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진의 할리우드 통신] 〈스파이 브릿지〉의 마크 라일런스 : 월간조선

영화 〈스파이들의 다리〉에서 소련 첩자 루돌프 아벨 역을 한 영국 배우 마크 라일런스(56)와의 인터뷰가 2015년 10월 뉴욕의 만다린 오리엔탈호텔에서 있었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은 마땅히 실을 곳이 없어 넘어갔는데, 지난 2월 제88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바로 그가 남우조연상을 탄 것을 계기로 이번에 소개한다.

시상식에 앞서 권투드라마 〈크리드〉에서 왕년 자신의 라이벌 아들의 권투코치 록키로 나온 할리우드의 고참 실베스터 스탤론이 조연상을 탈 것이라는 예상이 압도적이었다. 라일런스가 상을 탄 것은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절제되고 과묵한 연기를 차분하게 하는 라일런스가 별다른 깊이나 섬세한 점이 없는 스탤론을 앞지른 것으로 보인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스파이들의 다리〉는 미소 간 냉전이 한창이던 지난 1957년 미국에 수감된 소련 첩자 루돌프 아벨과 소련에서 실형선고를 받은 미국 스파이기 U-2의 조종사 프랜시스 게리 파워즈의 맞교환을 성사시킨 미국인 변호사 제임스 도노반(톰 행크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라일런스는 셰익스피어 배우로 무대에서 연기력을 연마했는데 토니상을 세 번이나 탔고 런던의 셰익스피어 글로브극장의 예술감독도 역임한 무대의 베테랑이다. 모자를 쓰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인터뷰에 참석한 라일런스는 매우 겸손하고 조용하며 또 차분하게 질문에 대답했는데 지적인 선비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선한 인상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스필버그가 당신을 자기 영화에 쓰려고 오랫동안 별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스필버그는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 가장 열정적인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와는 무슨 일을 해도 좋을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지니고 나온 임무를 행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피카소나 모차르트 같은 사람이지요. 그야말로 자기 일의 장인(匠人)이면서 아울러 자신의 일에 대해 아이와 같은 경이감과 사랑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내 안에 있는 아이와 같은 장난기를 구사하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렇게 하니 내가 당초 생각했던 연기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더군요.”

—감옥에 수감된 당신을 면회 온 도노반과 당신이 대화를 나눌 때 테이블 위의 라디오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나왔는데 누가 그 음악을 골랐습니까. 쇼스타코비치를 고른 이유는 그가 스탈린에 의해 박해를 받았기 때문인가요.

“내가 고르진 않았습니다. 그러니 왜 그 곡을 골랐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가 나눈 대사 중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장단점을 논의하는 것이 있었어요. 물론 스탈린도 얘기됐을 것이지요. 그리고 아벨이 어렸을 때 자기 집에 사람들이 찾아와 압박에 관한 얘기들을 나눈 사실도 대사 중에 있었는데 아마 그래서 쇼스타코비치를 골랐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난 스필버그가 그 음악이 매우 감정적이고 강렬한 것이어서 골랐다고 생각하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음악을 통해 각자 믿고 있는 정치적 체제를 벗어나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것이겠지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좋아합니까.

“물론이지요. 영화를 찍는 날 하루 종일 그의 음악을 들을 수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세트의 매 장면 그런 음악이 필요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지요.”

—당신은 영화에서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요”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실제로 당신은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만사태평형입니까.

“난 아벨처럼 느긋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아벨은 어렸을 때부터 1차대전 반전운동을 하는 아버지와 함께 다니면서 전쟁을 자행하는 인간행동의 잔인한 면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잔인하고 혹독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런 것을 유머로 넘겨버리듯이 아벨도 어릴 때부터 배운 인간의 잔혹사를 통해 자신의 역경에 대해서도 체념하듯이 수용하는 성격이 된 것 같습니다.”

아벨은 고급 스파이인가?

〈스파이 브릿지〉는 냉전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포로 교환을 그리고 있다.

—영화를 만들기 전에 아벨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에 대해 아는 두 사람을 만났을 뿐입니다. 한 사람은 내 고등학교 친구로 지금은 기자인데 어렸을 때부터 아벨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가수 스팅으로 스팅의 가족이 아벨의 가족과 같은 동네인 영국 북부의 뉴캐슬에 살아 가족끼리 알았다고 합니다.”(아벨의 가족은 러시아계로 아벨은 뉴캐슬에서 출생했으나 1920년대 소련으로 이주했다.)

—당신은 영국 연극의 중흥을 이룬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그에 대해 말해 주세요.

“난 런던의 셰익스피어 글로브극장의 예술감독을 지냈고 작은 극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극단의 감독 겸 배우로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출하고 연기도 합니다. 여기서 성공하면 그 작품을 글로브와 브로드웨이로 가져갑니다. 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영화로는 만들고 싶지가 않습니다. 딱히 그것을 반대해서라기보다는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벨은 어떤 스타일의 스파이였습니까.

“그는 그림 그리기를 사랑했고 매우 상냥하고 친절한 아버지나 아저씨 스타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교환 후 소련에 돌아가자 소련에서는 아벨을 하급 스파이라고 발표했지만 미국에서는 그를 대령 계급의 고급 스파이로 믿고 있습니다. 누구 말이 진짜인지 몰라요. 아벨이 체포된 것은 그의 부하 스파이가 술로 자금을 탕진해 소련으로 호출되자 귀국길에 파리 주재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뒤 아벨의 이름을 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당신은 유머가 많은 사람으로 나오는데 각본대로 한 것인지요.

“난 위트도 없고 농담도 할 줄 모릅니다. 난 그저 내가 맡은 인물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얼마 전에 런던에서 이 영화를 볼 때 아내와 나의 경호원과 함께 봤는데 경호원이 영화 속의 내가 ‘그게 무슨 도움이 될까요’라고 말하자 킬킬대며 웃더군요. 각본에 그 말을 할 때 유머러스하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스티븐은 그럴 사람도 아니고요. 그러니 그저 상황 탓에 유머러스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 끝에 당신이 소련으로 돌아가기 직전 톰 행크스가 당신에게 귀국하면 뭘 하겠느냐고 묻자 당신은 보드카를 마시겠다고 대답했는데 무슨 술을 좋아합니까.

“사실 난 술을 더 이상 안 마십니다. 그리고 보드카는 내가 좋아하는 술도 아닙니다. 난 테킬라를 좋아해요. 그러니 제게 그것은 선물하지 마세요.”

—베를린에서 이 영화를 찍었는데 그 경험에 대해 말해 주세요.

“난 베를린에 갈 때마다 이 도시가 폭격에 의해 폐허가 됐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건물에 난 총알의 흔적을 보면 전쟁의 폭력성과 힘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베를린은 젊은 세대에게 인기 있는 도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매우 예술적인 도시이지요. 실제로 교환이 이뤄졌던 글리니케 다리에서 촬영을 할 때 굉장히 추웠어요. 실제로 역사가 이뤄진 곳에서 그 역사를 재연한다는 것은 막강한 경험이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황홀했지요.”

—다시 연극으로 돌아가서, 당신이 런던 무대에서 부활시킨 셰익스피어가 당신의 인생입니까.

“우선 셰익스피어는 새로 활기를 불어넣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일은 마치 태양 앞에 촛불을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작품은 결코 재생이라는 말이 필요가 없는 것들입니다. 나는 운 좋게도 16세 때 위스콘신주의 밀워키에서 나의 첫 셰익스피어 작품인 햄릿을 연기했지요. 그 후 다른 역도 해 보려고 했지만 언제나 셰익스피어 작품이 내겐 자연스러웠던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22세 때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의 초청을 받았고 28세가 돼서 이 극단에서 다시 햄릿을 연기했습니다. 따라서 내가 2005년 글로브를 떠나기 전까지 내 인생 전반부의 30년간은 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연기하는 것으로 보낸 셈입니다. 글로브를 떠난 뒤로는 다른 역도 하면서 5년마다 다시 셰익스피어를 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나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난 이제 스필버그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작품도 만들고 싶습니다. 스필버그도 셰익스피어처럼 역사와 환상의 부분들을 혼합해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리는 자기 시대의 얘기꾼입니다.”

“아벨은 귀국 후 스파이 교관으로 일했다는 얘기 들어”

〈스파이 브릿지〉에서 소련 첩자 루돌프 아벨 역으로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탄 영국배우 마크 라일런스와 필자.

—당신은 감옥에 수감됐을 때 당신을 만나러 온 톰 행크스에게 펜과 종이와 담배를 부탁했는데 만약에 당신이 실제로 아벨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무엇을 부탁 하겠습니까.

“감옥에 갇히면 난 종이와 펜을 들고 시를 쓰겠습니다. 반드시 시라곤 할 수 없지만 난 늘 어렵고 곤란한 경우에 빠지면 시를 써 그 어려운 것들을 본질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려고 하곤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악기를 부탁하겠습니다. 내 아내는 음악인인데 난 그의 연주를 찬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내로 인해 많은 음악인들을 만났지요. 그래서 죽기 전에 악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어떤 악기요. 피아노요.

“피아노는 감옥에서 힘들겠지요. 우쿨렐레라면 되겠지요. 아니면 감옥 탈출 열쇠가 숨겨져 있는 플룻도 좋겠지요.”

—스파이가 되려면 남과 다른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까.

“그렇다고 봅니다. 우리가 스파이에게 매력을 느끼는 까닭은 우리 모두가 스파이들처럼 겉과 속이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안에 일종의 비밀 임무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지요. 스파이의 매력이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게리 올드맨이나 알렉 기네스 같은 배우들이 왜 그렇게 스마일리(스파이소설 작가 존 르 카레의 주인공 조지 스마일리) 역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파이들은 고독하게 마련으로 고립되는 것을 편하게 여겨야 하겠지요.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가까워야 하는 것이 그들의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양분된 자신을 지녀야 하는데 배우로서 난 그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비밀을 잘 지킵니까.

“우리 가족은 날 보고 수다쟁이라고 해요. 그러나 난 사실 비밀을 잘 지킬 수가 있는데도 내 아내와 딸은 그것에 동의를 안 합니다.”

—아벨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는지요. 귀국 후 그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소련에 돌아간 뒤로 사라져 버리다시피 했어요. 그런데 그가 스파이 교관으로 일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영화에서 KGB요원으로 나온 배우가 미국 감독인 스필버그가 소련 스파이를 매우 좋게 묘사해 이 영화가 소련에서 인기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을 하더군요. 정장에 모자를 쓴 아벨이 뉴욕의 브루클린 법정으로 재판을 받으러 갈 때 짓던 찌푸린 표정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나도 그 사진을 보고 그의 심정을 가급적 진실하게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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