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방랑자의 인문학 〈1〉 근대소설의 아버지 보카치오와 《데카메론》

“만일 終末의 광경을 미리 보고 싶다면 《데카메론》을 펼쳐라”

글 : 문갑식  선임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페스트는 ‘소돔과 고모라’에 이은 두 번째 종말… 전 유럽 인구 1억명 가운데 2500만명 사망
⊙ 인간들은 세상의 끝을 보며 한없이 타락했다… 그 지옥도가 《데카메론》
⊙ 7명의 숙녀와 3명의 신사가 하루 10개씩 10일 나눈 이야기가 《데카메론》… 이탈리아와 유럽에 걸친 민담의 집합체
⊙ “이 작품만큼 모방, 변형, 표절된 작품은 없었다”
⊙ 주된 주제는 性윤리의 상실과 타락한 종교인들의 실상… 그로부터 170년 후 종교개혁 이뤄져
⊙ 보카치오는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의 사생아… 아버지는 무역업에 종사하길 바랐으나 그리스 문학에 심취
⊙ 단테·페트라르카와 함께 르네상스의 문을 활짝 연 피렌체 삼총사
베키오다리는 피렌체의 상징이다. 모든 사랑이 이곳을 배경으로 이뤄진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주도(州都)가 피렌체다. 피렌체는 ‘꽃의 도시’라고 불린다. 로마군이 이 땅에 진주(進駐)했을 때 피렌체를 관통하는 아르노 강가에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이 만발해 있는 걸 보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피렌체의 이칭(異稱)이 플로렌스(Florence)다. 그래서인지 독일어에 ‘Flo’라는 접두사가 붙는 단어는 ‘활짝 피어 있다’ ‘만발’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피렌체 남서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체르탈도(Certaldo)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전 유럽에 문예부흥(르네상스)을 일으킨 피렌체 삼총사 중 ‘근대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보카치오는 피렌체 삼총사 알리기에리 단테(1265~1321),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의 막내 뻘이다.
 
보카치오 생가로 올라가는 언덕이다.
  체르탈도에 들어서면 해발 50여m쯤 되는 언덕에 고성(古城)이 보인다. 주변이 평원이라 눈에 확 띄는데 접근로를 찾는 게 꽤 어렵다. 주변을 빙빙 돌다 지쳐 할 수 없이 현지 젊은이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는 자전거 안장에 척 앉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자전거 뒤를 쫓다 백미러를 보니 뒤따르는 차 운전자들이 “뭐하는 인간들인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알려준 곳에서 보카치오가 살았던 마을까지 걸어서 5분이 채 안 걸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드넓은 평원에 포도밭이 산재해 있었다. 평화로운 분위기다. 보카치오 생가(生家)는 볼품없는 작은 박물관으로 변해 있었다. 성벽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은 레스토랑을 겸한 호텔이 두어 곳 있었고 노인들이 골목에서 더위를 식히며 한담(閑談)을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보카치오의 대표작 《데카메론(Decameron)》의 서두(序頭)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카메론은 그리스어로, ‘데카’는 열(10), ‘메론’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즉 열흘간 7명의 숙녀와 3명의 신사들이 하루 10개씩 풀어 놓은 100개의 이야기가 《데카메론》인 것이다. 왜 《데카메론》이 ‘근대소설의 원조’로 불리는 것일까.
 
보카치오가 태어난 마을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유럽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룩한 다민족 다문화를 존중하는 헬레니즘 문화(오늘날의 세계화)가 야만족에 의해 짓밟힌 뒤 1000년가량 중세(中世)시대를 겪었다. 중세를 암흑기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모든 중심이 인간 아닌 신(神)이었다. 중세 인간은 그저 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자주성을 상실한 존재였다. 한형곤 외국어대 교수가 중세와 근대의 차이를 잘 설명해 준다.
 
  먼저 단테의 ‘소네트(Sonnet)’를 본다. 소네트란 소곡(小曲), 14행시(行詩)로 번역되는데 13세기 이탈리아의 민요에서 파생됐다. 이것을 완성시킨 이가 르네상스의 삼총사 단테와 페트라르카다. 이 가운데 백미(白眉)가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다. 페트라르카 이후 셰익스피어가 영국형 소네트를 완성했고 훗날 프랑스의 보들레르에게까지 전통이 이어졌다.
 
  내 여인이 인사할 때
  한껏 거룩하고 성스럽게 보여
  누구든 혀를 떨며 굳어지고
  눈들어 쳐다보질 못하네.

 
  단테의 소네트 ‘내 여인’이다. 여기 등장하는 ‘내 여인’은 단테가 일평생 사랑했던 베아트리체다. 그런데 이 소네트에서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고귀한 존재요, 천사(天使) 같은 인물로 그려졌다. 단테는 비록 중세의 문을 닫고 르네상스의 문을 열었지만 여전히 중세라는 굴레에 묶여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 신적(神的)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페트라르카 시대에서 바뀐다. 페트라르카의 시에 등장하는 ‘라우라’ 역시 그가 생의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인물이다. 이탈리아 작가들은 작품마다 실제로 자기의 연인을 등장시킨다. 보카치오도 예외는 아니다. 《데카메론》에 나오는 7명의 숙녀 가운데 ‘피암메타’가 있다. 보카치오는 피암메타를 이탈리아의 강렬한 태양이 부끄러워할 만큼 열렬히 사랑했다.
 
  맑고 신선하며, 달콤한 물가.
  거기 내게만 여인으로 보이는 그녀.
  아름다운 자태를 드리우네.

 
젊은이들이 일하러 간 보카치오 생가 마을은 정적에 잠겨 있다.
  엇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시에 등장하는 여인이 어느덧 신에서 사람으로 변해 있다. 이에 가속도가 붙어 보카치오의 소네트에 등장하는 피암메타 역시 천사나 성스러운 여성이 아닌 평범한 여인의 모습을 띠고 있다. “꽃 따러 돌아다니는, 그녀를 보았을 적…” 어떤가, 중세와 근대의 차이는 사소했지만 그 얕은 벽을 넘기가 이렇게 어려웠다.
 
  나는 《데카메론》을 고산 고정일 선생이 경영하는 동서문화사에서 펴낸 월드북 56번으로 읽었다. 이 소설은 흥미진진하지만 읽기가 녹록지 않다. 분량부터 압도적이라 질리게 한다. 완역(完譯)이 아닌데도 800페이지나 된다. 게다가 중세 특유의 늘어지는 문체, 즉 우리 옛 양반들이 쓰는 것 같은 문투여서 긴장을 늦췄다간 꿈나라행 특급에 탑승한다.
 
이 마을에는 보카치오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과 호텔이 있다.
  《데카메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페스트’였다. 쥐벼룩이 옮긴 이 질병은 14세기 유럽을 강타했다. 우리에겐 흑사병(黑死病)으로 번역된다. 시신이 검게 변하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인구가 1억명 정도였는데 페스트가 만연하면서 희생자가 2500만명이 됐다. 한마디로 전 인구의 4분의 1이 원인도 모르고 치료 방법도 모르는 병에 의해 저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다.
 
  이것을 당시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의 징벌로 생각했다. 성서(聖書)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 이후 페스트가 숱한 희생자를 내자 유럽인들은 종말(終末)이 왔다고 믿었던 것이다. 종말은 인간의 본성마저 바뀌게 한다. 보카치오는 그 종말의 순간을 《데카메론》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데카메론》을 쓰게 된 계기도 겸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지 1348년이 되었을 때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번영된 도시 피렌체에 무서운 흑사병이 덮쳤습니다. 이 유행병은 천체의 작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 인간의 약함을 응징하시기 위해 하느님이 내린 정의로운 노여움에 의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지만 몇해 전 동양에서 생겨나 수많은 목숨을 빼앗은 뒤 여기저기로 잇따라 번져 무섭게도 서양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카치오는 인간의 무력함을 고백한다.
 
  페스트에 대해서는 어떤 인간의 지혜도 예방의 대책도 소용이 없었습니다마는 아무튼 그 때문에 임명된 관원들이 시내에서 산더미 같은 오물을 치워 내고 환자는 시내에 들어오지 못했으며 병을 막기 위한 온갖 예방조치가 내려졌습니다. 또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자주 행렬을 짓는다든가 해서 갖가지 기도문들을 되풀이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으며 앞에서 말씀드린 해의 초봄에는 흑사병이 무서운 감염력을 발휘하여 처참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말했듯 종말은 인간의 본성마저 바뀌게 하는데 그 실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어떤 남자가 죽으면 그의 이웃이나 친척이 되는 여자들이 초상집에 모여 죽은 이와 가장 친했던 여자들과 함께 슬퍼했고 한편 그 집 앞에는 친척이나 이웃 남자들, 다른 시민들이 함께 모여 죽은 이의 신분에 따라 사제(司祭)가 찾아오고 죽은 이와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유해를 어깨에 메고 촛불을 들고 성가(聖歌)를 부르며 장례 행렬을 지어 죽은 이가 생전에 다녔던 성당으로 가곤 했었지요.
 
  이러한 풍습은 흑사병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자 거의 대부분, 아니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이 도시에 새로운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간호하고 돌봐주는 여자도 없이 죽어 갔고 임종의 입회인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삶을 끝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친척들이 울며불며 슬퍼해 주는 사람은 아예 하나도 없는 형편이었으며 오히려 초상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웃고 떠들며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왁자하게 마치 축제 소동을 벌이는 습관이 생겨 버렸습니다. 여자들은 거의 여자다운 신앙심을 잃고 자기들 건강만을 크게 기뻐하게 된 것입니다.
 
  유해가 성당으로 날라져 갈 때 열이나 열두 사람 이상의 이웃들이 따라가는 일은 아주 드물게 되었습니다. 관을 메고 가는 사람들은 지위 높은 유지들이 아니라 하층 계급에서 끌려나온 무덤 파는 천한 인부들이었으며 파 둔 구덩이가 있으면 아무 데나 곧 관을 묻어 버렸습니다. … 하층계급이나 중산계급 사람들은 더 비참했습니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죽은 이에 대한 동정심은 고사하고 시체가 썩어서 자기들에게 병이 옮겨 오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모두 똑같은 예방수단을 찾아낼 궁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관이 모자라 널빤지에 얹혀서 들고 가는 일도 흔했지요. 하나의 관에 둘 또는 세 사람의 시체를 넣는 일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만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소돔과 고모라, 페스트에 이어 세 번째 종말이 온다면 인간들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데카메론》은 무서우리만치 예리하게 그것을 예언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야박한 마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절제있는 생활을 하고 무슨 일에나 지나침을 삼가면 그와 같은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면 그와 반대로 실컷 마시고 향락을 즐기고 노래부르며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놀러다니며 할 수 있는 한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이 병에 대한 가장 좋은 약이라고 단정해 버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실행에 옮겨 밤낮없이 이 술집 저 술집으로 옮겨다니면서 규칙 같은 것은 완전히 무시하고 흥청망청 끝없이 마시고 그들의 구미를 당기는 점이 있기만 하면 이집 저집 남의 집을 마치 여관이라도 되는 양 마구 돌아다녔습니다.
 
보카치오의 얼굴이다.
  보카치오가 말한 ‘욕망의 만족’은 섹스에 대한 집착, 불륜의 만연이다. 거기에 곁들여지는 게 가장 성스러워야 할 수도사들의 추악한 일탈(逸脫)이었다. 이 두 가지가 《데카메론》을 관통하는 이야기들의 소재다. 1348년에도 이 지경이었던 종교의 타락이 끝을 보게 된 것은 마르틴 루터가 기치를 내건 1517년 종교개혁 때부터였다. 그 사이 무려 1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런 가치 혼돈의 시대, 세상의 마지막을 목도한 이들 가운데 7명의 숙녀와 3명의 신사가 페스트를 피해 작은 성으로 떠나는데 그 광경이 내가 직접 본 체르탈도의 풍광과 흡사했던 것이다.
 
  그곳은 조그마한 언덕 위에 자리했으며 어느 큰길에서나 멀리 떨어져 있고 보기에도 상쾌한 푸른 잎이 무성한 떨기나무며 큰 나무들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주위에는 평탄한 초원이 펼쳐져 있고 훌륭한 정원이 딸렸으며 맑은 물이 쉴새없이 솟아나는 샘이며 값비싼 포도주를 넣어 둔 지하 곳간도 있었습니다. …
 
보카치오 생가에 보관돼 있는 《데카메론》의 옛 판본.
  《데카메론》은 성서만큼이나 훗날 수없이 많은 버전으로 패러디 혹은 윤색(潤色)됐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읽다 보면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을 주며 “아! 이 이야기의 원전(原典)이 《데카메론》이었구나” 하고 무릎을 치게 만든다. 여기서는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100가지 이야기 중에 독자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몇 가지만 소개해 보기로 한다.
 
 
  첫째 날 다섯 번째 이야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호위장관 몬페라토 후작에겐 아름답고 정숙한 부인이 있었다. 그 소문이 바람기 많은 ‘사팔뜨기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프랑스왕 필립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필립 왕은 몬페라토 후작이 십자군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제노바에 가서 몬페라토 후작 부인에게 수작을 걸었다. 부인은 필립 왕의 시커먼 속셈을 눈치챘으면서도 훌륭한 만찬을 베풀었다.
 
  그런데 부인이 내놓은 요리는 하나같이 암탉으로 만든 것이었다. 필립 왕은 “이 언저리 산야에 다른 여러가지 짐승이 있을 텐데 왜 쟁반마다 암탉이 올라와 있는가” 하고 의아해하면서 부인에게 물었다.
 
  “부인, 이 언저리에는 암탉만 나고 수탉은 한 마리도 나지 않습니까?”
 
  부인은 하느님이 자기 소원을 받아 가슴속을 털어놓을 기회를 주셨다고 속으로 찬양하며 답했다.
 
  “아닙니다. 폐하.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여자라는 것은 옷차림이나 신분에 여러가지 변화는 있어도 속은 다 같은 법입니다.” 이 말을 듣자 왕은 이런 부인은 아무리 설득해 봐야 헛일이며 권력을 휘두를 경우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부인을 연모하는 것이 얼마나 철없는 짓인지를 깨닫고 수치스러운 방문을 적당히 끝내고 제노바를 떠나고 말았다.

 
 
  셋째 날 첫째 이야기
 
《데카메론》에 삽입된 삽화들은 꽤나 파격적이다.
  피렌체에 신성하기로 이름난 수녀원이 있었다. 그 수녀원에는 여덟 사람의 젊은 수녀와 원장 수녀밖에 없었으며 남자는 정원사뿐이었다. 정원사는 급료가 적은 것을 불만스레 여기고 고향 람포레키아로 돌아갔다. 마을 청년 중에 마제토라는 젊은이는 체격도 늘씬하고 얼굴도 호감이 가는 스타일이었다. 마제토는 정원사 누토에게 거기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어봤다.
 
  누토의 말을 들은 마제토는 젊은 수녀들과 함께 살아보고 싶은 달콤한 소망이 솟아났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자 누토는 “벙어리 노릇을 하면 채용해 줄지도 몰라”라고 말했다. 마제토는 도끼 한 자루를 메고 수녀원에게 가서 호감을 산 뒤 취직에 성공했다. 어느날 마제토가 자는 척하고 있는데 젊은 수녀 둘이 이런 대화를 나눴다.
 
  “여기 자주 찾아오는 부인들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이 세상에서 남자와 여자가 하는 즐거움만큼 좋은 것은 없대요. 우리는 다른 남자와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으니까 이 벙어리와 한번 시험해 봐야겠어요. 머리는 좀 비었어도 얼굴도 잘생기고 체력도 꽤 좋고 아주 쓸 만한 젊은이잖아요?”
 
  그러면서 두 수녀는 서로 망을 봐 주면서 곳간에서 마제토를 농락하기로 했다.
 
  두 수녀와 마제토의 쾌락을 다른 수녀 세 사람도 눈치챘다. 결국 다섯 명의 수녀가 마제토가 경작해 주는 ‘땅’이 되었다. 어느날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수녀원장이 마당을 거니는데 마제토가 감복숭아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휙 불어 마제토의 아랫도리 옷자락을 걷어 버리자 수녀원장은 제자들과 같은 욕정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수녀원장은 마제토를 깨워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간 뒤 달콤한 즐거움을 되풀이해서 맛보며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바람에 제자들인 젊은 수녀들이 정원사가 밭일을 해 주러 오지 않아 요란스레 비난의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마제토는 원장 수녀를 비롯한 여러 수녀들을 상대하다가 몸이 축나 필경에는 큰일을 당하겠다고 생각하고 원장 수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장님, 한 마리의 수탉은 열 마리의 암탉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인간은 남자 열 사람이 여자 한 사람을 만족시키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요. 그런데 저는 아홉 사람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이러다간 돈이 산더미처럼 쌓이더라도 몸을 지탱하기 어려우니 저를 내보내주시든가, 아니면 다른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셔야겠습니다.”
 
  벙어리인 줄 알았던 사내의 말에 원장 수녀가 놀랐다.
 
  “아니 어찌된 일이냐, 대체 이건? 너를 벙어리인 줄만 알고 있었는데.”
 
  마제토가 말했다.
 
  “저는 정말 벙어리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게 아니고 병을 앓아 말을 못하게 됐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됐습니다. 하느님의 덕은 참으로 고마운 것입니다.”
 
  원장 수녀는 또 “아홉 사람에게 봉사해 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마제토는 사실대로 말했다.
 
  결국 원장 수녀는 수녀들과 함께 서로가 해 온 일을 고백하면서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마제토는 오랫동안 벙어리였지만 수녀들의 기도 덕분에, 그리고 이 수녀원의 수호(守護) 성인의 공덕 덕분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곤 그의 몸이 지탱되는 방법을 찾아 피로도 덜게 해 주었다. 수녀들은 몰랐지만 이 일은 세상에 금세 퍼졌다.

 
 
  셋째 날 열 번째 이야기
 
  바버리의 카프사라는 도시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이 사람에게는 자녀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알리베크라는 매우 아름답고 성품도 부드러운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어떻게 하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느님께 봉사할 수 있을까 궁리하다 한 사람에게 묻자 그는 테베스의 쓸쓸한 사막으로 간 사람들처럼 속세에서 벗어날수록 하느님께 봉사를 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열네 살된 알리베크는 이삼 일 만에 한 성자(聖者)를 만났다. 그 성자는 이 어리고 아름다운 소녀를 머물게 해 줬다가는 자기가 악마의 유혹에 사로잡힐 우려가 있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성자를 소개했다. 알리베크가 만난 다른 성자 역시 똑같은 말을 하며 루스티코라는 젊은 성자를 소개해 줬는데 그는 자신의 굳은 신념을 큰 시련에 걸어 보자며 그녀를 받아들였다.
 
  오랫동안 자기의 신앙력을 과시하던 루스티코는 유혹을 물리치기는커녕 순식간에 그 유혹에 지고 말았다. 그래서 하느님께 봉사한다는 구실로 그녀를 자기의 쾌락에 응하게 하기로 했다. 루스티코는 악마가 아주 나쁜 하느님의 적(敵)이라는 것을 일러주고는 악마를 다시 지옥에 몰아넣어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러자 소녀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루스티코는 “그것은 곧 알게 되지. 내가 하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말한 뒤 발가숭이가 되었다. 처녀도 그대로 했다. 그는 기도를 할 때처럼 무릎을 끓고 소녀를 자기 앞에 세웠다. 그랬더니 일찍이 없었던 욕정이 불현듯 타올라 육체의 일부가 뭉클뭉클 일어섰다. 그것을 보고 알리베크는 놀라 “루스티코님 그 툭 튀어나온 게 뭐예요? 저한테는 없는데”라고 물었다.
 
  루스티코는 “오오, 소녀여 이것이 내가 몇 번이나 말한 악마란다. 알겠느냐? 이것이 나를 참을 수 없을 만큼 몹시 나를 괴롭히고 있느니라”라고 말했다. 알리베크가 “아아 하느님, 고마워라. 저한테는 그런 악마가 없으니까요”라고 하자 루스티코는 “대신 내가 갖지 않은 다른 것을 그대는 가졌느니라”라고 했다. 알리베크가 뭐냐고 묻자 “지옥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에 알리베크는 기뻐하며 “제가 지옥을 갖고 있다면 좋으실 때 쓰도록 하셔요”라고 말했다. “오오 소녀여, 그대에게 축복 있으라. 그럼 행하기로 하리라. 악마가 내게서 나가도록 지옥에 몰아넣도록 하리라.”
 
  루스티코는 이렇게 말하며 침대로 소녀를 데리고 가 소녀에게 악마를 지옥으로 넣는 법을 가르쳤다. 소녀는 처음 겪는 일에 아픔을 느꼈지만 이내 말했다.
 
  “확실히 악마는 나쁜 짓을 하네요. 지옥에 들어갔을 때도 아픔을 느끼게 했으니 하느님의 적이 분명해요.”
 
  그후로도 숱하게 악마는 오만한 머리를 쳐들었으므로 순진한 소녀는 언제나 꺾어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사이 쾌감을 느끼면서 소녀가 말했다.
 
  “카프사의 훌륭한 분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매우 기분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거짓이 아닌 것을 알았어요.”
 
  소녀는 이후 줄곧 루스티코에게 재촉했다.
 
  “루스티코님, 저는 하느님을 섬기려고 여기 왔지 게으름을 피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악마를 지옥에 몰아넣기로 해요.”
 
  이렇게 소녀가 루스티코를 졸라 하느님을 섬기자 루스티코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렵게 됐다. 풀뿌리와 물만 마시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져 하느님에 대한 가장 즐거운 봉사는 악마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일이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보카치오는 사생아(私生兒)였다. 아버지 보카치노 디 켈리노가 무역업에 종사했기에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잔느라는 여성 사이에서 그가 태어났다. 잔느의 신분을 두고 설(說)이 엇갈린다. 귀족의 미망인이라는 설과 재봉사였다는 설이 있지만 후자가 지배적이다. 보카치오는 어린 시절을 파리에서 보내다 어머니가 죽자 피렌체로 와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해 여섯 살 때부터 시를 쓸 정도였는데 아버지가 자기 일을 맡기려 12살 때 나폴리로 보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꺼리는 도시가 됐지만 당시의 나폴리는 문화의 중심지이자 생기가 넘치는 왕국(王國)이었다. 보카치오는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왕립도서관 사서였던 파올로 다 페루지아에게서 문학공부를 했다.
 
  보카치오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 스타티우스의 《테베원정 이야기》 등 그리스 신화를 연구하면서 타고난 창작력을 발휘해 주옥 같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제노바 출신의 천문학자 안달로네 델 네그로 등에게서 그리스 문학을 배워 단지오 왕가(王家)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1340년 확고부동한 시인으로 명성을 떨치던 그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그해 나폴리의 바르디 가문이 세운 은행이 도산했다. 그 은행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던 아버가 망하게 된 것이다. 생활이 어려워진 그는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하필 페스트가 피렌체를 휩쓸 때였다. 보카치오는 단테의 명작 ‘코미디아(Commedia)’를 ‘신성한 희극(Divina Commedia)’이라고 불렀다. 이 위대한 작품을 단순히 희극으로 부르는 것은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뜻이었다.
 
  보카치오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후 상띠스라는 이탈리아의 문학가가 《데카메론》을 ‘Umana Commedia’라고 불렀다. 단테의 《신곡(神曲)》이 비견할 만한 ‘인곡(人曲)’이라는 헌사(獻辭)였다. 《데카메론》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산문으로 된 최고의 문체를 구사한 소설로 세계 문학사상 이 작품만큼 모방, 변형, 표절을 당한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데카메론》은 가톨릭적 윤리관에 어긋난 작품이라고 해 한때 소외됐지만 사실주의 문학이 등장하면서 재평가받았다.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100가지의 이야기는 전설과 이탈리아 중부지방에 떠돌던 이야기들과 실화(實話)의 저수지다. 그는 이후 《코르바치오》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역시 《데카메론》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소설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353년 《데카메론》을 완성한 보카치오는 《명사열전》 《이교신(異敎神)들의 계보》 등을 발표한 뒤 46세 때인 1359년부터 페트라르카와 죽을 때까지 친교를 이어 갔다. 나폴리 등을 전전하다 1370년 다시 고향 체르탈도로 돌아온 보카치오는 성 스테파노 디 바디아 성당에서 단테의 《신곡》에 대한 강의를 하다 건강이 악화돼 1375년 12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조회 : 2115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812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마음챙김 명상 클래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