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된 이후 30년 째 작품 활동을 이어온 시인 조항록이 여섯 번째 시집을 냈다. 조항록 시인은 《지나가나 슬픔》, 《근황》, 《거룩한 그물》, 《여기 아닌 곳》,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등의 시집을 낸 바 있다.

이번 시집은 총 62편의 시가 3부에 나뉘어 담겼다. 마지막엔 황치복 문학평론가의 해설도 포함돼 있다. 1부는 ‘통속과 순정’, 2부는 ‘흉터와 흔적’, 3부는 ‘잠과 환영’이다. 각 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 조항록은 이번 시집의 서두,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과 글에는 시제가 있다.

삶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나의 삶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삶의 시제가 뒤엉킬 때마다

나는 표정을 지우고

나는 가끔 허공에

시를,

썼다.(/ 쓴다./ 쓸 것이다.)

시인 조항록의 시상(詩想)은 그리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밥 차리는 상을 책상으로 쓰던 시절의 그 밥(책)상, 뙤약볕에 서글프게 우는 매미, 앞발을 핥다가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길 고양이.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그때그때 마주치는 것들과 그때마다 드는 상념(想念)들이 담겼다. 광활한 대자연이나 밤하늘의 별이 아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나 사과의 썩은 부분과 같은 것들에서 생각에 잠긴다.

조항록의 시는 어려워 보이지만 학예(學藝)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시가 아니다. 그는 삶이 마치 서사처럼 형식이 정해진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시제(時制)에도 구애받길 거부한다.

무심코 지나친,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일상의 순간들을 꺼내며 그 한순간 한순간이 퇴적되어 인생을 이룬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시를 이렇게 소개한다.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기승전결은 아닐 것이라고, 단 한순간의 분명한 사실과 단 한 줌의 틀림없는 감정, 다만 그것들의 퇴적이 인생의 본색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앞뒤 없는 하룻밤의 꿈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허공의 심상을 가만히 응시한다.”

황치복 문학평론가는 그의 이번 시집을 “시란 정동의 생성이나 이미지의 창출이라기보다는 시적 향유의 향연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했다.

1992년 《시문학》에 등단한 박제영 시인은 이 시집을 본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삶은 결코 기승전결이 논리 정연하게 서술되는 서사가 아니라는 자신의 고백을 증명해 보이면서 개별적이고 공시적인 사건(사실)들을 보편적이고 통시적인 개념(진실)으로 묶어버리는 식자(識者·학식 있는 사람)들과 식자연(識者然·학식 있는 척)하는 자들을 향해 ‘사기 치지 말라’며 멋지게 잽(jab·권투에서 가볍게 주먹을 날리는 기술)을 날리기까지 한다.”

글=김광주 월간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