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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1936년 잡지 <야담(野談)>에 실린 김동인의 역사소설 〈순진(純眞)〉①

[옛 잡지를 거닐다] 이 집에 이춘보(李春甫)의 일(一)족이 살고 있었다...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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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이 1936년 <야담> 9월호에 발표한 소설〈순진(純眞)〉의 첫 장이다.

소설가 김동인(金東仁·1900~1951) 은 1935년 12월 역사소설을 매달 연재하는 잡지 <야담(野談)>을 창간했다. 역사의 이면과 내막을 파헤치려는 생각이 잡지를 창간한 이유였다.  당시 <야담>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은 김동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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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동인 선생.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쓰거나 금동(金童), 춘사(春士), 시어딤(시어짐) 등 다양한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야담>에는 알려진 필명 외에도 수많은 필명이 등장한다. 이 중 동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글이 많지만 필명만으로 명확한 판단이 어렵다. 후대 연구가들이 밝혀야 할 대목이다.
<야담>에 실린 김동인의 소설은 통속적인 면과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이 가미된 점이 특징이다. 흥미 본위의 창작이란 측면이 짙으나 식민지 현실에 대한 나름의 통찰을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서울대 조동일 명예교수는 <야담>에 대해 “고급의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버린 김동인이 자본을 대고 편집을 하고 글을 써서 돈벌이를 하려 했다”고 주장(<한국문학통사5>)한다.
<월간조선>은 김동인이 1936년 <야담> 9월호에 발표한 〈순진(純眞)〉을 연재한다. 〈순진〉은 강원도 홍천에서 가난하지만 순수한 인물인 이춘보(李春甫)를 통해 인간의 운명과 윤리 문제를 다룬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김동인 연구자들 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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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純眞)
 
김동인(金東仁)
 
강원도 홍천(江原道 洪川)
홍천서도 읍을 떠나서 멀리 산기슭에 있는 외따른 집 한 채.
사람이 거처하니 집이라 부르지, 사실에 있어서는 집이라 부르기는 너무나 창피한 오막살이였다. 그 근처에서 소나무 몇 개를 찍어다가 기둥이랍쇼 세우고 거기다가 흙을 되는 대로 붙이고, 볏짚을 겨우 비나 안 샐 정도로 얹은 그야말로 오막살이였다.
그 오막살이 산에는 한 내외와 어린 아들 하나 딸 하나, 도합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남편의 나이는 40 넘짓, 아내는 그맛 나이나 되었고, 자식들은 겨우 걸음을 걸어 다닐만한 세 살쯤 난 맏과 금년 난 어린 젖먹이였다. 아마 가난하여 늦도록 시집장가를 못 갔다가 이즈막에야 겨우 어떻게 서로 만나서 사는 모양이었다.
그래는 사람의 사는 집안이라, 솥 나부랭이도 걸리고, 뜰에는 기저귀 등도 널려 있기는 하지만 아주 쓸쓸한 집이었다.
이 집에 이춘보(李春甫)의 일(一)족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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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야담> 9월호 표지.

본시 춘보는 집 한 칸도 없이 이집 저집으로 동리머슴으로 돌아다니며 그날 그날 입에 풀칠이나 하며 40년간을 지나오던 것을 이웃사람들이 보기에 하도 딱하여, 서로 의논한 끝에, 이 산기슭에 오막살이 하나를 지어 주고 (얼굴이 못 나기 때문에 30이 지나도록 시집도 못 간) 동리 처녀 하나를 아내로 삼아 주어서, 한 개 집이랍쇼 쓰고 살게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태 3년 지나는 동안 그래도 남녀가 모였다고 자식도 생기고 의무도 커지고 하였지만, 본시 미천이 없는데다가 주변까지 없는 춘보는, 더욱 가난하고 고단한 살림을 계속할 따름이었다.
이전 총각시대에는, 남의 집에서 일을 하다가 먹여주면 먹고 날이 저물면 그냥 그곳서 넘어져 자고, 이튿날은 다른 집을 물색하고―생활은 고단하나마, 걱정은 없는 살림을 하였는데 아내가 생기고 자식이 생기고 보니, 자기는 굶을 지라도 자식은 먹여야 할 의무가 생기고, 자기는 벗을지라도 가솔은 입혀야 할 의무가 생기고― 도대체 귀찮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더욱 고통거리는 춘보의 집 앞에 텃밭이 하나 있어서 거기다가 담배를 심었는데, 그 밭의 세납-전결(田結)이 1년에 여덟 잎씩 나오는 것이었다.
남의 집 일을 하여주면 쌀되는 준다. 쌀되가 있으면 끓여 먹기는 한다. 그러나, 돈(겨우 여덟 잎이나마)이란 것은 춘보의 손에는 좀체 들어올 기회가 없었다. 전결은 나라에 바치는 것이다. 없다고 모면될 것이 아니었다.
1년에 단 여덟 잎이지만 과연 그것은 춘보에게는 커다란 짐이었다.
 
× × ×
 
가을.
짧은 가을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는 황혼.
가을은 농군에게는 바뿐 시절이라, 춘보는 그 근처의 호가(豪家) 박도사(朴都事)의 집에서 품일을 하고 그 집에는 춘보의 아내가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남편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아랫마을 김풍헌이 찾아 왔다.
“춘보 있나?”
“박도사 댁에 일하러 갔어요.”
“아, 그런데 전결 여덟 잎은 어떻게 할 심이야.”
“글쎼요. 애기 아버지도 만날 그 걱정은 합니다마는 어디 돈이 생깁니까.”
“안 생긴다고 안 낼 배짱인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으면 왜 아직까지 안 내! 다른 집 것은 다 됐는데 이집 것 하나이 못 돼서, 지금껏 갖다 바치지 못했는데. 이따가 들어오거든 내일은 꼭 마련해 두었다가 달라고 그래. 사람도 그렇게 염치가 없담. 내일 안 됐다가는 큰 코 다침네.”
중얼중얼 하면서 돌아가는 김풍헌의 뒷모양을 보면서 춘보의 아내는 한심을 쉬었다.
그날밤, 아내에게서, 톡톡한 채근을 다시 받은 춘보는, 드디어 결심을 하였다. 텃밭에 심은 담배를 비기로 한 것이었다. 아직 물도 들지 않어서 며칠을 더 두고 싶었지만, 본시 마음이 착한 춘보는, 김풍헌의 채근을 그냥 모른 체 하고 며칠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단 3, 4일만 더 있다가 비어 팔아도 좀 더 값을 받을 것이지만 매일매일 김풍헌이 채근을 오는 것이 너무도 속으로 무안하여, 비록 헐값밖에는 받을 수 없으나마 밝은 날 담배를 비어 팔기로 하였다. (계속)
(출처=<야담> 1936년 9월호, p149~151)

입력 : 2018.08.27

조회 : 2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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