬성듬성한 천장 사이로 별도 보이고, 배우들이 거기서 숙식도 함께 하고. 최소한 5년 정도 걸릴 것을 예상하고, 벽돌 한 장부터 쌓는다는 각오로 포크레인, 지게차 면허를 이미 취득해 놓았습니다.”
유인촌은 지난 1999년 청담동에 유시어터를 개관했다. 영동고등학교 뒤편, 강남의 금싸라기 땅에 자리한, 순수 연극을 위한 소극장이다. 이 건물을 다른 용도로 활용하면 개인 유인촌의 경제사정은 지금보다 확실히 나아진다. 그 사정을 모르지 않기에, 연극인들은 이 극장을 15년째 유지하고 있는 그의 진정을 높이 평가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은 위치상으로 카페나 클럽을 하면 딱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은 여기를 임대 주고 극장은 다른 곳에다 하라며 말렸는데, 강남에서 강북 가기 힘들고 또 예술의전당도 가기 귀찮은, 그러니까 극장 근처에 사시는 동네 분들이 마실 가듯 편안하게 오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열었지요. 동네 분들이 생각만큼 잘 안 와 주셔서 그 점은 예측이 조금 빗나갔습니다.”
—어떤 애로사항이 있던가요.
“좌석이 200석인데, 전회전석 매진이 되더라도 적자(赤字)를 메우기가 불가능합니다. 구조적으로, 티켓을 팔아서 그 수입만으로 극장을 관리하고 운영하기가 불가능한 거죠. 제가 한창 활동할 때는 기업협찬도 받고, 광고도 찍어 적자를 메웠습니다. ‘디딤회’라고, 극단 유 초창기에 결성된, 주부들로 구성된 후원회가 있어서 모든 프로그램의 첫날 첫 공연 표는 이분들이 다 소화해 주시는데도 사정이 이렇습니다. 개인이 해서는 안 될 일을 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후회하시나요.
“아뇨. 빠르든 늦든, 어떻게든 극장은 지었을 겁니다. 자기 극장을 가지고 하고 싶은 작품을 공연한다는 건 모든 배우들의 꿈이니까요. 다만, 조금 더 기다렸다가 조금 더 크게 만들었어야 했다는 후회는 있습니다.
처음엔 극장 객석을 늘리면 그만큼 유지비가 더 들어간다고 판단했거든요. 그래서 소박하게, 소극장으로 가자고 결정한 겁니다. 좌석수가 500~700석은 되어야 표를 팔아서 극장을 유지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가 가능한 건데, 그걸 간과한 거죠. 공연장 규모가 작다고 운영비가 덜 드는 건 아니거든요.
예컨대, 이런 겁니다. 개관 당시 직원이 13명이었는데, 극장 규모가 커져도 관리인력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물론, 극장 규모가 커지면 뮤지컬이라든가, 아무래도 흥행성 위주로 작품을 선정해야 했을 테니 다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는 거지만….”
유인촌연극학교도 생각 중
유인촌은 이 공간의 미래지향적 활용을 두고 고민이 많다. 핵심은, ‘공연장’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살릴 수 있는 데까지 살리는 것이다. 한때 영국문화원과 잠깐 이야기가 되었던, 폴 메카트니가 설립한 예술학교의 분교(分校) 혹은 제휴기관을 설립하거나 아예 ‘유인촌 연극학교’를 만드는 방안도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다.
나이 서른에 시작, 22년을 출연한 <전원일기>의 김 회장네 둘째 아들로 국민배우 타이틀을 얻은 유인촌은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를 시작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대통령실 문화특별보좌관, 예술의전당 이사장 등을 지냈다.
—8년간의 공직생활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배우로서는 마이너스. 큰 경험이고 많은 공부가 되는 건 사실인데, 다른 예술인들이 한다고 하면 말릴 겁니다. 물론, ‘너는 다 해 먹고 남들은 못하게 막느냐’고 하는 소리가 바로 나오겠지만…. 인생의 방향을 그 길로 바꾸겠다면 그런 경우는 오케이(OK).
저는 공직생활 내내 누구에게 잘 보이거나, 타협하고 양보하지 않았기에 스스로에게 떳떳합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오해도 받았고 어려움도 적지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서 큰 불만은 없습니다.”
백성희장민호극장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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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인 2011년 4월 경기도 의왕시 서울소년원 대강당에서 원생들을 대상으로 연극 수업을 하는 유인촌. |
—8년간의 공직생활 가운데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겁니까.
“소프트웨어로는 음원(音源)저작권 정리, 하드웨어로는 올림픽홀 건립입니다. 당시 인순이, 송대관씨 등이 예술의전당 대관신청을 했는데 극장 측에서 다 거절했죠. 이 일이 막 신문에 실리고 방송에 나오고….
그래서 올림픽공원 내 시설을 리모델링해서 공연장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극장에는 그에 걸맞은 용도가 있잖아요? 음향효과 같은 기능적인 측면부터 주요 관객층이랄까 뭐 여러 가지. 그래서 올림픽홀 극장을 대중가요 전용극장으로 용도를 정해 놓고 로비에 ‘명예의전당’을 설치했습니다. 원로 가수들부터 오늘날 대중음악까지 그 역사를 전시하는 공간입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관객들이 다 일어서서 맘 놓고 뛰어놀 수 있도록 좌석도 가변(可變)좌석으로 만들었습니다.”
—박물관도 많이 만들었죠.
“국립박물관 입구에 한글박물관을 만들었고 광화문 한복판 문화체육부 자리를 한국근현대사 박물관으로 만들었죠. 세계 최빈국(最貧國)이 기적적인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대한민국 근현대사야말로 우리가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업적 아닙니까.
경복궁 옆 기무사 터를 미술관으로 만들고 서울역 뒤, 서부역 앞 기무사 수송부대 자리를 백성희장민호극장으로 개조한 것도 기억에 남는 일입니다.”
—저작권법과 관련해서는 가수들이 가장 혜택을 많이 본 건가요.
“1990년대까지, 예전에 했던 번역극들은 다 원작자에게 알리지도 않고, 좋은 작품이 있다고 하면 그냥 우리끼리 연습해서 막 올리는 거였습니다.
제가 1980년에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빌라도 역을 맡아 공연했는데, 사실 영국 원작자에겐 알리지도 않고 우리끼리 진행한 공연입니다. 그때는 저작권 개념이 없을 땝니다. 라이선스 작품료를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지 몰라서 못 주고 없어서도 못 주던 시절이죠. 이 공연을 방송국에서 연말 특집으로 틀어 주기로 하고 녹화를 뜨고 예고방송까지 다 나갔는데, 영국대사관에서 ‘공연까지는 몰라도 방송은 정말 곤란하다’며 항의를 해서 결국 방송은 못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어렴풋하게나마 ‘저작권’을 의식했어요.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로구나.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렵겠구나.’
1990년대 초에 방송연기자 노동조합장을 할 때도 핵심이슈는 ‘저작권’이었습니다. 아마 가수들 입장에서는 저작권 정비한 덕을 많이 봤을 겁니다.”
—반발은 없었나요.
“장관 취임 초기만 해도 우리나라는 국제적인 ‘저작권 우선감시 대상국’이었어요.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는 마음에 법 제정 노력을 시작했는데, ‘우리가 해외에 줘야 하는 돈이 받아야 할 돈보다 엄청나게 많은, 평생 밑지는 장사다’라는 식의 공격이 사방에서 끊이질 않았습니다.
문화콘텐츠는, 영화든 드라마든 음악이든 돈 내고 사서 쓴다는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입니다. 그래서 양보 안 하고 소신대로 법을 개정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해외에 주는 돈보다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더 많을 겁니다. 싸이를 보세요. 이제는 우리도 문화수출국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노래방에서 노래하는 것까지 전국에서 집계가 됩니다. 백화점에서 음악 트는 것도 다 돈 내고, 히트곡 한 곡이면 평생이 보장됩니다. 창작의욕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겁니다. 재능들도 몰리고, 선순환(善循環) 구조가 마련되는 거죠.”
22년간 ‘양촌리 김회장댁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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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촌은 MBC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김회장집 둘째 아들로 인기를 얻었다. |
—그때 그렇게 밀어붙인 이유가 있었나요.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가 열리면 제조업만으로 먹고사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콘텐츠, 문화, 예술, 음식, 패션, 미디어…, 이런 걸 팔아야지요. 저한테는 영국이 모델입니다. 영국이 ‘창조경제’라는 말을 유행시켰죠. SM, JYP, YG 같은 데는 정말 큰일 하는 겁니다.”
대중들은 그를 아직도 <전원일기>에 나오는 양촌리 김회장댁 둘째 아들로 기억한다. ‘고정적 이미지’가 있다는 건 배우에게 오히려 마이너스가 아닐까?
“그만큼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인데, 그걸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곤란하죠. 제가 <전원일기>를 서른 살에 시작해서 22년간 매달렸습니다.
일각에서는 <전원일기>에 ‘전원(田園)’이 없다, 우리나라 농촌의 현실을 도외시한 작품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없지 않았는데, 만약 이 드라마가 현실에 밀착해서 흘러갔더라면 이렇게까지 오래 방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작진, 출연진 모두가 ‘가족을 해체하면 안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방송한 작품이죠. 인간성 회복, 휴머니티의 추구가 <전원일기>의 모토였습니다.”
<전원일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100회 특집으로 방영한 김정수 극본의‘흙바람’이다. 장남인 형은 대학도 나오고 면(面)서기로 근무하는데, 왜 나는 대학 공부도 안 시키고 농사만 짓게 하느냐, 술 먹고 아버지 김회장(최불암 분)에게 대들고 끝끝내 분가(分家)해서 나가는 이야기다. 극중에서 ‘둘째’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대든 ‘역사적인(?)’ 에피소드다.
“1회 부제(副題)가 ‘박수칠 때 떠나라’였습니다. 돌아가신 차범석 선생께서 대본을 쓰셨는데, 제가 아버지한테 씨름에서 일부러 져 드리고 벌칙으로 아버지를 업고 나서 한 독백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가벼우신 줄 몰랐다’는 대사죠.”
정주영, <전원일기> 엑스트라 출연 희망
대중들이 기억하는 이미지가 하나 더 있다.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서 비롯한 ‘이명박(李明博)’의 이미지다.
“정주영(鄭周永) 회장께서 <전원일기> 팬이셔서 ‘지게 지고 논두렁 저 멀리 지나가는 엑스트라로 한 번 출연시켜 달라’고 농반진반으로 말씀하시고 그랬습니다. 저희 팀을 다 초대해서 현대 임직원들과 배구경기도 하고 고기도 굽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그때 처음 만났죠.”
—요즈음도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나시나요.
“그럼요. 같이 일했던 사람끼리 이런 저런 모임이 많으니까.”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주로 하십니까.
“저랑은 공연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어떤 작품이 요새 평이 좋다, 뭘 같이 보러 가면 좋겠느냐.”
알려져 있다시피, 1990년 KBS가 방영한 <야망의 계절>은 당시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던 이명박을 모델로 하여 만든 드라마로 알려져 있다.
“그때 MB가 현대건설 회장이었는데, <야망의 계절>에 나오는 해외건설 공사 에피소드를 말레이시아에 있던 현대건설 현장에서 촬영했습니다. MB가 다른 곳으로 출장갔다가 말레이시아 현장에 들렀고, 같은 비행기로 귀국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시베리아 천연가스를 파이프로 연결해서 우리나라까지 끌고 오고 싶다며 구체적인 플랜을 이야기하는데, ‘이분은 꿈이 많은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MB, “욕먹더라도 할 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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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9일 문화예술인들과의 ‘차 한 잔의 만남’ 행사장에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와 함께 들어서는 유인촌. 그는 이명박 정권 시절 3년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
—같이 일해 보니 어떤 분이던가요.
“아랫사람한테 일을 맡기면 끝까지 믿어 주고 밀어 주는 분입니다. 제가 장관 재임 중에 박물관을 상대적으로 많이 세울 수 있었던 것도 MB의 이 같은 일처리 스타일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이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하실 때 버스공영화 노선개편 문제 때문에 난리가 나고, 매일 데모대가 시청에 몰려와서 밖에도 못 나가고 시장실에서 도시락 먹으며 일하던 때였습니다. 제가 ‘일을 자꾸 벌여서 욕먹지 말고 조금 속도를 조절하면서 가면 어떠냐, 이미지 관리도 하면서….’ 그랬더니, 이분이 숟갈을 놓고 정색을 하며 말씀하시더군요. ‘욕먹더라도 할 건 하자’고. MB에 대해 인물평을 덧붙이자면, ‘따뜻한 사람, 일 처리의 우선순위를 아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장관 재임 시 ‘문화계 좌파논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잖습니까.
“예술을 통해 평등(平等)과 민주주의(民主主義)를 말하는 건 나쁘지 않죠. 하지만,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예술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게끔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없지 않더군요.
예술가는, 결국 자기 작품으로 대중들과 만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치를 너무 앞세우면 아무래도 예술적 완성도는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또 하나, 그런 분들이 과연 ‘평등’과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 뜻이 같지 않으면 상대방을 매도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들으려 하지 않으면서 정작 ‘소통’을 이야기하는 건 모순 아닌지요.”
아들도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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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4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유시어터 지하 연습실에서 늙은 말 홀스또메르로 扮한 유인촌이 연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연극배우로 복귀했다. |
배우와 극장장과 교육자와 예술행정가를 모두 거친 사람은 흔하지 않다. 이건 그야말로 예술의 전방위를 다 넘나든 삶이 아닌가. 그래서 그럴까, 유인촌은 본인이 택한 ‘후천적(後天的) 가족’ 중에도 예술가가 둘이나 있다. 1984년, 형수의 중매로 만나 6개월 만에 결혼한 아내가 성악가 강혜정이다. 연극 <파우스트>는 장대한 원작의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 연극과 오페라로 꾸민 작품인데, 여기서 오페라, 성악 쪽을 담당한 사람이 강혜정이다. 두 아들이 4살, 7살이던 시절, 유인촌은 아내의 ‘이탈리아 3년 유학’을 뒷바라지했다. 이 일로 유인촌은 주변의 남성들에게 ‘다른 남자들 처지도 생각해 봐라.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장모에게 아이들을 맡겼지만 휴일엔 아이들을 촬영장에 데리고 다녔다. 차남은 회계학을 공부하지만, 장남 대식(大植)은 연극을 한다. 양정웅이 주재하는 극단 여행자의 다음 프로젝트 <성(性) 역할을 바꾼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 역할이 청년배우 유대식의 배역이다.
돈키호테의 獨白이 인생의 모토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와서 ‘연극을 하겠다’고 선언하더라고요. 안 시킬 거면 아예 어렸을 때부터 극장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는데…. 이게 막는다고 막아지는 일도 아니고. 아들이 제가 택한 일을 평생의 업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두렵습니다.”
—아들이 어떤 배우가 되기를 원합니까.
“백성희(白星姬) 선생이나 박정자(朴正子) 선배님 같은 배우, 기본에 충실하고, 무엇을 해도 자신의 버팀목이랄까 그릇을 잘 유지하는 배우, 중요한 것들을 절대로 허투루 하지 않고 소중히 다루는 사람. 사실은 저도 그런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인터뷰 말미, 유인촌은 세르반테스의 풍자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독백을 낭송했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이 대사가 자신의 인생모토라고 했다. 미소를 가득 머금은 그의 얼굴은, 예순이 넘었어도 여전히 청년처럼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