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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출범 40주년 40장면] <3> 해태(KIA) 타이거즈와 V11

코끼리 김응용 감독, 엄격한 위계질서, 특유의 끈끈함이 승리 공식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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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프로야구 40년의 역사를 대변하는 40장면을 소개한다. 이 장면들은 어쩌면 B컷일지 모른다. 전면에 놓이기에 뭔가 허전하지만 그래도 역사의 귀중한 자산으로 기록될 장면들일 것이다. 결정적 장면은 수많은 스포츠신문과 주요 매체에서 다 다뤘거나 다룰 예정이니 불필요한 소음에 동참할 필요가 없다. 7권의 프로야구 관련 책들의 도움을 받아 기술한다.

《이것이 야구다-프로야구 30년을 뒤흔든 100인의 한마디/ 명장면 200선》(2011)
《그라운드 20년 마이크 30년 허구연의 야구》(2008)
《한국 프로야구 결정적 30장면》(2011)
《한국 프로야구 난투사》(2015)
《프로야구 투타의 전설》(2010)
《프로야구 크로니클》(2012)
《철학자 하일성의 야구 몰라요 인생 몰라요》(2013)
1997년 10월 25일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해태타이거즈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모습이다. 사진=조선일보DB

광주와 호남인에게 해태 타이거즈는 마을 장승, 혹은 사찰 앞 당간 지주와 같은 존재였다.


한마디로 광주 무등구장은 강신회(降神會)가 이뤄지는 공간이었다. 슬픔과 기쁨이 마주치며 매일 밤 무등산이 벌겋게 불 타 올랐다. 지지부진한 삶이 내팽겨질 망정 해태의 승리를 갈구했다. 타이거즈는 승리의 화신(化身)이어야 했다.


해태제과를 먹지 않아도 타이거즈는 존재해야만 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0년대와 90년대 광주의 상징이자 고집, 집요함이며 실천과 관념이 뒤섞인 성채였다.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더라도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하고야 마는 이 심리를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IMF가 터지자 해태그룹은 끊임없이 제기되던 타이거즈 매각설을 부인했다. 1997년 우승의 원동력이던 이종범 선수까지 일본 주니치 드래곤스에 팔아 돈을 조달하며 자구노력을 폈다. 팔 수 있는 선수를 모두 내다 팔았다. 투수 임창용도 그렇게 삼성에 내줬다. 


매각소문은 1997년말부터 계속 불거져 나왔다. 주력인 해태제과의 마케팅 차원에서도 구단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호남의 뜨거운 야구 사랑을, 타이거즈에 대한 애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images.jpg 해태 타이거즈 로고


해태 타이거즈는 2001년까지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9차례나 우승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졌으나 한국시리즈에서 한 차례도 지지 않았다. 가을 야구의 진정한 승자였다.


특히 대구 경북이 연고인 삼성라이온즈와 만나 모두 승리했다. 삼성은 해태를 이기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했으나 해태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정규시즌에서 해태를 압도해도 가을 야구에선 번번이 무릎을 꿇었다. 사자는 1980년~90년대 줄곧 호랑이 포비아에 시달리면서 울분을 삭혀야 했다. ‘검빨’(검정색 하의와 빨간색 상의 유니폼) 앞에선 사자가 아니었다. 영락없이 호랑이밥이었다.


화면 캡처 2022-09-22 074156.jpg 이미지 출처=나무위키


해태 타이거즈가 강팀이 된 이유 중 하나는 김응용(金應龍) 감독의 리더십이 강하게 작용했다. 부임 후 첫 시즌인 1983년 한국시리즈에 진출, 우승까지 거머쥔 그는 86년부터 89년까지 4연패의 위업을 이루며 명장에 올랐다. 4연패를 하는 동안에는 무려 3번이나 뒤집기 우승을 일궈냈다. 100kg이 넘는 육중한 체구, 과묵한 그에게 선수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해태 감독(1983~2000)으로 1164, 삼성 감독(2001~2004)으로 312, 한화 감독(2013~2014)으로 91승을 거뒀다한국시리즈에서 해태 감독으로 9, 삼성 감독으로 1, 삼성 구단 사장 하며 2(2005, 2006) 우승했다. 모두 더해 12번 우승한 셈이다.


1506_264_1.jpg 해태 감독 시절 김응용


김응용 감독은 선수를 구성할 때 스타 선수만 예우하지 않았다. 이름보다 당장의 컨디션, 기량을 칼같이 파악했다. 그래서 해태 감독 시절에 소위 미치는 선수가 많았다. 비결은 주전은 없다. 스타도 없다. 오직 실력이다. 1, 2군의 구별도 없다에 있었다.


그는 말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칭찬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야구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똑같다고 한다. 카메라에 비친 그의 얼굴은 괜히 뚱해 있거나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선수들에게 그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야단 안 맞으면 잘한 줄 알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해태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았다. 투수 선동열, 포수 김무종, 1루수 김성한, 유격수 서정환, 3루수 이순철(한대화가 영입되면서 외야수로 전향), 좌익수 김종모, 중견수 김일권, 지명타자 김봉연 등 뛰어난 기량의 선수들이 초창기 왕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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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미친 타선은 없었다"…  3세대 호랑이들. 왼쪽부터 1세대 강타자 김봉연 김성한, 2세대 강타자 이순철 이종범, 3세대 강타자 김선빈 최형우.


무엇보다 1986년에 실력있는 신인들이 한꺼번에 입단한 것이 왕조 부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광주일고-건국대를 거친 차동철과 김정수, 장채근, 이건열, 신동수 등에다 그해 입단 2년차인 선동열이 25-0.99의 평균 자책을 기록하며 역대 투수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선동열의 방어율은 19930.78/ 19870.89였다.)

 

이와 함께 OB와 트레이드로 국가대표 3루수 한대화가 가세한 것이 탄력을 받았다. 이후 10승 투수 조계현 김정수 이강철 이대진 문희수에다 야구천재 이종범 등이 해태 왕조를 완성했다. (선동열, 이종범 이야기는 차후 다시 다룰 예정이다.)


또 선후배간 엄한 위계질서, 특유의 끈끈함, 초반에 지더라도 역전할 수 있다는 불굴의 자신감, 가을 야구 경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기동력을 앞세운 경제 야구로 필요할 때 한방을 날릴 줄 알았다. 찬스에 강한 응집력, 여기다 잦은 도루로 상대 내야를 흔들어댔다. 김일권, 이종범 등이 대도(大盜)로 기억된다.


해태가 짠돌이 구단이라는 점도 선수단의 힘을 한데 모았다. 연봉이 적으니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보상을 받자는 심리가 단결력을 높였다고 한다. 해태는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우승했으나 준플레이오프나 플레이오프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꼭 이겨야할 때 이기는 팀이라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호남에 대한 차별과 1980년 광주 민주화항쟁에 따른 울분과 설움이 야구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갖게 만들었다. 광주의 깊은 상처를 쓰다듬기 위해서라도 목숨을 걸고 야구를 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한국 시리즈 우승이 해태의 마지막 헹가래였다. 선수들이 하나둘 떠나자 1999년 리그에서 해태는 꼴찌의 수모를 겪었다. 그때 김응용 감독이 한 말이 전설처럼 지금도 회자된다.


"동열이도 없고 음~, 종범이도 없고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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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 타이거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 사진=조선일보DB


그러나 200181, 해태제과가 기아자동차에 팀을 매각하면서 현재의 KIA 타이거즈로 변신한다. KIA 타이거즈 역시 2009년과 2017년 우승하며 최고의 명문구단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해태 시절만한 근성은 보이지 못했다.

입력 : 202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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