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석학 베를린자유대 박성조 교수는 14일 고향인 부산 기장군에서 고향의 미래에 대해 강연했다. 이날 특강은 기장독립운동사연구회가 마련했다. 사진=기장독립운동사연구회
“해외에서 평생을 살아도 제 마음 속에 늘 고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향을 위해, 고향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14일 베를린자유대 박성조 종신교수(朴聖祚·경제학 정치학)가 고향인 부산 기장군으로 내려갔다. 옛 친구와 만나 고향 땅에서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아닌 기장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큰 지자체나 무슨 관변단체의 화려한 초청 강연이 아니라 기장독립운동사연구회의 작지만 뜻깊은 강연이었다.
부산 기장은 1900년대 자그마한 읍소재였지만 이곳에서 애국독립지사 20여 명을 배출한 위대한 고장이다. 비록 ‘삼정승 육판서’ 같은 이가 없다 해도 빼앗긴 조국을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던진 인물의 명가(名家)가 바로 기장이다.
해외에서 박성조 교수는 인류의 미래와 관련된 진지한 화두를 던지곤 하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늘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고향의 산천과 미래에 대해 털어놓았다.
기자는 박 교수의 강의록을 요약해 전한다. 기장의 미래는 소중하다. 왜냐면 기장의 미래는 부산의 미래,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1. “기장, 아름다운 푸른바다의 고장”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2. "Great minds discuss ideas"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 중에 한 명인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영부인 엘리너 루주벨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인배들이 사람을 두고 논할 때, 보통 사람들이 사건을 두고 논할 때, 위대한 이들은 아이디어를 두고 논한다. (Small minds discuss people. Average minds discuss events. Great minds discuss ideas.)>
우리는 아이디어를 두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과 지혜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식은 당장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만 지혜는, 삶의 지혜는 삶을 사는데, 미래를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혜를 두고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3. 부산의 이미지는…
한국 산업화의 상징인 거리가 테헤란로입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우리나라가 충격을 받았을 때 유일하게 도움을 주었던 산유국이 이란이었고 자매결연을 맺어 테헤란로가 생겨나게 되었죠.
부산의 이미지는 뭔가요? 오륙도, 태종대, 자갈치, 갈매기, 누리마루, 광안대교….
1970년대 유럽의 넘버 투(No. 2) 도시들은 사양(斜陽)도시였어요. 중화학공업 중심의 2차 산업혁명 혜택을 못 받은 도시들이죠. 그런데 석유파동이 왔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분발을 했어요. 이 도시들은 중화학 공업 중심의 산업화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고 지식경제, 지식사회로 나아갔습니다. 그게 2위 도시들을 재생(再生)시켰어요.
지식경제를 하려면 굴뚝이 없어야 하고, 중소기업이 살아나야 하며, 자생적이어야 합니다. 또 사람들이 여러 방면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하는데 부산은 아직도 컨테이너만을 위한 항구가 전부인 줄 압니다.
부산이 지식산업으로 가려면 당장 무얼 해야 할까요. 과거 부산의 전통 제조업이었던 신발산업에다 파격적인 디자인을 접목시키는 것이 부산 지식산업의 출발입니다.
지식경제로 이행하는 데는 대학이 큰 역할을 해야 합니다. 부산 출신의 세계적인 해양학자인 박길호 교수(보스턴대)나 취리히 공과대학 하태규 박사 같은 분을 모셔와 가르치게 해야 합니다.
구태의연하고 부가가치가 낮은 부산의 문화 인식도 바꾸어야 합니다. 저는 부산의 상징인 광안대교의 영문 이름을 ‘다이아몬드 브리지(Diamond Bridge)’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요. 인구 360만 명, 세계 제5위의 컨테이너항,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를 가진 ‘문화의 도시’를 상품화해야 합니다.
4. 미래는 지식혁명의 시대
토론토 메트로폴리탄대학교에서 지속 가능한 디자인을 가르치는 로이드 알터(Lioyd Alter) 교수는 6가지 라이프 스타일의 혁신을 제안합니다. 6가지 혁신은 음식, 주택, 이동(교통), 소비재, 휴가, 서비스 산업 분야입니다. 지식혁명을 위해선 이 6가지 혁신, 혁명이 필요합니다.
산업혁명 시대는 공장, 대량생산, 쓰레기, 도시중심, 기술독점, 전문화 표준화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지식혁명 시대는 공장 대신 <개인과 대학, 연구소>, 대량생산 대신 <소량창조, 중소기업>, 쓰레기 대신 <지식의 축적>, 도시중심 대신 <지방분산>, 기술독점 대신 <지식공유>, 전문화 표준화 대신 <통합, 융합>이 도래하는 시대입니다.
5. 그렇다면 기장의 미래는…
기장은 멸치의 고장, 자연산 미역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장의 군(郡)화는 진달래, 군목은 해송, 군조는 갈매기, 군어는 멸치입니다.
진달래는 애향심을, 해송은 군민의 기상을, 갈매기는 군민의 끈기와 강인함을, 멸치는 군민의 역동적인 삶을 상징합니다. 멸치에 대해 첨언하자면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산란하며 봄 멸치가 유명하죠.
기장의 미래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까요? 미래는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야기할 때 대게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때는 좋았다’, ‘그땐 우리가 1등이었다’고.
이제는 과거 대신 미래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를 고민해야 합니다.
‘토론’을 하지 말고 스스로가 미래를 ‘만들어야’ 합니다. ‘미래’는 만드는 것이지 ‘토론’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기장의 미래를 만들 수 있는 모델케이스를 이야기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미래는 잠재력이지 돈이 아닙니다. 그 잠재력은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잠재력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했던 잠재력입니다.
예를 들면 기장은 도예(陶藝)로 유명한 창조적인 공간입니다. 기장에 도예촌이 있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조선시대 때 기장에 도예지가 35곳, 기와 요지가 64곳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잡혀 갈 도공들의 집결지가 기장이었다고 합니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조선초기의 분청사기로 맥을 이은 곳도 기장입니다. 도자기의 전통이 숨 쉬고 양질의 흙, 도공들의 열정이 있는 곳이 기장입니다. 이제는 도예를 하나의 예술 작품만으로 생각하지 말고 여러 가지 결합적 요소를 지닌 측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도예에 쓰이는 흙이 180종이 있다고 하는데 기장의 흙이 제일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예작업을 추운 겨울에 하기 힘들어요. 그런데 기장의 날씨는 따뜻합니다. 도예하기에 좋은 자연환경을 지니고 있지요. 도자기를 굽기 위해선 나무가 필요해요. 가마를 장작불로 피워야 하니까요. 기장의 해송이 유명합니다. 기장의 나무가 좋습니다.
또 문화가 발전하려면 외부에서 좋은 자극을 끊임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육열이 뛰어나 세상 밖의 문호를 받아들이고 이를 내재적인 것과 융합시킬 수 있는 안목을 가진 고장이 기장입니다. 기장 출신 인사들 중에 해외 유학파가 많습니다.
이런 도예가 발전하기 위한 최상의 조건을 갖춘 곳이 기장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한 게 없지요. 요업이야 말로 소재를 활용한 예술작품이자 창조적인 산업입니다. 기장은 예술의 고장이지만 애국지사의 고장인 만큼 자긍심이 강한 곳입니다. 기장의 미래를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세계적인 여성 생태환경 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비리 호지(Helena Norberg Hodge)는 이렇게 말했죠.
“우리의 미래는 지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