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시내에는 메이지천황을 기리는 메이지신궁이 있다. 7년 전 도쿄에 갔을 때 신궁 경내 쉼터에 메이지 천황의 일생을 담은 80개의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중에는 당연히 1910년의 소위 ‘일한합방(日韓合邦)’을 담은 것도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그림에는 합방조약을 체결하는 양국 고관(高官)들의 모습이나, 서울 시내에 진주한 일본군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합방 당시 경성 남대문 주변 광경’이라는 설명 아래, 초라한 서울거리의 모습을 그려 놓았을 뿐이다. 합방이 발표된 후 일본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제등(提燈) 행렬 등이 있었다는데, 왜 그런 모습 대신 생뚱맞게 남대문 주위의 모습을 그려 놓았을까?
‘합방’의 기만성과 강제성을 감추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일본의 군사적 위용과 경제적 번영을 묘사한 다른 그림들과 대조적으로 낙후되고 무기력한 조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합방’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까? 짧은 그림 설명은 ‘일청전쟁’ ‘일로전쟁’ ‘통감정치’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조선 정부의 동의를 얻어’ 운운하는 부분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문득 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종(高宗;1852~1919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종 이형(李㷩)과 메이지 천황 무쓰히토(睦仁;1852~1912년)은 같은 해에 태어났다. 고종은 1863년 11살의 나이로 즉위, 190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메이지 천황은 1867년 15살의 나이로 즉위, 1912년까지 제위(帝位)에 있었다. 비슷한 나이에 왕이 되어 비슷한 시대를 살았지만, 두 사람의 치세(治世) 동안 한일 양국의 운명은 극(極)과 극으로 갈렸다. 결국 한때 황제를 칭했던 한 사람은 망국(亡國)의 군주, 메이지의 번왕(藩王)이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죽어서 신(神)으로 모셔졌고, 지금도 일본인들로부터 ‘대제(大帝)’로 기림을 받는다.
무엇이 그들의 운명을 갈랐을까? 어떤 이들은 고종을 대단한 계몽전제군주라도 되는 양 추어올리면서, 우리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을 짓밟은 일제의 만행을 소리 높여 규탄한다.
하지만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이나 윤효정(尹孝定)의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 같은 책을 보면, 일제의 침략 이전에 이미 조선은 나라가 아니었다. 그 무책임과 부패와 무능과 분열, 그리고 국제정세에 대한 무지(無知)는 끔찍할 정도다. 청일전쟁 발발 후 주한일본공사가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강요해 올 무렵, 황현은 이렇게 탄식했다.
“경전에 ‘국가가 필시 스스로 자기를 해친 연후에 남이 치고 들어온다’고 하였으니, 아 슬프다!”
그 이후에도 임금과 신하들은 각성하지 못했고, 결국 그로부터 16년 후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나라는 이미 1905년 을사조약 때에 망했다. 그때는 항의라도 있었지만, 1910년에는 제대로 된 항의조차 없었다. 매천 황현 등 몇몇이 조용히 목숨을 끊어 선비로서의 도리를 표시했을 뿐이다. 일제 통감부는 조선주둔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려놓았지만, 그들 스스로 민망해 할 정도로 별일없이 넘어갔다. 대한제국은 그렇게 맥없이 망했다. 메이지신궁에 걸려 있는 남대문시장 주변이 평온한 모습은 그런 실상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처지가 1905년 이후 대한제국의 처지와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05년 이후 대한제국이 껍질만 남았던 것처럼 지금 자유민주주의국가로서의 대한민국도 껍질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대한제국은 황제가 무한(無限)한 군권(君權)을 갖는 전제(專制)국가였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갖는 민주국가이다. 대한제국이 망한 것은 고종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지만, 대한민국이 잘못된다면 그것은 국민들의 책임이다. 필부유책(匹夫有責)이라는 말의 무게가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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