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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윤정희 별세... 여배우 트로이카 이끌었던 톱 여배우

윤정희-백건우 부부 <월간조선> 인간탐험 다시보기

[편집자주] 알츠하이머를 투병중이던 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가 20일 별세했다. 향년 79세. 윤정희는 1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 딸 백진희씨와 함께 파리에서 거주해 왔다. 2010년부터 알츠하이머 투병을 해 온 윤정희는 최근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1944년생인 고인은 1967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였다. 이 시기 동료 배우인 문희·남정임과 함께 한국영화계 여성 배우 트로이카로 크게 주목 받았다. '강명화' '안개' '천하장사 임꺽정' '일본인' '장군의 수염' '독짓는 늙은이' '야행' 해변의 정사' '분레기' '첫경험' '석화촌' 등 33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대종상·청룡영화상·백상예술대상 등 국내 대부분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월간조선> 2003년 1월호에 실린 윤정희-백건우 부부 인터뷰를 다시 소개한다.
01 2003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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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東의 인간탐험 - 尹靜姬-白建宇 부부『우리는 지금 頂上을 향해 가고 있는 중』

김성동    ksd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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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建宇
● 아버지와 떨어지고 싶어 미국 유학을 택했다
● 유학 중 방황...철학,영화,미술 등에 빠지기도
● 스무 살 넘어서야 피아니스트의 길가기로 결심
● 북한 공연 실현은 그들이 얼마나 정직한가에 달려있다
● 유학 중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尹靜姬
● 한국 최고의 배우는 김승호와 황정순...신성일씨와 찍은 영화만 98편
●『우리를 납치하려고 했던 李應魯 화백의 부인 朴仁京은 위험한 인물이라고 千容宅 당시 국정원장에게 말했지만 국정원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李應魯 화백이 결혼 선물로 준 그의 그림은 납치 미수 사건 직후 찢어버렸다』
●『우리는 첫눈에 반해 결혼했고,지금도 그 기분으로 살고 있다』
고유명사 「尹靜姬·白建宇」
  우리나라 남해안 가운데쯤, 경남 통영이라는 곳이 있다. 多島海(다도해)의 절경이 펼쳐 있어 「동양의 나폴리」로 불리는 곳이다. 아름다운 풍광은 예술적 감수성을 풍성하게 해주는 인큐베이터일까. 통영은 시인 金春洙(김춘수), 柳致環(유치환), 소설가 朴景利(박경리), 극작가 柳致眞(유치진), 음악가 尹伊桑(윤이상) 등 대한민국의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을 배출했다.
 
  인구 13만5000여 명의 작은 도시지만 이곳에서는 藝鄕답게 매년 3월이면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린다. 이곳 출신의 작곡가 尹伊桑씨를 기리기 위해 2000년부터 시작된 행사다. 이 행사 개막 100일을 앞두고 통영 사람들은 地上(지상)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통영으로 초대했다. 통영의 절경과 「天上(천상)의 소리」가 만나던 날, 통영의 겨울은 참으로 따뜻했다. 「天上의 소리」의 주인공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白建宇(백건우·56)씨다.
 
  2002년 11월 27, 28일 양일간,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가진 白建宇씨의 곁에는 늘 그래왔듯이 그의 평생의 반려자인 영화배우 尹靜姬(윤정희·58)씨가 동행했다. 기자는 尹靜姬·白建宇 부부를 그곳 통영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통영의 겨울 햇볕이 따뜻했던 날」 열린 白建宇씨의 피아노 독주회가 시작되는 시간은 오후 7시30분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통영 시장 등 10여 명의 지역 유지가 참석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안 얘기지만, 통영시민문화회관 대극장 1960석은 진작 매진돼 있었다고 한다.
 
  사방이 어슴프레해질 무렵인 오후 5시30분 기자는 통영시민문화회관이 자리한 통영시 남호동 소재 남망산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오후 6시에 尹靜姬씨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남망산 공원 입구에는 「환영 백건우·윤정희 부부 통영 방문」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윤정희의 남편 백건우」에 익숙한 세대의 기자에게 「백건우의 아내 윤정희」로 읽혀지는 「환영 백건우·윤정희 부부 통영 방문」이라는 플래카드는 낯설었다.
 
  중간의 과정을 싹둑 자르고 결론부터 얘기하면 「누구의 아내 누구」 또는 「누구의 남편 누구」 하는 식의 수식어는 이들 부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질문을 던져도 「저희(우리)는요」였고, 함께 있을 때도 「저희(우리)는요」라는 말로 대부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尹靜姬-白建宇」라는 이름은 두 개의 이름이 그냥 나란히 있는 게 아니라 두 개의 이름이 합쳐져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름을 하나의 고유명사로 묶어 준 것은 「예술」과 「여행」 그리고 서로 간의 「신뢰」였다. 기자는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부부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통영시민문화회관 대극장 앞에서 만난 尹靜姬씨는 초면인 기자를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던 양 친숙하게 대극장 출연자 대기실로 안내했다. 白建宇씨와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다른 대기실로 연주회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갔다.
 
  통영에 머문 이틀 동안, 기자는 주로 尹靜姬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공연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白建宇씨와 장시간 인터뷰를 하게 되면 그가 연주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까 남편과의 인터뷰는 통영 공연이 끝난 다음에 하자는 尹靜姬씨의 부탁 때문이었다. 대신 尹·白 부부는 12월1일에 서울에서 다시 만나 긴 시간을 내주기로 약속했다.
 
  결혼생활 26년째인 이들 부부는 다르면서도 너무 닮아 있었다. 외양상 尹靜姬씨는 직관적이면서 쾌활했고, 白建宇씨는 신중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 느낌은 어투로도 나타났는데, 尹靜姬씨의 언어가 감각적이라면 白建宇씨의 언어는 사색적인 언어에 가까웠다.
 
  아주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은 너무 닮아 있었고, 그런 감동과 행복감은 일상사인 듯했다. 얽매인 삶을 싫어해서인지 또 하나 닮은 점은 둘 다 數値(수치)에 어둡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연주를 위해 몇 개국을 여행했는지, 무슨 일이 몇 년에 있었는지 하는 숫자와 관련된 것들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둘은 감성에 더 중심을 두고 사는 사람들 같았다.
 
 
 
 숫자 개념이 없는 부부
 
  통영시민문화회관 대극장 출연자 대기실에서 마주한 검정색 코트에 보라색 머플러를 두른 尹靜姬씨의 모습은 세월을 적어도 10여 년 전쯤으로 돌려 놓은 것 같았다.
 
  ―통영에는 이번이 몇 번째입니까.
 
  『한 20여 년 전인가 영화 「화려한 외출」을 통영시 욕지도에서 찍었는데 그때 왔고, 공연 때문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지금 묵고 있는 곳이 통영관광호텔인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통영 앞바다는 정말 아름다워요』
 
  ―부군의 연주 일정 때문에 세계 곳곳을 다녀봤을 텐데, 다른 나라 절경과 비교해서도 통영이 그렇게 아름답던가요.
 
  『그럼요. 세계 어느 곳보다요. 다도해의 모습은 참 아름다워요. 여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천이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산과 들의 아기자기함, 어머니의 품 같은 포근한 모습 등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지금까지 몇 나라를 다녀보셨습니까.
 
  『아직도 안 가 본 나라가 많아요. 가 본 나라의 숫자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요. 제가 워낙 숫자개념이…(웃음). 우리가 스케줄을 몇 년 후까지 잡다 보니까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 같고 그래요. 스케줄을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후로도 기자는 몇 번 數値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는데 그때마다 尹靜姬씨는 『숫자 개념이 없다』며 웃었다. 남편 白建宇씨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은 피곤한 일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저희가 외국엘 가잖아요. 그러면 저희는 꼭 운동화를 가지고 가요. 연주회가 끝나면 반드시 하루 이틀 시간을 내서 그 나라의 독특한 박물관이라든지 시장을 찾아 다녀요. 제가 시장을 좋아해요. 새로운 풍물과 새로운 삶을 접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즐거움이에요』
 
  ―해외 여행은 모두 연주 여행으로 간 것이었나요?
 
  『25년 전인가? 이집트에 갔는데 그때는 연주회와 상관없이 갔어요. 연주회와 관련없는 유일한 여행이었죠』
 
  ―1년 중 연주여행이 며칠이나 됩니까.
 
  『상황에 따라서 달라요. 특히 여름 페스티벌은 많이 다니구요. 그리고 연주 계획이 몇 년 후까지 있으니까요』
 
  ―몇 년 후까지 잡혀 있습니까.
 
  『2005년까지도 잡혀 있어요. 남편은 숨 쉴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이에요. 연주가 끝나고 나면 숨을 쉬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다른 연주자들은 저희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1년에 연주회를 100회, 120회씩 하고 그런대요. 1년에 100회만 한다고 해도 사실 그건 정상적인 일은 아니에요.
 
  제 생각에는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천재라도 좋은 음악이 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1년에 60~70회를 해도 너무 많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연주자는 레퍼토리를 하나만 가지고 연주하는 게 아니잖아요』
 
  ―1년에 60~70회씩 연주회를 하더라도 파리 자택에 머물러 있는 시간보다는 해외에 머물 시간이 더 많겠네요.
 
  『아뇨. 반반 정도라고 보면 돼요. 연주 투어를 할 때는 이번 우리나라에서의 7개 도시 순회 연주회처럼 한 지역에서 이어서 하니까. 단 한 번의 연주회 때문에 한 나라를 가는 게 아니고 한 나라에 가면 여러 차례의 연주회를 가져요』
 
 
 
 『파리에 사는 게 편해』
 
  ―해외 여행을 할 때 알려진 곳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아다니십니까.
 
  『일단은 알려진 곳부터 가 보고 구석구석을 찾아다니죠』
 
  ―가장 아름다웠던 곳을 한 곳 꼽으라면.
 
  『이탈리아의 시실리예요. 저희들은 시실리에 참 매력을 느껴요. 시실리에서도 시실리의 州都(주도)인 팔레르모는 참 특이한 곳이죠. 마피아들이 부하들을 그곳 시장에서 뽑았다고 그러잖아요. 그런 시장 같은 데 골목골목 다니고』
 
  ―영화 「代父」의 분위기도 느끼시고요.
 
  『네 맞아요. 거기는 어쨌든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발전돼 있는 곳이에요. 음악회를 여는 분들이 다 귀족이기 때문에 양쪽 문화를 다 볼 수 있죠. 귀족 문화와 그런 마피아 문화가 섞여 있죠.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참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한국 분위기하고도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시실리에 가는 게 한번 터지기만 하면 굉장히 몰릴걸요. 우리나라와 아주 비슷해요』
 
  尹靜姬·白建宇 부부는 1976년 3월 파리에서 결혼했다.
 
  ―신혼여행 때 간 곳이 제일 기억에 남지 않나요.
 
  『우리는 신혼여행을 가지 않았어요. 신혼여행을 안 간 대신 이렇게 연주여행을 신혼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죠(웃음).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막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혼여행 가지 말라고 하죠(웃음)』
 
  ―연주여행을 하면 뭐가 좋은가요.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좋잖아요. 기분 좋은 사람들과 만나니까 행복하죠. 우리는 둘 다 엄청난 걸 꿈꾸지 않아요. 조그만 꽃(대기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작은 국화를 가리키며) 가지고도 우리는 감탄을 크게 하죠. 하늘에 구름이 변하는 것만 봐도 찌릿하다고 서로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공통점이 많아요』
 
  ―두 분 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것도 있겠죠. 그런데 저희는 조그만 데서 만족을 잘 해요』
 
  ―심적으로 파리가 편안하십니까, 서울이 편안하십니까.
 
  『저희들에게는 파리가 편안해요. 파리가 왜 편안하냐, 자유스러우니까요. 남의 의사를 존경해 주는 사회인 것도 좋지만 길을 가다가 누가 내가 누구인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참 편안해요. 자연스럽고요. 서울을 오게 되면 또 다른 편안함이 있죠. 서로 말도 더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생각도 똑같은 점도 많고요. 뭐가 불편하냐면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불편할 때가 있어요. 어떤 경우에는 팬들이 우리를 붙잡고 안 놔줄 때가 있어요. 그런 점들이 불편하죠』
 
  尹靜姬씨는 1974년에 파리로 유학을 떠나 줄곧 그곳을 생활 근거지로 삼았다. 벌써 28년여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尹선생은 인생의 절반을 파리에서 사신 거죠.
 
  『네, 제 인생의 절반을 그곳에서 살았어요. 제가 1967년에 영화배우로 데뷔한 후 몇몇 일간지 문화부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그랬어요. 5년 후에 유학을 갈 거라고. 그때는 미국으로 갈 거라고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7년 후에 파리로 유학을 간 거죠. 유학을 가기 전, 당시 저희들의 모습은 창경원의 동물 같았어요. 밖에를 못 나갔잖아요. 밖에 나가면 팬들이 우루루 몰리고요, 그래서 내 세계를 찾자, 파리로 갔어요. 파리에서 파리3대학을 나왔어요』
 
 
 
 『여행은 인생관을 바꾸어 준다』
 
 
  ―여행이 인생관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 것 같습니까.
 
  『여유가 생기죠. 남을 받아 주는 자세가 더 되는 것 같고. 여행을 하면서 많은 역사와 예술작품도 보지만 사람들의 여러 가지 사는 모습을 보게 되잖아요. 여행은 對人(대인) 관계는 물론이고 저 자신을 많이 변화시켰어요』
 
  ―어떻게요.
 
  『남을 받아 주는, 그리고 낙관적인, 옵티미스트(Optimist)가 됐어요』
 
  ―그전에는 비관적이셨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 옛날에는 제가 굉장히 신경이 예민했어요. 그런 성격인데다 생각을 너무 많이 했어요. 비관적인 인생관을 가진 거는 아니었는데요. 지금은 필요없는 생각은 안 하는 편이에요(웃음). 우리 딸과 제 남편 성격이 굉장히 편안한 성격인데요. 제 단점 중 하나가 과거에는 후회를 많이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제 딸이 그래요. 「엄마, 후회는 왜 해요. 그건 필요 없는 정신적인 낭비야」 그렇게 말해요. 제 남편도 전혀 후회 안 하는 성격이고요. 지금은 굉장히 편안해졌어요. 여행이 그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옛날에 영화를 할 때는 제 시간이 없었어요. 의상도 스스로 골라야 했고 화장도 직접 하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신경이 항상 곤두서 있었어요. 제가 완벽주의를 굉장히 싫어해요. 왜냐하면 빈 틈이 없으면 사람이 그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白建宇-尹靜姬 부부에게는 외동딸(진희)이 있다. 두 사람의 결혼 이듬해인 1977년에 태어난 진희양은 파리고등음악원을 나온 바이올리니스트다.
 
  ―이번에 따님은 같이 안 왔습니까.
 
  『같이 못 왔어요. 그 아이가 바이올린을 하는데 문화전문 웹진에 음악평도 쓰고 영화평도 쓰고 그러느라 바빠요. 연주자이면서 동시에 평론가이기도 하죠』
 
  ―따님이 한국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과 결혼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되도록이면 한국 사람과 하면 좋겠지만 부모들이 강요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아무리 자식이라도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부모에게는 없다고 생각해요』
 
  처음 만날 때도 그렇지만 尹靜姬씨의 모습은 시종일관 즐거워 보였다.
 
  ―늘 즐거우신 것 같은데 뭐가 두 분을 즐겁게 합니까.
 
  『음악과 여행과 맛있는 거 먹는 거죠. 하지만 우리 생활은 심플해요. 꾸미고 그러는 걸 과히 좋아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아요』
 
 
 
 
 
『남을 대접할 만큼의 재산은 있다』

 
  尹靜姬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중 피아노 독주회 행사 진행요원이 좌석이 적힌 티켓을 가지고 왔다. 티켓을 본 尹靜姬씨는 다른 표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진행요원이 가지고 온 표는 공연장 맨 앞 자리였다.
 
  ―왜 앞자리에 앉지 않습니까.
 
  『뒷자리에 앉으면 관객들의 반응을 볼 수가 있거든요. 앞에 앉는 게 긴장이 되기도 하고요. 제 남편이 연주를 할 때마다 저는 너무 긴장이 돼요. 그래서 항상 맨 뒷자리에 가서 앉죠. 나중에 공연장 분위기를 남편에게 전해 주기도 하구요. 그리고 앞자리는 음향이 좋지 않아요. 중간 뒤쪽이 좋죠. 물론 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뒷자리에 앉아서 연주를 들으신 후 청중들의 분위기를 가감 없이 白선생한테 그대로 전달해 줍니까.
 
  『그럼요. 저 같은 경우는 피아노를 고르는 것에서 음향, 조명까지 조언을 해줍니다. 본인이 혼자서 다 할 수는 없잖아요. 주변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데 제가 그 첫 번째 조언자죠. 아주 영향력이 있는(웃음). 대부분은 제 의견을 잘 들어요(웃음)』
 
  ―혹시 청중의 반응이 기대에 못 미쳐서 실망한 적은 있습니까.
 
  『이거는 그냥 형식적인 말이 아니에요 그런 적은 없었어요. 외국에서도 그렇고요. 지금 제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頂上에 올라가 이렇게 된 게 아니고 지금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중이거든요. 저는 그게 참 좋다고 생각해요』
 
  ―頂上에 있는 게 아니라 아직도 頂上을 향해 올라가는 중이라니요.
 
  『頂上을 향해 올라가는 중이죠. 완전히 올라갔다면은 내려오는 길밖에 없잖아요』
 
  ―남들은 白선생님을 頂上에 오른 것으로 평가하는데요.
 
  『올라가는 게 한이 없잖아요. 우리는 頂上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언제나 열심히 해야 된다」 하는 이런 생각도 저와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영화를 촬영할 때는 항상 「나는 신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 된다」 하는 그런 마음이었거든요. 「거만한 겸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겸손이에요. 전 제 남편의 그런 점들이 좋아요. 그리고 남편은 언제나 레퍼토리를 항상 새롭게 하기 위해 애를 쓰죠. 「나는 이제 다 됐다. 내가 너무 재산이, 레퍼토리가 많다」 하는 식의 생각을 안 하거든요. 저도 곁에서 부채질을 하고』
 
  ―재산이 많으세요?
 
  『남편이 연주할 수 있는 레퍼토리 재산이 많다는 거죠. 우리는 재산이 많지 않아요. 다만 남을 대접할 만큼은 있죠. 저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고 부자라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캐슬(城)이 필요 없어요, 왜냐면, 가는 데마다 좋은 친구들이 열쇠를 주면서 와 있으라고 하는 캐슬이 세계 어느 곳엘 가든 너무 많거든요. 우린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요』
 
  기자와 尹靜姬씨가 인터뷰하는 동안, 白建宇씨의 피아노 연습은 계속됐다. 통영에 가서 얻은 또 하나의 행운은 아주 긴 시간 동안 白建宇씨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무거운 피아노를 이 열 손가락으로…』
 
 
  ―白선생은 하루에 몇 시간이나 연습을 합니까.
 
  『어제도 하루 종일 했구요. 오늘도 아침부터 저렇게 연습하고 있어요. 밥 먹는 시간 커피 마시는 시간, 빼놓고는 거의 하루 종일 연습이에요. 연주회를 할 때 장소마다 피아노가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피아노를 자기에 맞춰서 자기가 낼 수 있는 피아노 소리를 만들 때까지 연습이 필요해요.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이상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연습이 필요하죠』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연주자들도 있습니까.
 
  『그럼요. 피아노 조율사는 물론이고 요리사까지도 데리고 다니는 분도 있는데요. 저는 엉뚱한 피아노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도 연주자에게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 예술가의 창작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연주하는 곡을 작곡한 작곡가가 원하는 소리로 만드는 과정은 언제나 어렵지만 바로 그게 또 하나의 창작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야기는 다시 여행으로 돌아왔다.
 
  ―여행 다니시면서 먹은 음식 중 어느 나라 음식이 제일 맛있었습니까.
 
  『우리 둘이 참 다행인 게 어느 나라든 그 나라에 가서 음식 먹는 걸 즐겨요.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전통 음식은 맛있었다는 기억이에요. 골목골목을 한 다섯 군데 이상 찾아다니면서 그 나라의 음식을 찾죠. 찾다 보면 맛있는 음식집은 분위기, 이를 테면 사람이 많다거나 하는 그런 분위기로 알 수 있어요. 주인이 싫어하든 말든 댓 곳을 그렇게 다니다 보면 알 수 있어요. 보통 음악하는 사람들이 미식가인데, 현지에서 그분들이 안내해 주는 곳에 가서 그분들이 권하는 음식을 먹으면 대부분 맛있어요. 그래서 어느 나라 음식이 제일 맛있었냐고 물으면 대답을 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면 어느 나라 음식이 제일 맛이 없었습니까.
 
  『맛이 없는 나라는 영국이었어요. 음식들이 맛이 없어서 영국에 가면 차이니스 레스토랑이나 인도 음식점을 찾아 들어가게 돼요』
 
  연주회 시작 10분 전이 되자, 尹靜姬씨는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대로 객석 맨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白建宇씨가 예의 그 모습 그대로, 검은색 연미복 속에 흰 터틀넥 스웨터를 받쳐 입은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섰을 때, 그녀의 시선은 피아노와 남편만 덩그러니 있는 무대 위를 빨아들이기라도 할 듯 고정됐다.
 
  음악에는 문외한에 가까운 기자가 앙코르를 포함해 총 90분 동안의 연주를 보며, 「저렇게 열정적으로 치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얼마나 아플까」를 여러 번 속으로 되뇌이는 동안 그녀는 모차르트에서 브람스로, 브람스에서 쇼팽으로 넘어가는 길고 긴 「天上의 여행」을 남편과 함께 했다.
 
  공연이 끝난 후 마련된 늦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누군가가 白建宇씨에게 말했다.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직접 보니까 체력이 엄청나게 소모될 것 같습니다』
 
  예의 사람 좋은 표정과 함께 열 손가락을 펴보이며 白建宇씨가 대답했다.
 
  『피아노가 얼마나 무겁습니까. 피아니스트는 그 무거운 피아노를 이 열 손가락으로 가지고 놀아야 돼요』
 
  저녁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그 식당을 찾은 손님은 물론이고 종업원들까지 종이와 펜을 들고 와 이들 부부에게 사인을 요청했고, 두 사람은 흔쾌히 응했다. 그날 그 식당 주인은 『두 분을 모신 건 우리 식당의 영광』이라면서 食代(식대)를 받지 않았다. 대신 이들 부부는 식당 기둥에 漢字(한자)로 두 사람의 이름을 큼직하게 남겼다. 물론 주인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프랑스人들은 예술가를 아낀다

 
  통영의 볕은 다음날도 따뜻했다. 우리는 다음날인 11월28일 오전 10시30분에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오전 두 사람은 아주 행복한 모습으로 기자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오다 보니 조금 일찍 오게 돼서 통영시민문화회관이 있는 남망산 꼭대기에 올라가게 됐는데, 거기서 보이는 남해의 경관이 무척 아름다웠다는 게 그 이유였다. 행복에 겨운 모습으로 白建宇씨는 피아노 연습을 위해 자리를 떴고, 기자는 다시 尹靜姬씨와 마주했다.
 
  이야기를 나누기 직전, 피아노 조율사가 와서 尹靜姬씨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그 직전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통영시민문화회관 입구에 와서 일찍부터 기다리던 여러 명의 중년 여인들에게 사인을 해준 터였다.
 
  ―국내에 들어올 때마다 사인 공세에 시달리시죠.
 
  『네』
 
  ―白선생님보다 더 시달리시죠.
 
  『(웃으며) 아니에요. 그런데 근래 들어 제 얼굴을 알아보는 젊은이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아요. 교육방송(EBS)에서도 옛날 영화를 많이 틀어 주고, 또 우리 영화가 다시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옛날 영화를 보는 분들도 많아진 때문인 것 같아요』
 
  ―尹선생님 팬클럽도 생겼지요.
 
  『네, 갑자기 팬클럽 회장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그분을 이번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분은 제가 영화를 거의 300편 정도 했는데 그 가운데 여든아홉 개의 비디오를 가지고 있다고 그래요.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제 저녁 식사자리에서 공연장 분위기가 나라마다 다르다고 이야기하셨는데요. 어떻게 다른가요.
 
  『나라마다 공연 반응이 다 달라요. 네덜란드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즉시 모두 일어나서 열광적으로 박수를 쳐서 처음에는 「대성공이다」, 이렇게 착각을 했는데 두 번 세 번을 가도 그러니까 「아, 이 사람들의 습관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죠(웃음). 프랑스 청중들은 예술가들에게 사랑을 참 많이 줘요. 굉장히 친절하고 그래서 한번은 제가 물어봤어요. 그들에게 「왜 이렇게 예술가들한테 잘한 사람은 물론이고 못 한 사람에게도 박수를 많이 치냐」고 물었더니 한 예술가가 무대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자기들은 존중을 안 할 수가 없다고 그래요. 과정을 존중해 주는 거죠』
 
  ―어느 나라 청중들이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보입니까.
 
  『이탈리아도 그렇고 특히 프랑스가 좋구요. 영국은 물론 상황에 따라서 다르지만 박수들이 차갑더라구요』
 
  ―영국인들은 점잖아서 그런 건가요.
 
  『글쎄요, 그 사람들은 조금 맛이 없어요. 음식 맛이 없듯이(웃음)』
 
  ―우리나라 관객들은 어떻습니까.
 
  『청중들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어요. 감정이 풍부한 것 같구요. 西歐(서구)처럼 기립 박수가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건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그런 것 같아요』
 
 
 
 국정원장을 찾아간 사연
 
  尹靜姬-白建宇 부부는 결혼도 화제가 됐지만 두 사람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렸던 것은 1977년에 발생한 이른바 「尹靜姬-白建宇 부부 납북 미수 사건」이다. 이 사건은 尹씨 부부가 1977년 8월1일 오전, 파리 駐在(주재) 한국대사관에 출두해 당시 공산 국가였던 유고의 자그레브 공항까지 유인되었다가 프랑스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신고하면서 공개되었다. 이 사건은 유명 예술인의 납북 기도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화제를 모았지만, 당시 在佛(재불) 화가였던 顧菴(고암) 李應魯(이응로·1904∼1989) 화백의 부인 朴仁京(박인경·77)씨가 관련돼 더욱 주목을 끌었다.
 
  尹씨 부부는 朴仁京씨가 북한 측 공모자로 자신들의 납북 기도를 도왔다고 믿고 있고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물론 朴씨는 부인하고 있다. 2000년 11월에는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 미술관」이 개관됐고, 朴씨는 근래에 「李應魯 유작전」에 참석하는 등 한국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다.
 
  尹靜姬씨는 朴씨의 자유로운 출입국을 묵인하는 정부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민주당 千容宅(천용택) 의원이 국정원장으로 있던 시절에는 부부가 함께 국정원을 방문해 『朴仁京씨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千의원은 1999년 5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국정원장으로 재직했다.
 
  ―千容宅 당시 국정원장은 어디에서 만났습니까.
 
  『저희 부부가 직접 국정원으로 찾아갔어요. 그 무렵 신문이나 방송을 보니까 朴仁京씨가 한국에 가서 귀빈 대우를 받고 그러더라구요. 그 사람의 실체를 잘 아는 우리로서는 「이거 그냥 수수방관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그때 당시 문화부 장관을 찾아갔어요. 우리가 예술인이니까 문화부를 찾아갔지요. 거기서 국정원으로 가라고 해서 국정원으로 찾아간 거예요. 옛날 자료들을 다 챙겨 가지고 말이에요』
 
  ―그 일 때문에 일부러 가신 겁니까.
 
  『일부러 갔죠. 외국에 나가 살다 보니까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애국심이 생겨요. 그래서 저희 부부가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많은 걱정을 하고 있는 거구요. 저희 부부는 「이것이 애국이고, 국민의 의무다」 생각하고 찾아간 거예요. 「이건 도저히 안 된다. 이분들이 모를 수도 있으니까. 제대로 朴仁京씨의 실체를 알려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찾아갔어요. 저희들이 千容宅 원장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죠. 「이분은 위험한 인물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이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놔두는 것은 안 된다」 하고 말이죠. 그렇게 하고 나왔는데 그 다음에도 똑같아요.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납치 사건의 정신적 피해는 현재도 진행형
 
  ―마음 한구석에 아직도 납치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남아 있습니까.
 
  『우리가 그 뒤로 외국 여행을 여러 번 했는데 물론 겁나죠. 그 사건 직후에는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는 게 고통스러웠어요. 파리에는 동양인 택시 기사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면 중간에 내렸어요.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정신적인 피해가 많았죠. 아직도 저희가 러시아나 이런 데 갈 때는 제가 대사관에다 전화를 해요. 괜찮겠냐고 묻죠. 대사관에서는 「이제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더라구요』
 
  尹靜姬씨는 그 사건과 관련해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녀는 할 말이 많은 만큼 말을 참기 위해 애썼다. 尹씨 부부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인간적인 배신감인 것 같았다. 다른 이야기를 나눌 때는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던 尹靜姬씨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배신감이 컸겠습니다.
 
  『이역만리에서 부모같이 모셨던 분들로부터 당한 배신감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요. 우리한테는 너무 마이너스였어요. 그 배신감은 참을 수가 없어요』
 
  尹靜姬-白建宇 부부의 결혼식 주례는 李應魯 화백이 섰다. 결혼식 장소도 파리에 있는 李화백의 집이었다. 李화백은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자신의 그림을 이들 부부에게 선물했다. 납치 사건 후 이들 부부는 그 그림을 찢어버렸다고 한다.
 
  ―李應魯 화백은 그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데 왜 그 그림은 찢었습니까. 사건 직후에 찢은 겁니까.
 
  『네, 李應魯 화백은 관계가 없어요. 朴仁京씨가 그때 우리 부부와 함께 여행하는 걸 그분은 몰랐어요. 그런데 결국 그분도 자기 부인의 편을 들더라구요. 그때 느낀 배신감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래서 화가 나서 찢어버렸어요』
 
  尹靜姬-白建宇 부부에게 그 사건은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진행형인 것 같았다. 무거운 분위기를 털어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尹靜姬씨가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며 일어섰다. 마침 문 밖에는 오전 연습을 마친 白建宇씨가 와 있었다. 기자의 눈에 상당히 두툼하면서도 부드러워 보이는 白建宇씨의 양손이 들어왔다. 그는 손톱 옆에 일어난 굳은살을 조심스럽게 뜯고 있었다.
 
  ―손톱은 특별하게 관리를 합니까.
 
  『아뇨, 그렇게 하지는 않아요』
 
  ―피아니스트에게는 손톱도 중요하지요.
 
  『그럼요. 너무 길어도 안 되고 너무 짧아도 안 되고 신경을 많이 써야 하지요』
 
  점심 식사를 하면서 두 사람은 夫唱婦隨(부창부수)란 이런 것이라는 걸 實演(실연)해 보였다.
 
  白:『(음식이 맛있다며) 맛없는 것 먹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아요, 그쵸?』
 
  尹:『(맞장구 치며) 난 맛없는 거 먹으면 화나요』
 
  점심 식사 후 기자가 먼저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하자, 두 사람은 하이 파이브를 하며 활짝 웃었다. 대중의 시선을 받는 일이 몸에 밴 사람들이지만 역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아버지의 강요에 피아노가 싫어지기도 했다』
 
  尹靜姬-白建宇 부부를 다시 만난 건 지난 12월1일이다.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이었는데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기자를 발견한 두 사람은 오랜 지기를 만난 듯 동시에 반갑게 일어섰다.
 
  가족관계를 묻다가 작고한 양가 부친의 사망 시기가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여러 번 수정됐다.
 
  ―두 분은 확실히 숫자 개념이 없군요.
 
  『네, 저희 부부는 확실히 숫자 개념이 없어요』 하며 尹靜姬씨가 큰 소리로 웃었다.
 
  「호호호」 아니면 「하하하」 이렇게 문자로 그녀의 웃음을 표현할 수가 없어 유감이다. 호방하다면 여성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웃음은 호방하다. 무언가를 감추지 못하는 이의 웃음이다. 대신 남편 白建宇씨의 웃음은 싱겁다. 그는 웃는 것도 진지하게 웃는 것 같다. 얼굴엔 미소를 자주 띠지만 그의 웃음에서 소리는 거의 없다. 그래서 웃는 모습만 잔상으로 남는다. 싱겁다기보다는 선한, 그래서 진지한 모습이다.
 
  白建宇씨는 1946년에 서울에서 아버지 白洋(백양·작고)씨와 어머니 金浩子(김호자)씨 사이의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는 교사였던 아버지 白洋씨는 바이올린을 취미로 하고 합창도 지휘하는 등 예능 방면에 다양한 재능을 가지셨던 분으로 白建宇씨는 기억을 하고 있다. 어머니 金浩子씨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白建宇씨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과 밀접한 환경에서 자랐다.
 
  ―白선생은 어려서부터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스스로 가진 겁니까, 아니면 주변 환경 때문에 자연스럽게 갖게 된 겁니까.
 
  白建宇씨는 고개부터 가로저으며 차분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음악이 좋아서 피아노를 자연스럽게 시작하기는 했죠. 어렸을 때는 멋모르고 쳤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너무 무리하게 나한테 요구를 하셨기 때문에 오히려 피아노가 싫어졌죠. 제가 결심을 하고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어요. 그래서 저는 음악은 무리하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한국의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일찍부터 무리하게 가르친다는 게 얼마만큼 나쁜 일인가 하는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렇잖아도 그걸 여쭤보고 싶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 미술이든 음악이든 자식의 예능 교육을 시키는 많은 부모들 가운데 「내 자식은 천재다, 뭔가 내 자식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 특별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예능 분야는 꼭 조기교육을 시켜야만 하는 겁니까.
 
  『조기교육은 필요하죠. 그런데 천재는 한 세기에 한 나라에서 몇 명밖에 안 나와요. 예술이 뭔지 음악이 뭔지 아름다움이 무언지 이런 것을 깨우쳐 주는 거는 아주 필요한 거죠. 그러나 옳게 깨우쳐 주어야죠. 독일에서 그렇게 많은 음악가가 나왔어도 베토벤이 몇 명 있어요? 예술이 무언지를 옳게 깨우쳐 주다 보면 재능 있는 아이들은 그 재능이 발견되게 돼 있어요』
 
 
 
 『천재라는 소리가 부담스러웠다』
 
  白建宇씨는 열 살 때 최초의 독주회를 가졌고, 열두 살 때는 국립교향악단과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하는 등 일찍부터 재능을 보여 주변에서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천재라는 주변의 소리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까.
 
  『부담스러웠죠』
 
  그는 이 말을 두 번 반복했다.
 
  ―부모나 주변 사람들의 「천재는 더 잘해야 한다, 남보다 훨씬 뛰어나야 한다」는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했습니까.
 
  『아유, 많았죠. 그게 참, 저는 음악이 좋아서 시작을 했는데, 주위의… 저는 뭐랄까, 저희 아버지를 어떤 면에서는 존경하면서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크리틱(critic)하게 봐요. 너무 강요하시고 그랬기 때문에 피아노가 싫어지기도 했으니까요』
 
  白建宇씨는 만 15세이던 1961년에 渡美(도미)했다. 주한 미국대사관이 주관한 「뉴욕 디미트리 미트로포리스」 콩쿠르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만 15세에 줄리어드 음악학교로 유학을 가셨는데 가족들하고 같이 가신 겁니까.
 
  『콩쿠르에 참석하기 위해 아버지하고 같이 뉴욕으로 갔죠. 제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고 미국을 갈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해보라고 하셔서 참석하게 됐죠. 어떻게 한국 대표로 뽑히게 돼 가게 됐지요. 그 콩쿠르에 참석한 후 주최 측에서 「얘는 꼭 키워야 된다」고 레빈(Rosina Lhevine: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白建宇씨는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그에게 師事했다-필자 注) 선생한테 소개해 주고 또 레빈 선생님이 장학금을 마련해 주고 그랬어요. 저야 뭐 맨손으로 갔죠』
 
  ―가정의 경제력이 유학 갈 형편이 안 되었던 겁니까.
 
  『전혀 없었죠. 아버지가 콩쿠르가 끝난 후 「다시 나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음 기회에 다시 미국에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찾아보는 게 어떻겠니」 하고 물어보셨어요. 저는 사실 아버지 곁을 떠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남아 있겠다」고 했죠. 뉴욕에 남게 된 거예요. 당시 저도 전혀 몰랐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래서 韓美재단에서 거처를 마련해 주고 생활비도 지원해 주었어요. 몇 달러 안 되는 돈이었는데 그 돈으로 생활하면서 공부를 시작한 거죠』
 
 
 
 『나한테로 오라, 나한테로 오라』
 
  ―어린 나이에 가족도 없이 상당히 외로우셨겠습니다.
 
  『정말 지상에 저 혼자밖에 없었죠』
 
  ―유학 시절 한때 방황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반항을 할 수도 없었죠』
 
  ―「반항」이 아니라 「방황」요.
 
  『아, 방황요? 그럼요. 방황도 했죠』
 
  ―음악으로 인한 방황이었습니까.
 
  『아니죠. 삶에 대한 것이었어요. 왜 내가 이렇게 외롭게 있어야 되는가, 왜 내가 음악을 해야 되는가. 인간 사회란 무엇인가, 왜 존재를 해야 되는가』
 
  ―철학적인 방황이었네요.
 
  『아니죠, 그것은 절대로 철학적인 게 아니었어요. 그거는』
 
  ―현실(에 대한 방황)이었습니까.
 
  『현실이었죠』
 
  ―결론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결론이 뭐라고 그럴까, 한때 제가 너무 고통스럽고 못 먹어서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어요』
 
  ―영양 부족 때문에요?
 
  『뭐, 그런 것도 있었겠죠. 그때 아주 위험하게 창가에서 쓰러졌는데』
 
  ―학교 창가에서요?
 
  『십 몇 층인가에 있던 하숙집이었어요. 방을 겨우 얻어가지고 있을 때인데, 그런데 이런 얘기는 처음 하는 건데요. 바깥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더라구요』
 
  ―환청요?
 
  『네. 「나한테로 오라, 나한테로 오라」 이렇게 말이죠. 창문이 열려 있는 바깥으로 보이는 옆의 건물 벽돌에 햇빛이 쫙 내리 쪼이면서 어떤 목소리가 자꾸 「나한테로 오라, 나한테로 오라」 그러더라구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가다가 창가에서 쓰러졌어요. 그 상태로 한동안 잤죠. 몇 시간을 잤는지 모르겠는데 그러고 나서 깨어나니까, 몸이 환해지면서 어떤 깨달음이 생겼어요』
 
 
 
 『피아노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白建宇씨는 1997년에 가톨릭 신자인 尹靜姬씨 집안의 영향으로 요셉 마리라는 세례명을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때는 어떤 종교도 안 가지고 계셨지요?
 
  『안 가지고 있었죠』
 
  ―그때가 몇 살 때였습니까.
 
  『그때가 한 열일곱 살이었을 거예요. 내가 고민해 왔던 거, 외로운 거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내가 능력이 없다든지, 자잘한 일로 아웅다웅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더라구요. 그때는 제 자신이 모습도 보기가 너무 싫었고 몸도 안 좋았고, 그게 종교적으로 부활이라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지면서 사람 대하는 것도 그렇고 차분히 제 모습을 다시 찾기 시작하게 된 것 같은, 그러고 나서도 몇 년 동안 피아노하고의 싸움은 있었지만 음악은 계속 사랑하면서 그러다가 더 이상 끌 수가 없다, 내 인생에 무엇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한 거죠』
 
  ―스무 살에요?
 
  『네, 스무 살 아니면 스물한 살에』
 
  ―음악적으로 보면 그때까지는 계속 방황을 한 거고요.
 
  『그렇죠. 그때까지는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사진도 찍어 보고 뭐 영화도 만들어 보고 싶었고, 화가도 되고 싶었고, 괜히 그렇게 피아노에서 멀어지려고 그랬지요』
 
  ―일부러 멀어지려고요?
 
  『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이러한 경험이 무엇보다도 값진 거예요. 책에서 얻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어요』
 
  피아니스트 白建宇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때는 1972년에 뉴욕에서 라벨(프랑스의 작곡가-필자 注)의 피아노 독주곡 전곡 연주를 하면서부터다.
 
  ―특별히 라벨에 빠진 이유가 있습니까.
 
  『저한테는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한 어떤 동경이 있었어요. 잘 모르면서도 말이죠. 뭔가 그림이라든지, 언어라든지, 영화라든지, 이런 걸 통해서 프랑스를 그리면서 특히 그 당시 예민했던 시기에 라벨의 그 음악이 뭔가 필요했던 거죠. 환상적이고 컬러풀한 그 음악이 필요했던 거죠』
 
  ―프랑스에서 디아파종상을 수상하셨는데 그 상의 성격은 어떤 겁니까.
 
  『여러 번 받았는데, 그게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건데, 어쨌든 디아파종상이라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굉장히 인정받는 상이에요』
 
  ―프랑스에서 2000년에 예술문화기사 훈장도 받았는데요.
 
  『어쨌든 제가 라벨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프랑스의 음악을 계속 연주해 오는 그런 것도 있고, 저 같은 사람이 프랑스 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데 그런 것도 있고, 또 디나르 페스티벌을 사실 굉장히 조그맣게 시작한 페스티벌을 지금의 인정받는 페스티벌로 이끈 공로 그런 것도 있어서 준 것 같아요』
 
  ―프랑스에는 언제부터 정착했나요.
 
  『1972년부터일 거예요, 아마』
 
  ―尹선생은 여행지 중 가장 아름다운 곳 한 곳만 꼽아 달라니까 시실리를 꼽던데 白선생 생각도 그런가요.
 
  『저희는 시실리를 굉장히 좋아하지요. 자연이 그렇게 아름다운 곳은 보지 못한 것 같아요. 그리고 신비스러운 것이 에트나라는 산의 화산이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거예요. 이 화산이라고 하는 거는 어떻게 보면 지구의 생명력을 보여 주는 것이잖아요. 저희들이 아이슬란드 연주 여행을 갔을 때 새삼스럽게 느낀 바가 있는데 몇 년 전에 화산이 하나 터져 가지고 갑자기 섬이 하나 태어났대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지구가 몇천 년, 몇만 년 역사가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지구라고 하는 거는 태어나고 있는 초기밖에 못 왔구나, 하는 새로운 느낌이 들더라구요. 또 시실리에 있는 시라쿠사는 아테네보다도 더 그리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곳이에요.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죠』
 
 
 
 『외양에 신경 쓸 짬이 없다』
 
  ―金正日 체제하의 북한에서 공연 제안이 오면 연주회를 거기에 가셔서 하실 의향은 있습니까.
 
  『거기에 가고 안 가고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만큼 정직한 초청이 오느냐가 문제겠죠. 정말 거짓 없는 남북한 관계를 이룬다고 한다면 당연히 가야죠. 기쁜 마음으로 갈 것이고, 이것이 정말로 남북이 가까워지고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제가 안 갈 이유가 없죠. 그러한 과거(납치 미수 사건)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일 가고 싶은 곳이 거기겠죠. 그런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들이 거기를 가지 못하는 거죠. 안 가는 거죠』
 
  ―제안은 있었습니까.
 
  『있었죠. 북한에서 있었던 게 아니라 남쪽에서 가자고 하는 제안이 있었죠』
 
  ―한국 정부가요?
 
  『아뇨. 개인이었어요』
 
  ―요 근래에 그런 제안이 있었던 겁니까.
 
  『몇 년 됐죠. 2년 정도』
 
  ―對北 사업가였습니까.
 
  『그랬나 봐요. 저희들이 누구냐고도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자기들이 얘기를 했는데 잊어버렸어요』
 
  ―한 인터뷰에서 『예술가란 인간의 참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거기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웃음) 아니죠. 그런데 그 참모습이라는 말에 제가 애착을 갖는 것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더 그것을 찾고 있는 것 같아요』
 
  白建宇씨의 외양에서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어떤 때는 자연스러움을 벗어나 자신의 외양에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헤어스타일에는 특별히 신경을 안 쓰시죠?
 
  『제가 가위로 쑥덕쑥덕 잘라요』
 
  ―신경 쓰지 않는 게 더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닙니까.
 
  『그게 아니고 신경 쓰기가 싫어서 그런 거죠』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尹靜姬씨가 『저는 이제 (남편의 외모를 가꾸는 일을) 포기했어요』라며 웃는다.
 
  ―尹선생께서는 白선생에게 외모에 신경을 쓰라고 잔소리는 하셨습니까.
 
  『그럼요, 우리 딸하고 둘이 많이 했죠. 옷을 멋있는 걸 사다가 놔요. 그런데 입던 옷만 입고 다녀요. 이제는 포기상태예요』
 
  ―음악 연주에서 있어서는 한 작곡가의 全曲 연주라든가 하는 모험을 그렇게 하면서도 옷 입는 것은 모험을 안 하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신경을 쓸 여지가 없어요. 음악회 연주 준비만으로도 정신 없는데 다른 데 신경쓸 수가 있나요. 「이 옷에는 이게 맞을까, 이 색깔이 맞을까, 예쁘게 보일까」 이러는 데 신경을 쓰기가 싫어요. 화가들이 그 더러운 옷을 계속 입고 그림을 그리는 게 지금 여기가 바쁜데 다른 데 신경 쓰고 싶지가 않아서 그러는 거라구 생각해요, 저는』
 
  ―협연하실 때 지휘자와 마음이 안 맞아서 고생을 한 적은 없습니까.
 
  『있죠』
 
  ―자주 있습니까. 아니면 어쩌다 한 번.
 
  尹靜姬씨가 옆에서 『반반』이라며 웃었다.
 
  『그런데 실력 있고 준비가 돼 있는 지휘자하고는 절대로 문제가 없어요. 실력 있는 사람은 그만큼 여유가 있어요. 그리고 준비가 돼 있기 때문에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금방 알아들어요. 실력이 좀 달리고 준비가 덜 돼 있는 사람은 부닥치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격이 좋아서 저한테 「가르쳐 주십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케스트라 단원들 앞에서는 자기가 대장 노릇을 해야 하니까 자기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도 있죠. 그럴 때는 중요한 요점만 얘기를 나누고 말죠』
 
  ―양보를 많이 해주는 편이십니까.
 
  『양보는 하되 제 고집은 또 있죠. 그것마저 죽여 가면서 할 수는 없죠』
 
  ―프랑스에 있으면서 일하는 분도 안 두고 직접 요리 등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 어느 분이 요리를 더 잘하십니까.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잘하는 것 같아요(웃음). 요리를 잘하려면 먹는 걸 잘해야 돼요. 우리 둘 다 먹는 걸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잘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맛있는 걸 많이 먹어 본 경험 덕도 보구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요리를 한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에요. 인간이 요리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게 되면 자연과의 접촉을 잊지 않는 중요한 행위라고 봐요. 파를 다듬고, 생선 비늘을 걷어내고 그러는 것 모두 자연과의 접촉이잖아요? 우리가 직접 밭에서 그걸 따지는 않지만 전 그걸 즐기거든요』
 
  ―尹선생 보시기에 白선생의 요리 실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해놓고 우리가 맛있다 소리를 해 가면서 먹으니까 모르겠어요(웃음). 대신 우리는 요리책을 보면서 요리를 하지는 않아요. 답답하거든요』
 
 
 
 본인이 직접 지은 예명 尹靜姬
 
 
  이야기의 중심은 尹靜姬씨에게로 넘어갔다.
 
  ―尹선생은 어렸을 적부터 꿈이 영화배우였나요.
 
  『아니에요. 저는 우연히 영화배우의 길로 접어들었어요. 1966년에 합동영화사에서 김내성 씨의 소설 「청춘극장」을 영화화하기 위해 신인배우를 모집했어요. 오유경 役을 뽑았는데 주변에서 소설 속 오유경 이미지가 저와 비슷하다며 공모에 응해 보라는 권유가 있었어요. 저도 그 소설을 읽었는데 소설 속 오유경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구요.
 
  제 본명이 손미자예요. 제가 제 이름으로 영화배우 공모에 참가할 용기까지는 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성은 尹씨로 하고 이름을 靜姬라고 지었어요. 영화계는 너무 화려한 데니까 조용히 있는 사람이 되자, 하는 뜻으로 「고요 정」자를 쓴 거지요.
 
  그런데 그때 당시 소문에 벌써 이미 뽑힌 사람이 있다구 그러더라구요. 제가 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조감독이 막 쫓아와서 「당신이 될 것 같으니까 트라이를 해봐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카메라 테스트를 받는데 영화배우 황정순씨에게 달려가서 「어머님!」 하고 우는 장면으로 테스트를 했어요. 그런데 정말로 눈물이 나오더라구요. 그게 어떻게 잘 됐는지 우연히 제가 됐어요(웃음)』
 
  尹靜姬씨는 사업을 하던 아버지 孫昌基(손창기·작고)씨와 어머니 朴小順(박소순·77)씨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혹시 집에서 어르신들이 반대는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만 해도 지금과 달리 연예인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았는데.
 
  『물론이죠. 제가 가톨릭 신자예요. 제가 신부님한테 가서 그랬어요. 「가톨릭 신자로서 영화배우가 돼도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아, 물론이지. 네가 가톨릭 신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할 수가 있고 오히려 본보기가 된다면 더 좋다. 걱정하지 말고 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할 수 있었어요』
 
  ―어느 성당의 신부님이었습니까.
 
  『명동 성당요. 그때 당시 보좌 신부님인데요. 지금은 다른 곳 주교님이죠. 그분 성함은 밝히지 않을 게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어요. 제가 연기 공부를 전혀 안 했는데 아마 유치원 다니고 학교 다닐 때 무용반을 하고 합창반을 했던 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제 남편이 자주 말하지만 제가 공상에 잘 빠져요. 책 읽자마자, 그 주인공에 빨리 빠져 버리거든요. 그런 게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지금도 연기 연습하십니까.
 
  『연극은 연습이 필요해요. 그런데 영화 연기는 성격 분석을 잘 하고 의상과 모든 자기 육체적인 준비 이런 게 필요한 거지, 저 같은 경우는 너무 연기 연습을 하게 되면 오히려 카메라 앞에서 부자연스런 연기가 나올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저는 안 해요. 하지만 연극은 다르죠』
 
  ―출연작 300여 편이 다 기억에 남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어떤 겁니까.
 
  『300여 편이 다 기억에 남을 수는 없죠. 그래도 대부분은 기억에 남아 있는데 굳이 꼽으라면 아무래도 첫 작품인 「청춘극장」이 기억에 남겠죠. 「분례기」도 그렇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상옥 감독하고 찍은 「심청」이 기억에 남지요. 그 작품 때문에 남편을 만났거든요(웃음)』
 
 
 
 「심청」이 만들어 준 두 사람의 인연
 
  ―그렇습니까. 두 분이 그 작품 때문에 만났습니까.
 
  『네.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문화축전도 열렸는데 저와 신상옥 감독이 영화 「심청」으로 참가했어요. 마침 尹伊桑 선생도 오페라 「심청」으로 참가하고 계셨는데 독일에 초청연주를 와 있던 남편이 오페라 「심청」을 보러 온 거예요. 거기서 처음 남편을 만났죠. 영화 심청과 오페라 심청이 우리를 만나게 해준 셈이지요. 「심청」은 그런 상황이 기억에 남게 해주는 작품이죠. 그리고 「만무방」도 제가 아껴서 한 거구요』
 
  ―「만무방」을 1994년에 찍고 나서는 영화에 출연 안 하셨지요.
 
  『소식은 없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음 시나리오를(웃음)』
 
  ―광복 이후의 한국 영화배우 중 최고의 배우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김승호 선생님하고 황정순 선생님을 굉장히 존경해요. 그분들을 콤비로 해서 만든 영화들이 많아요. 두 분의 연기 자세와 연기는 우리 후배들이 아껴 주어야 할 것 같아요. 어떤 감독으로부터 들은 연기에 대한 집념과 열정을 보여주는 두 분에 얽힌 에피소드인데요. 두 분이 영화를 같이 많이 했잖아요. 두 분이 땅에서 뒹굴며 싸우는 장면이 있었대요. 서로 뒹굴다가 카메라의 마지막 컷에서 자신의 얼굴이 클로즈업이 안 되고 뒤통수가 잡히면 다시 찍자고 했대요. 자기의 얼굴이 나와야 한다고 말이죠. 서로 異性(이성) 간인데도 카메라 앞에서는 양보가 없었다나 봐요. 그렇게 다시 찍은 게 무려 18회나 되었대요. 욕심으로 볼 게 아니라 그 의욕과 자세는 높이 사야죠』
 
  ―尹선생은 그런 에피소드가 없습니까.
 
  『좀 상황이 다르긴 한데 「임꺽정」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였어요. 엑스트라가 제 머리를 치는 장면이 있는데 잘못 쳐서 머리가 진짜로 찢어졌어요. 정신이 없었죠.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가서 머리를 꿰맸죠. 그때 당시는 제작환경이 열악해서 몇 컷을 남겨두고 그냥 스톱할 경우에는 그 세트를 헐고 또 다른 세트가 들어오기 때문에 그 영화의 제작자는 제작비용 때문에 망해요. 그러니까 제가 정신을 잃으면서도 「이 제작자를 위해서는 계속해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겨요.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다시 촬영장으로 가서 찍었어요』
 
 
 
 『트로이카끼리 라이벌 의식 있었다』
 
  ―그런 점과 비교해서 요즘 후배 연기자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화면을 통해서 보면 연기를 잘 하는 후배들이 많아요. 열심히 하는 후배들도 있구요. 그런데 배우의 자존심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까워요. 광고 출연이 그 예에요. 배우의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광고를 하더라도 하나 정도는 이해를 해요. 그런데 조금 이름 있다고 하면, 이 텔레비전 드라마도 하고 저 텔레비전도 나오고, 이 광고도 하고 저 광고도 하고, 저는 그건 마음에 정말 안 들어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영화 황금기 중 문희, 남정임 등과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며 치열한 인기경쟁을 벌였는데 세 분은 당시 정말 라이벌 의식이 강했습니까.
 
  『물론이죠. 그거는 물론이고요. 제가 제일 후배예요. 그런 거는 제가 감출 수 없는 얘기이고… 그렇지만은 신성일씨 집에서 배우들끼리 모여서 파티를 가끔 했어요. 그럴 때 만나면 친구였죠』
 
  ―현장에서는 라이벌이지만 촬영장을 벗어나면 친구였다는 건가요?
 
  『네. 그냥 친한 친구는 아니지만 그런 걸 떠나서 만나는 거죠』
 
  ―문희씨는 근래에 못 만나셨죠?
 
  『생활이 다르니까요. 친구도 서로 대화가 통해야지 자주 만나게 되잖아요. 그런데 분야가 다르고 서로 바쁘니까 못 만나죠. 만나면 반갑겠죠』
 
 
 
 신성일씨와 함께 출연한 영화만 98편
 
  ―상대 남자 배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배우는 누구입니까.
 
  『제 팬클럽 회장이 그러는데 제가 신성일씨 하고 영화를 98편이나 찍었대요. 부부로 애인으로 말이에요』
 
  ―그러면 상대 남자 배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신성일씨겠네요.
 
  『그럼요. 저희 남편하고도 친해요』
 
  ―우리 한국 영화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저는 밝다고 생각해요』
 
  ―요즘 한국 영화가 너무 組暴이나 코미디로 가고 있고 충무로로 몰렸던 자금들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흐름은 항상 바뀌는 거예요. 충무로에서 예술영화만 나오라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코미디나 조폭 이런 영화들이 나오는 것도 필요하고, 예술 영화의 비중도 많아져야겠지요. 저는 그런 순간이 온다고 믿어요. 왜냐. 감독들의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제가 청룡영화제나 부산영화제를 심사하다 보면 제일 힘든 것이 신인감독상 부문이에요. 예를 들어서 후보가 6명이 나왔다 그러면 누구를 뽑아야 될지 모를 정도로 실력이 보통이 아니에요. 당연히 우리 영화의 미래가 밝을 수밖에요』
 
  ―함께 작품을 한 감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김수용 감독하고 신상옥 감독 두 분을 좋아해요. 신 감독을 왜 좋아하냐 하면, 그분은 연기자를 카메라에 묶어 놓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우리 연기자를 따라다녀요. 연기자가 마음껏 연기를 할 수 있도록 풀어놔 줘요. 김수용 감독도 편안하고 서로 대화도 되고 많은 좋은 작품을 그분 하고 제가 했거든요. 서로 대화가 되니까 좋죠』
 
  ―예명을 직접 지으실 때의 바람대로 지금까지 조용히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런데요(웃음). 저는 배우생활을 하면서도 카메라 앞에서만 배우지 스튜디오를 떠나서는 제가 스타라는 착각 속에는 살지 않았어요』
 
  기자는 12월1일 만남이 있기 전 통영에서 尹靜姬씨와의 인터뷰를 녹음한 테이프를 풀었다. 녹취를 하면서 尹靜姬씨의 목소리는 성우를 해도 손색없을 만큼 좋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하시면서 더빙할 때 왜 그 좋은 목소리로 직접 안 하시고 다른 사람들 목소리로 하셨습니까.
 
  『할 시간이 없었어요. 제가 데뷔하던 해에만 22편의 영화에 출연을 했어요. 거의 한 달에 두 편 꼴이잖아요. 어떨 때는 50편을 하기도 했으니 녹음할 시간이 없었죠. 「위기의 여자」는 제가 파리에 가 있을 때 했던 작품으로 시간이 있어서 제가 직접 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아, 그거는 윤정희씨가 안 했어, 고은정씨가 했겠지」 하는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尹선생을 대신해 더빙한 성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누구입니까.
 
  『옥경희씨 하고 정은숙, 그 다음에 고은정씨 이렇게 세 분이 제 역을 많이 했어요』
 
 
 
 『朴대통령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尹靜姬씨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朴正熙 前 대통령과 관련된 소문이다.
 
  ―尹선생의 파리 유학을 전후로 해서 尹선생이 朴正熙 당시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소문이 돌았고 아직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尹靜姬씨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어투는 단호했다.
 
  『저는요, 그것 때문에 참 속이 많이 상했는데요. 제가 처음에는 「사실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자」 그냥 이랬어요. 그런데 그게 저와 朴대통령이 이상한 관계라고 북한에서 「삐라(전단)」를 만들어 뿌렸대요.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자기가 그런 삐라를 주웠다고요. 대꾸도 안 했어요. 그 사람한테 내가 변명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니까요. 차라리 朴대통령을 한 번이라도 직접 만난 일이 있었다면 억울하지는 않지요』
 
  ―한 번도 만난 일이 없으시군요.
 
  『그럼요. 만날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중앙정보부 직원이 저희집을 찾아왔어요. 그 사람이 「지금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귀한 분이 미국에서 왔는데 당신이 영어를 좀 할 줄 아니까, 식사를 같이 하자」는 거예요.
 
  그 인사하고 대통령하고 저하고 몇 분이서 말이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저는 기생이 아닙니다. 저는 영화배우입니다. 그리고 제가 거기를 왜 갑니까. 그런 자리에 가고 싶어하는 분들도 많을 테니 그분들한테 부탁을 하세요」라구 말이죠.
 
  그런데 촬영을 하는데 또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제가 똑같은 얘기를 하고 못 간다고 했거든요. 내가 그분 성함을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나중에는 그분이 우리 집에 사과 궤짝을 보냈어요. 그런 나를 협박하지 않고 나를 좋다고 하면서 사과를 보냈어요. 그게 전부예요』
 
  ―1970년대 초반이겠네요.
 
  『그렇죠. 제가 유학을 가기 전이죠. 그게 전부고, 제가 그럴 성격의 사람도 아니라는 건 주변 사람들이 너무 잘 알아요. 그때 당시는 참 유혹이 많았어요. 저는 파티에도 잘 안 나갔어요. 또 저희 집 앞까지 차를 가지고 와서 협박을 해도 절대로 응하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억울하게, 참 너무 어이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걸 아직도 믿는 사람들이 있나요?』
 
  ―네,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쓰레기 정보」 가운데 그런 것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소문에는 유학을 간 것도 그것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제가 여권을 쉽게 받았어야지요. 제가 여권을 얼마나 어렵게 받았는지 알아요? 파리로 가기 위해 처음에 여권 심사과를 찾아갔더니 여권을 안 내주겠대요. 당시 駐韓 프랑스 대사가 피에르 랑비氏였어요. 그분이 저한테 「내가 너를 어떻게 도와줄까」 해서 제가 처음에는 장학금을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한국의 톱스타에게 장학금을 주선하면 스캔들 난다」면서, 대신 비행기표를 주셨어요. 그 분한테 들어온 공짜 비행기표였는데 그게 사용 시한이 정해져 있었어요. 시한이 지나면 못 쓰게 되는 표였죠.
 
  그러니까 프랑스대사관에서도 제 여권을 위해 노력을 했죠. 나중에는 안 되니까 「당신이 한국의 톱스타니까 이 나라에서 너를 바깥으로 안 내보내려고 그러는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하루는 탤런트 사미자씨가 『얘, 미스 윤, 내가 어떤 사람을 아는데 네가 장미꽃이라도 들고 가서 하소연을 해 봐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안 가고 저희 어머니가 갔어요. 남대문 시장에서 장미꽃을 사 가지고. 저도 여권 과장한테 가서 조르고 그렇게 해서 여권이 겨우 나와서 간 거든요』
 
  아내의 얘기를 듣고 있던 白建宇씨는 어이없다는 듯 소리내 웃었다.
 
 
 
 『빨간 스포츠카라니! 나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파리로 유학 가서 朴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호화 저택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것처럼 억울한 소리가 또 없어요. 제가 유학을 갈 때 제 남편도 잘 알지만 서강대학교 파드 데일리 총장 신부님이 유학을 주선해 주셨어요. 그분이 제가 프랑스 유학을 하고 싶다고 하니까 駐韓 프랑스 대사도 소개해 주고 그런 거예요. 프랑스에서 제가 있던 집도 총장 신부님이 잘 아는 변호사 집이었어요. 그걸 제 남편도 다 잘 알고 있구요. 그리고 저는 버스를 타고 다녔어요. 당시 한국에 가끔 촬영하러 와 보면 제가 「캐슬에서 산다」,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 하는 소리들이 들리더군요. 정말 어처구니없는 소문들이에요』
 
  ―어처구니없는 소문 중에는 「땅굴 소문도」 있었습니다.
 
  『땅굴 소문요? 아, 그거요. 그거야 말로 어처구니없는 소문이었죠. 제가 여의도에서 살다가 석관동으로, 석관동에서 살다가 필동으로 이렇게 이사를 다녔어요. 그런데 제가 사는 집에서 청와대까지 땅굴이 뚫려 있어서 그곳을 통해서 제가 朴대통령과 만난다는 거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얘기예요? 만약 사실이라면 그 땅굴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그 소문은 결국 저와 朴대통령과의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북한의 거짓 선전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도 한심하지만, 소문이 진실처럼 믿어지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예요. 언론이나 종요 지도자, 지식인들이 제대로 사회의 중추 역할을 한다면 그런 헛소문이 발붙이지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말을 마친 尹靜姬씨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화를 삭이고 있는 것이었다. 尹靜姬씨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화제를 바꿨다.
 
  ―살아가면서 예명 윤정희가 익숙합니까, 본명 손미자가 익숙합니까.
 
  『저를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개 있는데요. 파리에서는 제 친구들이 본명을 불러요. 왜냐하면 미자가 쉬우니까, 그러고 마담 백이라고도 하고, 제가 가톨릭 신자니까 데레사라고도 부르고, 또 한국에 오면은 신성일씨 같은 분은 미스 윤 그러고, 그래서 저는 거기에 다 습관이 된 것 같아요(웃음). 아, 그리고 지금은 진희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이름 이야기 도중 尹靜姬씨는 말을 멈추고 다시 朴대통령과의 소문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 외는 제가 다른 스캔들이 없을걸요. 제 개인생활에 있어서(웃음), 없어요. 그거는 정보부나 이런 데서 다 알 텐데…』
 
  다시 화제를 돌렸다. 가라앉은 尹靜姬씨의 기분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는 특효약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남편 白建宇씨가 그 특효약이었다. 그 처방은 거꾸로도 적용됐다.
 
  ―白建宇 선생의 어디가 좋으십니까.
 
  이 질문에 尹靜姬씨는 이내 생기를 되찾았다. 그녀는 남편을 장난스럽게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어디가 좋은가(웃음).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기 자존심을 버리고 다른 행동을 한다든지, 자기가 그게 잘못된 줄 알면서도 성공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더럽힌다든지, 저는 그런 걸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제 남편은 순수하고 진실한 것 같고, 또 하나는 굉장히 자기 음악에 모든 걸 바치기 때문에 저는 그 모습이 좋아요』
 
  ―白선생은 尹선생의 어떤 모습이 좋습니까.
 
  화답이 왔다.
 
  『굉장히 사랑이 많은 사람이에요. 삶에 대한 애착도 그렇고. 매사에 굉장히 열심히 해요』
 
 
 
 파리 레스토랑에서의 운명적인 재회
 
  두 사람은 1972년에 뮌헨에서 만난 후 尹靜姬씨가 파리로 유학을 간 1974년에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두 분은 뮌헨에서 만나신 후 파리에서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두 번째 만남은 파리에서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만났어요. 이쪽에서는 친구하고 영화를 보고 레스토랑에 들렀고, 저는 그 레스토랑엘 조각가 문신씨 하고 갔죠. 그때는 파리에 유학 와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서로 떨어지지를 않았죠』
 
  ―그럼 白선생이 첫눈에 반했던 겁니까.
 
  『둘이 서로 그랬죠』
 
  ―당시만 해도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는 예가 드물었는데 나이 차 때문에 양가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저는 숫자에 둔감해서, 정말 그런 거 생각 못 했어요(웃음)』
 
  ―두 분이 결혼 후 가장 오래 떨어져 있던 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만무방」 찍을 때인데…』
 
  ―그것도 숫자라 기억이 안 나십니까.
 
  『한 달 조금 넘을 거예요』
 
  ―그게 두 분이 결혼한 후 가장 길게 떨어진 시간입니까.
 
  『수치 문제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럴 거예요』
 
  ―尹선생만을 위한 공연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白:『집에서 많죠. 매일 연습하니까』
 
  尹:『제가요. 연주 전에는 하나의 청중으로서 몇 번씩 들어야 돼요』
 
  ―듣고 나서 평을 하실 수 있습니까.
 
  白:『그럼요. 여기가 준비가 덜 됐어, 그렇게 말하죠』
 
  ―두 분도 부부싸움을 하십니까.
 
  白建宇씨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그걸 왜 안 해요, 재미없게. 부부싸움을 안 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싸움을 하고 나면 누가 먼저 두 손을 듭니까.
 
  『손 네 개가 올라가죠』
 
  웃음이 많은 이들 부부는 또 한번 유쾌하게 웃었다.●

입력 : 2023.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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