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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 미국 《타임》지 독자들이 선정한 ‘20세기 최고 인물’

[阿Q의 ‘비밥바 룰라’] 《록의 시대-저항과 실험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본 로큰롤 선구자 10명 ①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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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로 나온 《록의 시대-저항과 실험의 카타르시스》는 프랑스 작가 알랭 디스테르(Alain Dister)가 썼다. 1996년 국내 번역되었다. 역자는 음악 평론가인 성기완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로큰롤 선구자 10명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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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 디스커버리 총서로 나온 《록의 시대-저항과 실험의 카타르시스》(1996)
1945년 제2차 대전이 히로시마의 섬광과 함께 끝이 났다. 미군 장병들, ‘GI’들은 평화와 행복한 가정을 기대하고 귀국했지만 이미 예전의 가치는 죽어 가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보수적인 백인 어른 세계의 낡은 소리에 등을 돌렸다. 흑인 가수의 신선하고 위트 있는 사운드가 그들이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로큰롤’이란 용어는 1940년대 미국 흑인들 사이에 유행한 육감적 춤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다.
 
말 뜻 자체가 성행위를 암시한다. 55년 빌 헤일 리가 ‘리듬 앤 블루스(R&B)’와 ‘컨트리 앤 웨스턴’을 섞어 만든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Rock Around the Clock, 하루 종일 로큰롤을)’이 인기를 얻으며 ‘로큰롤’이란 용어가 확산됐다는 게 정설. 하지만 초기엔 R&B와 동의어처럼 쓰였다고 한다.
 
백인 청중을 확보했던 R&B 계열 흑인 뮤지션 리틀 리처드와 척 베리가 ‘로큰롤 선구자’로 꼽히는 것도 그래서다. 비틀스, 롤링 스톤스 같은 60년대 백인 록밴드 대부분이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척 베리는 짧고 강렬한 기타 리프를 이용한 자극적 연주로 록 사운드 전형을 보여줬다. ‘로큰롤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반항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음악과 이미지로 로큰롤을 대중화시킨 주인공. ‘로큰롤’은 영국 등 유럽으로 건너가 청년 하위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1 . 엘비스 프레슬리
 
1999년 12월 30일, 미국 《타임》지(誌) 독자들은 ‘20세기 최고 인물’로 엘비스 프레슬리를 선택했다. 타임지는 금세기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상대성이론’의 창시자 아인슈타인을 선정했지만 타임지 독자들은 아인슈타인을 5위로 평가했다.
 
타임 웹사이트가 인터넷 독자들의 투표결과에 따르면 엘비스 프레슬리는 62만4574표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59만9557표를 얻은 이츠하크 라빈 전(前) 이스라엘 총리. 아돌프 히틀러가 51만6408표를 얻어 3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그 뒤를 이었다. 반면 금세기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2위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3위는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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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는 흑인의 목소리와 감성을 가진 백인이었다.
《팝 아티스트 대사전》(세광음악출판사 刊, 1986년 2판)에 따르면, 엘비스 프레슬리는 1935년 1월 8일 미시시피의 이스트 튜펠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노래했고 신앙 부응회 등에 부모를 따라다녔다. 11살 생일 때 기타를 선물 받았다. 1948년 7월 테네시의 멤피스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고 1953년 6월 고교 졸업 후에는 트럭 운전사가 되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My Happiness’를 녹음하기 위하여 지방의 군소회사인 선 레코드에 갔다.
 
그곳에서 기타리스트인 스코티 무어(1931년 12월 27일 테네시의 훔볼트 태생) 및 베이시스트인 빌 블랙(1926년 9월 18일 멤피스 태생. 1965년 10월 21일 멤피스에서 사망)과 함께 팀을 구성하고 몇 개월 동안 연습을 했다.
 
1954년 7월 컨트리 곡인 ‘Blue Moon of Kentucky’와 ‘That's All Right (Mama)’를 녹음했다. 프레슬리는 1954년 8월 10일 멤피스의 오버턴 파크에서 직업 가수로서는 최초로 대중 앞에 섰으며, 그의 정열적인 거친 목소리와 섹시한 개성으로 청중들을 사로잡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프레슬리는 곧이어 선 레코오드에서의 2차, 3차 싱글이 지역 히트가 됨에 따라 자신을 ‘힐리 빌리 캣’으로 선전하며 무어, 블랙과 함께 남부를 순회하였다. 프레슬리의 잠재적인 가능성은 레코드 회사들을 일대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었으며, 결국 RCA-Victor가 치열한 쟁탈전 끝에 11월에 1955년 당시로는 놀라운 금액인 3만5000 달러에 그와 계약을 했다.

1956년 1월 엘비스 프레슬리는 기타리스트인 스코티 무어와 쳇 앳킨스, 베이시스트인 비블랙과 드러머인 D. J. 폰타나의 반주로 내쉬빌에서 그의 최초의 레코딩 세션을 완성시켰다. 프레슬리는 1956년 1월 28일 도지 브라더즈 신에 출연함으로써 CBS의 방송망을 통하여 전국적인 TV 데뷔(당시 미국 CBS TV ‘에드 설리번 쇼’는 엘비스를 출연시키면서도 그의 허리 아래 모습은 비추지 않았다.)를 했다.

그 직후 RCA에서의 첫 번째 곡인  ‘Heartbreak Hotel’이 발표되어 컨트리 앤드 웨스턴, 리듬 앤드 블루스 그리고 팝 부야에서 대히트를 날렸다. TV와 콘서트에서 프레슬리의 노골적인 성묘사에 대한 찬반양론의 화제 속에서 프레슬리는 발라드곡인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 ‘Don't Be Cruel / Hound Dog’으로 대히트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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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는 수 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이후 놀라운 성공은 계속 되어서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 ‘Don't Be Cruel/Hound Dog’, ‘Love Me Tender’, ‘Love Me, Too Much’, ‘All Shook Up’ 등으로 잇달아 대히트를 터뜨렸다. 1956년에는 첫 영화인 <러브 미 텐더>가 개봉되었고, 이어서 1957년에는 ‘Loving You’ ‘Jailhouse Rock’ 등 무수한 히트곡을 터뜨리며 로큰롤 광풍을 주도했다.
 
사람들은 엘비스로부터 록의 존재를 알았고 록의 열정과 도발성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젊은이들의 반항을 상징했다. 영화로 치면 기타를 맨 말론 브란도나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딘이었다. 그러나 충격 파장은 두 배우보다 훨씬 컸다.
 
특히 거침없는 허리의 율동이 엄청난 반향을 불렀다. 비틀스의 존 레논은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어떤 것도 내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50년대는 엘비스와 로큰롤의 시대였다.



2. 척 베리
3. 비틀스
4. 롤링 스톤스
5. 아레사 프랭클린
6. 밥 딜런
7. 핑크 프로이드
8. 지미 헨드릭스
9. 레드 제플린
10. 섹스 피스톨스

입력 : 20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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