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중들, 잘 싸운 검투사를 살려주라고 요구하듯, 멋진 경기 벌인 황소에게는 ‘인디오(사면)’ 요구
⊙ 마타도르와 황소의 마지막 대결 순간은 삶과 죽음이 가려지는 ‘진실의 순간’
⊙ 관람석 모양은 모두 같지만 ‘솜브라(그늘)’석이 1등석… 대부분의 퍼포먼스도 이 앞에서 행해져
⊙ 기마투우사 ‘피카도르’, 작살 꽂는 ‘반데리에로’가 먼저 황소의 힘을 빼놓아
⊙ 6번의 경기 중에서 단 한 명의 마타도르만이 한 번에 황소를 죽이는 데 성공
박병진
1966년생. 서강대 경영학과 졸업 / IBM 로터스사업본부장, SAP 전략사업본부장·전무이사, SK쉴더스(구 ADT캡스) 전략사업실장·상품기획실장·부사장, 토페스(주) 대표이사 역임 / 저서 《위스키 스틸영》
⊙ 마타도르와 황소의 마지막 대결 순간은 삶과 죽음이 가려지는 ‘진실의 순간’
⊙ 관람석 모양은 모두 같지만 ‘솜브라(그늘)’석이 1등석… 대부분의 퍼포먼스도 이 앞에서 행해져
⊙ 기마투우사 ‘피카도르’, 작살 꽂는 ‘반데리에로’가 먼저 황소의 힘을 빼놓아
⊙ 6번의 경기 중에서 단 한 명의 마타도르만이 한 번에 황소를 죽이는 데 성공
박병진
1966년생. 서강대 경영학과 졸업 / IBM 로터스사업본부장, SAP 전략사업본부장·전무이사, SK쉴더스(구 ADT캡스) 전략사업실장·상품기획실장·부사장, 토페스(주) 대표이사 역임 / 저서 《위스키 스틸영》

- 사진=박병진
5월의 마지막 주, 톨레도 인근에 있는, 여의도보다 더 크다는 그의 올리브 농장을 취재하기 위하여 마드리드 바하라스 공항에 도착했다. 다음 날 그곳까지 렌터카로 가려고 했으나, 가는 길이 험해 외지인은 운전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한다. 그래서 마드리드에 거주하는 한국인 사업가이자 마드리드 회장의 동업자인 Y가 동행하여 운전을 해주었다.
예상보다 길은 더 험난했다. 길이 나타나지 않는 텅 빈 내비게이션 화면을 바라보며 대략 방향을 추측했다. 자연적으로 난 비포장 길을 따라 2시간여를 달리는데, 메마른 이베리아반도의 중간 중간 나타나는 수없이 많은 가시엉겅퀴가 인상적이었다. 워낙 광활한 농장이라 올리브 나무가 없는 공지(空地)도 군데군데 나왔고 다 자란 나무 사이도 여유 공간이 크니 역시 이베리아반도는 상상 이상이다.
마드리드 회장의 올리브 농장
농장 입구에서부터 본관까지도 꽤 멀어서 중간 중간 농장 관리인과 직원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올라” 하며 인사를 건넨다. Y의 말을 들어 보니 오늘 VIP가 온다고 하여 오늘따라 이렇게 열심히들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 VIP가 혹시 우리냐?”고 물으니 유쾌한 Y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럴 리가요? 물론 나예요!”
그렇게 농장을 한 바퀴 돌면서 난생 처음 올리브 꽃이 핀 것도 보고 군데군데 심어진 피스타치오와 앵두를 따서 먹기도 하며 사진 촬영을 마쳤다. 이제 사무실이 있는 본관으로 들어가려는데, 테라스가 길게 이어진 본관 옆의 멋진 공간이 뭔가 색다르다. 알고 보니 마드리드와 톨레도를 오가며 사는 마드리드 회장의 집이란다. 오늘은 다른 일이 있어 농장에 없는데, 멀리서 온 손님이니 다음 날 점심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자수성가(自手成家)로 거대한 올리브 농장과 여러 기업을 거느린 이 사람, 그런데 이름이 마드리드라니? 이것저것 내일 만날 재미있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다.
매일 광활한 올리브 농장을 바라보며 비는 또 언제 내릴까 걱정하는 마드리드 회장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낭만적이고 목가적(牧歌的)인 삶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비를 기다리는 일 이외에는 뭐 특별히 걱정할 일도 없이 유유자적하며 매일 좋아하는 와인과 올리브유를 마시며 살 수 있으니 이것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다. 문득 ‘아, 이래서 스페인 사람들이 투우를 좋아하나?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삶에도 무언가 삶과 죽음의 드라마가 필요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에스타를 위한 변명
다음 날 Y를 비롯한 한국인 친구들, 그리고 마드리드 회장과 점심을 함께 하려고 마드리드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콰트로 카미노스라는 지역에 있는 갈리시아 레스토랑으로 찾아갔다. 지하철도 없는 외진 곳이라 한참을 걸어서 갔다. 지나는 길에 남미(南美)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이 보이고, 낮고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그런 허름한 동네였다. ‘마 회장’이 극찬하는 대단한 레스토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주택가의 한가운데였다.
간판도 제대로 없어 겨우 찾아 들어간 레스토랑은 그저 동네의 평범하고 허름한 식당이었다. 점심 약속은 2시였는데, 2시 5분 전에 도착하니 아직 문도 열려 있지 않았다. 들어가 보니 아직 테이블 세팅도 안 된 상태였다. 2시 반은 되어야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오니 늘 이렇다고 한다. 그리고는 점심을 5시까지 먹으니, 보통 스페인 레스토랑은 디너의 시작이 오후 10시일 수밖에 없다.
가끔 농담처럼 이를 스페인 사람들의 성정(性情)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엔 다른 큰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시간대의 잘못된 설정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는 독일과 같은 시간대를 사용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스페인까지 같은 시간대가 되어 버렸는데, 전후(戰後)에도 원상복구가 되지 않아 스페인은 자신이 속한 시간대에 비해 지나치게 서쪽에 있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스페인은 저녁 10시에도 해가 지지 않는 이상한 시간대를 갖게 되었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처럼 일광절약시간제(서머타임)까지 적용하니 해는 더 오래 떠있게 된다. 그들도 대영제국처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바랐겠지만 이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인들의 변명을 대신하자면, 오히려 밤 10시에 저녁을 먹고 고단한 일과를 자정쯤 끝내더라도 대부분의 스페인인들은 다음 날 8시, 9시에 정상적으로 출근을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과거 시에스타(낮잠시간)가 있었고, 지금도 시에스타는 아니지만 오후에 긴 점심시간이나 휴식 시간을 갖는 것을 애틋한 맘으로 이해해 주고 싶다. 시간대를 바꾸는 결정은 쉽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속 스페인 민초(民草)들의 애환에 공감한다. 바르샤바와 마드리드가 같은 시간대라는 것은 사실 상식적이지 않다.
3시간 반 걸린 점심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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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마드리드 회장. |
식사를 하는 동안 ‘마 회장’은 레드와인을 마시며 두툼한 종이 뭉치를 계속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그제사 씨익 웃으며 “마드리드 투우장의 시즌 스케줄표”라며 슬쩍 보여 준다. 경마처럼 도박으로 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두툼한 종이 뭉치엔 꽤나 상세한 듯 많은 정보들이 빼곡이 채워져 있었다.
“오늘은 기대하라”며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쥔 마드리드 회장에게 다른 칭찬을 하나 받았다. 내 앞에 있는 게딱지에 그득한 장에 빵을 찍어 먹으니 “당신, 게 좀 먹을 줄 아네!”라며 웃는다. 그래서 내친 김에 “한국에서는 여기에 밥도 비벼 먹어요”라고 했다가 또 혼났다.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렇게 귀한 것을 왜 밥에다가 섞어 먹느냐?”고 나무란다. “당신들한테는 빵이 소울푸드이지만, 우리에겐 밥이다”라고 대꾸하려다가, 밥 사주는 분 앞이라 조용히 웃으며 고객를 끄덕여 주었다.
이렇게 각자 와인 한 병씩을 비운 거나한 상태로 나왔다. “잠시 후 오후 7시 투우장에서 만나자”며, 장장 3시간 반에 걸친 점심 식사를 끝냈다. 역시나 이곳은 마드리드, 점심은 그렇게 5시 반에 끝났다.
콜로세움 같은 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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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벤타스 투우장. |
나는 마치 로마 제국의 검투사(劍鬪士)라도 되는 양 그 지하에서 마드리드의 뜨거운 햇살을 한 모금 머금고 지상의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점심을 먹으며 거나하게 와인을 마셨는데도 우리는 경기장의 1층 바에서 한잔 더 하며 그곳에서 ‘마 회장’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드리드에서 투우장의 시즌권을 가진 이들이니 뭐 말할 것도 없는 상류층들이다. 마드리드의 사교와 비즈니스가 이곳에서 이루어지니 모두가 이곳으로 모이는 것 같다. 여기서 프로야구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투우장은 기본적으로 원형경기장, 즉 콜로세움과 동일한 구조다. 출입구 곳곳에 방석을 빌려 주는 부스가 눈에 띄었다. 패셔너블한 복장을 갖춘 여피족들은 역시 멋진 자신만의 방석을 가지고 와서 패션 감각을 뽐냈지만, 대부분은 2~3유로를 내고 방석을 빌려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왜 모두 방석을 빌리는지는 자리를 잡고서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좌석의 등급과 좌석의 형태가 무관했다. 즉, 1등석이든 일반석이든 모두 똑같은 시멘트 바닥이다. 그냥 앉으면 엉덩이가 배기니 모두들 방석을 깔고 앉는 것이다. 꽤나 가파른 각도와 매우 좁은 앞뒤 간격의 좌석은 자칫 무게중심을 잃으면 앞으로 쏠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여기도 전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로 간식과 맥주를 파는 행상이 가파르고 좁은 통로 사이로 마치 다람쥐처럼 성큼성큼 잘 날아다닌다. 어릴 적 길거리 간식으로 번데기를 담아 주던 원뿔형 종이 용기 같은 것을 길게 30센티 이상으로 말아서 피스타치오를 가득 담아 파는 모습이 이국적(異國的)이었다.
솜브라(그늘)와 솔(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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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벤타스 투우장을 가득 메운 투우 관람객들. 그늘이 지는 ‘솜브라’가 1등석이다. |
가장 비싼 좌석이 솜브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퍼포먼스 역시 이 앞에서 벌어진다. 간혹 황소가 반대편 솔 앞에 있으면 이쪽으로 몰고 와서 경기를 하게 되니, 솔 쪽의 뒷자리는 TV로 경기를 보는 것보다 시야가 더 좋지 않다. 그래도 현장의 열기를 느끼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온다. 피가 끓는 젊은이들이니 뭐 투우를 볼 수 있는 것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솜브라 자리엔 대부분 시즌권을 가진 마드리드의 상류층들이 앉아 있는데, ‘솜브라 이 솔’ 자리에서 넘어오지 못하도록 펜스가 쳐져 있다. 펜스 안의 솜브라석 사람들을 돌아보니 중절모를 쓰고 시가를 피워 문 스페인 마초들이 대부분이었고, 투우사의 동작 하나하나에 “올레!”를 외치며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맨 앞줄은 장벽이란 뜻의 ‘바리에라(barriera)’석인데 관계자들을 위한 자리다. 주(州)정부의 관리, 언론, 주최측 등이 앉을 법한 자리들이 있는데 내 눈에 띈 건 ‘가나데로스(ganaderos)’석이었다. 바로 목장주의 자리인데, 경마의 마주(馬主)처럼 대우받는 중요한 자리다. 경마는 같은 말이 계속 뛰기에 마주가 중요하지만, 투우에서는 매일 여섯 마리의 황소가 목숨을 잃기에 지속적으로 우수한 황소를 공급하는 목장주가 매우 중요하다. 투우가 잔인하다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보통의 육우들이 생후 1~2년 사이에 도축되는 것에 비하면 4~5년 좋은 환경에서 사육되는 투우용 황소는 그보다 나은 처지 아닐까? 가치 판단의 기준에 대한 또 다른 고민을 하게 된다.
제1막의 주연, 피카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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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우의 제1막에서 눈을 가리고 갑주를 한 말을 탄 피카도르는 황소를 창으로 찔러 상처를 입힌다. |
경기를 시작할 때 마타도르가 인사를 하지만, 제1막의 주연은 단연 피카도르이다. 철통 같은 장갑(裝甲)으로 무장한 말을 탄 중장갑의 창기사(槍騎士) 피카도르는 영락없이 중세(中世)의 마상 시합에 나오는 철갑(鐵甲) 기사다. 마드리드 에스파냐 광장의 돈키호테 기마상이 연상되는 피카도르는 긴 창인 ‘가로차(garrocha)’로 소의 어깨 근육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하고 소가 앞으로 머리를 숙이도록 한다. 하지만 이때는 가장 소의 힘이 왕성할 때라 타고 있는 말과 함께 뿔에 받혀 뒤집어지기도 하는 등 매우 위험한 역할이다. 그래서 때때로 보조 투우사인 페네오(Peneo)가 분홍색 망토를 흔들어 소의 시선을 분산해 준다.
하지만 내 눈에 띈 것은 그보다, 황소의 공격에 놀라지 않도록 말의 눈을 완전히 가린 것이다. 그래서 말은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도사린 줄도 모르고 그저 피카도르가 이끄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눈가리개는 말이 패닉에 빠지지 않게 하고 말의 안전 또한 보장하는 셈이다.
반데리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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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명의 반데리예로는 각각 장식이 된 작살 두 개를 황소에게 꽂아야 한다. |
사실 피카도르보다 반데리예로가 더 위험한 대결을 펼친다. 반데리예로는 맨몸에 작살 두 개만 들고 돌진해 오는 황소와 정면승부를 펼친다. 망토도 없고 그저 작살 두 개만 들고 이들은 황소의 등뼈 양쪽으로 작살을 찔러 넣는다. 황소와 정면승부를 할 수 있는 담력과 작살로 찌르고 난 후 잽싸게 성난 황소를 피하는 민첩성, 두 가지가 다 요구되며 작은 실수라도 하면 크게 부상을 당할 수 있는 역할이다. 그래서 세 명의 반데리예로가 각 2개씩의 작살을 가지고 나오지만, 대부분의 투우장에서 6개의 작살이 다 꽂혀 있는 소는 거의 없다. 적으면 두 개 정도, 많아도 네 개 정도가 등에 꽂혀 있다. 그만큼 담력과 순발력을 겸비한 반데리예로는 많지 않다. 이날 여섯 경기를 통틀어 6개의 작살을 다 꽂은 반데리예로는 없었다.
마타도르
흔히 기업 경영에서 MOT라는 약어로 많이 쓰이는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이란 말은 투우에서 유래했다. MOT는 그 기업의 직원 혹은 자원이 직간접적으로 ‘처음 만나는 고객과의 접점(接點)’이란 뜻이다. 바로 이 접점에서 고객에게 어떤 이미지를 심어 주느냐에 따라서 그 기업의 성패(成敗)가 좌우된다는 뜻이다.
투우에서 마지막 이 순간을 ‘진실의 순간(el momento de la verdad)’이라고 하는데, 이는 ‘삶과 죽음을 가른다’는 뜻이니 기업의 MOT보다 훨씬 무거운 말이다. 투우에서 죽는 것은 황소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하는 ‘진실의 순간’은 지금도 여전히 스페인 전역의 투우장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다. 투우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최고의 퍼포먼스를 펼치려 하다가 뜻하지 않게 실수로 사망하거나 다치는 경우가 많다. 지난 100여 년간의 투우 역사에서 약 500명 이상의 투우사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10년 사이에도 두 명이 사망했으며 다친 투우사는 훨씬 많다.
피카도르와 반데리예로가 제 역할을 하면, 가장 빛나는 복장으로 붉은 물레타를 들고 화려하게 마타도르가 등장한다. 스페인어로 ‘킬러(killer)’를 뜻하는 이 말은 ‘흑색선전(黑色宣傳)’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흑색선전을 하는 것도 사회적으로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아니라는 뜻이니, 정치권에 있는 분들은 부디 원뜻을 명심하고 이를 경계해 주기를 바란다.
마타도르는 그 화려한 복장에 못지않은 기교를 구사한다. 마치 황소와 댄스를 하듯 황소의 곁에 바짝 붙어서 물레타로 황소를 희롱한다. 이를 ‘파에나(faena)’, 즉 ‘기교를 부린다’고 하는데, 얼마나 아름답게 황소와 이 게임을 하느냐가 마타도르의 명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모든 투우사가 좀 더 황소 가까이에서 파에나를 하려다가 다친다. 적어도 황소의 피로 그 화려한 복장은 무조건 피투성이가 되고 만다.
진실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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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타도르는 부상을 입은 황소를 희롱하는 파에나 끝에 에스토케(칼)를 꺼내들고 황소의 목숨을 끊는다. |
마타도르의 명성은 이때 얼마나 정확하게 한 번에 에스토케의 손잡이까지 소의 숨골로 쑤셔 넣어서 심장까지 관통하게 하는지로 결정된다. 이날 멋진 파에나를 보여준 투우사는 많았지만, 그 진실의 순간을 단 한 번에 완벽하게 마무리한 마타도르는 6번의 경기 중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한 명은 황소의 역습(逆襲)으로 발굽에 짓밟히기도 하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나니 투우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바로 그 최고의 마타도르가 출전하기 전, 우리의 마드리드 회장은 “오늘 투우사들이 영 못한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피우던 시가까지 끝나 가자 “오늘 투우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어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투우는 스페인의 정수(精髓)이고 예술인데 오늘 그 예술을 못 보여 줘서 미안하다”면서 “그래도 당신에게는 새로운 경험일 테니 모쪼록 끝까지 즐기시길 바란다”는 인사와 함께 가파른 관람석에서 내려가 버렸다. 사실 그 마타도르도 첫 번째 경기에서는 황소에 받혀 넘어지고 짓밟혀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경기 전 부상 입은 황소는 암소들에 둘러싸여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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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전에 부상당한 황소는 암소들에 둘러싸여 퇴장한다. |
마드리드 라스벤타스에서는 매일 총 세 개 팀의 투우사가 출전한다. 이들이 순서에 따라 한 팀씩 순환하며 황소와 대결하므로 한 팀당 두 마리의 황소와 대결하는 셈이다. 추가된 두 마리는 일종의 예비 황소인데, 앞의 여섯 마리 중에서 경기에 참여할 수 없는 사정이 생긴 황소 대신 죽어야 하는 운명의 황소이다. 매우 드문 일이긴 하지만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나는 바로 그날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
모든 황소는 경기장에 들어오기 전 하루 동안 조용하고 어두운 방 안에 가두어 둔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걸음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향하게 되는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대부분 매우 흥분한 상태가 된다. 문제의 여섯 번째 황소가 바로 그랬다. 나오자마자 흥분하여 엄청난 속도로 경기장을 몇 바퀴 돌며 좌충우돌(左衝右突)하다가 제 풀에 못 이겨 앞으로 넘어지면서 그만 앞다리가 부러져 버렸다. 이렇게 되면 경기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황소를 들여보내고 예비해 둔 황소가 나와야 하는데, 문제는 앞다리가 부러진 녀석이 절룩거리면서도 경기장을 나가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다음 장면을 보고 이마를 쳤다. 갑자기 경기장에 암소를 10마리쯤 풀어 놓은 다음, 암소들이 그 황소를 에워싸고 경기장 밖으로 데리고 나가게 하는 것이다. ‘아, 이게 스페인이구나!’
그 황소는 그날 목숨도 구하고 아리따운 암소들에게 둘러싸여 나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투우 경기장에는 출전 황소 6마리, 예비 2마리, 그리고 암소 10여 마리 등 총 20여 마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디오(사면)
주연인 마타도르는 가장 예술적인 파에나를 보여 주기 위해 목숨을 건다. 마타도르와 황소의 합작으로 누가 보아도 멋진 경기가 펼쳐지면, ‘진실의 순간’ 직전에 관중들이 그 황소를 살려 주라며 “인디오(Indulto)! 인디오!” 즉 ‘사면(赦免)’이라고 외치며 흰 수건이나 티슈를 흔든다. 많은 관중들이 기립하여 수건을 흔들면 심판위원장이 판단하여 황소의 생사(生死)를 결정한다. 마치 로마 황제가 관중들의 연호를 받고 검투사를 살려 줄 것을 명령하는 것처럼.
인디오가 결정되면 그 황소는 여생을 종우(種牛)로서 평온하게 대접 받으며 살 수 있고, 마타도르 역시 슈퍼스타가 되어 무형문화재급 대우를 받는다. 바로 이 ‘인디오’의 영예를 위하여 마타도르는 큰 위험을 감수하고서 황소의 바로 앞과 옆에서 놈과 몸을 비벼 가며 물레타를 휘두른다. 그리고 멋진 장면이 나올 때마다 관중들은 “올레!”를 외친다.
스페인에서 투우가 야만적인 경기가 아니라고 옹호할 때 흔히 이 ‘인디오’를 예로 든다. 사실 최근에는 거의 없었고, 10여 년 전에 딱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스페인 투우의 황소와 달리,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실제로 검투사(gladiator)가 살아남는 확률은 영화나 소설에서와 달리 의외로 높았다. 사실 자본의 논리 때문에 거의 죽지 않았다고 봐도 좋다. 흥행을 위해 전문적으로 훈련된 검투사에 대한 투자 비용은 무척 높았고 검투 경기 자체도 극적인 연출과 기술의 대결을 보여 주는 것이라 무의미한 살육은 많지 않았다. 추정컨대 80~90% 이상이 생존한 것으로 보이니, 황소는 글래디에이터는 아닌 셈이다.
경기를 마치고 나오며 아까 다리 부러진 황소를 대신해 죽은 그 예비 황소의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리가 부러져 제 목숨을 구하기는 했지만 그 황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대신 죽은 그 황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게 또 뭔가’ 싶지 않을까? ‘예수가 십자가에서 인간들을 위해 대속(代贖)하듯이 그 황소 또한 하나의 생명을 살려 내고 대신 떠난 셈’이라고 생각하며 끝나지 않은 고민을 서둘러 마무리해 버렸다.
오늘 하루 투우를 처음 본 초짜가 소화하기 버거운 너무 많은 것을 하루에 다 보았다. 하지만 스페인의 뜨거운 햇살과 무료한 일상이 있는 한 이베리아반도의 모든 투우장에서는 “올레(Olé·멋지다)!” 소리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물론 황소들은 인디오를 바라겠지만!
하지만 인디오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올레 콘 올레(Olé con olé·정말 멋지다)!”의 연호(連呼)가 경기 내내 쌓여야 하는 것이니, 황소에게도 세상은 쉽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