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4년 8월 15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노은동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 참석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경기장에 들어가기 앞서 야외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카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4월 21일 ‘우리들의 곁’에서 ‘하느님의 곁’으로 떠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교황의 조부모는 이탈리아에서 식료품가게를 운영하던 중산층이었다고 전한다. 할머니 로사 마르게리타는 독재자 무솔리니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만큼 파시즘의 등장에 염증을 느껴 앞서 이민한 형제를 따라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1929년 1월, 더 나은 삶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도착한 이탈리아 사람들 가운데는 24세의 마리오 주세페 프란치스코도 있었다. 그는 1935년 이탈리아 피에 몬테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레지나 마리아 시보리와 결혼, 이듬해인 1936년 12월 17일,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Jorge Bergoglio, 프란치스코 교황)를 낳았다.
어린 베르골료의 가정은 넉넉하지 않았다. 소년은 어린 시절 ‘라사 노스트라나(Rassa nostrana)’라는 시를 자주 외웠다고 한다.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 니노 코스타(Nino Costa)가 지은 이 시는 이민자들의 고된 삶과 운명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하여 한 절기 손실로 망치고
노동으로 상하거나
발병하는 것보다 더 힘겨운 것은,
낯선 타향의 성당 뒤뜰
차가운 묘지로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니.”
베르골료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13세에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버지가 회계를 봐주던 양말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7세에는 제약 회사에서 일하며 식품화학을 배우는 공업학교에 진학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1시까지 공장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밤 8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제약 회사에 다닐 때 파라과이 여성 에스테르 발레스트리노 데 카레아가리를 무척 좋아했다고 훗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녀는 공산주의자였는데, 독재 정권 말기에 그녀의 딸과 사위가 납치되었고, 그녀 역시 얼마 후 실종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녀는 두 명의 프랑스 수녀와 함께 납치되어 살해당했다. 이들의 시신은 산타크루스교회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베르골료는 학창 시절부터 아르헨티나의 여느 아이들처럼 축구를 좋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산 로렌조 데 알마그로’의 열렬한 응원자가 되었다. 이 팀의 이름은 가난한 동네 아이들을 폭력과 갱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축구팀을 만든 어느 본당 사제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당시 그의 아버지 마리오 주세페 프란치스코는 철도 회사의 경리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교황은 아버지가 일요일에도 오후에는 큰 장부들을 거실 탁자에 펼쳐 놓고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이탈리아 음악 LP판을 틀어 놓곤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이민자들처럼 어떤 이유에서든 자기 땅에서 떠나야 했던 이들, 난민들과 장애인과 노인과 어린아이들,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호소해 온 것은 그의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고 보아도 좋았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미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카퍼레이드를 하며 신자들을 만나고 있다. 사진=조선DB
17세가 되던 어느날, 그는 고백성사를 보면서 ‘이상한 일’을 겪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것에 압도되는 느낌이” 무방비 상태의 자신을 덮쳤는데 “그를 부르실 때의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 때문에 종교적 소명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제 ‘하느님께서 먼저 그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20세가 되던 해에는 폐렴을 앓고 오른쪽 폐 일부를 절제했다. 생사를 오가는 체험을 하고 난 다음 해에, 그는 더욱 강한 종교적 확신을 갖고 예수회에 입회했는데 할머니가 가장 기뻐했다고 전한다.
마르게리타 할머니는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에도 할머니의 친필 유언장이 책갈피에 꽂혀 있는 《성무일도》를 사용했는데, 그 내용은 오래토록 교황의 영혼에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내 마음에 있는 좋은 것을
모두 다 줘도 아깝지 않은 내 손자들이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 주소서.
그리고 행여 언젠가
내 손자들이 고통과 질병으로,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아파한다면, 이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십자가 발치에 계신 성모님께서는
가장 고결하신 주님의 감실을 보며 탄식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은 너무도 아픈 상처에
한방을 향유를 바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의 신학교에 들어간 그는 사제품을 받기 전에 이미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33세가 되던 1969년에 사제가 되었고 그로부터 4년 후에 종신서원을 했다(1973년). 놀랍게도 같은 해에 6년 임기의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선출되었다(1973~79년).
그는 유례없는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관구장 임기가 끝나자 6년 동안 신학교 학장을 맡았다(1980~86년). 그로부터 6년 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좌주교로(1992년), 다시 5년 후에는 부교구장 주교로(1997년), 그 다음해에는 대교구장으로(1998년), 3년 후에는 추기경으로(2001년) 서임되었다.
호르헤 베르골료 신부는 1990년대 젊은 주교 시절 ‘빈민 사목 사제단’을 부활시켜 빈민촌에 파견한 일도 있다. 2001년 추기경 시절에는 실직자, 노숙자 등 주변부로 밀려난 가난한 사람에 대해 연구하는 ‘사회적 책임 연구소’라는 연구기관을 설립한 일도 있다.
훗날 알려진 사실이지만, 추기경으로 서임되고 4년 후에 열린 콘클라베에서 그는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었다. 진보성향 추기경들의 표가 그에게 쏠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2005년 4월 19일, 교회의 극한 대치를 피하기 위해 라칭어 추기경에게 투표해 달라고 지지자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호소했다.
그리고 콘클라베가 끝난 다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가 묵묵히 교구장직을 수행했는데, 같은 해 11월 19일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3년 후에는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에 재선되고(2008년), 결국 2013년에 새 교황이 되어 바티칸으로 돌아왔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나의 형제 추기경들이 로마의 주교를 찾기 위해서 지구 끝까지 갔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황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문화, 정치,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라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으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을 해 왔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을 통해 교회 자신이 복음화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의 교회 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라고 강조했다.
교황은 2014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한국을 방문하여 ‘아시아 청년대회’와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주재했다. 그리고 수많은 만남과 연설과 행동을 통해, 지친 한국인들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었다.
교황청은 폐렴과 그 합병증으로 투병해오던 4월 21일 오전 7시 35분 교황이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케빈 패럴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장관은 “오늘 아침 로마의 프란치스코 주교(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성부(聖父)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전 생애는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데 헌신했다”며 교황의 선종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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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의 모국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벽화에 21일 선종한 교황과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가 함께 그려져 있는 모습. 사진=AP 연합뉴스
다음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남긴 어록이다.
긍정적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영적 생활을 가꾸십시오.
동시에 밖으로 나가서 타인을 만날 준비를 하십시오.
특히 가장 무시당하고 가장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2013년 7월 6일)
단일한 생각이라는 현상은 인류의 역사에서 불행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지난 세기에 우리 모두는 단일한 생각이라는 독재가 결국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결과를 낳았음을 목격했습니다.
(2014년 4월 10일)
마태오가 예, 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 나서는 데는 한순간이면 족했어요.
그 순간은 자비를 살고 자비가 주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
(2013년 7월 5일)
동성애자인 사람이 하느님을 찾고 선한 의지가 있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정죄하리오?
(2013년 7월 29일)
한반도 평화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왔습니다.
(2014년 8월 14일)
구체적인 사랑을 아는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 기준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사랑하기입니다.
말은 바람에 날려가 버립니다. 오늘은 여기 있지만 내일은 사라져 버립니다.
(2014년 1월 9일)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일관성이어야 합니다.
인생의 모든 것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그리스도인답게 느끼고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적 삶의 일관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행동과 느낌과 생각으로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2014년 2월 27일)
희망은 관대함 안에서 넘쳐 흐릅니다. 희망은 계산하지 않고, 은연중에 요구하지 않으며, 잇속을 챙기지 않습니다. 희망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바로,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부서진 마음을 치유하며 온갖 종류의 속박에서 우리를 풀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은총의 해를 시작하면서 저는, 세상 만민이 삶의 존엄성을 되찾고 희망의 길을 다시 나서게 할 수 있는 세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부채의 위기를 이겨 내고, 모든 이가 용서받은 죄인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선, 부유한 국가들은 생태적 빚을 인정하고, 빚을 갚지 못할 처지에 놓인 국가들의 부채 탕감을 위하여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부름받았음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당연히 이것이 금융과 채무의 악순환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그저 일회적인 자선 행위로 끝나지 않으려면, 새로운 금융 체계가 고안되어 민족들의 연대와 화합에 기초한 ‘세계 금융 헌장’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또한 저는, 모든 나라에서 사형 제도를 폐지할 것을 제안합니다. 실제로 이 형벌 제도는 생명의 불가침성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용서와 재활에 대한 모든 인간적 희망을 없애 버립니다.
나아가, 전쟁으로 점철된 이 시대에, 군비에 들어가는 공적 자금의 일정 비율을 국제 기금 설립을 위하여 사용합시다. 이 기금은 기아 근절 그리고 빈곤국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의 증진과 기후 위기 대처를 목표로 하는 교육 활동 지원을 위하여 사용될 것입니다.
(2025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에)
나는 우리가 '평화는 가능한 일'이라는 희망을 새로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전 세계에서 반유대주의 정서의 성장은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끔찍한 분쟁이 계속해서 죽음과 파괴를 일으키고 극적이고 비참한 인도주의적 상황을 만들고 있는 가자지구의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휴전을 선언하고 인질들을 석방하고 평화의 미래를 열망하고 있는 굶주린 사람들을 도우십시오. 종교와 사상, 표현의 자유 그리고 다른 이들의 시각에 대한 존중 없이는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취약하고 소외된 이들, 그리고 난민들을 향해 종종 얼마나 많은 경멸이 가해지는가요?
오늘날 나는 우리 모두가 다시 새로 희망하고, 먼 땅에서 익숙하지 않은 문화와 삶과 사고의 방식을 가지고 온 우리와 다른 이들을 포함해 서로에 대한 믿음을 되살리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방어 수단을 갖춰야 한다는 요구가 재무장에 대한 경쟁으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부활절의 빛은 분열을 일으키고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결과를 가져오는 장벽들을 무너뜨리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세계에 정치적 책임을 지닌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른 이들과의 고립으로만 이어질 수 있는 '공포의 논리'를 따르지 말 것을 촉구합니다. 대신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을 돕는 '평화의 무기'를 사용해 주십시오.
(부활절인 4월 20일 교황이 전한 전 세계에 전하는 축복과 강론 '우르비 에트 오르비' 중에서. Urbi et Orbi는 라틴어로 '로마와 전 세계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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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선출 방식인 콘클라베에 대해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서 2013년 3월 12일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 시작에 앞서 추기경들이 비밀을 엄수하겠다는 맹세를 하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선거 결과가 공식 발표될 때까지 서신, 전화 등 어떤 통신 수단으로도 외부와 연락할 수 없다. 전면에 미켈란젤로의 벽화‘최후의 심판’이 보인다. 사진=AP 뉴시스
콘클라베는 교황 서거 후 15일~20일 뒤에 열리게 된다.
교황 선출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절차로, 콘클라베라는 비밀 회의를 통해 이뤄지는데 이 과정은 이렇다.
만 80세 이하의 추기경만 투표권을 가진다. 영국 BBC는 이날 전 세계에 252명의 추기경이 있으며 선거권을 가진 80살 미만 추기경은 138명이라고 전했다.
모든 투표는 비밀로 진행되며, 추기경들은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논의한다.
새 교황이 되려면 투표에서 3분의 2 이상의 표를 획득해야 하며 투표는 바티칸 시국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진행되며, 추기경들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상태로 머물게 된다.
투표가 끝난 후, 투표용지를 태워 연기를 통해 결과를 알린다. 검은 연기는 선출 실패를, 흰 연기는 새 교황 선출 성공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전통과 규율을 중시하며, 교황 선출의 공정성과 비밀성을 유지하기 위해 엄격히 관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