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기자는 몇 달 만에 다시 경북 안동에 내려갔다.

아침엔 많은 비가 쏟아지더니 승용차가 문경새재를 넘자 어느새 잦아들었다. 거대한 검은 구름이 낮은 산자락까지 내려와 그 아래 길을 굽어보고 있었다. 멀리 부드러운 햇살이 창호지문으로 스며들듯 새어나왔다.

회와와 조각을 넘나드는 작가 양순열(梁順烈) 선생의 개인전이 경북도청 동락관, 원당지와 청사 주변 회랑, 정원 등지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 늘 관심이 있었지만 최근 완성한 연작 <호모 사피엔스>를 보고 싶었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지금의 인간과 가장 가까운 족속(族屬)이다. 지혜롭지만 걱정·고민덩이가 지금의 인간, 호모 사피엔스다. 작가의 연작 속에 지친 나의 모습, 여린 우리의 얼굴을 찾고 싶었다.

양순열 작가는 작년 11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선정한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상’을 수상했을 만큼 다양한 개성과 새로운 양식의 도전에 땀을 흘려왔다. 이번 개인전은 좀 더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비평가의 지속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마련된 큰 행사였다. 

<호모 사피엔스>像 

■ 호모 사피엔스와 만나다!

작가 양순열 선생은 전시관 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늘 순수한 열정으로 화양연화(花樣年華) 같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순간을 포착해온 그였다.

<호모 사피엔스>像 

이번에는 <호모 사피엔스>를 들고 나왔다.

검은 색 몸을 들여다보면 사람 같지만, 사람 같지도 않은, 어쩌면 우리와 가장 닮은, 그러나 닮지 않은, 괴이한 형상들이었다. 

과장을 보태어 표현하자면, 그 형상들은 고집스런 이마가 얼굴 전체로 이어져 있거나 묘하게 슬픔이 보이고, 혹은 타는 듯한 분노를 담고 있기도 했다. 원망과 눈물과 한숨이 덕지덕지 쌓여 있는 듯이 보이거나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다며 입을 앙다문 듯 보였다. 저마다 운명을 짊어진 채 홀로 주저앉은 모습이랄까.

기자 내면의 어둠이 저 <호모 사피엔스>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최대한 흥분하지 않고, 작품을 보려고 애를 썼다.

 <호모 사피엔스 타워>像

높이 3m가 넘는 설치작품인 <호모 사피엔스 타워>를 보았다. 6층 높이의 타워에는 호모 사피엔스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문득 작가 양순열이 저 6층 높이의 군상(群像)들을 수레로 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일까.

저 호모 사피엔스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았다. 그들은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절실한지 알고 있었다. 얼버무려 말하고 있지 않았다. 문득 유치환의 시 <깃발>이 떠올랐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유치환의 <깃발> 전문

양순열 작가의 <호모 사피엔스> 연작들을 만나면서 마음이 슬퍼졌다. 보면 볼수록 많은 이야기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저마다 ‘꽃 한번 활짝 피웠다가 본향으로 돌아가는’ 존재들처럼 그들은 서로 다른 형상,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훨훨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 춤은 날카로운 가시가 있었다. 가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형상만으로 관람객의 마음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겨울이 되어서야만 그 결기가 드러나는 송백(松柏)’(유경숙의 《세상, 그물코의 비밀》)처럼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았다.

 <호모 사피엔스 – 경배>  446x214cm, 캔버스 위 유화

유화 <호모 사피엔스 – 경배>라는 작품과 만났다.  446x214cm(캔버스 위 유화)나 되는 대작이다. 이 작품을 한참 바라보았다. 1857년과 59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알려진 밀레(Millet)의 <만종>이 떠올랐다. 

<만종>은 화면을 중심으로 수직, 수평으로 나누어지는 매우 안정감 있는 구도가 특징인 그림이다. 추수하는 이의 경건함이 느껴진다. 

<호모 사피엔스 – 경배>는 좀 더 추상적이다. <만종>보다 고개를 덜 숙였을지 몰라도 경건함은 밀레의 작품보다 더 엄숙하다. 안개와 같은 불투명한 색의 층위가 몽환적으로 느껴진다. 작품 속 고개를 살짝 숙인 이가 오른쪽에 보인다. 왼쪽에 선 이는 키가 아주 크다. 그러나 그이도 고개를 숙였는데 그 머리가 댕강 잘려나갔다.

이보다 무시무시한 경건이 또 있을까. 자신을 버리고 완벽하게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작가의 메시지가 놀라웠다. 마치 정신의 승리처럼 느껴진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굽다>像

<신이 흙으로 인간을 굽다>라는 작품을 보았다. 부엌의 식기 건조기 속에 작은 토우(土偶)가 들어 있었다.  작가는 버려진 식기건조기를 주워서 작품으로 재활용했다고 한다.

그는 오래 전부터, <호모 사피엔스> 연작을 내놓기 전부터 토우 작품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수 천 점을 빚었으리라. 토우를 통해 인간의 근본과 가지가지 속성들에 푹 빠져서 작업을 했었다. 작가 양순열의 말이다.

“흙과 신, 그리고 인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신은 흙에 영혼을 불어 넣어 알맞은 온도에서 인간을 굽습니다. 흙은 인성(人性)을 상징합니다.”

작가는 토우에서 시작해 호모 사피엔스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했다. 좀 더 드라마틱한 인성(人性)을 작품 속에 불어넣은 것이다.

예루살렘 뮤지엄 관장과 푸에르토리코 뮤지엄 관장을 역임한 미술평론가 코린 팀시트(Corinne Timsit) 씨는 <호모 사피엔스> 연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코린은 프랑스 파리에서 발행되는 현대미술 잡지 《아트 프리미엄(art premium)》의 편집장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양순열이 지난 15년간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던 주제입니다. 동물적인 본능으로부터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한 인류의 특이성을 거대한 스케일의 인간 진화론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양순열은 자신의 손으로,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반죽하고 빚어낸 수백 개의 호모 사피엔스에 고유한 형태와 표정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조각된 호모 사피엔스에게 생명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그 존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에도 개입합니다. 문명은 단점과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전지전능한 ‘신적인’ 능력의 개입에 의해 창조되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작품 <대모신 오똑이> 가운데 양순열 작가가 서 있다.

■大母神 오똑이를 경배하다!

하지만 양순열 작가는 <호모 사피엔스> 연작과 같은 다소 비극적 세계관을 가진 작가가 아니다. 어머니를 대지(大地)의 신으로 여기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의 작품 <대모신(大母神) 오똑이> 연작들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근본적 분리를 해소하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과 사물들이 공생하고 협력하는 방법을 제안”(윤재갑 큐레이터)하고 있다. 

작가는 이 아름다운 대모신을 오똑이라 칭한다. 표준어는 ‘오뚝이’지만 어감이 좀 더 다부지고 억척스럽게 보여 ‘오똑이’로 쓴다. 겉보기는 볼링 핀처럼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절대 넘어지지 않는, 넘어졌다가도 금방 일어선다. 우리의 어머니처럼.

세상의 어머니는 언제나 오뚝이, 아니 ‘오똑이’다. 쓰러지는 법이 없다. 죽지 않는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몸이 열 개라도 거대한 불 속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다. 다 던져 재가 되어도 어머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

양순열 작가의 오똑이는 그러한 어머니다. 대모신, 영어로 표현하면 ‘Mother Earth’이다. 

자세히 보면 오똑이는 고전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완벽한 신체, 완벽한 정신의 조화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리스 시대 조각에서 남성상은 목 위가 몸 전체의 7분의 1, 여성상은 8두신을 지향했다고 한다. 양순열의 오똑이는 7분의 1도, 8두신도 아니지만 머리와 가슴, 긴 치마가 나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도 한결 같다. 완벽한 비례와 균형이 느껴진다. 

 경북 도청 청사 주변에 세워진 <대모신 오똑이>像.

연작 <대모신 오똑이> 작품들은, 작가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자연의 정확한 모방을 목표로 한 미메시스(mimesis)를 담고 있다. 분명 리얼리즘은 아니지만 감각이 아닌 개념으로 우리의 완벽한 어머니를 모방하고 있다.

무지개 빛깔 ‘오똑이’상도 인상적이다. 무지개는 자연의 가장 화려한 색상의 조화를 상징하지만 편안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양순열 작가의 말이다.

“무지개 색으로 칠해진 ‘오똑이’상은 다양한 생각과 존재들에 열려있는 시민 주체들을 상징합니다. 유교에 깊이 뿌리내린 경북의 전통문화가 타자와 소수자를 더 크게 감싸 안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밝고 희망찬 세계 시민으로 성숙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은 양순열의 조형세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양순열의 작품들은 꿈과 사랑과 어머니 같은 개념어로 이루어져 있다. 구도의 단순화, 절제된 화면은 양순열 회화의 주요 특징이다. 더불어 배경 역시 단순미를 강조한다. 단일한 색상으로, 그것도 커다란 여백처럼 처리되기 마련이다.

색채는 2차색 위주, 그것도 밝고 경쾌하면서 온화한 색상을 선호한다. 인체도 기호화하는 상징성, 이 역시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런 배경 위에서 펼쳐지는 작은 연극, 정말 환상극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이면서 상징적인 도상을 배치시킨다. 그것은 사실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나타난다. 혼란한 사회, 질곡과 모순의 시대, 이런 어둠 속에서 양순열의 작품은 하나의 청량제처럼 빛을 발휘하고 있다.

어둠의 현실에서 꿈과 사랑의 세계로 인도하는 전령사 같은 작품, 양순열이 지향하고 있는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