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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인 별세... 향년 81세

2003년 8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고백


[편집자 주] 김지하(본명 김영일) 시인이 8일 향년 81세 나이로 별세했다. 토지문화재단에 따르면 고인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생활 끝에 이날 강원 원주시 자택에서 타개했다.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한 고인은 1954년 원주로 이사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 미학과 졸업 후 1969년 시 '황톳길' '녹두꽃' 등을 발표하면서 공식 등단했다.

주요 시집으로 황토(1970), 남(南)(1984), 살림(1987), 애린 1·2(1987), 검은 산 하얀 방(1987),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나의 어머니(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중심의 괴로움(1994), 화개(2002), 유목과 은둔(2004), 비단길(2006), 새벽강(2006), 못난 시들(2009), 시김새(2012) 등이 있다.

고인은 체제 비판 활동으로 수 차례 투옥되고 사형 선고까지 받은 바 있다.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시위에 가담했다 체포됐고, 1970년 정경유착을 질타한 오적(五賊)을 발표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배후자로 지목돼 긴급조치 4호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문인과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풀려난 바 있다. 법원은 2015년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과 오적필화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며 15억원의 국가배상판결을 했다.

그는 지난 2003년 그동안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방대한(3권 분량) 회고록 '흰 그늘의 길'을 펴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기도 했다. 당시(2003년 8월) <월간조선> 인터뷰를 소개한다.

 

 

회고록 「흰 그늘의 길」 펴낸 金芝河

『李鍾贊씨와의 쿠데타 얘기는 진지하기는 했지만 그저 한번 해본 소리』

 

이청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고백
●『어째서 자꾸 反美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300만 또는 600만의 인민들이 끼니를 거르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코냑이나 마시고 있는 세상(북한)에 대해 긴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


金 芝 河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중동高·서울大 문리대 미학과 졸업. 명지大 문예창작학과 석좌 교수.
10년 걸려 완성한 대작
  시인 金芝河(김지하·62·본명 金英一)씨가 회고록 「흰 그늘의 길」(학고재)을 내자 신문들이 다투어 인터뷰를 하거나 책 소개를 하는 등 법석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金씨의 전력 때문에 이 회고록이 현대사의 그늘 속 미로를 찾아가는 희미한 불빛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金씨 삶의 기록이 주는 매력은 권력이라는 이름의 질곡에 저항해 온 「운동권」의 투쟁적인 면모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마르크시즘에서부터 儒·佛·仙의 동서양 사상을 편력하고 동학교도임을 자처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적 길 찾기는 사람에 따라서는 더 큰 감명을 받기에 충분하다. 金씨의 방대한 회고록 「흰 그늘의 길」은 이러한 운동권으로서, 사상가로서의 난해하고 거대한 갈래들을 한눈에 꿰뚫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는 셈이다. 책이 출간된 다음날인 7월10일 출판사 「학고재」의 응접실에서 金씨를 만났다. 얼른 보기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고, 말투마저 약간 어눌하여 왕년의 「대한민국 3대 구라」 중 한 사람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렇게 방대한 분량(「흰 그늘의 길」은 全3권, 원고지 4200장의 대작이다)을 쓰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1991년 동아일보에 「모로 누운 돌부처」라는 제목으로 일부 발표하다가 그만두었는데 2001년 9월부터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다시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여 올해 6월30일에 연재를 마쳤으니 시작부터 책이 나오기까지 줄잡아 10년이 넘게 걸린 셈입니다』

 
  1991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회고록을 갑자기 중단한 이유를 金씨는 제1권의 「글머리에」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십년 전 「동아일보」에 게재된 제1부에서는 엄밀히 말해서 가족사와 내 개인의 진실은커녕 최소한도의 사실마저 정면에서 온전하게 부딪치지 못한 채 금기의 장벽과 타협하고 말았다. 그래서 6·25 전쟁이 가까워지는 시점에 가서 나의 회상은 마침내 큰 장벽에 부딪쳐 중단되고 만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라고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이 명백한 한 마디가 없이는 나의 회상은 전체적으로 그 회상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흰 그늘의 길」, 금기의 장벽 허물고 다시 써 내려간 것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금기의 장벽과 타협」한 회고록을 그는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10년이나 뜸을 들이다가 이번에 그 금기의 장벽을 허물고 다시 써 내려갔다. 그래서 나온 것이 「흰 그늘의 길」이다.
 
  ―글은 무엇으로 씁니까.
 
  『만년필이나 볼펜이나, 그런 것으로 써요. 두드리는 것(컴퓨터)은 안 좋습니다. 두드리다 보면 상상력이 달리고, 글맛도 이상해지고, 생각 굴러가는 것이 달라요. 그러나 컴퓨터의 원리에 대해서는 알아둘 필요가 있습디다』
 
  ―하루에 어느 정도 씁니까.
 
  『한창 때는 하루 100장(200자 원고지)은 쉽게 썼습니다. 새벽부터 기운이 동해서 쓸 때는 신들린 듯이 써 내려갈 때가 있었습니다. 「붉은 악마」 얘기나 「촛불」이 그런 경우고, 「오적」은 단 사흘 만에 신들린 듯이 썼는데 오자나 탈자도 없었어요. 내 글씨는 漢字를 비뚤게 써서 알아보기 어려운데 신들린 듯이 쓸 때는 이런 현상도 없었습니다. 신명이 난 거지요. 그러나 요즘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느립니다. 최근 2~3개월은 먹(墨)도 잘 안 하고, 슬럼프 중의 슬럼프에 빠져 있습니다. 좀 놀아야 이게 풀리겠어요』
 
  ―회고록이라는 글의 형식이 마음에 듭니까?
 
  『칼 융도 「회고는 위선의 향연」이라 했어요. 그러면서도 그는 임상체험에 관한 글은 썼습니다. 지독한 공산주의자인 아티셀은 「환상도 사실이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환상이라는 것이 어디 딴 데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체계인 바에야 사실이 아닐 수도 없는 거지요. 루소가 대표적인 예인데 서양에서는 회고록이 중요한 글의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나름으로 미덕도 있었는데, 동양에서는 그런 글이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염치 때문이었을까요?
 
  『글쎄, 그렇다면 나는 상놈이라서 이런 글을 썼는지…』
 
  ―지나온 삶을 한 편의 글 속에 농축시켜 놓는다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가두어 놓는 것이 아닐까요?
 
  『갇힌 것은 아닙니다. 그 반대죠. 읽어보세요. 해방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나의 회고록은 포스트 모더니즘과는 다르지만 해체적인 것, 기존의 회고록들과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중심을 가지고 線的(선적)인 흐름을 따라갔어요. 그러나 의식이 복잡한 상태에 들어가면 흐트러지기 시작하여 문체마저도 전혀 달라집니다. 시작과 끝이 달라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는데 성공 여부는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회고록 제1권의 「아버지」를 「아버지 金孟摸(김맹모)는 공산주의자였다」로 시작한다. 계속해서 그는 「이 한마디는 나의 육십 생애 안에 깊이깊이 감추어진 비밀 주문 같은 것이다. 未堂(미당)이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한 마디에 그 일생이 결정되었듯이, 내게도 이 한 마디가 나의 생애를 결정지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고 쓰고 있다. 그는 아마 끝끝내 그 비밀을 가슴속에 묻어 두려고 했던 것 같다. 불과 10년 전 동아일보에 회고록이라는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던 글에서도 밝히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이번 글에서 그는 미당이 詩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유와 구속을 동시에 얻었듯이, 그 흉내를 내어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고 쓰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난 생애를 통하여 「온갖 형태의 억압과 자기검열로 봉인된 내 삶의 깊은 시간의 비밀」로 침잠해 있던 기억을 백일하에 드러내놓았다.
 
  金씨의 선친은 광복 전 게릴라 운동을 준비했고 6·25 전쟁 때는 빨치산으로 입산했던 공산주의자였다. 이 사실을 자기 검열로 봉인해 두었던 일 때문에, 즉 『그동안 아버지의 사상 문제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내 행동이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석연치 않았던 일에 대해 그는 『가령 韓日회담반대운동에 헌신적이면서도 민족주의비교연구회에 가입하지 않았고, 마르크스주의에 親緣性(친연성)을 가졌음에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했던 일』 등을 꼽았다. 역설적으로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를 두지 않았더라면 金씨는 「지독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
 
  ―건강은 어떤 편입니까?
 
  『이 글을 중간 정도 쓸 때까지는 괜찮았어요. 마지막 원고를 넘긴 올 초부터는 다리가 무거워 일어날 때는 한 번 꺾어서 일어나고, 기운이 없어집디다. 병원에 입원해서 전부 검사했어요. 나쁜 데가 한두 군데 아니고 많아요. 정신신경과 치료도 계속 중이라 치료제를 계속 복용하고 있고… 그래서 절로 갔습니다. 지난 2년간 집사람과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고찰을 찾았습니다. 옛 사람들 정말 뭘 알았던 게지. 고찰에 가면 기운이 돌아와요. 고찰에 며칠 머물면 개운해지고 기운도 생기고, 뭔가 달라요. 최근에는 부산 범어사에 가서 머물다 왔는데, 기운이 뻗치는 절이었어요. 서울로 올라오니 또 가물가물해집니다』
 
  ―장모님이신 朴景利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대목에서 잘못 말하면 마누라한테 혼이 나는데… 장모님은 예부터 훌륭한 소설가로 알고 있었는데 「토지」를 연재할 때부터 작품을 읽어 보았습니다. 「토지」에 옥관 스님이 연곡사로 들어가는 길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고개를 넘어 절로 돌아가는 가을길의 묘사인데 낙엽이 지는 주변 풍경과 옥관 스님의 미음속 번뇌가 기막히게 잘 묘사되어 있었어요. 한국에도 이런 작가가 나올 수 있었구나, 감탄했습니다. 내 보기에 최고의 소설가입니다. 지금도 글을 쓰고 계십니다. 나도 계속 쓰시라고 권했고요. 「노인이 되면 절이나 성당에 가거나 농사 짓거나 아니면 글을 써야 합니다」고 했더니 대답을 안 합디다. 그런데 최근 「나비야 청산 가자」를 내놓았어요』
 
  ―朴景利 선생님이 최고의 소설가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잔재주가 아닌, 역사를 보는 눈과 인간을 보는 시야가 정확하잖아요. 그게 이유입니다. 그런 눈을 가진 소설가가 별로 없습니다. 나는 춘원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어요.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재주는 기막힌데 근본이 틀렸어요』
 
  ―부인에게 고생 많이 시켰지요?
 
  『그럼요. 덕택에 지금은 꼼짝을 못합니다. 「젊었을 때 잘하라」는 옛 사람들 말이 맞아요. 요즘은 싱크대에 밥그릇 부딪치는 소리만 들어도 밥 못 얻어먹지나 않나 하고 놀라는 처지가 됐습니다. 이건 농담이고. 李文求가 살았을 때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 감옥에 가서 너무 오래 살았고, 정치투쟁의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문학적으로는 대작을 썼을 테고 식구들도 제대로 돌봤을 텐데」하고. 어떤 이들은 지난날의 내 삶의 행적을 두고 「역사의 대세를 따른 것인데 후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고 개인의 슬픔은 따로 있는 거예요. 지금 와서 아내에게 잘하려고 하나 방법을 모릅니다』
 
 
 
 『쿠데타는 그저 한번 해본 소리』
 
  ―지나온 길에 대해 후회되는 부분이 있습니까?
 
  『현실을 생각하면 지난 과거에 내가 잘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나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럿이 같이 움직였기 때문에 판단 이전의 문제라고 봅니다. 문학자로서 이제 좀 잔잔한 시선으로 가만히 보고 싶어요』
 
  ―얼마 전에도 反戰연대의 10인 성명에 이름을 올려 여전히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주었는데요.
 
  『그건 사실은 상식적인 평화에 대한 의견을 개진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무슨 대단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잘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사회 변혁을 위하여 온몸으로 살아온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내면적인 사상의 천착에 힘을 다하고 있는 까닭은 나이 때문입니까? 세상이 달라져서 더 이상 변혁시켜야 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까?
 
  『지금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그리고 나에게 뭔가 안 맞아요. 시절이 달라졌습니다』
 
  金씨의 회고록이 나오자 신문들이 가장 재미있는 대목으로 관심을 가진 부분이 「1970년대에 李鍾贊(이종찬) 前 국정원장과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金大中을 대통령으로 앉히고 운동권을 대거 정부에 진출시킨다는 계획까지 수립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신문에서는 이 대목을 李鍾贊씨에게 들려주고 李씨의 반응까지 실은 신문도 있었다. 李씨의 반응이라는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이란 원래 무한한 것이라서…』 정도였다.
 
  ―그때 李鍾贊씨도 진지하게 쿠데타 이야기를 했던가요?
 
  『물론이지요. 농담으로 할 이야기가 따로 있지요. 죽는 일인데. 朴正熙는 내가 詩人이었기 때문에 살려 주었지 아니었으면 간단하게 죽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진지하게 했지만 두 사람 모두 그걸 믿었을까요? 쿠데타가 쉬운 일이 아닌데 그저 한번 해본 소리였지요』
 
  ―그때 만약 쿠데타나 혁명을 일으켜 성공을 했더라면 그 권력은 썩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썩었겠지. 권력이 썩고 안 썩고의 문제 역시 얼마나 자기 수양이 잘 돼 있느냐의 차이, 즉 정도의 차이라고 봅니다. 수행을 한 인간들에게도 스캔들이 생기는데 하물며 수양도 없고 지도사상도 없는 무리가 권력을 잡았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뻔하지』
 
  ―북한의 현실은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고 그러한 문제에 대한 남쪽 지식인들의 역할도 요구되고 있습니다. 북한 얘기를 좀 해볼까요.
 
  『지난번 「화두」라는 책에 대한 간담회에 나갔더니 난데없이 누군가가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해요. 300만 또는 600만의 인민들이 끼니를 거르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코냑이나 마시고 있는 세상에 대해 긴 이야기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金日成은 사회주의하는 목적을 인민들에게 흰 쌀밥에 고깃국 먹고 기와집에 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말하고는 끝이었습니다. 오늘도 북한에 관한 이야기는 같은 말로 끝입니다』
 
 
 
 
「이해관계(정치적 욕망) 때문에 목숨 바쳐 싸울 사람」으로 金大中씨 지목

 
   ―李鍾贊씨와 「쿠데타 모의」를 할 때도 金大中씨를 지도자로 상정했고, 그 뒤에도 정치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지요?
 
  『지난날 反파쇼운동의 선두에는 장준하, 김수환 추기경, 김재준 목사, 천관우, 함석헌, 장일순 선생 같은 분들이 서 있었습니다. 어느 때 내가 그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은 개전 초기라 선생님들이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은 원래 학 같은 사람들이라 싸움이 진흙탕 개싸움이 되면 모두 날아가 녹나무 위로 가버릴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나 감옥에 가서 썩겠지요. 그러므로 이 운동의 선두에는 이해관계 때문에 목숨을 바쳐 싸울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가 「이해관계(정치적 욕망) 때문에 목숨을 바쳐 싸울 사람」으로 지목한 사람이 金大中씨였다.
 
  ―金大中씨는 어떤 사람이고 두 사람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金泳三씨와 金大中씨 두 사람 다 네댓 차례씩 만나 보았습니다. 앞세울 지도자감으로 누가 적당한지 검토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런 사람을 내세워야지 金芝河가 나서서 왕왕대 봐야 누가 따라오겠어요. 한데 金泳三씨는 손은 크데요. 돈을 주기에 「당신이 내게 주었으니 이미 내 것이 되었다. 내 돈을 당신에게 주니 갚은 셈이다」하고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웃음이 참 좋아 매력이 있어요. 영락없는 도련님 스타일이에요. 그러나 머리가 문제였습니다.
 
  金大中씨를 처음 찾아간 것은 그가 大選에 첫 출마했을 때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전의 일입니다. 첫 만남에서 떠보려고 내가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는 사꾸라라고 하던데 어찌된 거요」했더니 두 시간 반을 떠듭디다. 나는 백기완, 황석영씨와 함께 「대한민국 3대 구라」로 불리기도 합니다만 金大中씨도 만만찮아요. 정신없이 얘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비록 3류 이론가이기는 하지만 공부는 하는구나. 기억력도 좋고, 문장 구성력을 보니 조직력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金大中씨와의 첫 만남에서 일어서면서 나는 한마디했습니다.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지도자는 말이 적어야 된다고 들었습니다」 하고요. 나중에 보니 金大中씨는 역시 독한 데가 있습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정치를 그만둔다고 했다가 어물어물 번복하는 등 행태를 보고 중앙일보에 「도둑놈 담 넘듯 하지 말라」고 썼더니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YS와 DJ 두 사람, 특히 DJ는 집권 이후 만나 보거나 무슨 제의를 받은 일은 없었나요?
 
  『집권 기간 내내 서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서운할 것도 없었어요. 우리가 지향해 온 방향에서 인물 선택을 잘못한 것이지요. 여러 가지 잘못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정치 9단」이라 마지막에는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접지 못했습니다. 남북관계를 트면서 저쪽에 돈을 갖다 준 방식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중대한 남북교섭의 역할을 시킨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하기에는 왕년의 李厚洛이 훨씬 윗길이었어요』
 
 
 
 『나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공명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金씨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물이 지형을 따라 한 곳으로 흐르듯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중심축으로 몰리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상」이었고 더 나아가 「우리 사상」이었다. 정치 얘기를 하다가도 어느덧 말머리는 사상으로 흘러들었고, 문명 이야기를 하다가도 사상이 나왔다. 그가 구축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로서의 사상, 그리고 인간과 사회가 지향할 수 있는 가치로서의 사상체계였다. 서양으로부터 빌려 온 너덜너덜한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흙에서 만들어 낸 토종 냄새가 나는 사상, 그러면서도 인류 보편성을 지닌 사상, 金씨는 시인, 혁명가이기보다 우리 민족 구성원에게 이런 사상의 토대를 제공하고 싶다는 큰 욕망을 지니고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儒·佛·仙은 물론이고 동학과 증산도, 단학에 이르기까지 종교, 사상의 편력이 어디에 이르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 사상」에서 뭔가를 찾아내고 재구성하려는 뜻은 잠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찾아낸 우리 사상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자기 앎을 알아야 「♥」이 됩니다. ♥은 대긍정의 ♥입니다. 어떻게 대긍정의 ♥에 도달하느냐, 역시 내 앎을 알아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참으로 고집 센 민족입니다. 예를 들어 불교는 이미 도입된 지 1600년이 지나 거의 민족종교화했는데도 그에 대비한 우리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부단하게 전개되어 온 것이 그 예입니다. 이처럼 자기 앎에 토대를 두고 다른 앎에 대해 알아야만 ♥의 대긍정에 도달한다는 얘깁니다』
 
  내 앎을 알아야 대긍정의 ♥에 이른다는 어려운 말로 시작했으나 金씨의 이야기는 분명한 가닥을 잡고 예의 그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문화의 대혁신이 필요합니다. 과거로 가는 문예부흥과 미래로 가는 문화쇄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예부흥과 문화쇄신을 관통하는 독특한 세계관, 그것에 토대를 두고 자연과학이 성립하고, 그것에 토대를 두고 사회과학을 구축하며, 정치·경제·교육도 그것에 토대를 두고 실현되는 것, 다른 명칭이 없으니 한 마디로 「사상」이라 불리는 그것을 찾아내고 싶었어요. 나는 그것을 구하고 싶어 이것저것 온갖 것을 집어먹으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제 삶은 실패작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어쩌면 내가 실패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더라도 뒤를 이어 내 생각을 수정하면서 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현상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은 해체의 시대입니다. 해체되고 분산되는 속에서도 중심 노릇하는 뭔가가 있고, 찾으면서도 그것에 의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해체하면서도 해체하지 않는 모순, 역설에 기초를 둔 삶이지요. 속물은 겨우 이렇게 표현하지만 고승대덕들은 이미 이를 명쾌하게 밝혀 놓았어요. 이를 현상 속에서 찾아내자면 글로벌과 로칼의 합성어인 글로칼리즘이 있고, 反美이면서 反美가 아닌 것, 미국을 비판하되 미군철수 주장이나 미국 대사관을 쳐들어가는 우스운 짓을 하지 않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효순이와 미순이의 참사를 재발 않도록 보장을 받으면서 미군철수라는 우스운 주장을 꺼내들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해체이면서 해체가 아닌 것입니다』
 
  ―미군 철수를 꺼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뭡니까?
 
  『간단하지요. 미군이 철수하면 일본이 再무장할 것이고, 중국도 당장 군사비를 늘릴 것입니다. 남북한도 그동안 군사비를 줄여 복지예산으로 쓰던 돈을 다시 군사비로 털어 넣어야 할 것이고요. 그 다음은 뭐겠습니까. 어쩌자고 자꾸 反美 얘기가 나오는지 답답해요』
 
 
『인생이란 뭔지 알면 그날 죽어도 좋다』
 
  金씨의 정신은 동학에서 증산, 그리고 단군의 神市(신시)에서 周易(주역)과 正易(정역)으로 옮겨 가면서 마침내 「내 앎을 알고 대긍정에 이르는」 체계를 완성해 놓고 있었다. 문제는 그 파장이 얼마나 클 것인지, 흔히 하는 말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인지는 미지수였다.
 
  『지난 1년간은 좀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국에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명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金씨의 예감처럼 그의 삶은 실패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또 실패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장자의 逍遙遊(소요유)편에 나오는 大鵬(대붕)처럼 그의 상상력과 세계를 꿰뚫어보는 직관이 뱁새들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아득한 창공에 있다는 점이다. 그 大鵬은 말한다.
 
  『인생이란 게 뭔지 알면 그날 죽어도 좋겠습니다. 도대체 어렵습니다』
 
  그는 그 알기 어려운 것을, 보통 사람들을 대신하여 알기 위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입력 : 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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