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계열전〉에 유학을 넘는 진리에 대한 개방적 태도 반영
⊙ 제나라 순우곤, 3년간 울지도 날지도 않은 새의 비유로 위왕을 깨우쳐
⊙ 한 무제, 동방삭을 측근에 두었지만 중용하지는 않아
⊙ “(동방삭이) 해학을 펼친 때 보면 광대를, 무궁무진함은 사리를 아는 자를, 간언할 때는 곧은 신하를 닮아”(양웅)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제나라 순우곤, 3년간 울지도 날지도 않은 새의 비유로 위왕을 깨우쳐
⊙ 한 무제, 동방삭을 측근에 두었지만 중용하지는 않아
⊙ “(동방삭이) 해학을 펼친 때 보면 광대를, 무궁무진함은 사리를 아는 자를, 간언할 때는 곧은 신하를 닮아”(양웅)
이한우
1961년생.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철학과 석사,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조선일보》 문화부장, 단국대 인문아카데미 주임교수 역임

- 동방삭
“저리자는 말재간이 뛰어나다[滑稽].”
저리자는 진(秦)나라 혜왕(惠王)의 동생으로 꾀[智]가 많아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꾀주머니[智囊]라고 불렀다. 골계에 대한 주석에서 추탄생(鄒誕生)은 “골(滑)은 어지럽히다[亂]는 뜻이고 계(稽)는 같은 것[同]이다. 말재간이 뛰어나 틀린 것도 맞는 것처럼 말하고 맞는 것도 틀린 것처럼 말함으로써 같고 다름을 어지럽힌다”라고 풀었다. 약간은 부정적 뉘앙스다.
그러나 사마천은 이들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런 인물들을 모아 〈골계열전〉을 쓴 것이다. 〈골계열전〉에는 끝부분에 ‘사마천 왈(曰)’이 없고 대신 앞부분에 왜 골계전을 두어야 하는지 이유를 공자(孔子)의 말과 대비시켜 간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공자가 말했다.
“육예(六藝·육경)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한 가지다. 《예기(禮記)》는 사람을 절도 있게 해주고 《악기(樂記)》는 사람의 마음을 조화롭게 해주며 《서경(書經)》은 일을 말해주고 《시경(詩經)》은 뜻을 전달해 주며 《주역(周易)》은 신묘한 달라짐[神化]을 보여주고 《춘추(春秋)》는 마땅함으로 옛일을 판단한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천도(天道)는 넓디넓으니 어찌 크다고 하지 않으랴! 우리가 하는 말 중에도 은미한 뜻에 적중한다면 실로 얼마든지 어지러이 얽힌 것들도 풀어낼 수 있으리라!”〉
즉 유학(儒學)을 넘어서는 사마천 혹은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진리에 대한 개방적 태도가 있었기에 골계를 별도의 열전으로 삼을 수 있었다. 게다가 골계는 실없는 농담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골계의 원조 순우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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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천 |
제나라 위왕(威王) 때 왕이 수수께끼[隱=隱語]를 좋아하였고 음탕하게 놀면서 밤새워 술 마시기를 즐겼으며 술에 빠져 정사(政事)를 다스리지 않고 국정을 경대부에게 맡겼다. (이에) 백관들은 문란해지고 제후들이 잇따라 침략하니 나라가 장차 위태로워지고 망하는 것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었는데도 좌우 신하들은 누구도 감히 간언을 하지 못하였다. 순우곤만 수수께끼로 유세하여 말했다.
“도성 안에 큰 새가 있어 왕의 뜰에 머무르고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울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 새가 어떤 새인지 모르시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이 새는 날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한번 날았다 하면 하늘로 높이 날아오르고, 울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한번 울었다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이에 마침내 (위왕은 깨달은 바가 있어) 여러 현의 현령(縣令)과 현장(縣長) 72명을 조정으로 불러 이 중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한 사람은 주살하고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운 다음에 (그동안 제나라를 침략했던 나라들을 향해) 출병하였다. 제후들은 크게 놀라 모두 침략했던 제나라 땅을 돌려주었다. 그 위엄은 36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일은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에 실려 있다.
똑같은 수수께끼가 〈초세가(楚世家)〉 초나라 장왕(莊王)과 오거(伍擧) 사이에도 나온다. 같은 깨우침을 받은 장왕도 그간의 음란한 생활을 거두고 정사에 부지런히 임해 죽인 자가 수백 명이었고 자리에 새롭게 등용한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이를 통해 분명히 사마천이 생각했던 골계는 실없는 농담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우회적 비판임을 알 수 있다.
우맹의 뛰어남을 알아본 손숙오
우맹은 성명이 아니라 우인(優人·배우) 맹(孟)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초나라 명재상 손숙오(孫叔敖)는 맹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여겨 후하게 대우했다. 손숙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내가 죽으면 너는 틀림없이 빈곤해질 것이다. 너는 우맹을 찾아가서 내가 손숙오의 아들이라고 말해라.”
몇 년 뒤에 그 아들은 (정말로) 곤궁해져서 (생계를 위해) 땔감을 베 팔고 다닐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와중 우맹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저는 손숙오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제가 곤궁해지면 우맹을 찾아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맹은 곧바로 손숙오의 옷을 입고 관을 쓴 다음 그의 말투와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1년 남짓 이렇게 하다 보니 손숙오와 비슷해져서 초나라 왕의 좌우 신하들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장왕이 술자리를 베풀었을 때 우맹이 앞으로 나아가 축수의 잔을 올렸다. 장왕은 크게 놀라며 손숙오가 다시 살아났다고 여겨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에 우맹이 말했다.
“청컨대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상의하고 사흘 뒤에 재상이 되겠습니다.”
장왕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사흘 뒤에 우맹이 다시 왔다. 왕이 말했다.
“부인께서 뭐라고 하던가?”
맹이 말했다.
“아내가 말하기를 ‘삼가시지요. 초나라 재상은 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돌이켜봤을 때 손숙오는 초나라 재상이 되어 충성을 다하며 청렴하게 초나라를 다스려 초나라 왕을 패자(霸者)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손숙오가 죽자 그 아들은 송곳 하나 꽂을 만한 땅도 없이 가난하게 땔감을 베어 나르며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손숙오처럼 되느니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장왕은 우맹에게 사과하고 손숙오의 아들을 불러 침구(寢丘)의 400호를 봉지로 주어 아버지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후 10대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태사공은 이에 대해 “우맹은 말을 해야 할 때를 알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동방삭, 오만방자한 글로 자신을 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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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무제 |
동방삭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이다. 무제는 널리 인재를 구하는 데 힘썼고 이때 동방삭도 장안에 들어와 글을 올렸다. 자천(自薦)하는 글이었다. 이 글은 〈골계열전〉에는 없고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동방삭전(東方朔傳)〉에 실려 있다.
〈신 삭(朔)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수의 손에 자랐습니다. 나이 13세부터 글을 배웠고 세 번의 겨울을 지나는 동안 공부하자 각종 문체와 전고[文史·문사]를 익혀 임용에 대비한 준비를 갖췄습니다. 15세에는 검술을 익혔습니다. 16세에 《시경》과 《서경》을 배워 22만 자를 암송했습니다. 19세에는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법을 배워 전투할 때 진(陣)을 치는 방법과 (징과 북을 쳐서) 군사를 전진시키고 후퇴하게 하는 법을 익혔는데 이 또한 22만 자를 암송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 삭은 진실로 이미 44만 자를 암송하고 있습니다. 또한 늘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한 말[《논어》에서 “자로는 일단 허락한 일을 묵혀두지 않았다”라고 했다]을 가슴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신 삭은 나이 스물둘이고 키는 9척 3촌이며 눈은 구슬을 매단 것 같고, 이는 조개를 엮어놓은 것 같으며, 용맹함은 맹분(孟賁·전국 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쇠뿔을 맨손으로 뽑은 용사)이요, 민첩하기는 경기[慶忌·춘추 시대 오왕(吳王) 요(僚)의 아들. 행동이 매우 민첩해 달리는 짐승을 따라잡았고 나는 새를 손으로 잡았다. 얼마나 민첩한지 말을 타고서도 그를 따라잡지 못하고 화살로도 그를 맞히지 못했다]요, 청렴함은 포숙(鮑叔·춘추 시대 제나라의 대부로 관중과 동업할 때 그에게 이익을 많이 양보했다)이요, 신의를 잘 지키기는 미생(尾生·중국 고대에 신의를 잘 지킨 사람의 상징이다. 그가 한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여자가 아직 오지 않았을 때 조수가 밀려왔다. 그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다리 기둥을 붙잡고 기다리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입니다. 이런 정도라면 가히 천자의 대신이 될 만합니다. 신 삭은 죽음을 무릅쓰고 두 번 절해 아룁니다.〉
‘미치광이’ 동방삭
글이 올라가자 많은 사람이 그 글이 불손하고 오만방자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무제는 그를 기이하게 여겨 공거(公車)에 머물며 다음 명을 기다리도록 했다. 공거란 황제에게 글을 올린 사람이 예우를 받으며 다음 조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관청이다. 〈골계열전〉에는 이때의 일화를 적고 있다.
〈삭이 처음 장안에 들어왔을 때 공거 [책임자는 공거사마(公車司馬)]를 찾아가 글을 올렸다. 그 글은 모두 3000장의 주독(奏牘·임금에게 아뢰는 목간)에 쓴 것이라 공거에서는 두 사람을 시켜 함께 겨우 그 글을 들어 옮길 수 있었다. 임금은 위에서부터 읽어 내려가다가 중간에 쉴 때는 그때마다 붓으로 표시를 해두었고 두 달 만에야 마침내 다 읽었다. 조서를 제배(除拜)하여 낭(郎·임금 명을 받드는 중하급 관직)으로 삼으니 항상 곁에서 모시게 됐다.
자주 불려가 어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임금은 그때마다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종종 조서를 내려 어전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했는데 식사가 끝나고 나면 먹다 남은 고기를 깡그리 품속에 넣어 가지고 나가느라 옷이 모두 더러워지곤 했다. 비단도 자주 내려주었는데 그때마다 어깨에 둘러메고 물러갔다. 하사 받은 돈과 비단을 마구 써서 장안의 미녀 가운데 젊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여자를 맞아들인 지 대략 1년 정도 지나면 그 여자를 내버리고 다시 다른 여자를 맞이하였다. 하사 받은 돈과 재물을 이렇게 모두 여자를 찾는 데 써버렸다. 임금 좌우의 낭관들 가운데 절반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불렀다. 무제가 이를 듣고 말했다.
“삭에게 일을 시키면서 그런 행동을 못 하게 한다면 너희가 어찌 그에게 미칠 수 있겠는가!”〉
무제는 이런 동방삭을 가까이에 두고 말벗으로 삼았다.
동방삭의 재담
〈골계열전〉과 〈동방삭전〉을 음미해 보면 왜 무제가 동방삭을 가까이에 두고 아끼면서도 큰 자리는 주지 않았는지를 추론(推論)할 수 있다. 〈동방삭전〉에는 동방삭의 재담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화가 실려 있다.
〈복날에 시종하는 신하에게 고기를 내려준다는 조칙이 있었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도록 대관승(大官丞·황실의 음식물 공급을 관장하는 직책)이 나타나지 않자 삭은 혼자 검을 빼어 고기를 베고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복날이라 일찍 귀가해야겠으니 하사품을 받아가겠소이다.”
말을 마치고 즉시 고기를 가슴에 품고 가버렸다. 대관(大官)이 이 일을 상에게 아뢰었다. (다음 날) 삭이 입조하자 상이 물었다.
“어제 고기를 하사할 때 조칙을 기다리지도 않고 검으로 고기를 베어서 귀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삭이 관을 벗고 사죄했다. 상이 말했다.
“선생은 일어나서 자신의 잘못을 말해보라!”
삭이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삭아! 삭아! 하사품을 받되 조칙을 기다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무례한가! 검을 뽑아 고기를 베었으니 얼마나 호쾌한가! 고기를 많이 베어가지 않았으니 또 얼마나 청렴한가! 귀가해 세군[細君·原註-사고(師古)가 말했다. “동방삭 아내의 이름이다. 일설에는 세(細)는 소(小)로서 동방삭이 자신을 제후에 비견해 아내를 제후의 아내를 부르는 칭호인 소군(小君)이라 했다고 한다”]에게 주었으니 또 얼마나 어진가!”
상이 말했다.
“잘못을 말해보라 했더니 되레 자신을 찬양하는구나!”
다시 술 한 섬과 고기 100근을 하사하여 돌아가 세군에게 주라고 했다.〉
동방삭은 무제의 비위를 잘 맞추기도 했지만 이처럼 무제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다른 신하들을 경시하였다. 무제가 물었다.
“지금 승상 공손홍(公孫弘)과 어사대부 예관(兒寬), 동중서, 하후시창, 사마상여, 오구수왕, 주보언(主父偃), 주매신, 엄조, 급암(汲黯), 교창, 종군(終軍), 엄안(嚴安), 서락(徐樂), 사마천의 무리가 모두 변론을 잘하고 지식이 풍부하며 문장을 아주 잘 짓는다. 선생 자신이 보기에 이들과 비교해 어떠한가?”
동방삭이 대답했다.
“신이 살펴보니 들쑥날쑥한 이빨, 툭 튀어나온 광대뼈, 대접 같은 입술, 내려앉은 목에 쳐든 고개, 정강이와 다리는 붙어 있고, 볼기짝과 꽁무니가 이어진 자들이 걸음걸이는 비틀비틀, 허리는 구부정하더군요. 신 삭이 비록 모자란 놈이기는 해도 오히려 이런 사람들 여러 몫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에 답하는 동방삭의 기발한 말솜씨가 모두 이러한 식이었다.
동방삭이 중용되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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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고 |
〈무제는 이미 영특한 준재들을 불러서 각 사람의 그릇과 재능을 헤아려서 기용했는데 혹시라도 그 능력에 제대로 어울리는 자리를 주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썼다. 그때 바야흐로 한나라는 밖으로는 흉노와 월(越)을 정벌하고 안으로는 제도를 바로 세우느라 한창 일이 많았다. 공손홍 이하 사마천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자의 명을 받들어 사방으로 사신으로 나갔는데, 어떤 자는 군의 태수와 제후국의 재상이 됐고 공경대신에까지 이르렀지만 유독 삭만 일찍이 (잠깐) 태중대부(太中大夫)까지 오른 적을 빼고는 뒤에는 항상 낭관이었고 매고(枚皐)나 곽사인과 함께 상의 좌우에서 우스갯소리나 할 뿐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삭은 글을 올려 병농(兵農)을 통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계책을 말하고 그 기회에 자신만이 큰 벼슬자리를 얻지 못했으므로 자신도 한 번 쓰이기를 바란다고 하소연했다. 그런데 그가 사용한 언사가 오로지 상앙(商鞅)과 한비(韓非)의 설만 채용했고, 말하고자 한 뜻이 제 마음대로이고, 게다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제법 많아 수만 자에 달하는 말을 했음에도 결국 기용되지 못했다.〉
‘객난’이라는 새로운 장르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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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삭은 서왕모의 복숭아들을 훔쳐 먹고 ‘3000갑자’, 즉 18만 년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둥 수많은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만승(萬乘) 제후를 한번 만나자마자 재상의 자리를 거머쥐어 그 은덕이 후세에까지 미쳤소. 지금 당신은 대부로서 선왕의 학술을 익혔고, 성인의 의로움을 사모했으며 《시경》과 《서경》 및 백가(百家)의 글을 암송해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할 지경이오. 죽간(竹簡)과 비단에 글을 써서 입술이 썩고 이가 다 빠질 정도로 가슴속에 담아두어 잠시도 놓지 않으니 학문을 좋아하고 도를 즐긴 결과가 아주 분명하오. 지혜와 능력이 천하에 짝할 자가 없다고 자부하므로 박학하고 구변 좋고 지혜롭다 말할 만하오. 그러나 온 힘을 다하고 충성을 바쳐 빼어난 천자를 섬긴 지 수많은 세월이 지났건만 시랑(侍郞)의 관직을 벗지 못하고 창을 잡고 경비를 서는 지위를 넘지 못하니 혹시 행실이 잘못된 것은 아니오? 친형제가 머물러 살 곳도 없으니 이유가 대체 무엇이오?”
이 질문에 동방삭은 “허 허!” 장탄식하고서 머리를 쳐들고 말했다.
“그 속내는 당신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이니 같은 차원에서 말할 수 있나?
소진과 장의의 시대는 주(周)나라 왕실이 크게 붕괴해 제후들이 조회를 드리지 않고 힘으로 징벌하고 권력을 다투었네. 서로 무력으로 침략해 12개 제후국으로 합병돼 자웅을 가리지 못했네. 이때는 인재를 얻은 자가 강성해지고 인재를 잃은 자는 망하는 때라, 유세하는 선비가 횡행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그들의 몸은 높은 지위를 누리고, 진귀한 보물은 집 안에 가득하며, 밖에는 곡식 창고가 있고, 덕택이 후세에까지 미쳐 자손들이 오래도록 향유했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네. 성스러운 황제의 덕이 흘러서 천하가 두려워하고 제후들이 복종하며, 사해 밖까지 띠처럼 둘러 사발을 엎어놓은 듯이 편안하네. 천하가 전쟁 없이 평형을 이루고 한 집안이 돼 큰 사업을 하기가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쉽네.
그러니 현자와 바보를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 하늘의 도리를 준수하고 땅의 이치를 따르므로 제 있을 자리를 얻지 못한 사물이 없다네. 따라서 천자가 어루만지면 안정을 찾고, 뒤흔들면 괴로움을 겪으며, 높이 올려주면 장군이 되고, 낮춰놓으면 포로가 되며, 높이 천거하면 청운(靑雲) 높이 올라앉고, 억누르면 깊은 연못 밑으로 가라앉네. 사람을 기용하면 범이 되고, 쓰지 않으면 쥐가 되는 법, 있는 힘을 다해 충성을 바치려고 해도 재주를 발휘할 마당이 있겠는가? 하늘과 땅은 넓고, 백성은 수가 많아 정력을 다해 유세하려고 사방팔방에서 몰려드는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네. 가진 힘을 다해 황제의 덕을 사모해도 옷과 밥을 얻지 못하고, 심지어는 대궐 문조차 들어서지 못하는 자도 있지.
소진과 장의가 오늘날 세상에 나처럼 태어났다면 장고(掌故)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감히 상시랑(常侍郞)을 바라기나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때가 다르고 일이 다르다고 했네.
그렇다고 자신을 수양하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시경》에서는 ‘집 안에서 종과 북을 치면 바깥까지 소리가 들리네’[소아(小雅) 백화(白華) 편의 구절] ‘낮은 못에서 학이 울면 울음소리 하늘에서 들리네’[소아(小雅) 학명(鶴鳴) 편의 구절]라고 했네. 자신을 잘 수양한다면 영화를 얻지 못할까 염려할 필요는 없네. 강태공은 몸소 인의(仁義)를 실천하다 일흔두 살이 돼 주나라 문왕, 무왕에게 기용돼 제 주장을 펼치고 제나라에 봉해져 700년이 지나도록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네. 선비가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행실을 닦아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네. 비유하자면 할미새가 날면서도 우짖는 것과 같지.
그러므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는 ‘하늘은 사람이 추위를 미워한다고 겨울을 없애지 않고, 대지는 사람이 험준함을 미워한다고 광대함을 포기하지 않으며, 군자는 소인들이 흉흉히 소란을 피운다고 행실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네. 또 ‘하늘에는 일정한 도수(度數)가 있고, 대지에는 일정한 형상이 있으며, 군자에게는 일정한 행실이 있다. 군자는 일정한 행실을 따라 움직이지만 소인은 결과만을 따진다’고 했네. 《시경》에서는 또 ‘예의에 어긋나지 않았으니 남의 말을 두려워하랴?’라고 했네.
그러므로 ‘물이 지극히 맑으면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극히 깨끗하면 따르는 자가 없다. 관을 쓰고 앞에 수술을 드리우는 것은 밝게 보는 것을 가리기 위함이요, 귓가에 구슬을 다는 것은 똑똑하게 듣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네. 아무리 눈이 밝은 자라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고, 아무리 귀가 밝은 자라도 듣지 못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
덕이 큰 사람을 천거할 때 자그마한 과실 정도는 너그럽게 보아 넘기는데, 그 까닭은 한 사람에게 모든 덕망을 갖추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네. 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도 스스로 터득하게 하고, 관대하고 부드럽게 변하는 것도 스스로 얻게 하며, (제 본성과 재능을) 재고 헤아리는 것도 스스로 찾게 유도하네. 성인의 교화란 이처럼 스스로 터득하게 하기 때문이지. 스스로 터득하면 효과가 빠르고 넓다네.
그런데 오늘날 처사(處士)는 따르는 자 없이 쓸쓸하고 초연하게 홀로 살지. 위로는 천하를 마다한 허유(許由)를 찾고, 아래로는 벼슬하지 않고 미친 척하던 접여(接輿)가 있나 둘러보네. 공을 이루자 도망쳐버린 범려(范蠡) 같은 꾀를 써보려고 하고, 간언하다가 죽임을 당한 오자서(伍子胥)의 충성을 바치려고 드네.
그러나 천하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의를 지키고 있으니 더불어 지낼 벗이 드문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자네는 어째서 내 처지를 의심하는가? 저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악의(樂毅)를 써서 제나라를 격파하고, 진나라가 이사(李斯)를 기용해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 고조(高祖)께서 역이기(酈食其)를 써서 제나라 왕을 설득해 70여 개의 성을 항복시켰네. 그때 물이 흐르듯 유창하게 유세한 말은 잘 받아들여졌고, 손가락에 반지가 끼어 있듯이 제후들이 그 말을 따랐기 때문에 시도한 것이 모두 성취돼 공훈이 산악처럼 높았다네.
반면에 지금은 천하가 안정되고, 국가가 평안하므로 이 좋은 시대를 만나 살면서 자네는 내가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이상히 여길 이유가 있는가? 속어에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고, 표주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며, 풀줄기로 종을 친다’고 했네. 그래가지고야 어떻게 하늘의 법도를 꿰뚫어 보고, 바다의 이치를 알아내며, 종소리를 낼 수 있겠나?
이렇게 본다면, 처사가 출세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생쥐가 개를 습격하는 꼴이자 돼지 새끼가 범을 물어뜯는 격이네. 그 앞에 이르기만 하면 몸이 으스러지고 말 테니 무슨 공을 세우겠는가? 이제 어리석고 비루한 식견으로 처사를 비난하는 자네를 내 아무리 곤경에 빠뜨리지 않으려고 해도 정말 어쩔 수 없네 그려. 자네가 시세 변화를 읽지 못할 뿐만 아니라 큰 도리조차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줄 뿐이네.”〉
동방삭은 또 비유선생[非有先生·비유(非有)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으로 자허(子虛)나 오유(烏有)와 같이 허구적인 인물]의 논쟁을 가상으로 설정하여 지어냈다. 그래서 반고는 이 논쟁도 자세히 소개하고서 이렇게 평한다.
“동방삭의 문장은 위에 보인 두 편이 가장 좋다. 그 나머지로 ‘태산을 봉하다’ ‘화씨의 구슬을 꾸짖다’ ‘황태자 탄생을 축하하다’ ‘병풍’ ‘궁전의 잣나무 기둥’ ‘평락관(平樂館) 사냥’ ‘팔언시(八言詩) 칠언시(七言詩) 각 상하편’ ‘공손홍에게 수레를 빌리다’ 따위가 있는데 유향(劉向)이 기록한 동방삭의 글은 이것이 전부다. 세상에서 동방삭이 한 일이라고 전하는 여타의 사실은 모두 그릇된 것이다.”
반고도 문장가 동방삭의 면모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행위로 이름 붙일 수 없어”
〈골계열전〉에는 ‘사마천 왈’이 없어 반고의 찬(贊)으로 대신한다.
〈유향이 말하기를 젊을 때 삭과 같은 시대를 살아 당시 일을 잘 아는 어르신들과 뛰어난 분들에게 자주 물었는데 그들은 다 ‘동방삭은 해학을 말하고 논변에 능했으나 자신만의 주장을 가지지는 못했고 일반인들에게 이런저런 주장을 펼치기 좋아했기에 후세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진 것이다’라고 했다. 양웅(楊雄)도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삭의 말은 스승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고 그의 행실은 다움[德]을 그대로 따르지 않아 남겨진 풍모나 글이 보잘것없다. 하지만 삭의 이름이 실상보다 넘치게 된 까닭은 그가 해학에 뛰어나고 다방면에 재능을 가져 한 가지 행위로 이름 붙일 수 없는 데에 있다. 그가 사람과 상대하며 해학을 펼친 때 보면 광대를 닮았고, 무궁무진함은 사리를 아는 자와 닮았으며, 바르게 간언할 때는 곧은 신하[直臣]를 닮았고, 다움을 더럽힌 것은 은둔자[隱者]를 닮았으며, 행동을 스스로 지저분하게 한 것은 은사와 비슷하다.’[註-양웅의 《법언(法言)》 연건(淵騫) 편에 나오는 말이다.]
백이와 숙제는 잘못됐고[非] 유하혜[柳下惠·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성은 전(展)씨고 이름은 획(獲)이며 자는 금(禽)이다. 유하(柳下)는 식읍(食邑)의 이름이고 혜(惠)는 시호다. 유하계(柳下季) 또는 유사사(柳士師) 등으로 불린다. 일찍이 사사(士師)라는 관직을 지내면서 형옥(刑獄)을 맡았는데 세 번 쫓겨나자 사람들이 떠나기를 권했다. 그러자 바른 도리로 남을 섬긴다면 어디를 간들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 도를 굽혀 남을 섬길지라도 어찌 부모님의 나라를 떠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 노나라 희공(僖公) 26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희공이 전희(展喜)를 보내 호군(犒軍)을 명분으로 삼아 제나라에 철군을 설득하라고 했다. 전희가 먼저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물어보았다. 어질고 덕이 있어 공자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동생이 유명한 도적 도척(盜跖)이었다. 낯선 여자와 하룻밤을 지내고도 음란(淫亂)하지 않아 조행(操行)이 있는 남자로 불린다]를 옳다[是]고 여긴 동방삭은 보신이 최고라고 자식들에게 경계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숙제는 아둔하고[拙]
주하사(柱下史)가 된 노자는 노련하다[工]
배불리 먹고 거드름 피우기 위해서는
농사를 버리고 벼슬을 해야지
조정에 숨어서 세상을 즐기며 살고
시류를 거스르다 화를 자초하지 말거라.’
이것만 보아도 삭은 골계하는 자[滑稽]의 우두머리라 하겠다. 삭의 해학, 예언, 사복[射覆·원래는 사발 같은 그릇에 어떤 물건을 덮어놓고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맞히게 하는 놀이였으나 나중에는 주령으로 발전해서 시나 글귀, 고사성어, 전고(典故) 등을 이용해 어떤 사물을 암시하게 해놓고 차례가 된 사람에게 알아맞히게 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때 답을 맞히는 사람도 그 사물을 암시하는 다른 시나 글귀, 고사성어, 전고 등을 제시해야 한다. 답을 맞히지 못하거나 문제를 잘못 낸 사람 모두 벌주를 마셔야 했다] 따위는 경박스러운 것이지만 대중에게 유행해 어린애와 목동들이 현혹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후세의 호사가들이 기이한 말과 괴상한 이야기를 가져다가 삭에게 결부시키기 때문에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미 그때 ‘삼천갑자 동방삭’ 운운하는 허황된 말들이 떠돌아 동방삭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반고는 사마천보다 훨씬 자세하게 그의 열전을 기록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방삭 같은 인물에게 눈길을 주어 열전에 포함한 것은 태사공의 공이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