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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분식, 대중 영합’ 비판 받는 全北의 ‘동학농민운동 유족수당’

‘왕도정치’ 갈망한 동학군을 대한민국이 왜 예우하나?

  •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thegood@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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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뉴스’ 취급 받은 전북의 ‘동학농민혁명 유족수당’ 지급 계획
⊙ 국가유공자는 ‘조건부’로 2대손까지 수혜… 동학농민군 유족은 ‘4대손’도 포함
⊙ 동학농민운동의 ‘근대성’ 논거인 ‘폐정개혁안 12개조’는 진위 불분명
⊙ 윤준병 의원(민주당), 동학농민혁명 헌법 전문 포함·동학혁명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 주장
⊙ 동학농민혁명 유족 1만3268명, 전북 관내 참여자 유족 915명
⊙ 전북도의 수당 지급 조례는 법적 근거 불분명하다는 논란 있어
⊙ “전북은 동학농민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연 중심이자 민주주의 시대를 연 심장부” (김관영 전북지사)
⊙ “‘일제 침략에 맞선 무장투쟁’ 주장은 운동권적 역사 편집”(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
사진=동학농민혁명기념관
지난 6월 25일, 전라북도가 ‘동학(東學)농민혁명’ 참여자 후손에게 매월 10만 원의 수당을 지급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온 이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조치는 2024년 5월 제정되고 같은 해 9월 개정된 ‘전북특별자치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지원에 관한 조례’에 따른 것이다. 전라북도는 이르면 내년부터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갈 방침이다. 이를 위해 7월 31일 전북도의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수당 지급정책 수립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한다고 공고까지 했다.
 
 
  ‘전북에 사는 유족’만
 
  지급 대상은 참여자의 자녀와 손자녀·증손자녀·고손자녀 등 직계 후손 가운데 전북에 사는 유족이다. 현재 전북 관내에 거주하는 수당 수급 대상 유족은 915명(참여자 1명당 수급권을 가진 유족은 1명으로 한정)이다. 이는 노무현 정부 시절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유족 등록을 받은 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가 지금까지 심사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유족 신청 희망자는 ▲자신의 부모·조부모·증조부모 또는 고조부모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 또는 문헌 ▲참여자 호적 관련 서류 ▲신청인의 가족관계증명서 ▲그 밖에 유족임을 소명할 수 있는 증거자료를 각 1부씩 첨부해 서류를 제출하고 심의를 거쳐야 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따르면 2004년부터 지금까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된 이는 총 3913명, 그 유족은 1만3268명이다. 전라북도는 관내 거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915명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데 연간 10억9800만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동학농민운동 참여자 유족에게 수당을 주는 것은 전라북도가 최초 사례는 아니다. 2019년 전북 정읍시에서는 당시 시장이 발의한 조례안에 따라 의회 의결을 거쳐 이듬해부터 관내에 거주하는 참여자 후손에게 수당 월 10만원을 지급했다.
 
  관련 보도 이후 일각에서는 “가짜뉴스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임진왜란 의병 후손들에게도 수당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됐다. 다소 황당한 주장이지만,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고려할 때 단순한 궤변으로 치부하기 힘들다. 논쟁의 핵심은 명확하다. 동학농민운동은 그 사상적 지향과 목표 면에서 민주공화국의 헌법정신과 거리가 있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을 대한민국의 ‘보훈(報勳·국가 유공자 훈공에 대해 당사자나 유족에게 보답하는 일)’에 포함하자는 주장은 국민적 공감을 얻기 쉽지 않다.
 
 
  ‘조병갑 수탈’과 ‘고부민란’
 
고부군수 조병갑이 자행한 부패와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가 있던 자리에 ‘만석보유지비’가 서 있다. 이하 사진=박희석
  현행법상 ‘혁명’으로 규정된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말인 1894년 농민들이 동학교단을 중심으로 조직한 전국적 무장(武裝) 저항운동이다. 전개 시기는 보통 1차 봉기(3~5월)와 2차 봉기(9~11월)로 구분된다. 1·2차 봉기는 전개 양상, 지향점, 외세 인식 등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군에서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발생한 민란이다. 당시 이를 주도한 이는 ‘녹두장군’으로 불리는 전봉준(全琫準)이다. 고부민란 종료 후 안핵사(按覈使) 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가 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해 탄압하자, 전봉준은 전라도 무장(茂長)현(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에서 동학 남접(南接) 대접주 손화중(孫華仲)·김개남(金開南)과 1차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제폭구민(除暴救民·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원함)과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거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기치를 내걸고 태인, 금구, 부안으로 진격했다. 이어서 황토현(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서 전라감영군 2000여 명과 싸워 승리했다.
 
  고종은 그해 4월 2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고 동학농민군 진압을 명했다. 홍계훈은 독일제 소총과 크루프(Krupp)포, 최초의 근대식 대량살상무기로 평가받는 개틀링 기관총(회선포)을 보유한 조선 최정예 경군(京軍) 800여 명을 이끌고 전주성으로 향했다. 동학농민군은 경군을 유인하기 위해 고창군→영광군→함평군→나주목으로 남하했다가 갑자기 북상해 4월 22일 장성군 황룡촌에서 경군 300명과 교전해 승리하고 최신 무기를 노획했다. 나흘 뒤인 26일에는 전주성에 무혈입성했고 이후 뒤를 쫓은 홍계훈 부대와 5월 3일까지 교전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淸)에 개입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5월 5일 청군이 충청도 아산에 상륙했고, 갑신정변(1884년) 후 청일 양국이 체결한 ‘톈진조약’(1885년·청일 병력 조선 주둔 금지, 병력 파견 시 상호 통보 후 사건 종료 시 즉각 철수)을 명분으로 5월 6일 일본군도 제물포로 들어왔다. 경군과의 완산전투(4월 28~5월 3일)에서 패한 동학농민군과 일본의 군대 파병에 당황한 조정은 협상에 나섰다. 동학농민군은 조정에 ‘폐정(弊政) 개혁’을 요구했고, 홍계훈과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이 이를 수용해 5월 7일 ‘전주화약(和約)’이 체결됐다.
 
 
  ‘척왜양창의’ 내걸고 2차 봉기
 
고부민란 이후 전봉준이 동학 남접 대접주 손화중과 함께 농민들을 훈련시키고 봉기했던 ‘무장 기포지’(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다.
  이후 해산했던 동학농민군은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고종의 신병을 확보한 뒤 강제적인 근대 개혁을 추진하자 재(再)봉기를 준비했다.
 
  가장 먼저 거병한 이는 남원 지역을 본거지로 한 김개남이다. 김개남은 조선왕조 타도와 새 왕조 건설을 목표로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재봉기는 시기상조”라던 전봉준과 손화중도 김개남이 봉기하고 흥선대원군도 밀지(密旨)를 보내 재봉기를 독촉하자 9월 18일 전라도 완산군 삼례면(현 완주군 삼례읍)에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일본과 서양을 물리치고자 의병을 일으킴)’란 구호를 내걸고 거병하면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에게 연합전선을 요청했다. 그간 남접의 무장투쟁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최시형은 입장을 바꿔 기포령(起包令)을 내리고 손병희(孫秉熙·후에 동학 3대 교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를 북접군의 지휘관으로 삼았다.
 

  전봉준은 삼례에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한 달 동안 군수물자를 모았다. 10월 12일 북상해 공주 공략에 나섰지만 조일(朝日) 연합부대에 패배했다. 동학농민군은 전열을 정비해 재공략에 나섰지만, 11월 9일 우금치(현 충남 공주시 금학동)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관군(官軍)과 일본군의 맹공에 궤멸적 타격을 입고 대패했다. 같은 시기 능치전투에서는 북접의 손병희 부대가 관군의 급습을 받고 와해됐다. 이후 동학농민군은 전라도로 남하하면서 조일 연합부대와 교전했지만 번번이 패했다.
 
  태인전투(11월 27일)를 끝으로 전봉준은 항전을 중단하고 금구로 도피했다. 후방에서 나주를 공략하던 손화중도 12월 1일 군대를 해산하고 은신했다. 충청도에서 저항하던 북접의 손병희 부대는 최시형의 명에 따라 12월에 해산했다. 이후 주변인의 밀고로 각각 체포된 전봉준(12월 28일), 손화중(12월 11일) 등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한성부로 압송돼 석달이 지난 1895년 3월 29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다음 날 처형됐다.
 
 
  국회의원·지방의원·지자체장의 ‘동학’ 강조
 
  일부 인사들은 동학농민운동을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평가하며 ‘동학농민운동→3·1운동→4·19→5·18→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연속성을 주장하지만, 이는 ‘자의적인 도식’에 불과하다. 그런 까닭에 지방자치단체가 동학농민운동 참여자 유족을 대상으로 보훈 성격의 수당을 지급하는 행위는 정당성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지방 입법권을 이용해 특정 역사 사건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지방행정권을 통해 국가 보훈 체계를 우회하거나 무력화하는 사례를 만드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지적과 관련해서 해당 조례 발의자인 염영선 전북도의원에게 물었다.
 
  — 동학농민운동은 근왕(勤王)주의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당시 그들의 사상과 지금 대한민국은 연결되는 지점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럼 1895년 을미의병도 독립운동이라고 하지 말아야 맞죠. 동학농민혁명 당시는 대한민국 체제가 아니었지만, 이미 1895년 을미의병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했기 때문에 말씀드린 겁니다. (동학농민군은) 2004년 특별법에 의해서 유공자로 선정됐거든요. 그럼 다른 유공자처럼 유족수당을 줘야 마땅한데, 국가보훈부에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읍시에서 하던 걸 전북특별자치도로 확대하자고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 지금 ‘유공자’라고 표현했는데, ‘유공자’는 아니잖습니까. 특별법 상 동학농민군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이 정말 ‘독립운동’이라면, 그에 관한 학술연구부터 진행하고 또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 다음에 서훈 기준을 고쳐 예우하자고 주장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지방의회가 이런 식으로 국가 보훈 체계를 무력화하는 조례를 발의하고 지자체가 시행하는 게 타당한 겁니까?
 
  “그런 비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학술연구를 충분히 하고 공개 토론을 거쳐야 하는데요.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벌써 20년이 지났어요. 이제 정말 유족으로 등록된 사람이 다 죽고 난 다음에, 아니 죽은 후에도 유족에 대한 수당이라든가 그런 게 없을 것 같아서 먼저 지자체에서 시작하자는 그런 취지로 한 겁니다.”
 
  일각에선 이번 조치를 2026년 지방선거를 앞둔 지역 정치권의 대중 영합(포퓰리즘) 행보로 보고 있다. 실제로 해당 조례안을 발의한 도의원의 지역구는 동학농민운동의 중심지인 정읍이다. 2022년 7월 1일 취임사에서 “전북은 동학농민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연 중심이자 민주주의 시대를 연 심장부”라고 언급한 바 있는 김관영 전북지사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할 가능성이 크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 같은 조처가 전국 단위로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 행정1부시장을 지낸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전북 정읍·고창)은 21대에 이어 이번 국회에서도 동학농민운동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자는 법안을 다시 제출했다. 동학을 ‘혁명’이라 명명하고 이를 제도화한 노무현(盧武鉉) 정부, 매년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문재인(文在寅) 정부, 두 정부와 비슷한 기조인 이재명(李在明) 정부의 행보를 고려하면 앞으로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재해석과 ‘과도한 예우’가 전국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유례 찾기 어려운 지자체의 ‘보훈수당’ 신설
 
전봉준이 무장현에서 기포를 준비할 당시 농민군이 죽창을 만들 대나무를 조달한 곳으로 알려진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의 대숲이다. 해당 마을은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법적 타당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현행 지방자치법 제28조 1항은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를 제정할 때 그 내용이 “주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거나 벌칙을 정할 때는 반드시 법률의 위임이 있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특정 사건의 참여자 유족에게 매달 일정 금액의 수당을 지급하는 조례는 단순한 상징적 명예 회복이나 기념사업의 범주를 벗어난다. 이는 실질적으로 보훈적 성격의 금전적 급부에 해당한다. 그 자체로 새로운 재산권을 창설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고, 그럴 경우 반드시 상위 법률의 명시적 위임 근거가 있어야 정당화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8조 4호를 수당 지급 근거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해당 조항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그 유족의 명예 회복을 위한 ‘사업’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유족에게 수당을 직접 지급하라는 명시적 규정은 해당 법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당 지급을 옹호하는 측에서 반대 논거로 제시할 가능성이 있는 각 지방자치단체의 복지 명목 수당은 동학농민운동 참여자 유족수당과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다. 일반 복지 명목 수당은 사회보장기본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포괄적으로 위임된 자치사무다. 또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시행됐기 때문에 법적 정당성이 인정된다.
 
  동학농민운동 참여자 유족수당은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유족에 대한 지자체의 각종 지원금과도 법적 성격이 다르다. 전술한 두 사건의 희생자 유족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과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보상 체계에 따라 지원금을 받는다. 이와 달리 동학농민운동 참여자 후손에 대한 수당 지급은 전술한 것처럼 상위 법령에 아직 근거가 없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소관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의 전통문화과 관계자는 전라북도 조례의 위법성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특별법 8조에 보면 기념사업은 어떤 정신의 선양이라든지 명예 회복에 관련된 사업으로 정하고 있지만, 수당 지급 기준이나 근거를 정하고 있지는 않아요. 전북도에서 지금 추진하고자 하는 유족수당 같은 경우는 해당 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는 거고, 국비가 지원되지 않는 부분이라서요. 자치단체에서 자체 재원으로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유족을 위한 사업이잖아요. 그래서 상위법에 명확한 근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을 정해 놓는다고 하면, 법을 어겼다고 얘기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요.”
 
 
  증손·고손의 수혜 자격 논란
 
동학농민군의 백산대회를 후대에 그린 기록화다. 무장현에서 들고 일어난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백산(전북 부안군 백산면)으로 이동해 조직을 정비했다. 출처=국가기록원
  전라북도의 해당 조례가 헌법적 원칙과 현행 보훈 체계에 어긋날 소지가 크다는 지적도 제기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2호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자녀·손자녀 및 증손자녀·고손자녀’를 유족으로 정의한다. 전북도 조례도 마찬가지다. 이는 보훈 법령 상 유족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헌법이 규정한 국민 평등권을 침해하고 ‘사회적 특수계급’을 창설하는 행위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국가유공자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유족’의 범위를 배우자·자녀 및 제한적 조건 하에서 손자녀까지로 한정한다. 이는 보훈 급부가 후대까지 무제한으로 세습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제한하는 장치다.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에는 유족의 범위가 명시돼 있지 않다. 당사자가 사망하면 유일한 금전적 혜택인 ‘참전명예수당’ 지급이 중단(제5조 2항)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학농민운동 참여자의 유족을 다른 법령 상 규정과 달리 고손자녀까지 확대해 수당을 지급한다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제1항)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제2항)고 규정한 헌법 제11조를 위배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보훈법 체계의 형평성과 일관성을 훼손하는 사례로 지목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염영선 전북도의원은 “동학농민운동은 130년 전의 사건으로, 자녀나 손자녀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므로 증손·고손자녀에게까지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이는 공로자 유족에 대한 지원 의도와 거리가 먼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실질적 생활관계와 심리적·경제적 연계성
 
  보훈정책 상 유족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단순한 혈연관계가 아니라 공로자와의 ‘실질적 생활관계’와 ‘심리적·경제적 연계성’을 전제로 한다. 대부분의 보훈 급부는 공로자가 생전에 직접적인 예우를 받지 못했거나, 전사·순직·투옥 등으로 유족이 생계 곤란을 겪었을 경우를 가정하고 마련된 제도다. 유족에 대한 수당 지급과 각종 지원은 공로자의 희생에 대한 간접적 보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동학농민운동 참여자의 증손자녀나 고손자녀가 과연 공로자의 희생에 대한 예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왜 그런 특혜를 줘야 하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 같은 법적 타당성에 대한 의문과 반대 여론에도 전라북도는 2026년 1월 추진을 목표로 관련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전라북도 유산관리과 관계자와의 문답이다.
 
  — 동학농민운동 참여자 유족에게 수당을 지급한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반대 여론이 거셌습니다. 그럼에도 해당 사업을 진행할 계획입니까?
 
  “내년 1월 추진을 목표로 준비는 하고 있습니다만, 도민 공청회를 개최해서 한 번 더 도민들께 여쭤 볼 계획입니다.”
 
  — 이번에 비판적인 여론을 확인한 후 그 지적의 타당성에 대해서도 검토해 봤습니까?
 
  “예, 지금 그런 과정입니다. 사실 민원도 많이 들어오는데요, 민원인들의 주장은 대체로 ‘오래된 과거 아니냐’ ‘지방 재정자립도도 어려운데 대중영합주의 정책을 하려고 하느냐’인데요. 잘 아시겠지만 수당 지급 사업은 특별법을 준용(準用)해서 하는 겁니다. 거기에 “명예 회복을 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하나도 한 것 없잖아요. 전북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란 역사문화적인 특수성이 있잖아요. 나라에서 안 하면 지자체가 조례를 제정해서 수당 주는 사례가 많아요. 노근리사건, 여순사건, 거창사건, 4·3사건도 그렇잖아요.”
 
 
  근왕주의 표방한 동학농민군
 
동학농민군이 조정에서 파견한 최정예 경군을 무찌른 장성 황룡촌 전적지의 모습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 윤준병 의원은 4월 16일 대표 발의한 ‘동학농민혁명 및 5·18광주민주화운동 정신 헌법 전문 포함 촉구 결의안’에서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여했다.
 
  〈1894년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기치를 들고 전북에서 일어났던 최초의 민중혁명인 동학농민혁명은 (중략)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작과 효시가 된 민중혁명이다. (중략) 촛불 시민혁명, 내란 수괴 윤석열의 탄핵을 이끌어냈던 빛의 혁명의 모태로서 자유, 평등, 인간 존중과 직접민주주의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주장은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이 강하다. 동학농민운동의 실질은 이런 의미 부여와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먼저 동학농민운동의 전근대성이다. 조선 말기 농민들이 봉건적 수탈과 부패한 관료제, 외세의 간섭에 맞서 봉기한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기반은 본질적으로 전근대적 성격이 짙다. 특히 당시 이들이 표방한 ‘근왕주의(勤王主義·임금이나 왕실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려는 태도나 경향)’와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사이에는 사상적, 정치적 접점이 전혀 없다. 근왕주의는 ‘백성은 임금에게 충성하고, 임금은 백성을 어여삐 여긴다’는 유교적 충의(忠義)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동학농민군이 근왕주의를 표방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작성한 여러 공식 문건과 구호, 행동 노선에서 명확하게 확인된다.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워”
 
  전봉준이 지금의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에서 발표했다는 ‘무장 포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자애롭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셨으며, 신통력 있는 명확함과 성스러운 명석함을 지니셨다. (중략) 우리는 초야에 사는 백성이지만, 임금의 땅에서 먹고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있으므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좌시할 수 없다. (중략) 함께 태평한 세월이 오기를 기원하며, 모두 임금의 덕화(德化)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동학농민운동 연구의 권위자인 배항섭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논문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과 유교〉(2017년)에서 동학농민군의 핵심 사상은 ‘유교 이념’이었다고 지적했다.
 
  〈농민전쟁 초기뿐만 아니라, 농민군이 승승장구하던 시기는 물론 농민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농민군이 제시한 글의 대부분은 그러한 ‘분식(粉飾)된 유교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납득하기 어렵다. (중략)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들의 행동 역시 기본적으로 유교적 사회질서에 대해 정면 도전한 적이 없으며, 전제왕권을 자명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폐정개혁안’에서 보이는 농민군의 요구 조건 역시 ‘개혁’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략) 척왜양운동 시기에는 화이론(華夷論·세계를 중국과 그 주변 오랑캐로 나누는 이분법적 시각)적 세계관과 충효사상이, 농민전쟁 시기에는 민본(民本)과 인정(仁政) 등 유교 이념이 자신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핵심 사상이 되었다.〉
 
 
  흥선대원군과의 공모·밀약설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종사 보존과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꿈꿨다. 흥선대원군은 2차 봉기를 주저하던 전봉준에게 밀지를 보내 재봉기를 독촉했다. 출처=국사편찬위원회
  동학농민운동의 전근대성은 당시 전봉준·손화중 등 지도부가 흥선대원군과 지속적으로 교류한 점, 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로 ‘흥선대원군의 재집권’을 수차례 강조한 점에서도 살필 수 있다. 이 역시 동학농민운동이 근대 민권운동이나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과 전혀 다른 성격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중 하나인 《나암수록(羅巖隨錄)》에는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바라는 동학농민군의 속셈이 드러난 통문(通文) 내용이 기재돼 있다. 아래 글에 등장하는 ‘국태공(國太公) ’이 바로 흥선대원군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거사는 단연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탐욕한 관리에게 스스로 움츠러들게 할 바를 알게 하는 것이다. 또 국태공으로 하여금 감국(監國·왕을 대신해 나라일을 맡아보는 일)케 하여 위로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아래로 일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함으로써 부자의 천륜과 군신(君臣)의 대의를 온전히 할 것이다.(1894년 4월)〉
 
  역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포함된 《남유수록(南遊隨錄)》에는 1894년 5월 전주성 농성 당시 전봉준이 초토사(招討使) 홍계훈에게 보낸 서한 내용이 있다.
 
  〈위로는 국태공을 받들어 부자(父子)간의 인륜과 군신 간의 의리를 온전히 하며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종묘사직을 보호하려는 바람을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습니다. 초토사께서 살펴 주시고 처분을 내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남유수록》에는 당시 동학농민군이 홍계훈에게 전달했다는 이른바 ‘폐정개혁안 23개조’도 소개돼 있다. 그중에는 “국태공을 받들어 국정을 살피고 돕게 할 것”이란 요구도 있다. 국태공은 흥선대원군을 말한다. 동학농민군이 1894년 4월 16일 영광군에서 전주감영 지휘소(완영유진소)로 보낸 통문에도 흥선대원군과 관련한 내용이 있다.
 
  〈탐관오리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국태공 흥선대원군을 받들어 나라를 감시하고 위로는 종사를 보존하며 아래로는… (하략)〉
 
  이상의 문헌 기록은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조선 왕권 자체를 부정하거나 근본적으로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려는 혁명적 목적이 없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그 밖에 전봉준이 고부민란 전 흥선대원군의 식객(食客)으로 있었던 점,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에게 밀지를 보내 재봉기를 독촉한 점 등을 고려하면 동학농민군의 봉기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학농민운동 지도부가 내세운 사상적·정치적 지향은 한계가 명확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淸軍과 협력해 日軍 축출하기 위해 2차 봉기?
 
  이와 관련, 급진 좌파 성향인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러시아계 한국인)는 2003년 11월 ‘그들은 보수적 개혁가였다’란 제하의 《한겨레21》 기고를 통해 “변혁 세력의 역사적 근거 찾기 차원에서 동학을 ‘민중혁명가’로 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있을 수 있는 자기확립의 방법”이라면서도 “민중적으로 미화되지 않아도 평등의 전도사 최제우·최시형, 반부패 항일 의거 지도자 전봉준 같은 영웅들은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영감을 준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그의 글이다.
 
  〈동시대의 문서에 의해서 복원되는 가난한 선비 전봉준은 개화의 세례를 받지 못해 ‘개조’ ‘종교’ ‘인류혁명’과 같은 일본 메이지(明治) 계통의 신조어(유럽 개념의 번역어)를 알 리 만무했다. (중략) 그러나 민중을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붓에 의해서 보국안민과 ‘국태공’·고종에 대한 충성심을 내세웠던 전통적인 양심적 지식인 전봉준은 ‘인류혁명가’로 변모되었다. (중략) 그러나 봉건제도를 제대로 깨뜨리려는 움직임은 크게 보이지 않았다. 동학은 양반 지주의 땅을 빼앗아 균등하게 나누려 하지 않았으며, 기존의 행정제도를 마비하지 않았으며, 조선왕조에 도전하지도 않았다.〉
 
 
  ‘폐정개혁안 12개조’의 진위 논란
 
  ‘전주화약’ 당시 조정에 제안해 1894년 6월 제1차 갑오경장에 영향을 줬다는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 12개조’의 실재 여부도 논란의 대상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폐정개혁안’에 대해 ▲봉기의 원인이 되었던 탐관오리의 숙청 ▲매관매직 등 정치 기강 문란의 시정 ▲농민에 대한 탄압과 가렴주구(苛斂誅求·가혹한 징세와 착취) 철폐 ▲신분상 모든 차별대우 철폐 ▲일본 침략에 내통하는 자 징계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한 농민의 생계 보장 등 반(反)봉건적·반침략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설명한다. 동학농민운동을 ‘근대혁명’으로 찬양하는 측은 ‘신분제 철폐’ ‘토지개혁’ 등 근대적 개혁 요구가 담긴 ‘폐정개혁안’을 그 핵심 근거로 제시하지만, ‘폐정개혁안 12개조’의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폐정개혁안 12개조’는 동학농민운동 관련 1차 사료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된 일이 없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오지영(吳知泳)이 쓴 소설 《동학사(東學史)》의 초고본(1926년)과 간행본(1940년)에 등장할 뿐이다. 그마저도 초고본과 간행본 내용이 서로 다르다. 이런 이유로 ‘폐정개혁안 12개조’는 실제 존재했던 공식 문건이라 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서 고(故) 유영익 전 연세대 교수는 논문 〈동학농민운동의 기본성격〉(2007년)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책(《동학사》-편집자 주)은 동학·천도교 연구자들이 ‘참고’할 가치는 있지만, 그 내용을 글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신빙성이 낮은 사료이다. 특히 이 책에 실려 있는 속칭 ‘농민군의 12개조 폐정개혁안’은 믿을 수 없는 역사자료이다. (중략) 둘째, 이 문건은 1894년 당시에 제작·살포된 많은 봉기 관련 1차 사료들 가운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료이다. 셋째, 이 문건은 1894년 봉기 당시 농민군이 제작·사용했던 구호, 격문 및 원정(原情·사정을 하소연함) 등의 내용과 논리적으로 결이 맞지 않기 때문에 1894년의 농민군이 작성한 자료로 간주할 수 없다. 넷째, 이 문건은 1926년경에 오지영이 집필한 《동학사》 초고본에 실린 ‘집강소의 정강 12개조’와도 내용이 다르므로 오지영이 편의적으로 조작한 문건이라는 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종합해 볼 때 ‘역사소설 《동학사》’에 실린 ‘개혁조건 12조’는 믿을 수 없는 가공의 사료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자료를 동학농민기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핵심 사료로 원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 ‘독립운동’으로 인정 못 받나
 
  우리 헌법 전문(前文)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에 따라 3·1운동으로 귀결되는 이전의 국권 수호·회복 활동도 ‘독립운동’으로 평가받지만, 동학농민운동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3·1운동과 동학농민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역사학계의 일반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말기 농민들이 주체가 돼 봉건적 수탈과 외국의 군사 개입에 저항한 대규모 운동이었지만 앞서 살핀 것처럼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로부터 25년 뒤인 1919년, 일제 식민 통치에 맞서 조선 전역에서 벌어진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재임 1913~1921년)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가 국제사회에 확산되던 시점에 전국에서 전개된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학생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종교계와 민족 대표들의 주도로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됐다.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전형으로 평가받는 3·1운동은 비록 즉시 독립을 실현하진 못했지만, 독립선언을 통해 대한 독립의 의지를 안팎에 분명히 알렸다. 이 운동은 근대 민주공화국 건설의 정당성과 독립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혔다.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들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고, 이들은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됐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임시헌장’을 통해 군주제를 거부하고 국민 주권에 기반을 둔 공화제를 채택했다. 이 정신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헌정 질서로 이어졌다. 1948년 7월 제정된 제헌헌법에서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1항)라는 원칙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현재 헌법 전문에 나오는 ‘법통 계승’이라는 표현은 임시정부의 법적 ‘계속성’을 의미하진 않는다. 대한민국과 그 헌법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 등이 담고 있던 사상과 정신을 물려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헌법 제정 당시 헌법기초위원장이었던 서상일(徐相日) 당시 의원의 헌법 초안 제안설명, 제헌 과정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유진오(兪鎭午) 전 신민당 총재의 증언 등을 고려하면 그렇다.
 
 
  “농민군 내면에 독립과 항일이 있었을까”
 
  동학농민운동은 우리 헌법이 계승을 명시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적, 제도적 유산과 직접적인 접점이 없다. 당시 농민군의 정치적·사상적 지향은 민권·민주·입헌주의와 거리가 멀다. 동학농민군이 반외세를 외쳤던 것은 사실이나, 근대적 민족주의나 민족자결권 실현이라는 명확한 의식에서 비롯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동학농민운동은 봉건적 수탈과 외세 개입에 맞서 민중이 자발적으로 일어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 운동을 오늘날 헌법정신이나 독립운동의 계보에 억지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현대의 정치 이념에 따라 과거를 재단하는 역사 왜곡이란 비판을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다음은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가 이 같은 취지로 비판한 2023년 10월 3일 자 《중앙일보》 칼럼 ‘동학이 항일투쟁이라고?’의 일부다.
 
  〈농민군의 상대는 주로 관군, 수성(守城)군, 민보(民堡)군이었다. 고부 봉기, 무장기포, 정읍 황토현전투와 전주성 함락까지 관군 및 향토군과 싸웠다. 일본군이 개입한 것은 청일전쟁 발발로 조선 섭정관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청국으로 달아난 이후다. 아산만 해전(1894년 6월), 평양성전투(8월)에서 청군을 대파한 일본군은 갑오내각의 요청을 받고 동학군에 눈을 돌렸다. 우금치, 청주, 섬진강전투에서 농민군 주력이 일본군과 맞닥뜨린 배경이다. (중략) 외세를 물리쳐 반듯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강성 민족주의의 원류로 해석하는 것은 좋으나,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는 의도적 강조는 본말전도에 해당한다. 학계에서 그토록 경계한 운동권적 역사 편집이다.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은 3000 관군과 2000 일본군 연합부대와 싸웠는데 그게 항일투쟁인가? (중략) 죽창과 괭이를 들고 무장(남접)과 보은(북접) 집회에 자진 모여든 농민군의 내면에 독립과 항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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