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 귀환한 납북어부 李在根씨가 쓴 「엽기 공화국 30년 체험」

黨 간부가 人肉 먹는 나라… 인민들은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받는다

  • : 김용삼  dragon03@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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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자로서의 고단한 삶
 
 
  李在根(이재근)씨는 최초의 귀환 납북어부다. 국군포로가 脫北(탈북)하여 귀환한 사례는 많지만 납북어부의 귀환 사례는 이재근씨가 처음이다. 그의 귀환은 정부가 앞장서서 북한과 협상을 벌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량난을 견디다 못한 李씨가 목숨 건 脫北을 감행하여 중국 내 한국대사관으로부터 버림받고 1년 반 정도 중국에 숨어살다가 운 좋게 구출된 것이다. 이런 李씨가 최근 「엽기 공화국 30년 체험」이란 제목의 수기집을 펴냈다.
 
  李씨는 남한에서 30년, 북한에서 30년을 살아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남북 양쪽에서의 삶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면 그나마 회한이 덜할 것이다. 30년 간의 남쪽 생활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낳은 처절한 주변부적 삶의 연속이었다. 「早失父母(조실부모)한 고아로서 초중고교는 모두 중퇴, 軍에서 탈영, 변변한 직업도 없이 떠돌다 자살을 결행하려 했던 사회 낙오자로서의 고단한 삶이었다」고 그는 수기에서 회고한다.
 
  어부가 되어 마음 잡고 살 만한 시기가 되자 이번에는 어로작업 중 拉北(납북)이라는 또 다른 불행이 닥쳤다. 30여 년 사회주의 체제에서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對南(대남) 간첩 교육을 받았다. 그가 북한 체제에 순응할 작정이었다면 남한을 넘나드는 간첩의 길을 택하거나 對南 공작 부서에 배치받아 상층부의 삶을 영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납북」과 「억류」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당연히 체제에 반항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李씨는 북한에서도 사회 최하층 노동자로 편입되어 고단한 억류 생활을 몸으로 때워야 했다.
 
 
  「천대 11호」의 납북 과정 최초 공개
 
 
  이번에 출간된 李씨의 수기가 기존에 간행된 탈북자들의 수기나 자서전, 증언과는 색다른 가치를 갖는 것은 李씨가 자본주의적인 남한과 사회주의의 탈을 쓴 神政(신정)국가 북한을 동시에 체험한 관찰자로서 북한 사회의 리얼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탈북자들의 기록이 「북한 사회에서 나고 자란 북한 사람」의 북한 관찰기라면, 李씨의 수기는 「남한에서 나고 자란 남한 사람」의 북한 억류기인 셈이다.
 
  어로작업 중 해상에서 납치당한 납북어부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북한에 억류당하며, 어떤 대우를 받는지, 그들의 삶은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는지를 우리 사회에 알리는 최초의 증언이라는 의미가 있다.
 
  李在根씨의 증언 중에는 조선노동당 정치학교 훈련 과정이라든가, 간첩교육 내용, 평북 영원읍 부근에서 인민군대가 양귀비를 재배하는 장면 등 정보적 가치가 풍부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 또 납북어부들의 납치 과정이 최초로 공개된 부분도 눈길을 잡아끈다. 기자는 지난해 4월 중국에서 李씨를 만나 납북어부들의 근황을 취재해 月刊朝鮮(2000년 7월호)에 소개한 바 있는데, 그 중에 납북 정황이 자세히 소개되지 않았던 김대곤씨의 납북 과정을 李在根씨의 수기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김대곤이 타고 있는 「천대 11호」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며칠 간 묵고 출항했다. 배는 제주도 남서쪽으로 4시간 가량 항해한 다음 그곳에서 작업을 했다. 새벽녘에 멀리서 배가 한 척 느릿느릿 다가오더니 그 배의 선원이 김대곤에게 말을 건넸다.
 
  『아침 반찬감이 없는데 좀 줄 수 없겠소?』
 
  『그래요? 좀 갖다 잡수시구려』
 
  김대곤이 생선을 건네 주려고 천대 11호를 그 배에 나란히 갖다 대자 난데없이 공산군들은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꼼짝 마!』
 
  어민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시키는 대로 그물을 바다에 던져 넣고 선장실에 들어가서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데, 총 쥔 놈들은 엎드려 있는 선원들을 내려다보면서 움직이는 기척이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고함을 질렀다>
 
  김대곤씨가 타고 있던 천대 11호는 공산군들의 배에 예인을 당해 北으로 끌려갔는데, 어선을 끌고가면서도 족히 20노트는 되었다고 한다.
 
  李在根씨의 수기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은 북한 주민을 등쳐먹는 인민군대의 모습들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이나 수기에서도 굶주리는 인민군대가 북한 주민의 식량과 음식을 훔쳐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李씨의 수기처럼 적나라한 모습을 그리고 있지는 않다. 인민군대에 식량을 강탈당한 주민들이 『저놈들은 살려 두지 말고 전부 죽여야 한다』고 반항하는 모습이 보인다. 李在根씨는 자신의 수기에서 인민군대의 파렴치한 행각을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총 가진 군인과 맨주먹 백성이 싸우는 나라
 
 
  <총 가진 군대와 맨주먹인 백성과의 전쟁으로 인해 남새밭이며 강냉이 밭이며 논이며 과수원이며 온 들판은 굶주린 백성들의 시체로 뒤덮였다. 포성 없는 전쟁으로 굶어 죽는 사람, 배고픈 게 죄가 되어 총에 맞아 죽는 사람들의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포성 없는 전쟁이 포성 있는 전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인민군은 인민을 위한 군대가 아니라 인민의 피와 땀을 빨아먹는 흡혈귀와 같은 마적의 무리들이요 인민들 위에 군림하여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깡패 집단이다>
 
  李씨의 수기 곳곳에는 남한 사회 출신으로서 북한 사회주의의 허실과 환상, 처절한 주민들의 생존기 등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나타나 충격을 더한다. 李在根씨는 남한 사회에서 최하층민 신분이었지만 결코 양식이 없어 穀氣(곡기)를 거른 적은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의 북한 억류 생활 후반기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격투의 연속이었음을 적나라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의 수기에 의하면 1990년부터 북한 당국은 식량 배급을 한두 달씩 뒤로 미루더니 1993년과 1994년에는 3개월 정도 배급이 나오지 않았다. 1995년부터는 1년 중 명절날 3~4일 정도만 나오다가 1996년부터는 아예 배급이 끊겼다고 한다. 이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李在根씨는 도둑질, 수백 리 길을 봇짐을 지고 장사 등을 마다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배급이 완전히 끊기자 인민들은 살아 남기 위해 나무 껍질을 벗기고, 풀을 뜯고, 집에 있는 가재도구 등 팔 수 있는 물건들은 모조리 장에 내다 팔았다. 그것으로 버텨야 얼마나 버티겠는가. 가재도구마저 식량과 다 바꿔 먹은 집들은 하나씩 둘씩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94년 李在根씨가 근무하던 함주 선박 전동기 공장의 작업반에서도 10여 명이 굶어 죽었고, 그가 살던 인민반에서도 10여 명의 늙은이들이 시체가 되어 나갔다고 한다. 1994년도에 식량난의 실태가 이 지경이었으니 배급이 아예 끊긴 1996년부터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李씨의 「人肉(인육) 먹는 현장 체험기」에서 그 참혹한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탈북자들이 북한 사회에서 인육 먹는 정황을 증언했으나 누구도 직접 그 모습을 보지는 못한 채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李씨의 수기에는 그가 직접 인육 먹는 현장을 목격한 현장 체험기가 실려 있다.
 
  인육을 먹은 사람은 당 간부 경력자이자 함주지구 자재공급소장 경력자. 그는 며칠을 굶자 눈이 뒤집혀 여자 꽃제비 한 명을 데려다 살해한 후 가마솥에 넣고 푹 고아 먹었다. 두 명, 세 명 사람 잡아먹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안전원에게 뒤를 밟혀 범행 현장을 들켰다. 李씨의 수기에는 인육 먹는 현장 목격기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집 대문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웅성거리기에 나도 가 보았더니 사람을 잡아먹다가 들켰다는 것이다. 무심결에 그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커다란 솥에서 뭔가 펄펄 끓고 있었다. 솥뚜껑을 열어 보니 끔찍하게도 그 속에는 여자아이 머리 3개가 들어 있었다. 8년 전에 평성에서 사람 10여 명을 잡아먹은 식인종이 있다는 소문은 들어보았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李씨는 북한의 열악한 의료 시설에 대해서도 이책에 상세히 밝혀 놓았다. 웬만한 수술은 마취약이 없어 마취 없이 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외과 과장이 와서 마취도 하지 않고 대뜸 내 가운뎃손가락을 칼로 째는 것이었다.
 
  『너무 아프니 제발 살살 해주시오』
 
  『뼈가 썩으면 팔 전체를 잘라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약간 아픈 게 낫지 않겠소』
 
  의사는 내 손가락 뼈를 도려내고 있었다>
 
 
  중국 탈출 후부터 手記 정리
 
 
  李在根씨는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서 은신생활을 하면서부터 노트에 자신의 체험을 담기 시작했다. 그가 납북 30주년이 되던 지난해 4월29일, 李在根씨는 필자와 함께 北京(북경)의 한 호텔 방에서 정부로부터 한국 귀환에 대한 어떤 소식도 접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며칠 전 그는 청도의 한국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한국 귀환을 하소연했는데, 한국 외교관으로부터 『당신 세금낸 것 있어요? 왜 자꾸 정부를 귀찮게 하는가. 가족에게 연락해서 밀항을 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李씨는 북한에서도 보위부 지도원으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하는데 그의 수기에는 이런 장면이 발견된다.
 
  <공장 정문 앞을 지나려는데 보위부 지도원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치 나를 죄인 취급하듯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당신은 북조선에 와서 한 것이 뭐가 있다고 책임 비서를 찾아가 돈을 달라는 둥 여행증도 해 달라는 둥 성화를 부리는가? 당신은 조국을 건설하는 데 피 한 방울 흘린 게 있어? 염치도 없이 왜 계속 달라는 거야?』>
 
  남한 정부와 북한 당국은 李在根씨에게 세금 낼 기회, 조국 건설에 피 한 방울 흘릴 기회라도 주고 이런 소릴 하는 것일까?
 
  필자는 지난해 4월 하순 납북어부 李在根씨의 존재를 北京 주재 한국대사관에 신고하고 그의 신변보호와 본국 귀환을 요청했는데, 신고를 접한 대한민국 고위 외교관의 開口一聲(개구일성)이 『남북 頂上회담을 앞둔 이 시기에 언론이 왜 이렇게 민감한 문제를 제기하는가. 보도를 자제해 달라. 당신이 납북어부를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신변보호를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필자는 李在根씨 일가 세 명을 일주일 동안 보호하느라 온갖 험한 꼴을 다 체험해야 했다.
 
  李씨는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 당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되고 말았는데, 李씨의 사례처럼 남북 당국으로부터 외면당한 인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상상해 보았지만 최인훈의 소설 「광장」 이외에 별다른 방법론이 떠오르지 않았다. 李在根씨의 수기는 (주)月刊朝鮮社에서 간행했으며 값은 8000원. 시내 유명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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