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년 7월 서울 이마트 용산점에서 모델들이 칠레산 화이트 와인 신상품 '소비뇽 블랑'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내 수입 와인 시장의 흐름이 달라지고 있다. 한때 와인은 묵직한 레드 와인을 중심으로 소비됐지만 최근에는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 비중이 빠르게 늘고 있다. 업계에서는 “한국인의 식문화와 음주 방식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와인업계에 따르면 2025년 국내 전체 수입 와인 가운데 화이트 와인 비중은 33%대를 기록했다. 2020년 약 19% 수준이던 점을 감안하면 불과 몇 년 사이 소비 구조가 크게 바뀐 셈이다. 반면 레드 와인 비중은 50% 초반까지 내려왔다.
특히 최근에는 칠레산 화이트 와인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올해 2월 기준 국내 화이트 와인 수입 통계에서 칠레는 물량 기준 1위를 기록했다. 업계에서는 “가볍고 산뜻한 스타일을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칠레 화이트 와인이 수혜를 보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와인 유통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와인을 어느 정도 ‘격식 있는 술’로 접근했다면 최근에는 집에서 음식과 함께 편하게 즐기는 문화로 바뀌고 있다”며 “특히 차갑게 마실 수 있고 음식과 부담 없이 어울리는 화이트 와인 선호가 확실히 늘었다”고 말했다.
기후 변화도 소비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 나온다. 무거운 타닌감보다 시원하고 산뜻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실제 대형마트와 편의점에서도 화이트 와인 진열 공간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세계 유일의 까르메네르 강국” 칠레의 상징
칠레 와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품종이 까르메네르(Carménère)다. 업계에서는 사실상 “칠레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상징 품종”으로 평가한다.
원래 까르메네르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재배되던 품종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필록세라 사태로 거의 사라졌다. 필록세라는 포도나무 뿌리를 갉아먹는 진딧물 계열 해충으로, 당시 유럽 포도밭 대부분을 초토화시킨 와인 산업 최대 재앙으로 꼽힌다.
이후 칠레에 건너온 포도나무가 살아남아 메를로 (merlot) 품종로 오인되어 재배되다가, 1994년 DNA 분석을 통해 카르메네르 품종으로 공식 확인되었다. 원산지인 프랑스 보르도에서는 거의 사라진 품종이 대서양을 건너 칠레에서 되살아난 난 점은 그 자체로 기적에 가까운 이야기로 여겨진다.
칠레 와인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원산지인 프랑스에서는 사실상 사라진 품종이 대서양을 건너 칠레에서 부활한 셈”이라며 “현재 전 세계 까르메네르 생산량의 90% 이상이 칠레에 집중돼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세계 시장에서 ‘까르메네르=칠레’라는 공식이 형성돼 있다는 설명이다. 블랙체리·자두 계열의 검은 과일 향과 다크초콜릿, 후추, 풋고추를 연상시키는 허브 향이 특징이며 부드러운 타닌과 긴 여운으로 차별화된 개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와인 유통업계 관계자는 “까르메네르는 다른 나라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품종이라는 희소성이 있다”며 “소비자 입장에서는 칠레 와인을 선택해야만 경험할 수 있는 상징적 스타일이라는 점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칠레 현지에서도 매년 11월 24일을 ‘까르메네르 데이’로 지정해 대대적인 홍보 행사를 열고 있다.
칠레 아콘카과 밸리에 위치한 에라수리스(Errázuriz)의 ‘돈 막시미아노 아이콘 와이너리’. 안데스 산맥 자락 아래 펼쳐진 포도밭과 현대식 와이너리 전경이 어우러져 있다. 이곳은 에라수리스가 보유한 대표 포도 재배지 가운데 하나로, 칠레 프리미엄 와인의 상징인 ‘돈 막시미아노’가 생산된다. 사진=조선일보DB
“안데스와 아타카마, 파타고니아의 자연”…칠레 와인의 경쟁력
칠레 와인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독특한 자연환경이 있다.
칠레 와인 산업은 16세기 스페인 선교사들이 포도나무를 들여오면서 시작됐다. 이후 19세기 프랑스 보르도 품종이 도입되며 현대 와인 산업 기반이 마련됐다.
칠레 와인 전문가에 따르면 칠레 와인의 가장 큰 경쟁력은 사실상 천혜의 자연 조건을 꼽는다. 동쪽 안데스 산맥, 서쪽 태평양, 북쪽 아타카마 사막이라는 거대한 자연 장벽 덕분에 병해충 피해가 적고 포도 재배 환경이 매우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포도나무 뿌리를 공격하는 필록세라 피해가 거의 없다는 점은 칠레 와인의 상징적 강점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칠레에는 100년이 넘는 올드바인도 상당수 남아 있다.
큰 일교차 역시 품질 경쟁력을 높이는 요소다. 낮에는 강한 햇빛을 받고 밤에는 기온이 크게 떨어지면서 포도의 산도와 향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안데스산맥에서 내려오는 청정 수자원과 태평양의 서늘한 기운은 포도의 향과 산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 조건 덕분에 칠레에서는 산뜻한 화이트 와인부터 구조감 있는 프리미엄 레드 와인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이 폭넓게 생산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식과 잘 맞는다”…FTA 효과도 한몫
국내 시장에서 칠레 와인이 강세를 이어가는 이유로는 뛰어난 음식 궁합도 꼽힌다.
대표적으로 소비뇽 블랑은 생굴, 해산물, 해물파전과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까르메네르는 불고기·갈비찜·제육볶음과 조화를 이루고, 까베르네 소비뇽은 스테이크와 LA갈비 등에 어울린다. 피노 누아는 삼치·연어·고등어 같은 생선구이와 궁합이 좋다는 평가다.
와인 유통 관계자는 “한국 소비자들은 와인을 어렵게 접근하기보다 음식과 함께 즐기려는 경향이 강하다”며 “칠레 와인은 가격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고 한식과 잘 맞아 접근성이 높다”고 말했다.
가격 경쟁력도 중요한 요소다. 2004년 발효된 한·칠레 FTA 이후 칠레 와인은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가격대를 형성했다. 업계에서는 “1만~3만원대 데일리 와인 시장에서 칠레 와인의 존재감이 특히 강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앞으로도 화이트 와인 중심 성장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와인 유통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와인이 특별한 날 마시는 술이었다면 지금은 일상 속 음식 문화로 들어오고 있다”며 “그 변화의 중심에 칠레 와인이 있다”고 말했다.
안데스의 햇살과 파타고니아의 바람을 담은 칠레 와인이 한국 식탁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