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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책] 자살하려 수면제 털어넣던 열입곱 소녀가 '김혜자'가 되기까지, 김혜자의 ‘생에 감사해’ (2022, 수오서재, 17,000원)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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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이랄까,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은 읽지 않는 버릇이 있다. 멀찍이서 지켜보다 시간의 풍화를 거치고도 모양새가 괜찮아 보인다 싶으면 그때서야 읽어본다. 그런 이유로 배우 김혜자의 책 ‘생에 감사해’도 부러 읽지 않았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 책을 만났다. 디자이너 진태옥 선생님의 작업실에 여러 권이 쌓여 있었다. 진태옥 선생님은 이야기를 끝내고 나오는 내 손에 책을 들려줬다.

 

책장 한 켠에 꽂아놓은 채 얼마가 흘렀을까, 진 선생님이 떠올랐다. 꺼내들어 읽기 시작했다. 단순히 속편한 노후를 보내는 한 배우의 감상이 아니라, 한 소녀가 시대에 새겨진 배우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슬프고, 재밌고, 감동적이다.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다.


그가 수식이 필요 없는 배우 김혜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크게 세가지다.


첫째, 공부다. 김혜자가 배우를 하겠다고 하자, 부친 김용태 전 재무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유명한 배우의 한마디는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 못지않게 영향력이 있다... 공부를 많이 해라 책을 많이 읽어라.”

들어도 따르지 않으면 그만인데, 그는 우직하게 숙제처럼 책을 읽어나갔다. KBS 공채 탤런트 1기로 뽑힌 뒤 매일같이 책상에 앉아 세계명작을 읽었다. 톨스토이의 ‘부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끝까지 다 읽었다고 한다. 세권 모두 꽤나 두꺼운 책이다. 이건 대단한 거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이들 중에도 저 책 세권을 다 안 읽은 이들이 태반이다. (노어노문학과 수업을 많이 들어서 확실히 안다!)

‘안나 카레니나’를 단순히 안나의 불륜을 그린 소설이 아니라 ‘레빈’(등장인물 중 한 명)의 이야기로 읽어낸 점도 인상깊다. 독해력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해석이다.


둘째, 연기 공부다.

공채 탤런트가 됐지만, 연기에 자신감을 잃고 육아에 전념하던 그는 연극 무대에서 연기의 기본기를 닦게 된다. 실험극장에서 연기 공부를 하게 된다. 탤런트 동기들은 일찌감치 드라마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던 때였다. 그는 남산 드라마센터, 실험극장 등에서 여러 편의 연극에 출연하며 연출자들의 감독 아래 움직이는 법, 말하는 법 연기의 기본기를 쌓아나간다. 이 시간들 덕분에 그는 배우로서 더 높이 오를 수 있었다.


세 번째, 새로운 연기에 대한 도전이다. 

늘 ‘전원일기’, ‘엄마의 바다’ 같은 작품만 하지 않았다. 짐승같은 모정을 그린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 푼수떼기 엄마 역할을 한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 얄미운 엄마로 변신한 영화 ‘마요네즈’. 다양한 작품에서 한계에 도전했다. 직업 분야를 불문하고 귀감이 되는 대목이다.


이런 노력들 때문에 그는 자부심을 길러내고 간직할 수 있었다. YS 때, 청와대 행사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행사 전, 정원 벤치에 앉아 쉬고있었는데 직원이 와서 ‘영부인이 앉는 자리니 일어나라’고 했단다. 김혜자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했다는 답변에 웃음이 터졌다.

“미안합니다만, 영부인께서도 배우 김혜자가 앉아 쉬었다고 말씀드리면 기뻐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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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들려주는 인생 얘기를 따라가며 한국 드라마의 두 보물 김정수, 김수현 작가를 만날 수 있어서 또한, 행복한 독서였다. 지금의 K 콘텐츠 전성기는, 이 두 작가의 영향력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마음 밭이 고운’ 김정수 작가의 드라마, ‘끝까지 밀어붙여 극과 극으로가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그리고 그 속에서 울고 웃은 김혜자와 국민들. 그리운 드라마 왕국시대였다.

 


책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상처를 숨기지 않았다는 점. 책의 말미엔 그가 어릴 적, 아버지가 배다른 동생을 데려온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그로 인해 어두워진 사춘기, 갑자기 생긴 연년생 동생 때문에 어쩌면 더 상처받으며 살았을 남동생의 자살.


책 초반 ‘나는 우울한 성품을 타고났다’고 회고하길래 의아한 참이었다. 열일곱살 나이에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했다기에 이유가 뭘까 싶었는데 끝까지 읽고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다른 가족들을 외면했다는, 아버지에게 더 이상 기댈 수 없다는 불안감이 마음에 고여 근원적 슬픔이 된 게 아닐까. 상처를 담담히 드러낸 대목을 읽으며, 어쩌면 김혜자는 이 책을 다시없을 자서전으로 생각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사람이 아닌 세대에게 기억된다는 것. 그렇게 되기 위해 인간 김혜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김혜자의 책이자, 한국 드라마의 책, 한국 현대사를 담은 책이다. 오늘도 신에게 감사하다는 그의 고백 속에 삶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글=하주희 기자

입력 : 202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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